인권오름 제 43 호  [기사입력] 2007년 02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물가는 뛰고 벌이는 신통치 않거나 아예 없다. 이럴 때 절실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일텐데, ‘그림의 떡’으로 여겨지거나 먹어도 배고픔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권리일 수 있을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우리 사회는 많이 갈구하는 듯하면서도 그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사회보장에 대한 2001년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의안이다. 문서의 제목은 ‘사회보장: 새로운 합의’라고 되어있다.

국제인권준칙 중에서 대표적으로 세계인권선언 22조는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했고, 25조에서는 사회보장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이어받은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 9조는 “모든 사람이 사회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이 문서들에는 사회보장에 대한 정의가 없고 사회보장의 구체적 내용은 몇 가지 예시에 머물러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회보장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사회보장 관련 원칙들을 보는 것이다. 여러 국제 전문기구들 가운데서도 국제노동기구는 1919년 창설 이래로 사회보장을 그 핵심 수임사항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을 통해 국제노동기구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보호를 제공할 필요성을 천명했고, 사회보장에 대한 일련의 조약과 권고들(2006년 현재까지 31개 조약과 23개 권고)을 발전시켰다.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을 담당하는 유엔사회권위원회는 사회보장권의 구체적 내용을 국제노동기구 관련 규정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규정은 일반적으로 고용과 연관된 사회보장이다. 즉, 노동자의 소득과 상황에 기반한 것으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권리 또는 적절한 자원이 없는 사람 누구나가 ‘필요’에 기반하여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보다는 좁은 의미이다. 물론 필라델피아 선언이나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관련 결의안에서는 “사회보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과 포괄적인 의료보호를 제공할 것”을 거듭 원칙으로 선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안점은 고용과 연관된 사회보장이다.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관련 기준을 볼 때는 이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보다 광의의 개념의 사회보장을 규정하고 있는 유럽사회헌장에 따른 국가의 의무는 사회보장 제도를 설립하고 유지할 의무(12조 1항)이다. 유럽사회권위원회에 따르면 사회보장체제에 상당한 격차가 있거나 급여수준이 낮다면 12조 1항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된다. 즉 사회보장제도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엔 또는 국제노동기구의 회원국들은 국제노동기구 헌장과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여타의 국제인권조약을 수용함으로써 일정 수준의 사회보장을 자국의 모든 시민에게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그렇지만 이런 국제기준들은 회원국이 추구해야 할 실제적인 보장의 수준이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회원국들에 재량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오늘 읽어볼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에 대한 결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회원국들에 재량의 여지를 남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에 관한 지도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 적용범위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급부(benefits)는 충분해야 한다.
- 국가는 급부가 제때 정당한 권리로서 제공될 것을 보증하고 충실한 거버넌스 구조를 보 장해야 할 궁극적이고 일반적인 책임을 진다.
- 사회보장은 사회적 연대에 기초하여 조직돼야 한다. 특히 남성과 여성간의 연대, 다양한 세대 간의 연대, 취업자와 실직자 간의 연대, 부자와 빈민 간의 연대에 기초해야 한다.
- 사회보장 체제는 지속가능해야 한다.
- 일국 및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법의 지배가 보편화돼야 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의 의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고 할 때 그것은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 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 22조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마음대로 강화하게 한다든가, 자유와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돼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의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사회권’에서 ‘사회적’(social)의 어원인 ‘socialis’는 ‘결연’했다는 뜻으로 사회 속의 모든 시민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연대라 할 때 ‘연대’의 어원인 ‘in solidum’은 채무자의 연대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로부터 부분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채무자 각자가 전체로서 빚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훗날 공동체 관계, 상호의존과 부조, 구제와 지원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게 됐다.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하므로, 인간의 상호의존성과 연대는 인간의 동의에 선행하며 인간의 의사에 우선하는 자연적 사실이다. 인간이 이러한 인간의 결사로부터 물질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의 연대라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 대해서 채무자라는 것이다. 각자의 능력과 활동의 자유로운 발전은 동시대의 다른 인간들의 능력 및 활동의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의 발전단계는 과거 인간의 능력과 활동의 축적된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지는 채무로부터 ‘의무’로서의 연대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나 교육을 통해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향유하면서 사회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있는 한편 상속재산도 교육도 자본도 없어서 더 적게 받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와 정의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상부상조의 미덕을 강조하는 해석에서부터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까지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사회보장은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02월 28일 인권오름 제43호>

사회보장: 새로운 합의(ILO. Social Security: A New consensus, 2001)

2. 사회보장은 노동자와 그 가족, 전체 사회의 복지에 매우 중요하다. 사회보장은 기본적 인권이며 사회평화와 사회적 통합을 보장하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적 결집을 이루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사회보장은 정부 사회정책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빈곤을 예방하고 경감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사회보장은 국민적 연대와 공정한 부담 공유를 통해 인간존엄성과 평등, 사회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 사회보장은 또한 정치적 통합, 권한 강화,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하다.

3. 적절하게 운영되는 사회보장은 건강보호, 소득 안전,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강화한다. 사회보장은 성장하는 경제와 능동적인 노동시장정책과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적 발전의 도구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보장이 기업에게 비용인 동시에 사람에 대한 투자이며 지원이라는 것이다. 지구화와 구조조정정책으로 인해 사회보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4. 사회보장에 유일하게 옳은 모델이란 건 없다. 사회보장은 시간이 감에 따라 성장하고 변화 발전한다. 사회보장에는 사회부조, 보편적 계획, 사회보험, 공적 및 사적 설계가 있다. 각 사회는 소득안전과 건강보호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들 선택에는 각 사회의 사회문화적 가치, 역사, 제도, 경제 발전의 수준이 반영된다. 국가는 사회보장의 촉진, 증진, 적용범위의 확대에 있어 우선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모든 사회보장 체계는 일정한 기본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 특히 급부는 안전하고 비차별적이어야 한다. 사회보장계획은 건전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그 성취를 가늠하는 주요인이다. 신뢰가 존재하기 위해선 충실한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5. 정책의 최고 우선순위는 기존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국가들에서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장 고용인, 자영업자, 이주 노동자, 비공식부문 경제활동 종사자(상당수가 여성)이다. … 특정 집단의 욕구는 다르며 일부 집단의 기여 능력은 매우 낮다. 사회보장의 적용범위를 확대할 때 이런 차이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 적용범위를 확대하려는 정책과 계획은 통합적인 국가 사회보장 전략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

6. 비공식 경제가 던지는 근본적인 도전은 어떻게 공식 경제에 통합하느냐이다. 이는 형평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이다. 정책은 비공식 경제에서 이동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체 사회 또한 비공식 경제의 취약 집단에 대한 지원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7. 노동연령의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은 존엄성 있는 일자리(decent work)이다. 실업자에 대한 현금 급여의 제공은 일자리를 구하는데 필요한 훈련과 재훈련 및 기타의 지원과 밀접하게 조응해야 한다. 장차 경제 성장에서는 노동력의 교육과 기술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다. 적절한 생활 기술,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을 성취하고 인격 성장과 노동력 진입이 용이할 수 있도록 모든 아동이 교육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애 전반에 걸친 교육이 오늘날 경제에서의 고용능력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실업 급여는 의존성을 심화하거나 고용 장벽이 되지 않도록 설계돼야 한다.

8. 사회보장은 ‘성평등’의 원칙에 기반하고 이를 증진해야 한다. 이것의 의미는 똑같은 또는 유사한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처우해야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여성에게 평등한 결과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사회는 여성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돌봄노동으로부터 큰 혜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아동, 부모, 허약한 가족 성원에 대한 여성의 돌봄이 그러하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노동 연한 동안에 이런 돌봄의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인생의 후반기에 체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9. 여성의 노동력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남녀의 역할 변화도 그러하다. 따라서 남성을 생계책임자로 상정한 원래의 사회보장체계는 많은 사회들의 욕구에 더욱더 부응하고 있지 못하다. 사회보장과 사회서비스는 남녀평등에 근거하여 계획돼야 한다.

10. 많은 사회들에서 남녀 간의 지속적인 소득불평등이 여성의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영향을 끼친다. 지속적인 임금차별 철폐 노력, (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최저임금제 도입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 중 어느 한 편이 자녀 양육을 하는 경우에 아동양육에 대한 사회보장급부는 돌보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11. 고령화 현상에 당면하여 생산적 고용율을 높일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12. …HIV/AIDS 확산으로 인한 폐해적 결과가 크다. 긴급하게 대응할 것이 요구된다.

13. … 법정 연금 제도는 적절한 급부 수준을 보장하고 국민적 연대감을 보장해야 한다. 기타 보충적 제도들에 대한 지원은 저소득층 또는 중간소득층을 겨냥해야 한다.

14. 지속가능하고 재정적으로 실행가능한 연금 체계가 장기간 보장돼야 한다.…

인권오름 제 43 호  [기사입력] 2007년 02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간답게 살 권리라 하는 ‘사회권’은 흔히들 정의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기도 어렵고 권리로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은 사회권을 쉼 없이 괴롭히고 조롱한다. 이에 맞서는 주장들은 국내법의 근거를 들기보다는 국제인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권리라는 것을 먼저 내세운다. 자유권과 비교할 때 사회권은 국제인권에서 먼저 확립되어 국내적 실천을 도모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기본으로 다루는 문서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사회권규약)’이다. 전반적인 생활의 위기 속에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하나씩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먼저 사회권규약 11조에 규정된 식량권의 의미를 살펴본다.

식량권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농촌활동이란 것이 매년 있던 시절, 밥을 먹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었다. 숟가락,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라 노래한 후에 농민께 감사한다는 복창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과연 밥은 ‘나누어 먹는 것’일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먹을 것을 돈 주고 산다. 가게와 시장에 진열된 상품인 ‘먹을 것’은 가격이 오르고 내릴 뿐 항상 넘쳐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들 대부분이 과연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인지 여기서는 알기 어렵다. “배가 부르면 우린 소화불량이 두렵다. 배가 텅 비면 우린 두렵다. 다시는 먹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듯이 극단적 다이어트와 굶주림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아우르는 식량권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양으로나 질로나 적절하고 충분한 식량, 식량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문화 전통에 부응하는 방식의 식량, 신체적·정신적으로나 개인적·집단적으로나 존엄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식량, 지금까지 말한 의미의 식량에 대해 정기적이고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를 말한다.

이들 요소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가 내놓은 일반논평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이다. 이 논평에는 식량의 ‘적절성’과 ‘지속가능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간단히 말해 식량의 ‘적절성’은 “개인의 먹을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이다.

‘지속가능성’은 식량이 현재 및 미래 세대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 다른 기본적 필수품을 줄이거나 얻을 수 없다면 경제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고, 자연재해나 무력 분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장애인, 노인, 유아 등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식량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지속가능성’에서 세계의 농민과 민간단체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의 개념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데 식량주권 개념의 문제의식이 있다.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

사회권 규약에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라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은 양대 국제규약에서 “기본적인(fundamental)”이란 수식이 붙은 유일한 권리이다. 식량권을 기초하던 토론이 진행되던 1963년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 센(Sen)은 세계기아문제의 엄청난 규모와 그것이 어떤 구체적 조치들로 인해 줄어들 수 있느냐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5억의 인구가 기아상태이며 10억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20세기 말까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30억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식량권을 미적지근하게 다뤄서는 안되며 긴급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에 식량권의 긴급성을 강조하여 식량권에 대해서는 ‘점진적 조치’라는 표현이 빠지게 됐다.
하지만 20세기 말인 1999년에 채택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에서의 상황 제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8억 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 상태이며, 자연재해,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수백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식량권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적절성’의 양적인 의미의 개념은 기아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최소한의 칼로리가 아니라 정상적이고 능동적인 생존을 촉진하기에 충분한 식량이다. 나아가 질적인 의미에서의 ‘적절성’은 하위규범인 기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것으로 식량의 문화적 적절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식량권은 인권이 아니다?

일부 경제 선진국에서도 목격되는 영양실조 문제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 아니라 빈곤으로 인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 결여라는 지적 앞에서도 식량권을 인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여전하다. 이런 견해에서는 도덕적 또는 인도주의적 고려만으로는 정부들이나 기타 관련된 행위자들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식량권의 주장이 시간 낭비라고 한다. 식량이란 연간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상품이며 따라서 식량이 인권으로서 갖는 지위는 부차적일 뿐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도덕적 고려가 정책 결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식량권이 이행되지 못하는 원인이나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식량권 이행을 위한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식량권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행가능하지 않고 개별국가 차원에서 매우 제한적인 계약의 한계 내에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셋째로 사회권 일반에 대한 반대의견이다. 시민·정치적 권리가 우선적이며 일단 세계 민족들에게 자유가 확보된 이후에야 식량권 같은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현 인권이사회)에서는 이런 발언이 있었다. “세계의 상당수는 정말로 굶주리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는 문제가 있다. 세계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거의 1/3만이 자유롭다. 그 나머지 2/3 이상이 노예이다.…기아 또는 빈곤이란 인류에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빈곤은 현세대나 현재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니다. 기아와 빈곤을 종식시키고 싶다면 먼저 부자유한 국가들의 속박을 깨뜨려야 한다.”

과연 그럴까? 유엔인권위원회 같은 데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편히 쉴 수 없게 만든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나이지리아에서 구전되는 말) [류은숙] <2007년 01월 31일 인권오름 제39호>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12: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

…국제사회가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완전한 존중의 중요성을 수차례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약 11조에 제시된 기준과 세계 여러 지역의 실제상황 간에는 여전히 심각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국민인 전 세계 8억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를 겪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재해, 일부 지역에서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의 발생, 그리고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본 위원회는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가 대개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심각하지만, 영양실조, 영양결핍 및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 관련된 기타 문제가 일부 경제선진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의 근원은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특히 빈곤으로 인하여 잉여가능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위원회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핵심 내용이 다음을 내포한다고 간주한다.

개인의 식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

이러한 식량이 지속가능하고 기타 인권이 향유를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

식이적 필요란 식사가 전체적으로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발전 및 유지, 그리고 생애 전 단계에서 성별과 직업에 따른 생리적 필요를 포함하여 신체적 활동을 위한 영양분의 혼합을 포함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이적 다양성, 그리고 모유 수유 등 적절한 섭식 및 급식 방식을 유지, 적응 또는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이때 가해지는 식량가용성 및 접근성에 대한 최소한의 변화가 식이적 구성 및 섭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장한다.

해로운 물질이 없을 것은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 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 안보 및 공적‧사적 수단을 통한 일련의 보호조치에 대한 요건을 정한다. 또한 자연발생적 독소를 검출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박멸하기 위한 주의도 기울여야 한다.

문화적 수용성 또는 소비자 수용성은 음식 및 음식 소비에 부여되는 인지된 비영양적 가치, 그리고 접근가능한 식량의 성질에 대한 정보력 있는 소비자의 우려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고려하여야 할 필요를 내포한다.

가용성은 생산지나 기타 자연자원으로부터 직접 먹을 것을 구할 가능성 또는 수요에 따라 식량을 생산지로부터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운반할 수 있는 원활한 유통, 가공 및 시장 시스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접근성은 경제적 접근성과 물리적 접근성을 모두 포함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사를 위한 음식물의 획득과 관련된 개인 또는 가정의 재정적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사람들이 음식을 조달하는 획득 유형이나 조달할 자격에 적용되며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위해 충분한가에 대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 및 기타, 특히 빈곤한 계층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은 특수 프로그램을 통한 관심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물리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량이 유아, 아동 등 신체적으로 취약한 사람, 노인, 신체장애인, 불치병 환자 및 정신질환자 등 지속적인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재해 피해자, 재해 빈발지역 거주자 및 기타 특히 혜택받지 못한 집단들은 식량 접근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 그리고 때로는 우선적 고려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조상 전래의 땅에 대한 접근권이 위협받고 있는 많은 선주민 집단도 특별히 취약한 경우에 해당한다.

각국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 관할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양이 충분하고, 영양이 알맞으며 안전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식량에 대한 접근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5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02일 21:19: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밝았다’고들 얘기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지만 ‘새해’라는 이름을 붙인 만큼, 좋게 달라져야 할 세상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가는 날들이었으면 한다.

오늘은 새해인 만큼, 담담하지만 강력하게 ‘희망’을 드러낸 글을 골라보았다. 인권운동가이자 역사학자로 널리 알려졌고 국내에도 많은 책이 소개된 하워드 진의 글이다.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새해에도 서울역사 앞에서 유인물을 돌리고 있는 KTX 승무원들을 떠올리며 마음 속 기차놀이를 해본다.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들을 이어붙이고 붙여 꼬리가 아무리 길더라도 끝까지 같이 안고 가는 그런 기차놀이를 생각해본다.

2007년의 ‘인권문헌읽기’는 ‘경제 사회적 권리’를 주제로 한 문헌들을 중심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불확실한 가운데 희망은 있다(The Optimism of Uncertainty) - 하워드 진(Howard Zinn)
- 2004.9.30 Znet 논평

사람들을 돌보는 노력을 권력자들이 행한 일과 견주어 보기가 무색해지는 이 끔찍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는 사회에 계속 관여하고 겉보기로나마 행복하기를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까?

내가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게 아니라, 모든 패를 돌리기 전에는 게임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생은 도박’이라는 은유는 숙고할만하다. 게임을 하지 않는 것은 이길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것이다. 게임을 하고 행동에 나설 때에야 적어도 세상을 바꿀 가능성을 만들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현재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들의 갑작스런 붕괴, 사람들 사고의 엄청난 변화, 압제에 저항하는 예기치 않았던 봉기,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권력체제의 급속한 붕괴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놀랐던가를 우리는 잊고 있다.

과거 수백 년의 역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역사의 철저한 불예측성이다. 반봉건제라는 가장 지체된 상태에 있던 러시아에서 짜르(전제군주)를 타도한 혁명은 선진 제국주의 세력을 경악시켰을 뿐 아니라 레닌 자신조차 놀라서 급히 페트로그라드행 기차를 타게 했다.

누가 2차 세계대전의 기괴한 변화를 예상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전후 세계의 형상을 어느 누가 사전에 그릴 수 있었는가.

미국도 마찬가지의 현실에 직면했다. 미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한 폭격을 퍼부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전면전을 벌였지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매일 머리기사들 속에서 강력한 권력이 힘없는 이들에게 실패하는 다른 예들을 본다.


이렇게 엄청나게 놀라운 목록들을 볼 때, 무기와 돈을 갖고 있고 그것에 완강하게 집착하는 자들의 명백히 압도적인 권력 때문에 정의를 향한 투쟁이 결코 포기돼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그 명백한 권력이 폭탄과 달러보다 덜 중요시된 인간적 자질-도덕적 열정, 단호함, 단결, 조직, 희생, 지혜, 독창력, 용기, 인내 등-앞에서 그 취약성을 되풀이해서 드러냈다. (미국) 앨라배마와 남아공의 흑인들이건,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베트남의 농부들이건,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소비에트의 노동자와 지식인들에 의해서건, 힘의 우세에 대한 그 어떤 냉정한 계산도 자신들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확신한 민중을 제지할 수는 없다.

나는 세상에 대한 친구들의 비관(그게 어디 내 친구들 뿐이겠는가)에 맞춰보려 했지만, 도처에서 벌어지는 온갖 끔찍한 일에도 불구하고 내게 희망을 주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고 있다. 특히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는 젊은이들이 그렇다.

나는 가는 곳마다 희망을 주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한 줌밖에 안되는 소수의 활동가들 뒤에는 비정통적인 사상에 개방적인 수백, 수천, 아니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하기 십상이고, 그래서 그들은 버티는 동안 산 위로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로 언덕 정상에 이르자마자 굴러 떨어지는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거듭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음)같은 절망적인 인내심을 갖고 버틴다.

나는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전국적인 운동이 없어서 낙담한 바로 그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운동의 잠재성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혁명적인 변화는 한 번의 격변하는 순간(그런 순간을 조심하라!)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괜찮은 세상을 향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위대한 영웅적 행동에 관여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들이 수백만의 사람들에 의해 곱으로 늘어날 때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승리’하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 자신이 다른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뭔가 가치 있는 일에 깊이 관련됐다는 사실에는 즐거움과 성취가 있다. 우리에겐 희망이 필요하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 낙관주의가 반드시 태평스럽고 어딘가 극단적으로 감상적인 휘파람 소리인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가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잔인성의 역사일 뿐 아니라 연민과 희생과 용기와 친절의 역사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기초한 낙관이다. 이 복잡한 역사 속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으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최악의 것만을 본다면, 그것은 뭔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이 당당하게 행동했던 시대와 장소들-그런 예는 아주 많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행동할 힘을 얻을 것이고, 적어도 팽이같은 이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방법으로라도 우리가 행동한다면 우리는 위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의 무궁한 연속이며, 우리 주변의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인간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현재를 사는 것 그 자체가 경이로운 승리이다. [류은숙] <2007년 01월 02일 인권오름 제35호>

인권오름 제 31 호  [기사입력] 2006년 11월 28일 23:15:08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바람이 분다. 광풍(狂風)이 분다. 수시로 불었던 광풍이지만 온몸으로 바람막이에 나선 사람들의 몸과 가슴에는 피멍이 든다. 경찰에 의한 노동자·농민의 죽음, 떨어지는 농산물 가격, 천정을 모르는 집값 놀음, 세금폭탄 타령, 그래도 밀어붙인다는 한미 FTA, 이라크파병연장……. 더 이상 늘어놓기도 민망할 정도의 인권말살정책이 판을 치는데 가만있으라 한다. 따지려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한다. 정작 ‘폭력’을 창조한 세력들, 생명을 죽이고 생존의 희망을 죽인 세력들, 얘기를 들으려고도 전달하려고도 않은 정치인들과 언론이 외치는 ‘평화’는 역겹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자기 방어를 방어하며”이다. 오늘날 언론이 시위대를 끔찍하게 몰아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단주의자, 전복세력, 선동분자, 빨갱이’로 불린 사람들이 쓴 인권선언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민권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경찰이든 법원이든 그 누구도 폭력과 불의로부터 사회적 약자인 흑인들을 보호할 의사가 없다는 증거가 쌓여만 갔다. 흑인 빈민가에서 터져 나온 전국적인 투쟁은 ‘반란, 폭동, 소요’로 표현됐고 경찰과 주방위군 뿐만 아니라 백인 민간인들도 총기를 사용했다. 소년·소녀, 임산부도 그런 총탄에 희생됐다.

이 문건 속에 ‘총’이 등장하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흑표범당은 이런 환경에서 탄생한 흑인좌파정당이었다. 우리에게는 사건 조작으로 사형수가 된 무미아 아부 자말(레게머리를 한 그의 사진은 사형폐지운동을 비롯한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어왔다)로 인해 알려진 조직이다. ‘우리를 대표하는 정부가 없으니 우리 스스로 정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 흑표범당에 참여하고 지지하는 이들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흑표범당의 당원들은 흑인들이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고 말하며 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경찰의 총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그들은 총을 가지고 흑인빈민가를 순찰했다. 동시에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아침식사, 학교, 병원 등을 제공했다.

미국 정부가 이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미국연방수사국(FBI)은 치밀하고 가공할 공작으로 흑표범당을 파괴했다. 1969년 어느 날 새벽에는 흑표범당 당원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기관단총과 산탄총으로 무장한 경찰분대가 습격하여 흑표범당의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흑표범당은 1980년대 초까지 존속했다고 하나 상당수 당원을 구속과 사망으로 잃은 이후 당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된다.

물론 이들의 ‘자기방어’ 주장을 흑인이나 변화를 갈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찬동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화염병과 소총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비폭력 행동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사회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호소가 더 강력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비폭력 행동을 찬양하는 언론들이 고의로 빼먹은 중요한 부분이 있다. 킹 목사의 비폭력 행동은 그의 분명한 실천을 통해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킹은 분노하고 절망한 흑인들에 대한 비폭력의 호소가 가장 큰 폭력의 가해자인 자기 정부를 향해 말하지 않고서는 허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탐욕을 베트남 전쟁이라는 가장 큰 폭력을 통해 채우려는 미국정부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그 전쟁으로 인해 가난한 흑인이 굶어죽고 또한 전쟁에 나가 죽어야 한다는 현실을 고발하지 않고서는 비폭력에 대한 자신의 호소가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 결과 그는 암살당했다.

이라크 파병이라는 크나큰 폭력, 생존권 박탈이라는 근원적 폭력을 말하지 않으면서 평화를 호소하는 소리는 겨울철의 모기 소리마냥 뭔가 잘못된 것이다. 하물며 집회·시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작정한 듯 난도질하는 것을 보니 예비된 공작의 수순으로 여겨질 뿐이다. 해놓은 것도 잘한 것도 없는 정권의 최후 발악을 보는 듯하다.

집회·시위의 자유가 왜 기본적 인권이겠는가? 이것이 없는 표현의 자유는 일부 지식인과 언론인, 재산가들이 독점하는 여론이 돼버리고, 정작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문제를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제는 집회·시위의 자유, 그것만이 아니다. 자기방어는 사활적인 인권이다. 지금 거리의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자기방어를 위해 싸우고 있다. 한 줄이라도 이들이 싸우는 이유를 쓰고 나서야 ‘평화’를 입에 물 수 있지 않을까? [류은숙] <2006년 11월 28일 인권오름 제31호>

“자기방어를 방어하며”
- 휴이 뉴튼(Huey P. Newton)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 (1967.6.20)

법과 규범은 언제나 민중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회 규범이란 민중에 의해 세워져야 조화로운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법률과 규범은 사회의 보편적 복지를 증진할 목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규범이 인간을 섬겨야지, 인간이 규범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당국자들이 가난한 민중을 괴롭히려고 시도한 법률과 규범은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태에 관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섬기지 않는 규범을 민중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국자들은 외면한다. 자신들의 더 나은 이익을 위한 규범과 법률을 만들고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의 의무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기본적 인권 중 하나이다.

착취하는 억압자들의 속임수와 기만적인 올가미로 만들어진 경로를 민중은 거부해야 한다. 민중은 억압자들이 지지하는 모든 것에 반대해야 하고, 억압자들이 반대하는 모든 것을 지지해야 한다.

억압자는 심판받을 때까지 시달려야 한다. 억압자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어떤 평화도 없다. 노예들의 수는 언제나 노예주인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억압자의 권력은 민중의 굴복에 달려있다. 흑인들이 정말로 단합해서 자신들의 엄청난 수로 일어설 때, 불의를 때려 부술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엄청난 수가 가진 힘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대륙과 서반구 도처에 있는 무수한 흑인 민중이다.

인종차별주의 머저리인 억압자는 무장한 인민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무기와 자기방어를 위한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흑인들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비무장한 민중은 노예이거나, 어느 때건 노예제의 대상이 된다. … 자유, 방어의 총, 그리고 전략적 해방론으로 무장한 흑인민중과 비무장으로 굴복하는 흑인 민중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장난 차 엔진을 고치고 싶은 정비사는 그 일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를 가져야만 한다. 민중이 해방을 향해 나아갈 때도 해방의 기본적 도구를 가져야 한다. 총을 가져야한다. 총의 힘으로만 흑인 대중은 무장한 인종주의자들의 권력 구조가 자신들에게 자행하는 테러와 만행을 멈출 수 있다. 어떤 점에서는 오직 총의 힘으로만 전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

인권오름 제 31 호  [기사입력] 2006년 11월 28일 23:15:08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 호  [기사입력] 2006년 10월 31일 17:23:49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어렵게 가을이 찾아왔다. 끈질긴 더위와 폭우의 꼬리를 길게 달고 온 가을 추위는 가난한 삶에 한숨을 불어넣는다. 사치스런 소리일지 모르지만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시 한 편이 간절히 생각났다. 우리네 답답한 속내를 뚫어주는 시, 이리 저리 짓밟힌 몸과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시, 숨죽여 있는 힘을 북돋아 주고 끌어 올려주는 그런 시를 말이다.

짧게만 뒤돌아봐도 어두운 시절마다 우리에겐 시인이 있고 시가 있었다. 그 어떤 자유와 평등론 보다도 명쾌하고 절절하게 그 말의 의미를 토해내던 시들은 지금 어느 헌책방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고 하중근 씨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라는 건설노조원들의 외침도, 장애인의 교육권과 활동보조인을 보장하라는 장애인들의 장기 거리 농성도, 치솟는 물가와 추락하는 일자리에 허리 굽는 사람들도 시를 필요로 하고, 한미 FTA에 반대하며 바닷물로 뛰어든 절박함에도, 전쟁과 핵에 반대하는 다급한 발걸음에도 시가 깃들어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 문헌은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의 ‘시’다. [이 글에 나오는 시는 1994년 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자유와 구원의 절규, 검은 영혼의 시인 랭스턴 휴즈』에서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옮긴이는 소설가 박태순.]

억압하는 자와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시인이 아닌 ‘흑인’ 시인이 요구됐고, 인간의 삶이 아닌 ‘흑인’의 삶이 얘기돼야 할 이유가 거기 있었다. 랭스턴 휴즈는 1967년 65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수많은 시와 소설, 희곡 등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시원스레 ‘까발리고’ 위로하고 힘을 북돋았다.

흑백의 구분이 분명한 사회에 검은 얼굴로 태어난 운명, 평생 막노동일을 하는 어머니와 흑인의 삶을 증오하고 자학하며 일찍이 멕시코로 도망가 버린 아버지, 그 자신 먹고살고 공부하기 위해 분투해야 할 뿐 아니라 어머니의 수차례 결혼을 통해 갖게 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던 그의 팍팍했던 삶 이야기는 그의 전기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이쯤 해두자.

그의 전기 속에는 대조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그를 실제로 기른 외할머니이고 하나는 일찍이 도망가 버린 아버지이다.

흑인해방운동의 혁명가와 결혼했던 외할머니는 “삶이 너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결코 주저앉아서는 안된다”,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되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맞서 싸워라”라고 하며 그렇게 싸운 흑인 영웅에 대해 얘기해주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버지는 ‘흑인은 시험을 쳐서 법률가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의 벽을 저주하며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의 전기에 아버지는 “압제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압박받는 사람들을 증오하였고, 살인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피해자를 증오하고 있다. 그의 증오 속에는 흑인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고 묘사돼 있다. 그의 아버지는 편견과 차별을 등지려고 옮겨간 멕시코에서 멕시코 사람들을 ‘게을러빠지고 무식하며 퇴보적인 종자들로 미국의 흑인들과 똑같은 족속’이라고 비웃었다. 억압받는 사람이 억압받는 사람을 저주하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으며 그만큼 억압에 길들여졌음을 보여주는 예도 없다.

“네가 네 스스로를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너를 노예로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도 싸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힘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그런 힘을 먼저 깨달았을 것이다. 랭스턴 휴즈의 시를 읽으면서 먼저 떠올린 단어는 ‘존중’이다. 그는 흑인들, 나아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존중할 것, 서로를 존중할 것을 노래했다. 

<나의 동포(My People)>

밤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얼굴도 아름답다

별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눈동자도 아름답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태양
또한 아름다운 것은 내 동포의 ‘소울(soul)’

(랭스턴 휴즈에 따르면 ‘소울’은 흑인 민중예술의 정수를 총칭하는 것)



<니그로(nigro), 강에 대해 말하다>

나는 강을 안다.
태고적부터, 인간 혈맥에 피가 흐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강을 나는 안다.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인류의 여명기에 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했으며
나는 또한 콩고 강가에 오두막 지어 물소리 자장가 삼았다.
나는 나일 강 바라보며 그 위에 피라밋 세웠고
나는 또한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스로 남행하고 있을 때 미시시피 강이 그에게 들려주었던 노랫소리를 들었으며, 저녁 노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강의 진흙 젖가슴을 줄곧 지켜보았다.

나는 강을 안다.
저 태고적부터 아슴푸레하던 강을,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이런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의 문학이었기에, 그의 예술론은 다음처럼 표현됐다.

“흑인청년 예술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무엇인가? ‘백인이었으면’ 하고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굴종하는 예술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자는 것이다. ‘왜 내가 백인이기를 원하는가? 나는 흑인이며, 그것도 위대한 흑인이다’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흑인민중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예술로 되돌려놓자는 것이다.”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통 속에 던져두거나 내버려둘 수가 없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저항한 불의는 바로 우리의 정의를 위협하는 차별과 가난, 군국주의였고, 그 운동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은 우리의 운동에서도 되새김질된다. 말 뿐인 자유와 평등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법을 평등하게 하여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만들어도 여전히 가난한 흑인은 그 식당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인권이란 신기루라는 것, 즉 빵과 자유의 불가분성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또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억압자들이 정한 윤리규범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중심에서 같이 노래한 시인의 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나의 동포(My People)>

밤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얼굴도 아름답다

별은 아름답다
그래서 내 동포의 눈동자도 아름답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태양
또한 아름다운 것은 내 동포의 ‘소울(soul)’

(랭스턴 휴즈에 따르면 ‘소울’은 흑인 민중예술의 정수를 총칭하는 것)



<니그로(nigro), 강에 대해 말하다>

나는 강을 안다.
태고적부터, 인간 혈맥에 피가 흐르기 전부터 이미 흐르고 있었던
강을 나는 안다.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인류의 여명기에 나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목욕했으며
나는 또한 콩고 강가에 오두막 지어 물소리 자장가 삼았다.
나는 나일 강 바라보며 그 위에 피라밋 세웠고
나는 또한 에이브 링컨이 뉴올리언스로 남행하고 있을 때 미시시피 강이 그에게 들려주었던 노랫소리를 들었으며, 저녁 노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강의 진흙 젖가슴을 줄곧 지켜보았다.

나는 강을 안다.
저 태고적부터 아슴푸레하던 강을,

나의 영혼은 강처럼 깊게 자라왔다.



이런 ‘존중’을 바탕으로 한 그의 문학이었기에, 그의 예술론은 다음처럼 표현됐다.

“흑인청년 예술가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무엇인가? ‘백인이었으면’ 하고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굴종하는 예술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자는 것이다. ‘왜 내가 백인이기를 원하는가? 나는 흑인이며, 그것도 위대한 흑인이다’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흑인민중들의 열망을 담아내는 예술로 되돌려놓자는 것이다.”


자신과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고통 속에 던져두거나 내버려둘 수가 없다. 불의한 현실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하다. 흑인 인권운동이 저항한 불의는 바로 우리의 정의를 위협하는 차별과 가난, 군국주의였고, 그 운동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은 우리의 운동에서도 되새김질된다. 말 뿐인 자유와 평등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 법을 평등하게 하여 흑인과 백인이 같은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을 만들어도 여전히 가난한 흑인은 그 식당에 들어가 먹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것, 그런 현실을 타개하지 않고는 인권이란 신기루라는 것, 즉 빵과 자유의 불가분성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또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은 억압자들이 정한 윤리규범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중심에서 같이 노래한 시인의 시는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인권오름 제 27 호  [기사입력] 2006년 10월 31일 17:23:49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3 호 [기사입력] 2006년 09월 26일 17:44:15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내가 사는 곳 골목 모퉁이 평상에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두커니 앉아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대문 앞에 박스를 깔고 쪼그려 앉아 계시는 할머니도 자주 보게 된다. 종이상자를 힘겹게 주워 모으는 허리 굽은 노인들은 거리의 흔한 풍경이다.

고령화 시대는 분명 우리 시대의 화두다. 그런데 이 문제가 경제적 문제로만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측면이 적지 않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듯 지금 성년의 사람들은 한 두 분의 어른에게 용돈을 드리면 되지만, 더 어린 세대는 여섯 분(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에게 용돈을 드려야 한다는 말도 있다.

경제적 문제 말고도 고령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혼란스럽다. 인터넷 검색어에서 ‘동안’이 유행어로 떠오르듯이 나이 먹는 일은 달갑지 않은 일이고, 가족회의를 당당하게 소집하고 경제력과 집안의 대소사에 막강한 발언력을 가진 연속극 속의 노인들은 노인학대나 소외 등의 문제를 외면한다. 사회면 뉴스 속에서는 무슨무슨 궐기대회에 단골 출연진인 노인들의 모습이 부각되지만 정작 노인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내는 의견을 찾아보긴 어렵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돌봄에 대한 논의보다는 치매까지 다 보장한다는 내용의 사보험 광고들이 극성을 부린다. 노년을 위해 최소한 몇 억을 준비해야 한다는 재무 설계 조언이 나이 듦에 대한 모든 대비를 일괄 지시해준다.

그럼, 노인에 대한 인권의 관심은 어떠할까? 장애인, 여성, 아동 등과 같은 프리즘을 통해 이들 집단의 특수한 인권문제에 집중해온 것에 비해 노인의 인권에 관련된 논의는 이제 갓 발동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노인의 권리와 관련해서는 타 집단과 달리 포괄적인 국제조약도 없고 전문기구도 없는 상태이다. 최근 일련의 국제회의를 통해 논의된 노인의 인권 관련 원칙들이 있을 뿐이다.

국제 사회는 지구적 차원에서 고령화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모였다. 1982년 비엔나 회의와 2002년 마드리드 회의가 그것이다. 비엔나 회의가 선진국의 고령화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마드리드 회의에서는 고령화가 선진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가운데 고령화 문제를 다뤘다. 선진국들은 사회보장정책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정책을 노인 인구에 맞춰 조정할 과제에 직면해 있고, 사회보장이 없거나 결핍된 많은 국가들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대거 이주와 그로 인한 노인의 주요 부양원인 가족의 전통적 역할의 약화로 노인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 현실 진단이다.

비엔나 회의는 노인에 관한 최초의 국제문서라 할 ‘고령화에 관한 비엔나 행동계획’을 채택했고, 마드리드 회의는 ‘고령화에 대한 정치선언과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이 두 회의 사이에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것이 ‘노인을 위한 유엔원칙’인데 이 원칙은 고령화와 노인의 인권에 관련된 논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독립, 참여, 돌봄, 자아실현, 존엄’이라는 5개 군 18개 항으로 이뤄진 이 원칙 속에서 각각의 요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고령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삶이나 치료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의 삶의 지속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인이 독립성을 누릴 수 있는 소득과 교육 등에 대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 노인의 사회참여는 단순히 임금 노동이나 생산성 그 이상의 의미로 간주돼야 한다. 노인의 지속적 고용과 그로 인한 사회통합은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노인의 참여는 임금 노동 그 이상의 것으로 일상생활의 영위, 자원 활동, 지역사회 참여 등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노인 자신을 위한 사회운동과 단체의 형성과 참여에 주목해야 한다.

‘돌봄’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노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고령화 대책은 모든 노인을 포함해야 한다. 즉 상당히 약하고 돌봄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노인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고령화 정책이 초고령층을 배제하고, 상대적으로 젊고 활동적인 노인에게 초점을 둘 위험성이 있다. 또한 육아, 가사, 돌봄과 관련된 여성의 노동이 생애전반에 걸쳐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취약한 여성의 현실이 노후의 연금, 사회보장, 주거권 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에서 여성 노인에 대한 특별한 유의가 요구된다.

이들 원칙에 기반하여 국제사회가 내세운 목표는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The Society For All Ages)이다. 사실상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에 걸쳐 나이 드는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고령화는 우리 모두의 미래에 관한 것이지 노인 인구만을 위한 것은 아니므로 모두가 당사자로서의 노력이 요구되며, 전 세대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응은 모든 연령과 세대를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 옹호된다. △노약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하고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 △노인의 의사와 선택의 존중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가족의 부담에만 떠맡기지 않는 것 △고용‧교육‧여가‧조직 등에 대한 노인의 지속적인 참여 등이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의 요소들로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원칙은 구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령화 속도를 재며 계산기 두드리기에 바쁜 현실 속에서 노인의 인권을 경제·사회적 논의 속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 삶의 문제 속에서 이들 원칙에 살을 붙여나가려는 노력이 우리 사회가 제대로 ‘성년’이 되는 과정일 것이다. [류은숙] <2006년 09월 26일 인권오름 제23호>

노인을 위한 유엔원칙(1991년 12월 16일 유엔총회 결의 46/91)

독립 (Independence)
1) 소득, 가족과 지역사회의 지원 및 자조를 통하여 적절한 식량, 물, 주거, 의복 및 건강보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2)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거나, 다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3) 직장에서 언제 어떻게 그만둘 것인지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4) 적절한 교육과 훈련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5) 개인의 선호와 변화하는 능력에 맞추어 안전하고 적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6) 가능한 오랫동안 가정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참여 (Participation)

1) 사회에 통합되어야 하며, 그들의 복지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 형성과 이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들의 지식과 기술을 젊은 세대와 함께 공유하여야 한다.
2) 지역사회 봉사를 위한 기회를 찾고 개발하여야 하며, 그들의 흥미와 능력에 알맞은 자원봉사자로서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3) 노인들을 위한 사회운동과 단체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돌봄 (Care)

1) 각 사회의 문화적 가치체계에 따라 가족과 지역사회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아야 한다.
2)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안녕의 최적 수준을 유지하거나 되찾도록 도와주고 질병을 예방하거나 그 시작을 지연시키는 건강보호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3) 그들의 자율과 보호를 고양시키는 사회적 법률적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4) 인간적이고 안전한 환경에서 보호, 재활, 사회적 정신적 격려를 제공하는 적정 수준의 시설보호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5) 그들이 보호시설이나 치료시설에서 거주할 때도 그들의 존엄, 신념, 욕구와 사생활을 존중받으며, 자신들의 건강보호와 삶의 질을 결정하는 권리도 존중받는 것을 포함하는 인간의 권리와 기본적인 자유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자아실현 (Self-fulfillment)

1) 자신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전시키기 위한 기회를 추구하여야 한다.
2) 사회의 교육적, 문화적, 정신적 그리고 여가에 관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존엄성 (Dignity)

1) 존엄과 안전 속에서 살 수 있어야 하며, 착취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2) 나이, 성별, 인종이나 민족적인 배경, 장애나 여타 지위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대우받아야 하며 그들의 경제적 기여와 관계없이 평가되어야 한다.

인권오름 제 23 호 [기사입력] 2006년 09월 26일 17:44:15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9 호 [기사입력] 2006년 08월 29일 13:53:5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정치 1번지’ 또는 ‘복지 1등구’라 자임하는 서울 한복판 종로구청 앞에서 40일이 되도록 중증 장애인들이 길에서 먹고 자며 타전을 보내고 있다. 자신들을 볼모로 사욕을 채운 시설장에 대한 감독의 책임을 물으며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타전에 대한 응답은 담당 공무원들의 사과가 아니라 폭력이요,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보상이 아니라 꼬리를 무는 인권침해다. ‘바다 이야기’로 넘실거리는 언론의 관심은 바닥이고, 장애인에 대한 폭력에 대응하는 경찰은 팔짱만 끼고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성람재단 비리척결과 사회복지사업법 전면개정을 위한 공동투쟁단’ 관련 기사를 찾아보길 바란다)

문득 장애인의 인권을 명확히 말해주는 근거를 찾아 들이내밀고 싶었다. 그러나 장애인의 인권을 속 시원하게 두루두루 말해주는 기준을 찾기는 힘들었다. ‘공사 중’이라는 팻말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여전히 제정 ‘노력’ 중이다.

장애인의 권리선언(1975), 국제 장애인의 해(1981), 장애인에 관한 국제 행동 프로그램(1982) 등이 있어왔지만 장애인의 인권을 다룬 국제조약은 현재 없다. 물론 유엔의 수많은 국제인권조약들은 ‘모든 사람’의 권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장애인’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에서 배제돼왔다. 이에 ‘간접적’으로 장애인과 관계된 인권 기준 말고 장애 문제에 구체적으로 집중한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을 만들자는 요구가 거세졌다. 그런 기준이 있어야 국가들이 자기가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를 똑똑히 알게 할 수 있고, 장애인에 대해 툭하면 ‘좋은 뜻’으로 ‘배려’하고 ‘보살피고’ ‘헤아린다’는 투로 나오는 사회적 태도와 대응들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다. 그 결과 유엔총회는 2001년 12월 결의안을 통과시켜 장애인권조약을 검토할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고, 현재 장애인권조약을 만드는 중이다. 국내에서도 차별금지법 제정 등을 위한 발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오늘 읽어볼 ‘장애인의 기회의 평등에 관한 표준 규범’은 독립적인 장애인권조약을 만드는 데 밑그림 같은 것이다. 22개항의 규범은 장애인의 삶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며 ‘유엔장애인권 10년’ 동안 발전된 인권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규범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애’에 대한 정의이다. 여기서는 장애인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입은 ‘손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유로 장애인의 사회참여와 권리이행을 가로막는 사회 환경이 문제라고 한다. 장애인과 그 환경과의 관계의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면 고치고 개선해야 할 부분도 이 관계 속에 있다. 장애인의 참여를 가로막으려고 사회가 만들어낸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애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문제이지, 한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장애의 정의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인식의 변화와 발전이 담겨있다.

유엔에서 장애에 대한 관점은 전후 후생사업의 관점에서 지원과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점차 탈시설화와 장애인의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사회복지의 관점으로, 장애인의 동등한 권리와 장애인의 참여를 강조하는 인권의 관점으로 옮겨왔다.

인권의 관점으로 옮겨온 후의 내용들을 예로 들면 ‘1975년 장애인 권리선언’은 장애인이 타인과 똑같은 시민·정치적 권리를 가지며, 또한 경제적 권리,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고용에 대한 권리, 가족과 함께 살 권리, 사회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에 참여할 권리, 모든 착취와 학대나 모욕적인 행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말하고 있다. 1989년의 유엔가이드라인에서는 “장애인은 정부에 의존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의 주체로 인정돼야 한다. 장애인에 대한 교육은 정규 학교 체제 내에서 이뤄져야 하며, 장애인 교육에는 독립적인 사회화와 독립생활을 준비하기 위한 자조 기술을 포함해야 한다”고 하고,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는 “의도적이건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장애인에 대한 그 어떠한 차별도 본질적으로 인권침해”라고 한다. 이런 생각들에 기반하여 ‘장애인의 기회의 평등에 관한 표준 규범’은 국가들의 정책수립과 취해야 할 행동의 지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기준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인 당사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을 지지하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함께 전진하길 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독립입니다. 우리의 철학은 동등한 생활을 누리고, 동등한 기회와 참여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누리는 겁니다. 우리 스스로의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인 참여자나 서비스를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우리는 능동적인 조직가여야 합니다”(홍콩 재활 동맹) [류은숙] <2006년 08월 29일 인권오름 제19호>

‘장애인의 기회의 평등에 관한 표준 규범’

도입

배경과 현재의 요구

세계 모든 곳, 모든 사회의 모든 수준에는 장애인들이 있다. 세상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수는 많으며 늘어나고 있다.

장애의 원인과 결과는 세계 곳곳마다 다르다. 이 차이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환경과 국가가 자국 시민의 복지를 위해 제공하는 것의 차이의 결과이다.

현재의 장애 정책은 지난 200여 년 간의 발전의 결과이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다양한 시대의 일반적 생활 조건과 사회경제 정책을 반영한다. 그러나 장애 분야에 있어서는 장애인의 생활조건에 영향을 미친 많은 특수한 조건들이 또한 존재한다. 무지, 방임, 미신과 공포는 장애의 역사 내내 장애인을 고립시키고 장애인의 발전을 지체시킨 사회적 요인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 정책은 시설에서의 기초적인 보호로부터 장애 아동에 대한 교육과 성인기에 장애인이 된 사람들의 재활로 발전해왔다. 교육과 재활을 통해, 장애인은 장애정책의 진전 속에서 보다 능동적인 추진세력이 됐다. 장애인과 그 가족 및 옹호자들의 조직이 결성됐고, 이 조직들은 장애인의 더 나은 상황을 옹호했다. 2차 대전 이후 통합과 정상화(normalization)의 개념이 도입됐고, 이것은 장애인의 능력에 대한 인식의 향상을 반영했다.

1960년대 말 무렵, 몇 개 국가들의 장애인 조직들은 새로운 장애의 개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개념은 장애를 가진 개인들이 경험하는 제한,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환경의 디자인과 구조, 그리고 일반 국민의 태도간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했다. 이와 동시에 개발도상국들의 장애 문제가 더욱더 부각됐다. 이들 국가들 중에서는 장애인구의 비율이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됐고, 그들 대부분이 극빈자였다.

장애인의 기회의 평등에 관한 표준 규범의 목적과 내용

…이 규범이 강제력은 없지만, 상당수 국가들이 국제법의 규범을 존중할 의도를 갖고 적용한다면 국제관습법이 될 수 있다. 이 규범은 국가가 장애인의 기회의 평등을 위해 취해야 할 강력한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포함한다. …이 규범의 목적은 장애를 가진 소녀, 소년, 여성과 남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사회들에는 장애인이 권리와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회활동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들이 여전하다. 그런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적절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정부들의 책임이다.…여성, 아동, 노인, 빈민, 이주노동자, 이중의 또는 복합 장애를 가진 사람들, 선주민, 인종적 소수자와 같은 집단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장애 정책의 기본 개념

장애(disability)와 핸디캡(handicap)

‘장애’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국민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상당수의 다양한 기능적 제약을 요약한다. 사람들은 신체적, 지적 또는 정서적 손상, 건강상태나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장애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손상, 건강상태 또는 질병은 영구적이거나 일시적일 수 있다.

‘핸디캡’이란 용어는 타인과 평등한 수준에서 사회생활에 참여할 기회를 상실하거나 제한받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장애인과 그 환경간의 부닥침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용어의 목적은 환경과 사회의 많은 조직화된 활동 속의 결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평등한 조건으로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보, 통신, 교육이 있다.

…“장애”와 “핸디캡”이란 용어는 흔히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게 사용됐고, 정책 수립과 정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서 빈약했다. 용어는 의학진단과 의료적인 접근을 반영했지, 그 환경을 이루는 사회의 결함과 부족을 무시했다. …현재의 용어는 개인의 요구(예를 들어 재활과 기술 원조)와 사회의 부족(참여를 가로막는 다양한 장애물) 둘 다를 다뤄야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예방

“예방”의 의미는 신체적, 지적, 심리적 또는 감각적 손상의 발생을 방지(1차 예방) 또는 영구적인 기능 제한이나 장애를 야기하는 손상을 방지(2차 예방)하는 목적을 둔 행동이다. 예방에는 다양한 유형의 행동이 포함되는데, 예를 들어 기초 건강 보호, 산전·산후 보호, 영양교육, 전염성 질병에 대한 면역 캠페인, 풍토병 통제조치, 안전 규제, 다양한 환경에서의 사고 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고, 여기에는 직업 장애와 직업병을 예방하기 위한 작업장 개조, 환경오염 또는 무력 분쟁에서 발생하는 장애 예방이 포함된다.

재활

“재활”이란 용어는 장애인이 자신의 최적의 신체적·감각적·지적·심리적·사회적 기능 수준에 도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장애인에게 더 높은 수준의 독립성을 향해 생활을 바꿀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재활은 기능을 제공하거나 회복하기 위한 조치, 또는 기능의 상실·부재·제약을 보상하기 위한 조치를 포함할 수 있다. 재활과정은 초기의 의료적 치료를 포함하지 않는다. 재활은 보다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재활로부터 목적 지향적인 활동(예를 들어 직업재활)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범주의 조치와 활동들이다.

기회의 평등

“기회의 평등”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사회 시스템과 환경(서비스, 활동, 정보, 문서 등)을 모든 사람(특히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평등한 권리의 원칙은 각각의 모든 사람의 요구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의미이며, 그러한 요구가 사회계획의 기초가 돼야 하며, 모든 개인이 평등한 참여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방식으로 모든 자원이 사용돼야 한다는 의미이다.

장애인은 사회의 구성원이며 자신들의 지역 사회 속에서 살아갈 권리를 갖는다. 장애인은 보통의(ordinary) 교육·보건·고용·사회서비스의 구조 속에서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지원을 받아야 한다. …

(후략; 이하 규범 1부터 22까지는 다음과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Ⅰ. 평등한 참여를 위한 전제조건
규범 1. 인식향상
이용가능한 프로그램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장애인이 접근가능한 형식으로 제공
장애인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시민임을 전달하는 정보의 생산과 유포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리며, 이에 대해 장애인 조직과의 협의
장애인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의 원칙을 반영하는 대중교육 프로그램
장애인 당사자와 그 가족, 조직의 참여
모든 활동에서 장애 문제를 포함하는 기업 활동 장려
장애인이 자신의 권리와 잠재성에 대한 인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
모든 아동 교육 프로그램, 교사 훈련과정, 전문가 양성과정에 장애 인식 향상을 포함

인권오름 제 19 호 [기사입력] 2006년 08월 29일 13:53:5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인권오름 제 15 호 [기사입력] 2006년 08월 01일 21:33:55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잔인한 7월이었다. ‘평화로운 빗소리’라는 식의 표현을 7월의 집중호우 속에서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빗속에 생존권을 떠내려 보낸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가 그치고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지만 여전히 또다른 ‘비’를 내리는 세력들이 있다. FTA와 평택미군기지의 강행, 노동자 때려잡기, 그리고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에 대한 학살 등 빗줄기는 그치지 않고 있다.

빗소리의 느낌이 맥락에 따라 다르듯이 평화의 개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으로는 ‘평화와 공존’을 외치지만 그것이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실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가짜 평화에 맞서 평화를 규정하려는 노력들은 많다. 좁고 넓게 혹은 길게 가깝게 평화를 ‘이런 것’이라 규정하는 노력 속에서 바라보는 평화는 참 평화롭다.

“평화는 삶에 대한 존중”, “평화는 인간의 가장 값진 소유물”, “평화는 무장 갈등을 끝내는 그 이상의 것”, “평화는 인간과 환경의 조화로운 공존”,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뿐만 아니라 빈곤과 기아 등 구조적 폭력이 없는 상태”, “평화는 먼 훗날의 이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소소한 방식으로 창조되고 확대되는 행위양식”, “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및 인류 간 연대의 원칙에 대한 뿌리 깊은 헌신”…

“평화적 생존은 모든 인권의 출발점”이란 말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평화롭지 않다. 기본 중의 기본을 무시당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이 1984년 채택한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선언’이다. 이 선언은 인류의 평화적 생존권이 모든 인권의 기초임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강조하고 있다. ‘전쟁위협의 종식’,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이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건이란 것도 분명히 하고 있다. 평화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가장 좁은 의미의 평화에 대한 약속의 재확인이다.

이 선언이 채택된 것은 유엔 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1985년을 ‘세계 평화의 해’로 선포하기 위한 합의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더 큰 피를 불렀다는 역사적 교훈은 넘쳐난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을 선택한 것의 결과가 어떠하지를 잘 아는 속에서 출발한 유엔은 그 헌장 첫머리에서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기” 위해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들의 힘을 합”한다는 것을 결의했다.

그 연장선에서 1949년 ‘평화의 본질에 관한 선언’은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어떤 국가에 대해서든지 그 인민의 의지를 파괴하려는 모든 직간접적 위협이나 행위를 삼갈 것”을 가장 엄숙한 평화 협정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1978년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들의 준비에 대한 선언’에서는 “침략전쟁, 침략전쟁의 계획·준비·추동은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서 국제법에 의해 금지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1984년 선언은 앞서 원칙들을 반복·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력에 기념할 날짜를 채워가고 평화에 대한 선언문을 쌓아가는 것이 평화의 존재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현실은 아프게 보여준다. 이 모든 국제인권법을 백지화시키고 있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표정은 이런 선언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선언이 채택되기 얼마 전인 1982년에도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침략하여 약 1만8천여 명의 생명을 학살했고, ‘세계평화의 해’에는 튀니지의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를 폭격하여 수십 명을 살해했다.

평화에 대한 말을 실천으로 번역해 내기 위해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반평화와 반인권의 현실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기본권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전쟁위험과 실제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봐야 한다. 성차별, 인종차별, 경제적 압력, 실업, 저발전, 기상의 변화, 사막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인간이 유발한 환경파괴 등을 그 누구의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알아야 한다.

평화에 대한 또 다른 선언문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전쟁을 창안한 바로 그 종(인류)이 평화도 고안할 수 있다.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 있다.” [류은숙] <2006년 08월 01일 인권오름 제15호>

유엔,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1984년 11월 12일 유엔총회 결의 39/11)

유엔총회는

유엔의 주요 목적이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임을 재확인하며,

유엔헌장에 규정된 국제법의 기본적 원칙들을 상기하며,

인류의 삶에서 전쟁을 근절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적인 핵 파멸을 막는 것이 모든 인류의 의지와 열망임을 표현하며,

전쟁 없는 삶이야말로 나라들의 물질적 복지, 발전, 진보를 위하며 유엔이 선언한 권리와 기본적 인간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제1의 국제적 필수조건임을 확신하며,

핵시대에 있어서 지구상에 지속적인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보존과 인류의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조건을 대표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인류의 평화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각 국가의 신성한 의무임을 인정하며,

1.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2.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를 보존하고 그 이행을 증진하는 것이 각 국가의 기본적 의무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3. 인류의 평화권 행사를 보장하는 것은 전쟁의 위협, 특히 핵전쟁의 위협을 종식시키기 위한 국가들의 정책을 요구하며, 국제관계에서의 무력 사용의 포기와 유엔헌장에 기초한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4. 모든 국가와 국제 조직은 국가적 및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적절한 조치를 채택함으로써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이행을 지원하기에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한다.

인권오름 제 15 호 [기사입력] 2006년 08월 01일 21:33:55 류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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