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다가오는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1948년 이날의 세계인권선언 채택을 기념하며 거기 담긴 약속의 실현을 온 인류가 다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권의 날을 눈앞에 둔 지금, 서울의 거리에는 스산한 바람만 몰아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선 소위 '북한인권대회'라는 것이 열리고 있고 이라크파병재연장동의안의 국회통과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보장의 필수조건인 평화와 정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연일 죽어나가고 있고 매서운 바람이 가난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할퀴고 있다. 이들을 위한 인권대회는 어디에 있고 언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참담한 물음 속에 우리보다 앞서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임을 절감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킹 목사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갈채를 보냈던 사람들이 그의 생애 말년에는 그를 외면한다. 그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 백인 자유주의자들, 유명 흑인 인사들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그는 "자신의 양심이 다른 선택을 허락지 않기 때문에" 발언하기 시작한다.

1967년 4월 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의 "베트남 너머"라는 연설을 통해 그는 미국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며 미국이 자국내의 불공정을 외면하고 세계 평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신의 저주와 분노가 떨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이 있은 지 꼭 1년 후인 1968년 4월 4일에 그는 암살당했다. 의문에 싸인 죽음이지만 그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싫어한 자들의 소행이라 여겨지고 있다.

양심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범죄의 증거가 속속 들어났는데도 파병연장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한반도 한복판에서 대북적대선동행위가 벌어지도록 좌시하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다. 인권을 빙자하여 무고한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을 학살한 이라크 침략전쟁의 당사자가 북한을 상대로 한반도 한복판에 와서 소위 인권대회를 갖는 것은 위선이다.

북한과 이라크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둘 다 인권을 빌미로 한 미국의 전쟁책동의 희생물이고, 그에 동조하는 세력은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이러한 선동에 동원하고 있다. 북한인권대회와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이 출현하고 있는 이 현상을 눈앞에 보는 듯이 킹 목사는 말하고 있다. 왜 우리가 이 둘에 대해 반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우리가 미국에서 전개해 오고 있는 시민권 투쟁 사이에는 아주 명백하면서도 알기 쉬운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의 시민권 투쟁은 빛나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그때는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통해서, 흑인과 백인을 불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 군대가 파병되면서, 저는 이 빈곤퇴치 프로그램이 마치 전쟁에 미쳐버린 사회의 정치적 노리개마냥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모험들이 일종의 마력을 지닌 파괴적인 흡혈귀처럼 사람들과 기술과 돈을 계속적으로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재활에 필요한 자금이나 에너지를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이 전쟁을 가난한 사람들의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에 반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인구의 나머지 집단들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비율이 맞지 않게 턱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싸우다 죽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을 8천 마일이나 떨어진 동남아시아로 보내, 그들에게 남서부 조지아나 동부 할렘 지역에서도 찾지 못했던 자유를 수호하라고 하고 있습니다.…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조종당하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인권을 송두리째 날려버린다. 경제제재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과 노인과 시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에너지를 비롯한 필수자원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총성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런 책동에 동원당하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북한인권대회를 위해 안락한 신라호텔에 머물고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했고 동시에 인권을 사랑했던 킹 목사의 말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대들이 북한적대정책을 선동하려고 쳐들이는 돈은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미국 시민들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다. 그대들이 외치는 북인권을 진정 위한다면 미국 정부의 반평화 공세를 중단시키는 일이 먼저이다. 당신 정부의 정책 때문에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다. 그대들이 주입시키고 싶은 자유는 '주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결권 존중과 안전보장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이라크에 침략군을 계속 두면서 재건을 말하지 말고 차라리 그 비용을 이라크인들이 재건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큰 폭력의 행사자인 바로 우리 정부를 향해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는, 흑인 거주 지역에서 억압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비판하는 저의 목소리를 결코 높일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들을 위해서, 이 정부를 위해서, 우리의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전 세계인들의 가장 깊은 희망을 파멸시키는 한, 미국의 영혼은 구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미국이 되리라'라고 결심한 우리는 저항과 반대의 길을 감으로써, 이 나라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힘없는 이들, 발언권이 없는 이들, 우리 나라에 의해 희생된 이들, 이 나라가 '적'이라고 부르는 이들, 인간이 기록한 어떠한 문서에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말하고자 저는 이곳에 온 것입니다."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스스로 선언한 것은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도 '자결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예속 하에서 참된 인권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 베트남의 자결권을 부인했듯이 오늘날 이라크와 북한의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베트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자신들의 선언에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식민지를 다시 정복하려는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베트남인들이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고,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 세계의 정서에 치명적인 독을 입혀왔던 서구의 오만함의 희생자로 또다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베트남인들에게 그들이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했습니다.…재식민지화하려는 이러한 비극적 시도에 따르는 거의 모든 비용을 우리는 머지않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진실한 인권 기준은 상대방에게 적용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약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선'으로 주장하는 것은 지배와 다를 바 없다. 공동선의 관점에서 자신을 먼저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의 주장이다. 상대방의 차이에 대해서 '존중' 수준까지는 못가더라도 적어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 인권대화와 인권증진노력의 출발점이다.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지 않는 인권은 힘의 횡포요, 강자의 위선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비폭력적 공존이냐? 폭력적 공멸이냐? 우리는 과거의 우유부단함을 떨치고 행동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평화와 함께,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개발도상국들에 있어서의 정의의 확립을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힘, 도덕성이 결여된 힘,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힘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길고 어둡고 수치스러운 시간의 복도를 따라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불협화음들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바꿔 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미국과 전 세계에서 정의가 홍수처럼 흐르고 공의가 힘찬 물살로 흐르는 그날을, 우리는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 ◎ 이 연설의 전문은 http://www.stanford.edu/group/King/publications/speeches/Beyond_Vietnam.pdf (영어)에서 볼 수 있다. 한국어판은 위드북스에서 출판된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에 실려있다.

 

[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류은숙] <2005년 11월 25일 인권하루소식 제2944호> 

 

'식량주권'이란 말이 절실하게 겨울 공기를 가르고 있다. 주권 없는 식민지 주민마냥 내몰리던 농민들이 하나 둘씩 생명을 잃고 있다.

1996년 '세계식량정상회담'이란 것이 로마에서 열렸다. 명목상 '만인을 위한 식량안보 달성'과 '2015년까지 영양부족인구 반감'을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농산물 시장 개방을 염두에 둔 식량수출국들과 시장가격으로 평가될 수 없는 농업의 다원적 기능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개도국들간의 갈등은 어정쩡하게 봉합됐다.

5년 후인 2002년, 또 한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계정상들은 그동안 뭘 했나를 점검했다. 원래 세웠던 목표대로라면 2015년까지 세계 8억 기아인구를 절반인 4억으로 줄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매년 2천2백만 명씩 기아인구가 감소돼야 했다. 하지만 상황을 평가하니 진전은 형편없어서 이대로 나가다간 45년이 더 걸릴 것으로 추정됐다. 세계 전체 식량공급은 충분한데 나라간의 이동과 분배가 자유롭지 못하니 자유무역을 하면 된다던 정책이 엉터리였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열릴 때 전 세계 농민들과 식량권을 옹호하는 민간단체들도 한데 모였다. 이들은 세계정상들과는 다른 것을 꿈꾸었다. 여기서 논의된 개념이 '식량주권'이었다. 오늘 읽어볼 선언문은 농산물 자유무역에 맞선 식량주권에 대한 선포이다. '식량주권'은 우리 농민들만이 외치는 배타적 구호가 아니다. 농토와 전통적 농사방식을 빼앗기고 쫓겨나며 농사를 지으면서도 기아에 시달리는 세계의 농민들, 초국적 기업농에게 식량권을 내맡긴 정부하의 국민들, 자기 먹거리와 고유의 풍경, 다양하다 못해 풍요한 문화적 자산을 잃어버리고 세계무역기구(WTO)가 먹으라는 것을 먹어야 하는 소비자들의 공통구호인 것이다.

이 선언문에 나타난 대로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다. 자유무역이 굶주림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은 자살하는 농민들이 속출하는 현실에서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자기 이익을 가장 잘 판단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라며 개인의 자유에 모든 걸 내맡기자던 자유주의자들은 왜 자기 이익을 가장 잘 판단하고 있는 농민자신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선택의 자유를 그리도 강조하던 자들이 우리 땅에서 유전자 조작되지 않은 종자로 안전하게 가꾼 음식을 먹고 싶은 우리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일까? 몇몇 초국적 기업농의 손에 우리의 식량권을 내맡기고 싶지 않은데 왜 무역자유화라는 유령선에 강제 승선해야 하는가? 자동차와 휴대전화를 수출하려면 농사는 짓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은 누가 누굴 위해 만든 것인가? 그런 게임의 규칙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게임에 참가해야만 한다는 법이 법이라면 거부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돈'을 만들어내는 것만이 가치이고 국가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틀 속에서 농민들을 비난하지 마라. 농민들은 '돈'이 아닌 '생명'을 가치로 생각하는 틀 속에서 싸우고 있다.

평생 생명을 심고 가꾸는 일을 한 탓에 자신의 생명을 잃은 농민들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식량주권: 모두의 권리-식량주권을 지지하는 민간/시민사회단체 포럼 성명(2002.6.14)-(Food Sovereignty: A Right For All-Political Statement of the NGO/CSO Forum for Food Sovereignty-)


1996년 행동계획(세계식량정상회의가 채택한 '로마선언문과 행동계획'을 말함)의 실패는 정치적 의지나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실패한 이유는 오히려 그것이 기아를 초래하는 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그 정책이란 남반구에 대한 경제자유화와 문화적 동질화의 추구이며 그것은 규정한대로의 행동이 실패하면 군사력으로 뒷받침됐다. 오직 근본적으로 다른 정책만이, 지역사회들의 존엄성과 생존에 기반한 정책만이 기아를 없앨 수 있다. 우리는 이 일이 가능하며 긴급하게 요청된다고 확신한다.

1996년 이후로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기아와 영양실조의 구조적 원인을 강화하는 지구화와 자유화를 지휘해왔다. 이는 농업생산물 덤핑에 대한 시장 개방,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지원기구들의 민영화, 공공의 토지·물·어장·삼림의 사유화와 상업화를 강요했다.

식량주권이란 무엇인가? 식량주권은 자기들 자신의 농업·노동·어업·식량·토지 정책을 생태적· 사회적·경제적·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독특한 환경에 적절하게끔 정할 수 있는 인민·지역사회·나라들의 권리이다. 식량주권에는 식량에 대한 권리와 식량 생산에 대한 권리가 포함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민이 안전하고, 영양적이며, 문화적으로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며,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식량 생산 자원과 능력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식량주권은 다음을 요구한다:

다각화된 농민과 생태적 생산 체제에 기반하는 국내 및 지역 시장을 위한 식량생산에 우선성을 둔다.
농민에게 공정한 가격을 보장한다. 이는 헐값의 덤핑 수입물로부터 내부 시장을 보호할 힘을 의미한다.

식량 생산에서의 여성의 역할 및 생산 자원에 대한 여성의 동등한 접근과 관리를 인정하고 증진한다.
토지, 물, 유전자 및 기타 자원에 대한 기업의 소유권에 대항하여 생산자원을 지역사회가 관리한다.
종자를 보호한다. 종자는 식량과 생명 그 자체의 기초이며, 농민들의 무료 교환과 이용을 위해 보호돼야 한다. 이는 생명에 대해서는 어떤 특허도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며, 식물과 동물들의 중요한 유전적 다양성을 오염시키는 유전자 변형 작물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의미한다.
권한강화, 인민과 지역시장을 위한 식량 생산 및 지역 관리를 위한 장치로서 가족들과 지역사회들의 생산 활동을 지원하는 공적 투자를 한다.

식량 주권은 무역의 관심사를 초월하는 것으로 인민과 지역사회의 식량권과 식량생산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수출을 위한 생산과 식량 수입보다는 지역시장과 생산자들에 대한 지원과 증진을 의미한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 세계무역기구(WTO),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나온 "모두에게 맞는 한가지 사이즈"의 정책들은 "많은 세계들을 위한 여지를 품은 하나의 세계"의 비젼으로 대체돼야만 한다. 연대와 다양성의 존중을 통해 힘과 인간존엄성이 건설되는 세계에서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은 자신들의 정책을 정할 권리를 갖는다.…

 

 

[류은숙] <2005년 11월 25일 인권하루소식 제2944호> 

[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11월 13일은 이 땅의 영원한 '노동자'가 태어난 날이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두 살의 젊은 전태일은 스스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절규 속에서 그의 몸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뤄졌다. 속칭 '빼빼로 데이'는 알아도 11월 13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우울함에 세 번째로 『전태일 평전』을 샀다. 우리 사회의 독보적인 인권 교과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처음 손에 가졌을 때의 제목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다. 그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그런 우회적인 제목을 가졌고, 저자(고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도 적히지 않은 책이었다. 나는 특정 종교재단에 속한 학교라는 이유로 강제 수강해야 했던 종교개론 시간에 맨 뒤에 앉아 시간을 때우려고 이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수업시간인지라 코와 입을 막고 울먹임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가졌을 때는 『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저자의 이름도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두 번째 책은 경찰의 압수수색에서 불온서적을 소지한 것으로 걸릴 것을 두려워한 친구들에 의해 깨끗이 치워졌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손을 강제로 떠났다.

세 번째로 가지게 된 책의 표지는 깔끔하고 세련되게 바뀌어 있다. 마치 전태일이 고발했던 모든 것이 옛일인 듯 시치미 떼고 있는 사회의 뻔뻔함을 반영하듯이 말이다.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갖은 돈벌이에 시달리던 전태일은 열여섯 살이 돼서야 야간학교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1년도 채 다닐 수 없었다. 윗글은 그가 짧은 학창시절에서 경험한 체육대회를 마치고 쓴 글이다. 그늘에서 그늘로 옮겨 다니는 삶 속에서도 스스로의 생명과 존엄을 잘 알고 있는 '인간'을 여기서 대면할 수 있다. 스스로를 존엄한 인간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노예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할 가치와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큼 인권의 교과서적인 선언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인권 논의는 이런 선언문 아래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데 머물고 있다. 하지만 핍박을 당하는 사람은 압제자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한가지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하지 아니하고 대목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모두 똑같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따라서 대등한 인간이다. '형식'으로는 대등한 인간인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전통적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은 현실의 인간이 처한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 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권의 현실을 무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주인도 노동자도 자유롭고 평등한 대등한 시민일 뿐이다.

윗글은 전태일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처음으로 사회비판의식을 드러낸 글이다. 인권의 변화는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변화는 인권주체의 구체화와 집단화로 나타났다. 구체적 인간은 누구인가. 자기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임금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들, 즉 재단사인 노동자이고 시다인 노동자이다. 이들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이들이 사회적 조건을 얘기하려면 이들의 존재를 통해 얘기할 수밖에 없다.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철같은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일반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일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또한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대부분 6년 전후의 경력자들로서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해 안질과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응당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기업주는 건강진단을 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을 기만합니다. 한 공장의 30여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상의 진단을 마칩니다. X레이 촬영시에는 필름도 없는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인당 3백 원의 진단료를 기업주가 부담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전부가 건강하기 때문입니까? 이것도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실태입니까?.....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시간-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그렇게 등장한 구체적 인권이 '노동권'이다. 노동권의 등장으로 인해 전통적 인권이 옹호했던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은 깨졌다. 재산을 똑같은 재산으로 바라보지 않고 누가 어떤 것을 가졌느냐에 따라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보게 된 것이다. 자본가의 소유권은 그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소유권을 위해 제한될 수밖에 없고, 이 새로운 소유권은 '노동권'이라는 인권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자본가의 재산권에 대해 책임을 묻게 됐고, 사용자의 권리에 대한 제한 규정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휴일과 적절한 휴식 없이 일 시켜선 안되고, 공정한 임금을 주어야 하고, 노동자의 자기 보호를 위해 조합을 조직하고 가입하고 활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자라는 인간집단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으로) 동등한 인간임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업주들은 한 끼 점심값에 2백 원을 쓰면서 어린 직공들은 하루 세 끼 밥값이 50원, 이건 인간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각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 즉 인간입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
종교는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법률도 만인이 다 평등합니다.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더러운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부한 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합니다. 천지만물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다 고귀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것은 생물체의 본능입니다.
선생님, 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미생물이 아닌, 짐승이 아닌,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 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부한 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
선생님, 그들도 인간인 고로 빵과 시간, 자유를 갈망합니다."

'빵과 자유'로 뭉쳐있지 않은 인권은 무용지물이다. 빵, 즉 '인간답게 생존할 권리'를 인권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인권이 아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신체의 자유, 사상·언론의 자유같은 자유는 의미가 없다. 사실상 누릴 수 없는 권리를 사람들에게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식권을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기이다. 한편 '빵'은 '자유'의 배척물이 아니라 자유를 기본 내용으로 한다. 전태일의 말대로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에는 뭉칠 자유가 필요하고 뭉쳐서 행동할 자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빵은 자유 없이 실현불가능하다. 그래서 '빵에 대한 권리'를 담고 있는 '사회권'이란 인권은 '자유'의 고양이지 자유의 무시가 결코 아니다. 대표적인 사회권인 노동의 자유가 결사의 자유, 단결의 자유, 단체행동의 자유를 외쳤고 많은 정부가 탄압하는데서 보여지듯 자유없이 사회권의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사회권을 흔히 국가가 위로부터 베푸는 혜택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사회권은 노동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출발했고, 그를 통해 자본가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사회적 책임을 추구한 것이다. 사회권은 노동자를 비롯한 당사자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일차적으로 도모되는 것이고 국가의 역할은 그런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전태일 이후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빵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오늘날에는 '노동자'라는 이름도 아까워 '비정규직'이란 이름을 붙여서 노동자를 반토막 취급하고 있다. 이것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고 또 읽어야 되는 이유이다.

[인용글의 출처] 전태일 평전, 도서출판 돌베개, 조영래 지음

 

 

[류은숙] <2005년 11월 10일 인권하루소식 제2934호>

[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188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이 팜플렛은 세상을 경악케 하고 빈곤을 '발견'케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발견'되어야만 했을까?

사회권이란 인권이 인식되기 이전에 빈곤은 죄악이었다. 승승장구하는 경제적 성장과 번영으로 인해 눈에 띄는 곤란은 감소된 것으로 여겨졌고, 보다 숙련된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보게 됐다. 많은 중산층들은 빈곤이 성공적으로 퇴치되었다고 여겼다. 이 번영의 시기에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건 인간말짜인 것으로 게으르고, 나쁜 습관을 못 고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탓이라 여겼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인간말짜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지근성 등 빈민의 성격결함과 행동을 고치는 것이 빈곤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그렇게 빈곤문제를 바라본 세력에게 빈곤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고 따라서 '발견'돼야 했다. 원래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던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빈민은 사라지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전례 없는 국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박탈과 불행이 일반화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찰스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도 런던 동부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이다. 일련의 사회활동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빈민들의 실상을 고발했고 빈곤문제에 대한 논쟁을 펼치게 됐다. 그런데 이런 빈민에 대한 묘사는 이방의 세계, 딴 세계를 그리는 듯한 것이었고, 그것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 내용, 연애소설을 들고 있는 독자들이 읽을 수 없는 참혹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은 소설이 아닌 사실이었고, 선정적이라 할지라도 빈곤이라는 최악의 사회문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계절노동이나 아주 불안정한 경제 부문에 임시 고용될 뿐이고, 15시간에서 17시간에 이르는 착취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일자리 말고도 아주 과밀한 주거, 부적절한 위생, 높은 아동사망률, 성매매의 만연, 폭력적 범죄와 질병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런던동부에서 빈곤율은 40%에 육박했다. 사적자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빈민의 수가 많다는 것, 빈곤의 원인이 성격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유로운 시장에 내버려 두면 되고, 국부가 증진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았던 논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것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권의 도전을 받게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빈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서울 부랑인의 절규'같은 고발이 더 이상 필요할까? 700만, 800만에 이른다는 빈곤층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개인의 모자람으로 취급하고 여전히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별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면 발견될 것은 빈곤이 아니고 치유될 것은 빈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이고 구조일 것이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The Bitter Cry of Outcast London): 비참한 빈민의 상황에 대한 조사(Andrew Mearns, 1883)

(일부발췌)

…최근까지 기독교회는 빈민구제를 일부 외곽조직으로 만족해왔거나 더 나쁘게는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조직도 없는 소수의 기독교인에게 맡겨왔다. 나머지들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지역 방문과 다소 무차별적인 물질적 자선의 배포와 극빈자들이 모이는 몇 개의 방을 여기저기에 개설하는 것에 만족해왔고 그런 일들로는 소수가 구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그 방식에서 선하며 선한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는 가난과 비참함, 더러움과 부도덕으로 아주 음울한 지역의 가장자리만을 건드렸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한다. 사실을 통해 끔찍한 죄악과 비참함의 홍수가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 수위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이 문건은 극빈자의 실제 상태와 가장 효과적인 대책을 찾기 위한 오랫동안의 끈기 있고 진실한 조사의 결과이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기서 주어진 정보는 선별한 사례가 아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거리마다에서 보이는 상태를 단지 드러낸 것이다. 둘째, 절대로 과장하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을 꾸밈없이 서술한 것이다. …


빈민이 사는 곳의 조건

그들의 '집'(home)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들짐승이 사는 굴과 비교할 때 동물이 사는 굴이 더 안락하고 건강한 곳으로 여겨질 그런 곳을 어떻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이들 치명적인 인간의 빈민굴이 무엇이며, 노예선의 복도에서 듣는 것을 연상시키는 공포에 둘러싸여 수만 명이 어디에서 한데 우굴 거리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려면, 사방에서 던져지고 당신 발밑을 흐르는 오수와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유독한 고약한 냄새로 쩔은 골목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골목들 상당수에는 햇볕이 전혀 들지 않고, 신선한 공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으며, 한 방울 청소물의 효능을 알지 못한다.

썩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매 계단마다 빠질 위험이 있고,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려, 방심하면 팔다리나 생명을 잃을 구멍을 남기고 있다. 해충이 기어오르는 어둡고 더러운 복도를 더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악취로 물러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대속한 인종에 속하는 수천 명의 존재들이 무리져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철로 문 아래나 짐수레나 큰 통속에서, 또는 야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잠자리에서건 잠을 자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을 동정한 적이 있는가? 이곳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있는 이들의 운명과 비교할 때 거리의 그들을 더 부러울 정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평방 8 피트가 이 많은 방들의 평균 크기다. 벽과 천장은 오랜 세월 방치돼온 때가 뭉쳐 검은색이다. 머리 위 판자의 깨친 틈 사이로 오물이 스며 나오고, 벽을 따라 떨어지고 있고 어디에나 있다. 창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절반이 넝마나 판자로 막혀있다. 나머지 부분도 아주 더럽고 희미해서 빛이 거의 들어올 수 없거나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열려있거나 깨진 창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그래도 좀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고 다락에 올라간다면 낮은 집들의 지붕과 선반을 보게 되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메스꺼운 공기가 죽은 고양이나 새들의 시체 더미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들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썩고 악취나는 주택의 각 방에는 한 가족 때론 두가족이 살고 있다. 한 위생감독관은 한 지하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 명의 아이, 그리고 4마리의 돼지를 발견했다. 또다른 방에서 한 선교사는 천연두를 앓고 있는 남자와 8번째 해산을 하고 막 몸을 추스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반은 벌거벗은 채 먼지로 뒤덮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한 개의 지하 부엌에는 7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같은 방안에 죽은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또다른 곳에는 가난한 과부와 3명의 아이, 그리고 죽은 지 13일이 된 아이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마부였는데 얼마 전에 자살했다. …초저녁에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어머니가 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부도덕한 목적으로 방을 세놨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어린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시간이 돼서야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침대가 있는 곳은 단지 더러운 넝마와 대팻밥이나 짚단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불쌍한 아이들이 휴식할 수 있는 부분은 더러운 판자 위일 뿐이다. 이 방의 소유자인 과부는 침대만을 차지하고 바닥은 결혼한 부부에게 임대했다. …


빈곤

…우리가 의미하는 빈곤은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빈곤이다.…트위드 바지를 만드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하루에 얼마를 버냐고 했더니 1실링이라 한다. 그런데 하루가 이 가련한 영혼에게 뭘 의미하는가? 17시간이다!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녀는 일한다. 식사할 짬도 없다. 일하면서 빵껍질을 먹고 약간의 차를 마신다.…이들은 가족 소득의 절반을 이런 끔찍한 동네의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고, 일용할 음식과 옷과 연료를 위해 남겨지는 돈은 4다임에서 6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빈민의 고통스런 얼굴은 노예제와 악명 높은 억압의 땅에 비할 바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이러한 빈곤과 타락의 심연에까지 교육법이 미치고 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육법으로 인해 우리가 설명한 이 계급은 잔인한 짐을 걸머져야 한다. 이들에게 서넛의 아이 각각에 대한 일주일에 2펜스나 1페니의 수업료는 그만큼의 먹을 것의 부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빈곤과 지저분함 속에서 사람이 지속적으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의 광경을 대면해야 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해야 할 일

…우리는 국가의 개입 없이는 어떤 효과적인 것도 대규모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일거리가 있는 중심가 근처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기차나 전차로 교외로 나갈 여유가 없다. 어떻게 그들의 야위고 굶주린 몸으로 1실링 또는 그 이하를 벌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는 것도 모자라 편도 3∼4마일을 걸을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노동자 주거법(the Artizans' Dwellings Act)은 빈민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기준에 맞는 주거를 건설한다고 대규모 구역에서 빈민들을 몰아냈지만, 이들 주거의 임대료는 극빈자들의 수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빈민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거의 없다시피한 숨막힐 듯한 곳에 더욱 밀집해 살도록 내몰렸다. 빈민은 비록 그것이 살아있는 무덤 같은 주거라 할지라도 어딘가에 주거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에 부자는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된 부동산을 사들여 그것을 금광으로 바꿔놓으면서 그렇게 빈민의 고통으로부터 더 풍요로운 수확을 거둔다.
국가는 이런 사악한 매매를 빨리 없애야만 하고, 극빈자에게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열병의 소굴보다는 더 나은 곳에 살 권리, 가장 지저분한 야수보다는 더 나은 존재로서 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

 

[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류은숙] <2005년 10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915호> 

 

인권의 역사는 승리와 연대의 기록만이 아니라 계급·인종·민족·성적 차별의 소용돌이이기도 하다. 그속에서 많은 투쟁의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바로 그 차별의 노예가 되어 투쟁의 목적을 잊기도 했다. 반노예제투쟁과 노동권쟁취를 위한 여성들의 투쟁이 쉽사리 망각되는 것도 그중 하나의 결과일 것이다.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라는 바로 그 대의 속에서 여성차별이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제 철폐를 위한 세계대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석을 갖지도 못했고, 노예제 폐지 조직에서 여성들은 봉사해야 할 뿐 가입 자격도 성명서에 서명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 여성은 청중석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연단에 설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자 여성은 의장을 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남성이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노예제 폐지 투쟁속의 성차별 속에서 여성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됐고 노예제와 성적억압이라는 두가지 악에 맞서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 뛰어난 순회연설가, 작가, 조직가가 되어갔다. 어떤 경우이건 변화는 한가지 또는 한 집단의 권리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를 위한 환기와 각성은 또 다른 이들의 권리에 불을 지핀다. 바로 그 예가 미국에서의 노예제 철폐 투쟁과 여성운동의 관계일 것이다. 여성들의 조직적인 대규모 투쟁은 노예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싹텄다. 노예 예방을 위한 운동에서 여성들은 운동의 대의를 깨달았고, 조직하는 법, 대중집회를 갖는 법 등을 배웠다. 용기 있는 행동과 경험 속에서 대중에게 연설할 권리를 얻었고 그렇게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은 상호를 강화하고 풍부하게 했다.

노예제 철폐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운동의 결속에 큰 역할을 한 인물 중에 흑인여성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가 있었다. 소저너는 노예로 태어나 일평생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가 사랑한 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채찍질을 했다. 결국 주인이 강요한 남성과 결혼하여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1827년 그녀는 뉴욕주 법으로 자유를 얻었다. 그후 노예제폐지운동가가 되면서, 그녀는 노예시절의 이름인 이사벨라(Isabella Baumfree)를 버리고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진리를 전하고 다니는 사람)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가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연설을 한 것은 1851년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여성권 집회에서였다. 남성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왔고 누구도 이에 대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저너가 말하려고 앞으로 나서자,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대의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발언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저너는 연단에 나가 말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연설은 충격을 줬다. 당시 의장을 맡았던 이의 표현에 따르면 흥분한 군중의 조소와 야유는 존중과 경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난 연설 하나로 평등이 왔다고 하는 건 환상일 뿐이다. 노예제 폐지운동에 함께했던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의 이런 활동이 남성을 부당하게 공격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뛰어난 연설가들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지지하기 보다는 '어떤 분파의 권리도, 어떤 계급의 권리도, 어떤 성의 권리도 옹호하지 않겠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권리를 옹호하겠다'는 식으로 점잖게 보편성을 옹호했다. 이런 식의 말뿐인 보편성 옹호는 남성만의 권리를 확인, 재확인했을 뿐이다.

앞서 말한 '변화는 한가지 또는 한 집단의 권리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를 위한 환기와 각성은 또 다른 이들의 권리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권리 주체들만이 아니다. 지배자들, 억압자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변화는 하나가 아니라 집단으로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지배계급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여성과 여성, 흑인과 여성, 남성과 여성, 이주노동자와 미국인 간에 선을 그어나갔다. 인종적, 성적 억압과 착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공유하지 못한 운동은 공통의 적을 이롭게 했다.

예를 들어 북부 자본가들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아일랜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타 집단의 권리투쟁을 부르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압했다. 성급하게 여성의 권리를 요구할 때가 아니라 지금은 '흑인의 시간'(Negro's hour)이라 주창했다. 흑인의 참정권을 우선시한 그들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남부로 한몫 챙기러간 북부 자본가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전 노예소유주들을 견제했다. 그렇게 이용된 '흑인의 시간'은 지속되지 않았다. 목적이 성취되자 흑인의 권리에 대한 퇴보조치가 속속 취해졌다. 또 다른 예로 자본가들은 폭증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요구가 두렵고 싫어지자 이번에는 여성참정권을 옹호하고 나섰다. '비백인 이주 임금노예'에게 참정권을 주느니 백인여성에게 참정권을 줘서 백인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의해 백인여성참정권이 옹호됐다. 이주노동자 여성들로부터 촉발된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으면서 여성참정권운동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소저너의 외침은 "나는 노동자가 아닌가요", "나는 시민이 아닌가요", "나는 인간이 아닌가요"라고 메아리쳐 왔다. 그리고 이런 외침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같이 외쳐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Ain't I a woman?)(1851)

여러분, 이렇게 야단법석인 곳에는 뭔가 정상이 아닌 게 있음이 틀림없어요. 내 생각에는 남부의 검둥이와 북부의 여성 모두가 권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백인 남성들이 곧 곤경에 빠지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건 전부 뭐죠?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 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이런 일을 사람들이 머리와 관련해 얘기할 때 뭐라고 부르죠? (청중 속에서 중얼거린다, "지성") 맞아요. 그거예요. 지성이 여성의 권리나 흑인의 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나의 잔이 1파인트도 담지 못하고, 당신의 잔이 2파인트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내 보잘 것 없는 절반 크기의 잔을 채우지 못하게 할만큼 야비하지는 않겠지요?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말하네요. 여성은 남성만큼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죠? 어디서 왔느냐고요? 신과 여성으로부터 왔잖아요! 남성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신이 만든 최초의 여성이 혼자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만큼 강했다면, 이 여성들이 함께 세상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여성들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내 말을 들어야만 해요. 이제 늙은 소저너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류은숙] <2005년 10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915호> 

[류은숙] <2005년 9월 29일 인권하루소식 제2905호>

 

카트리나가 훑고 간 뉴올리언스의 처참한 광경에서 보이는 것은 허리케인만이 아니다. 인종주의의 거센 발톱이 비극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제국주의, 이런 것들은 인권의 역사에서 영웅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나왔다. 재산권을 핵심으로 한 인권의 주창자들은 그 이익을 위해 이런 '필요악'들을 창조했고 그것의 유지를 위해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당사자 자신이 아닌 '그들'에 의해 쓰여진 노예, 여성, 식민지 주민 등의 권리에 관한 문헌에는 우리가 충분히 기대하고 예상할 벅찬 감동의 문구 따위는 없다. 정떨어질 정도로 간결한 '그들' 자신의 목적이 표시될 뿐이다.

오늘 읽어볼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저 절절하고 화려한 독립선언서의 문구와는 사뭇 다르다. 독립선언서와 권리선언의 주창자들이 노예제에 대해 침묵했던 것, 노예소유주들과 떳떳하게 합의할 수 있었고 공공연히 인종주의를 드러냈다는 것, 링컨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미연방이었고, 미연방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제도로서 노예제를 바라봤을 뿐이라는 것이 이 선언의 배경이었다. "내가 사건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나를 통제해 왔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그의 말처럼 남북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위해 링컨은 마지못해 이 선언을 선포해야 했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흑인들이 연방군에 결합하게 됐고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예 해방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군사적 필요에서 왔던 것이고, 이전의 억압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온 해방이 진정으로 흑인을 해방시킬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의 권리선언이 말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해 흑인은 어떻게 느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독립혁명이 진행되던 시절, 코네티컷에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을 꽤 잘한 열정적인 설교자가 있었다. 이 설교자에게는 잭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다. 주인은 계속 설교를 했고 그 노예는 주인의 설교를 들으며 경탄했다. 어느 날 잭은 주인에게 가서 말했다. "주인님, 저는 항상 자유에 대한 주인님의 설교를 보고 자유를 위한 기도를 듣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말씀을 듣는 게 좋습니다. 자유는 좋은 것이니까요. 주인님은 설교도 잘하시고 기도도 잘하십니다. 하지만 주인님 한 가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련한 잭은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인류사회는 노예제와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형태의 노예제는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미국의 노예제로 알려져 있다. 그것이 역사상 다른 노예제와 구별되는 것은 '인종주의'를 새롭게 도입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노예가 된 대상은 오로지 흑인이었다.

다른 지역, 다른 사회의 노예는 주인과 협상도 할 수 있었고, 자유인이 되기도 쉬웠고, 가족과 재산을 누릴 수 있었다면 미국의 노예가 겪은 고초는 동물학대반대운동가들이 항의해야 할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동물에게도 하지 못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흑인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가한 일이었기에 그것은 인권침해가 아닌 것으로 정당화됐다. 흑인과 관련된 법률들의 주요한 특징은 노예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재산 소유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유주는 살해를 포함하여 노예에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권리가 있었다. 노예제가 법률상으로 철폐된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살아남았다. 흑인을 "추하고, 구린내나고, 이성없는"(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존재로 여기는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인종에 대한 편견은 노예제를 폐지한 지역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났다. 또한 인종주의는 흑인만이 아니라 이후 서부로의 진출에서 멕시코인과 아시아인을 착취하고 살해하는데 동원됐다.

노예제와 흑인의 수난을 보면 인권의 보편성과 상호의존성이 새삼 떠오른다. 노예제도 폐지를 부르짖는 사람의 인쇄소는 불태워지고 테러를 당했다. 저명한 폐지론자들의 목에는 노예소유자들이 내건 현상금이 붙었다. 노예제는 흑인 뿐 아니라 백인들의 권리를 위협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백인노예해방론자들은 자신들의 언론의 자유가 노예해방과 관련돼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또한 수많은 백인노동자의 권리 침해는 흑인의 무권리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일부 사람의 인권이 침해될 때 다른 사람들의 인권도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튼 이 노예해방선언을 출발로 해서 이후 70여년 동안 미국 헌법에는 노예해방(수정 제13조),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제14조), 흑인에 대한 투표권 부여(제15조)라는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들 조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들 법들의 효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흑인에 대한 여러 차별적 입법 조치가 있었다.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법이 흑인법으로 변환되어 실질적으로 차별하는 작용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은 자신들을 배신한 이상인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를 위해 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에서 피를 흘렸다. 그것도 흑인은 안 된다는 배척 속에서 이름도 없이 '검둥이'라 불리며 그렇게 했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은 노예제가 미 대륙의 주요한 약한 고리라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하려 했다. 영국군에 가입하는 모든 노예는 해방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남북전쟁에서는 북군이 똑같은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흑인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이상인 인권의 보편성의 정당성과 진정성을 부여잡고 행동했다.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사회경제적 힘 관계를 적극적·실질적으로 고려할 때는 진정한 보편성을 지닌 인권의 실현을 향해 가는 지렛대 역할을 하지만 형식적 보편성에 머물 때는 그 정당성과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특수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63년 노예해방선언(The Enamcipation Proclamation)

1862년 9월 22일을 기하여 미합중국 대통령은 다음 선언을 발표하였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지정된 지역에서의 노예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존할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앞서 말한 1월 1일에 여전히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들과 주의 일부 지역이 있다면 이들 지역을 선포로써 지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주 또는 주민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의 선거에서 선출한 의원들을 성실하게 미 의회에 파견하고 있다면 이를 무효로 할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 주와 주민은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합중국의 권위와 정부에 대한 실제적인 무장 반란시에 미합중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내게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기에 적합하고 필요한 조치로서, 1863년 1월 1일부터 그 이후 100일 동안, 미합중국에 대항해 반란 상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주와 주의 일부 지역을 반란주로 지명하는 바이다.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등 (그 외 반란주 및 지역의 명칭 생략)

앞서 말한 권한의 힘으로 상술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상의 반란주로 지정된 주와 주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육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다.

나는 자유가 선언된 상기의 노예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폭력을 삼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경우에 적합한 임금을 벌기 위하여 충실히 노동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그리고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합중국 군대에 입대하여 요새, 진지 및 기타부서에 배치되고, 모든 종류의 선박에도 배치될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진실로 정의로운 행위로 생각되며, 군사상의 필요로 헌법에 의해 보증된 이 선언에 대하여 나는 인류의 신중한 판단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한다.

증인으로써, 나는 여기에 내 손으로 미합중국의 봉인을 찍는다.

미합중국 독립 87년, 1863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류은숙] <2005년 9월 29일 인권하루소식 제2905호> 

[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국가안보가 인권보장과 항시 충돌하면서 사실상 '정부보안', '기득권세력의 자기보호 카드'로 활용될 때마다 되레 인권운동가들은 '당신들이 안전을 책임질 것이냐'는 추궁을 받아왔다. 진짜 안전은 국민의 존엄성과 인권이 효과적으로 보호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더 많고 더 성능 좋고 더 비싼 무기와 감시체제가 보장하는 안전이야말로 진짜 안전이라는 공격 앞에서 눈총 받아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말만 들어왔고, 국가안보에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무릎 꿇리고 도둑맞아왔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인간안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넘쳐나는 '말잔치'에 또 하나의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라는 반응도 있고, 빈곤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안보'라는 개념으로 다룬다는데 반감이 있기도 하다.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데 그 위협이란 게 정당한 위협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것은 국가안보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와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있다. 가장 많은 비판은 '인간안보'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위협'이라 인식되는 요소가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고, 그런 모호성과 자의성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는데 별 도움 될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견은 있다. 그 의미를 좁게 또는 넓게 정하자는 주장간의 대립이다. 좁게 정하자는 것은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문제란 문제를 다 포괄하다 보면 그 개념이 모호해지고 그 문제의 취사선택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폭력'같은 것에만 개념을 한정하자는 것이다. 반면에 '안전'이란 폭력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곤, 질병, 환경 재해 같은 문제들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넓게 정하자는 주장이다. 어느 쪽이건 '안전'의 개념이 국가에 대한 위협, 영토에 대한 위협, 군사적 차원의 안보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인간안보라는 단어는 더 일찍부터 사용됐다고 하나, 그 개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를 통해서이다. 이 보고서가 정의하고 있는 인간안보의 개념은 앞에서 말한 '넓은' 정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의된 인간안보는 소위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고 둘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인간안보의 본질로서 '보편성, 상호의존성, 사후개입이 아닌 사전 예방, 인민 중심'을 들고 있다. 또한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을 '경제적 안전, 식량안전, 건강 안전, 환경 안전, 개인의 안전, 지역사회의 안전, 정치적 안전'이라는 7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듯 인간안보의 핵심은 안보의 '중심'을 국가로부터 '인민'으로 옮겨서 생각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안보의 관념은 냉전에 의해 크게 형성됐고, 주로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국가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는 그 시민을 보호할 권리와 수단을 독점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이해와 위협의 유형은 확장되고 변화됐다. 국경, 국민, 특정 체제의 가치와 제도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환경오염, 광대한 인구 이동, 에이즈와 같은 전염성 질병 같은 요소들을 인식하게 됐다. 너무나 많은 위험들이 아주 빨리 오늘날의 상호연관된 세계로 퍼진다. 이에 국제사회도 새로운 안보의 틀을 요구하게 됐다. 국가는 여전히 안보의 기본적인 조달자이자만 때때로 그 안보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국민에 대한 위협의 원천이 된다. 이런 이유로 국가 중심의 안보로부터 인민 중심의 인간안보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개인과 집단, 인민의 역할을 중시하게 됐다는 점이다.

인간안보의 주요한 관심은 국가보다는 개인과 집단이다.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요소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던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행위자의 범주가 국가만이 아니라 그보다 확대된다. 인간안보를 성취하는 것은 인민을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낼 인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한 강화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의 강화가 당연히 포함된다.

이처럼 인권과 인간안보는 그 동기나 관심 영역에서나 긴밀히 연결돼 있다. 또한 둘다 빈곤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권과 인간안보 둘 다의 공통된 목표이다. 국제인권의 초기 역사에서 냉전으로 인해 자유권과 사회권은 인위적으로 분리됐다. 그것에 저항하여 인권운동은 모든 인권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파편화된 인권이 총체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구조와 질서를 모색하면서 평화권, 환경권, 발전권이 속속 등장했다. 인간안보의 출현은 이러한 인권의 총체성과 불가분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건 안 하건 간에 또는 수용하건 안 하건 간에, 지배계급 혹은 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의 보안과 인간안보,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인간안보란 빈곤과 절망으로 극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고, 이로 인해 공포와 강압적 안전을 거래하는 일이 없는 사회를 설계하는 것이다. 공포 때문에 정상적 인간 활동을 줄인다거나 공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거나 공포 때문에 총과 무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불행히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후자이다. '안보'란 그런 속임수를 쓸 여지가 다분한 개념이기에 조심, 또 조심하고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거짓말쟁이 소년의 이야기를 어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사용한다. 이를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얘기로 바꿔보자. 두 번이나 속은 마을 사람들은 늑대에 대한 경보를 신뢰할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을 왜 하지 않았을까. 양떼와 소년의 목숨을 잃은 것은 거짓말쟁이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모두의 피해이지 않은가. 더구나 잃은 것은 귀중한 생명이요, 신뢰와 같은 사회의 버팀목이 되는 가치이다. 안보, 대테러를 명분으로 한 가짜 경보에 대피하면서 기본적 인권을 팽개치고 뛰어가 버리면 정작 안전을 위협하는 진짜 경보를 듣지 못할 수 있다.

1994 인간발전보고서-새로운 차원의 인간안보(일부 발췌)

50년 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핵 에너지의 발견에 대해 "모든 것이 변했다."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예견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핵폭발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철저히 파괴했지만, 인류는 세계적인 핵참화를 방지하려는 최초의 결정적인 시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50년이 지났고, 우리에게는 핵안보로부터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사고의 심오한 전환이 요구된다.

안보 개념은 아주 오랫동안 협소하게 해석돼왔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의 영토의 안보로서, 또는 외교 정책에서 국익의 보호로서, 또는 핵 학살의 위협으로부터의 지구적 안보로서. 안보 개념은 인민 보다는 국민국가들에 보다 결부됐다. 열강은 전 세계적 냉전을 치르면서 이념투쟁에 사로잡혔다. 개발도상국들은 최근에야 독립을 얻었고 자신들의 약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또는 인지된 위협에 대해 민감했다. 일상생활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들의 정당한 관심사는 잊혀졌다. 이들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은 질병, 굶주림, 실업, 범죄, 사회갈등, 정치적 억압, 환경적 위험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로 상징됐다. 물러간 냉전의 어두운 그림자와 더불어 이제 우리는 국가간이 아닌 국가 내부의 많은 분쟁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안감은 격변하는 세계적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것이 더 많다. 자신과 가족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까? 직업을 잃지 않을까? 거리와 이웃들이 범죄로부터 안전할까? 억압적인 정부에게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성별 때문에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종교적 또는 인종적 출신 때문에 박해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최종분석하면, 인간 안보란 아이가 죽지 않는 것, 질병이 퍼지지 않는 것, 일자리가 삭감되지 않는 것, 인종(민족) 긴장이 폭력적으로 격발되지 않는 것, 반대자가 침묵당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안보는 무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다.

간단하지만, 인간안보의 사상은 21세기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인간안보의 기본 개념을 고려할 때 4가지 본질적 특징에 초점을 둬야 한다.

□ 인간안보는 보편적 관심사다.
인간안보는 부유한 나라이거나 가난하거나 모든 곳의 사람들과 관련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많은 위협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실업, 마약, 범죄, 오염, 인권침해이다. 문제의 강도는 지역마다 다를 수 있으나 인간안보에 대한 이 모든 위협들은 현실이며 증가하고 있다.

□ 인간안보의 구성요소는 상호의존한다.
세계 어디서건 인민의 안전이 위험에 빠지면 모든 국가들이 연루될 수 있다. 기아, 질병, 오염, 마약 거래, 테러리즘, 민족 분쟁, 사회적 해체는 더 이상 고립된 사건이 아니며 국경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영향은 전 지구를 휩쓴다.

□ 인간안보는 사후 개입이 아닌 사전 예방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 더 쉽다.
이들 위협에 대해 막바지보다는 시작단계에서 대처하는 것이 대가를 덜 치른다. 예를 들어 HIV/AIDS의 직간접 비용은 1980년대에 대략 2천4백억 달러였다. 수십 억 달러라도 기초 건강 보호와 가족계획 교육에 투자됐다면 이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 인간안보는 인민 중심적이다.
인간안보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느냐, 시장과 사회적 기회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느냐, 분쟁 속에 사느냐 평화롭게 사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몇몇 분석가들은 인간안보를 엄격하게 정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와 같은 여타의 근본적인 개념들처럼, 인간안보는 그것의 실재보다는 부재를 통해 더 쉽게 규명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전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명백한 정의가 있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인간안보는 두개의 주요한 측면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안보는 기아, 질병, 억압 등의 만성적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이다. 둘째, 인간안보는 일상생활의 유형-집이건, 직장이건, 지역사회이건- 속에서 갑작스럽고 해로운 붕괴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이러한 위협은 모든 수준의 국민 소득과 발전 수준에서 있을 수 있다.

인간안보의 상실은 느리고 조용한 과정일 수도 있고 갑작스럽고 소란한 긴급상황일 수도 있다. 잘못된 정책 선택으로 인한 인재일 수도 있고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환경 파괴가 자연 재해를 초래하고 인간 비극이 뒤따르는 경우에서처럼 두개의 합성일 수도 있다.

안전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인간안보가 인간발전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발전은 보다 광의의 개념이다. 인간발전은 이전 인간발전보고서에서 인민의 선택의 범주를 확장하는 과정으로서 정의됐다. 인간안보는 인민이 이러한 선택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오늘 갖고 있는 기회가 내일 전적으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안보와 인간발전은 연관된다: 한 쪽에서의 진보가 다른 쪽의 진보의 기회를 강화한다. 하지만 한쪽에서의 실패는 다른 쪽의 실패의 위험을 또한 증가시키며 역사는 그 사례들로 가득차 있다.

실패한 또는 제한된 인간발전은 인간박탈-빈곤, 굶주림, 질병, 인종(민족) 집단 또는 지역간의 지속적인 불균형-을 초래한다. 권력과 경제적 기회에 대한 접근에서 이러한 것들이 적체되면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

 

[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광주항쟁, 부안반핵투쟁에 '광주꼬뮌', '부안꼬뮌'이라는 말을 붙이곤 한다. 꼬뮌이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상징되는 꼬뮌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그해 5월 28일에 최후의 총성이 멎을 때까지 불과 70여 일 동안 프랑스 빠리에 존재했던 민중권력을 말한다. 빠리꼬뮌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부르주아운동을 제쳐놓고 스스로의 권력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이전 권력 그대로에다 등장인물만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빠리꼬뮌은 '권력의 보편화'를 기치로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분야의 공직자를 선출하고 그들을 소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적 권리로 선언했다.

그 권력의 주인공들은 하루 11시간 이상 노동하면서도 극빈 상태에 가까운 빈곤으로 고통 받는 생산자들이었고, 권력의 위기를 타개하려 대외 전쟁을 벌여놓고 나자빠진 권력자들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지켜낸 전사들이었다. 외국의 군대보다 무장한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한 권력자들은 '적'인 프러시아와 협상하여 진압군을 조직했고 무자비하게 꼬뮌을 진압했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꼬뮌은 위험스런 도발에 불과한 사건이었고 잘 진압되었다. 3만여 명을 총살하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4만여 명 이상을 가두거나 추방시키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일을 잘 치러낸 머혼(MacMahon)은 훗날 프랑스의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빠리꼬뮌은 광주꼬뮌으로 부안꼬뮌으로 세계 어디서나 민중의 항쟁이 있는 곳이라면 기억되고 되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빠리꼬뮌은 '헌법'이라든지 '인권선언'이라는 명칭을 가진 문서들을 내놓지 않았다. 권력자들이 안팎으로 꼬뮌을 옥죄어오는 엄중한 상황이었기에 체계적으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시민혁명의 인권선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행동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빠리 민중은 대대적인 환호 속에서 사형집행수단으로 유명한 '길로틴(단두대)'을 불태웠다. 빠리꼬뮌 지지자들을 총살하는 정부 정책에 맞서 "눈에는 눈"이라는 정책 성명이 발표됐지만 실제로 빠리 노동자들은 그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꼬뮌의 생명존중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노동민중에게 절실한 조치들이 속속 취해졌다. 노동에 대한 사적착취라는 이유로 전당포가 폐쇄됐고, 프러시아군이 빠리를 포위한 기간에 발생한 채무의 회수를 중지했고, 임대료를 체불한 세입자에 대한 강제퇴거를 금지했다. 빵집 노동자의 야간작업을 금지했고, 경찰이 지명한 사람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발부했던 노동자 등록카드를 폐지했다. 소유주들이 문을 닫은 작업장이나 공장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에 넘겨주었다. 꼬뮌은 또한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여 빠리에 세워졌던 기념물을 맹목적 애국주의와 민족적 증오를 선동하는 상징이라 하여 끌어내렸다. "꼬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라는 이유로 외국인이 꼬뮌의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정식으로 만들어진 인권선언은 아니지만, 꼬뮌이 채택한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1871년 4월 19일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을 중심으로 그 인권보장의 구상을 살펴보자.

선언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에 덧붙여 "그리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완전한 행사의 보장"을 말한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비롯하여 근대인권선언에서 선언된 '모든 인간'은 현실속의 구체적 인간간의 관계를 결코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토지나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노동력밖에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똑같이 대하려 한 구상이었다. 여러 자유와 권리를 내세웠지만 그 중핵은 사적소유권이었기에 사적소유권을 누릴 수 있는 '일부 사람'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듯이 가장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민중의 정치참가가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민중의 의사표현을 억압하고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을 사수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적소유라는 인권은 자기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는 개인의 권리이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한 가운데 사회와도 무관하게 자신이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만의 이용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전체사회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자본가의 재산 소유권은 노동자에게 미치는 모든 파괴적인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보호돼야만 한다는 자유의 원칙이 옹호되었다.

꼬뮌은 구체적인 인간인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하며 생산수단의 사유와 그것에 봉사하는 정치원리를 부정하고 나섰다. 이는 "권력과 소유권을 보편화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수립"을 꼬뮌의 과제로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예속"을 "조국에는 불행과 파탄"을 가져온 "군사주의, 관료주의, 착취, 투기, 독점, 특권의 종말"을 말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꼬뮌에서 말하는 사회권의 내용은 사회복지에 대한 권리 등 사후적 조치의 것이 아니라 "교육·생산·교환·금융을 진작시키고 보급하는데 적합한 제도의 설립"이라는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통해 도모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꼬뮌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중핵으로 했던 근대의 인권관과는 다르다. 자유의 이름 하에 자유로부터 가장 단절됐던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개인적 자유, 양심의 자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 "꼬뮌 업무에 대한 시민들의 항구적인 개입"을 위한 "집회와 선전의 권리", "꼬뮌의 자치를 위한 행동의 자유"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은 민중 자신에 의한 정치였다. 앞서 말한 표현, 집회, 선전의 자유는 민중에 의한 정치의 일상적인 통제를 가능케 한다. 또한 "책임 있는 모든 방면·서열의 행정관 및 사법관의 선거나 경쟁을 통한 선출,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리"에서 드러나듯 민중은 모든 공무원을 선임하고 언제든지 통제·파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한 공무원은 출세의 목표가 도구가 아니기에 그 임금을 평균 노동자 임금을 넘지 못하게 했다. 권력기구의 핵심인 군대와 경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꼬뮌은 상비군이 인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험하다고 보고 그것을 폐지했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지휘자를 선출하고 국민방위군과 도시 방위대를 조직"하는 것이 민중의 권리였다.

'꼬뮌의 유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문서는 체계적이지 않지만 근대인권의 그림자 속에서 싹틔운 민중의 인권구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마찬가지의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계속 단련시켜야 할 과제와 목표를 가득 안고 있는 것이다.

빠리꼬뮌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1871)

아직도 빠리에 포위공격과 포격의 공포를 주고, 프랑스인의 피를 흐르게 하고, 우리의 형제들·여성들·아이들을 포탄과 총탄 속에서 으깨어져 사라지게 하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분쟁 속에서, 여론은 나뉘어져서는 안되며, 국가적 의식도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빠리와 국가 전체는 완성되고 있는 혁명의 본질과 대의명분과 목적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 고통과 슬픔, 불행 우리는 이것들의 희생자인데 의 책임을, 프랑스를 배신하고 빠리를 외국의 손에 넘긴 후에, 공화국과 자유의 파탄 속에 그들의 배신과 그들의 죄에 대한 이중의 증거를 숨기려고 맹목적으로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완고하게 수도의 파멸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꼬뮌은 빠리 인민의 열망과 소원을 명시하고 규정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아직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베르사이유를 둘러싼 정치가들에 의해 왜곡된 3월 18일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밝힐 의무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빠리는 프랑스 전체를 위해 행동을 하며 고통을 겪는다. 빠리는 전투와 희생을 통해, 지적·도덕적·행정적·경제적인 쇄신과 영광과 번영을 준비한다.

빠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인민의 권리 그리고 사회의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공화국에 대한 재인식과 공화국의 강화,
프랑스 전역에 걸쳐있는 각 꼬뮌에게 그 권리 전체를 보장해주고,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완전한 행사를 보장해주는 꼬뮌의 절대적인 자치,
꼬뮌의 자치는 단지 계약을 준수하는 다른 꼬뮌이 갖는 동등한 자치권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이들 꼬뮌의 결합은 프랑스인의 단일한 통일체를 보증해야 한다.

꼬뮌의 고유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꼬뮌의 예산 및 수입과 지출의 표결; 세금의 결정과 부과; 지역 서비스의 지도; 사법과 내부 치안, 그리고 교육의 조직; 꼬뮌 소유의 재산의 관리·운영.
책임 있는 모든 방면·서열의 행정관 및 사법관의 선거나 경쟁을 통한 선출.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리.
개인적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
자신의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자신의 이해의 자유로운 옹호를 통한 꼬뮌 업무에 대한 시민들의 항구적인 개입; 이러한 권리를 꼬뮌은 보장해야 하며, 꼬뮌의 유일한 책임은 집회와 선전의 권리를 자유롭고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휘자를 선출하고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민방위군과 도시 방위대의 조직.

빠리는 연합한 꼬뮌들의 대표인 위대한 중앙행정부에서 위와 같은 동일한 원칙들이 실현되고 실천된다는 조건 하에서, 지역의 보장을 명목으로 한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꼬뮌의 자치를 위하여 행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빠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빠리 민중이 요구한 행정적·경제적 개혁의 수행; 교육·생산·교환·금융을 진작시키고 보급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설립; 그리고 당대의 필요성과 이해 당사자들의 소망을 충족시키면서, 권력과 소유권을 보편화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수립.

우리의 적들이 빠리의 자유 의사 혹은 빠리의 패권을 다른 지역에 강제하려 한다고 빠리를 비난할 때, 혹은 빠리가 여타의 꼬뮌의 주권과 독립을 해치는 진정한 음해 기도가 될 수 있는 독재권력을 요구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은 서로를 속이거나 혹은 조국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적들이 빠리에 대해 혁명이 수립한 통일된 프랑스(Unit fran aise)를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은 서로를 속이거나 혹은 조국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성(Unit ),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제국과 군주제와 의회제도의 남용을 강제했던 그러한 통일성은, 단지 전제적이고 어리석고 제멋대로이거나 번거로운 중앙집권화에 불과했다.
빠리가 원하는 정치적인 통일성은 만인의 복지와 자유와 안전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도모하는 모든 지역적 창의성의 자발적인 결합이며, 모든 개인적 힘(에너지)의 자연발생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이다.

3월 18일, 민중의 발의로 시작되었던 꼬뮌 혁명은 실험적이고 긍정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열고 있다.
꼬뮌 혁명은 정부를 지지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돌아가던 낡은 세계의 종말이며, 군사주의와 관료주의, 착취, 투기, 독점, 특권의 종말이다. 이러한 것들에 프롤레타리아는 노예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조국은 불행과 파탄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거짓말과 비방으로 기만당해온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심하기를!

빠리와 베르사이유 사이의 투쟁은 기만적인 타협으로 마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국민방위군이 불굴의 투지로 가열차게 추구하는 승리는 소신과 권리 속에 남을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 호소한다.
무장한 빠리가 그 용맹만큼이나 침착함을 지녔다는 점을, 그리고 빠리가 열정만큼이나 저력을 가지고 질서를 옹호한다는 점을, 빠리가 영웅의식을 지닌 만큼이나 합당하게 헌신한다는 점을, 빠리는 단지 만인의 영광과 자유를 위한 충성심에서만 무장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프랑스가 이 피의 전투를 그치게 되기를!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존엄하게 표명함으로써 베르사이유를 무장해제하는 것은 바로 프랑스의 몫이다.
우리의 정복과 쟁취로부터 혜택을 입도록 되어 있는 프랑스가 우리와 연대할 것임을 선언하기를! 그리고 단지 꼬뮌의 소신이 승리하고 빠리가 몰락함으로써만 끝이 날 수 있는 이 전투 속에서 우리의 동지가 되기를!

빠리의 시민인 우리는 역사를 환하게 비춘 모든 혁명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풍요로운 근대적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투쟁하고 승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1871년 4월 19일 빠리꼬뮌

 

 

[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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