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1. 7. 8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모욕을 거부하는 사회(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엄마는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다르다고, 괜히 대학 보내서 딸 버린 것 같다는 원망을 하곤 해.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된 후로 엄마 딸이 아닌 딴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다른 사람이 돼버렸어. 어릴 때의 나는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모범생이었어. 규칙으로 정해진 건 도무지 어길 줄 모르고, 시키지 않아도 미리 찾아서 할 일을 하고, 어른들에게 깍듯하여 동네방네 칭찬만 먹고 자라는 그런 아이였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말투도 거세지고, 법도 무서워하지 않고, 경찰서에도 들락거리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위아래 안 가리고 면전에서 따지는 그런 인간이 돼버렸으니 엄마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내 모습에 놀라곤 해. 그런데 그건 엄마가 추측하는 것처럼 괜히 대학 보내서 몹쓸(?)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니야. 날 180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건 모욕과 폭력이었어. 그리고 그것에 맞서서 나를 지키려다 보니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내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첫 경험은 매 맞는 일이었어. 난 자라면서 엄마 아빠한테 맞아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집단으로 맞는 일이 흔했어. 맞는 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나만 맞는 게 아니었기에 참아 넘길 수 있었어. 반 전체가 맞거나 지각한 사람 모두 맞거나 할 때는 별로 창피할 것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어. 성적표가 나오는 날처럼 집단으로 맞을 것이 예상되는 날에는 교복치마 속에 반바지를 껴입고 가곤 했어. 심한 경우엔 종아리를 때리지만 그건 자국이 남으니까 주로 엉덩이를 때렸거든. 그렇게 맞다보니 주간행사처럼 느껴졌어. 그렇게 면역되어버려서였는지 전원이 아니라 몇몇 아이만 찍혀서 따로 매를 맞을 때도 무덤덤하게 지켜볼 수 있었어. 내가 따로 찍혀서 맞는 게 아닌 이상 별 문제로 보이지 않았어. 따로 찍혀서 맞는 아이에 대해선 그 애가 맞을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나만 찍혀서 매를 맞게 됐어. 나는 공상을 무지 즐겨 해서 수업 시간에 집중이란 걸 잘 못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강연회 같은 데 잘 안가. 가봤자 딴 생각만 하니까 그냥 발표문만 챙겨 읽고는 해. 수업시간에 머릿속에서 온갖 주인공들을 데리고 얘기를 꾸미고 있다 보면 너무 빨리 종이 울리곤 했어. 그런 나에 대해 아는 선생님들은 “숙아,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라고 가끔 내 공상 속을 비집고 들어오곤 하셨어. 그럼 나는 머리를 한 번 털고 집중하려고 노력하곤 했지. 그런데 그날은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선생님이었어. 내가 싫어하는 수학 과목이었거든. 성적이라는 업적으로 등급이 나눠지는 학교 사회에서 그 시간은 내가 존중받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수학 선생은 먼저 백묵을 내 머리에 집어던졌고, 다짜고짜 의자 밑으로 끌어내려선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어. 내 머리는 산발이 됐고 머릿속은 뒤집힌 서랍이 돼버렸어.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꿇어 앉아있어야 했어. 아픈 것 보다는 굴욕감이 날 힘들게 했어. ‘무슨 생각하고 있니? 집중하면 안 되겠니?’라고 말 한마디 먼저 건네줄 수는 없었던 거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도살장에 끌고 가는 동물처럼 날 패대기쳐야만 했을까? 종은 도대체 언제 울리는 거야? 학교 안에 숨을 곳이 있을까? 이참에 아예 학교를 관둘까? 나 홀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
처참하게 얻어터지고 있는 나를 다른 친구들이 멀뚱멀뚱 쳐다봤을 때 야속하고 괘씸하게 느껴졌어. 또 영화 속 광경이 떠올랐어. 감옥이 있고 죄수들이 있는 장면, 한 죄수가 간수에게 두들겨 맞는데 수치심만 집어 삼키며 지켜봐야 하는 동료 죄수들이 나오는 그런 영화 장면이었어. 그 장면 속에 딴 친구가 그렇게 맞고 있을 때 무덤덤하게 바라봤을 내 눈동자가 겹쳐졌어. 그 때의 수치감은 아주 오래 갔어. 집에 와서 머리를 박박 감아도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어.
이게 중1 때의 경험이었다면, 그런 식의 경험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고3 때였었어. 내 담임은 고3 담임만 18년을 한 입시전문 베테랑을 자처하는 분이셨지.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에 단 한 명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게 그분의 원칙이었어. 나도 처음에는 그 원칙에 따랐고, 그걸 따르는 동안에는 난 선생님의 사랑받는 제자였고, 교실의 규율을 잡아주는 그 선생님은 내게 최고의 선생님이었어. 그런데 얼마 못가 지쳤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70여명이 가득 차 있는 교실에서 하루 종일 환기는 드물었고, 온갖 땀 냄새와 반찬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보내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선생님께 말했지.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으니 정규수업이 끝나면 귀가해서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때 선생님은 이전까지 날 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변했어. 한 명이 빠져 나가면 전체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그런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도 난 그러고 싶다고 했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댔어. 그러자 선생님은 “네 종교가 OO지? 네 종교에서 네 하나님은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디?”라고 했어. 난 뭔가가 내속에서 허물어져 내리는 걸 느꼈어.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그때 나에게 신앙은 나의 전부와 같았거든. 야자 안한다고 해서 내 하나님을, 내 신앙을 뭐라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 그냥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와 저녁 내내 울며 시장바닥을 쏘다녔어. 그 분노와 모멸감을 식히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리고 결심했지. 이대로 굴복할 순 없다고. 정규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4시경, 그리고 보충수업 2~3시간이 더 있고 또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학습. 나의 의무사항은 정규수업시간까지라고 여겨졌어. 정규수업이 끝나면 담임이 종례를 하러 교실에 들어오는데, 난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왔어. 가끔 종례를 하러 오는 담임과 복도 한복판에서 마주쳐 서로 눈싸움을 했지만 그냥 버텼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학년 주임이 날 불러서 담임 속 썩이지 말라는 경고를 했고, 그런 신경전이 고3말까지 이어졌어.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고, 나는 내 결심대로 계속 행동했어. 왜 불러서 패지 않고 가만 놔둘까 의아했지만 의문은 막바지에 밝혀졌어. 대입이 끝나고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도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지. 다른 아이들이 다 원서를 써서 나가고 교무실이 텅 비도록 담임은 날 쳐다보지 않았어. 내 원서를 써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나서서 거들어 주셨기에 간신히 원서를 작성할 수 있었지.
나의 신앙을 들먹이며 나를 모욕했던 사람 덕분에 난 자유가 뭔지 알게 됐어. 정규 수업만 마치고 가방을 메고 나온 학교 밖에는 찬란한 태양과 맑은 공기가 있었어. 그걸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느끼고 들여 마시며 학교건물을 뒤돌아볼 때 나는 가슴 벅찬 뭔가를 느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씻고 빨래와 청소도 하고 저녁노을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다시 공부를 하는 게 정말 좋았어. 난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아니라 정말 자율학습을 하는 거였으니까.
난 그때 받았던 모욕에 대해 대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몸으로 옮겼어. 만년 모범생이었던 내가 저지른 최초의 반항이자 대형 사고였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만큼 내 자신이 맘에 들었던 때가 없어. 내가 모욕감을 접고 원래 담임이 정했던 테두리로 돌아가 얌전히 굴었다면 난 다시 사랑받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나를 나로 만들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난 그때 그렇게 대들고 버텼던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학창 시절의 그런 경험이 어린 날의 풋내나는 행동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것은 그런 나를 지지해주는 비슷한 목소리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야.
“폭력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떤 특정한 행위에 대한 권력의 승인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노예가 노예주인의 허락을 받아서만 할 수 있는 일, 가령 일요일에 교회에 가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하거나 한가로운 시간에 옷을 수선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야. 유명인의 말뿐만 아니라 내 눈앞에서 실행에 나선 사람도 있었어.
“저희 바람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 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10여년 후에 나처럼 강제 자율학습에 대해 따지고 나온 고등학생이 한 말이야. 그 학생은 강제 야자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겠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지. 난 그때 정말 반가웠어. 자기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조건에 맞서 싸우는 동료를 만난 것이어서 말이야.
요즘 책에서 모욕과 품위에 대한 얘길 읽었어. 사람은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 된다고 했어. 그래야 자신의 소중함과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니까. 여기서 명예란 무슨 등급을 매겨서 달라지는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지는 존중받을 자격을 말해.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순간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 이후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런 변화의 가능성만으로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어. 품위 있는 사회란 구성원들의 변화의 힘을 눈여겨 볼 줄 아는 사회야. 그런 눈을 갖고 있기에 그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한 모욕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사회야. 따라서 품위 있는 사회란 사람을 모욕하는 제도를 허용할 수가 없어. 가령 어리다는 이유로 때려도 된다는 것이 합법화돼있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어린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고, 경쟁적으로 등급을 매겨서 사람대접을 달리하는 사회나 일하는 사람을 헐값으로 대우하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야.
학교에서 그렇게 모욕에 맞선 이후 엄마 딸은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겪고 모욕을 참아낼 것을 강요받는 일을 많이 보게 됐어. 그럴 때 멀뚱멀뚱 쳐다보지 않고 내가 모욕당한 것처럼 울컥하다보니 엄마 딸이 많이 변하게 된 것 같아. 모욕하고 창피 주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제 자신의 값어치를 ‘싸고 형편없는’ 것으로 느끼게 유도하는 일만큼 나쁜 일은 없는 것 같아.
미국의 어떤 작가는 직접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해서 경험한 바를 책으로 썼어. 가난한 사람들이 집세를 더 많이 지출할 수밖에 없는 생활조건이나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하면서도 얼마나 박한 대우를 받는 지 등에 대해 쓴 거야. 그 사람의 고발 중에서 내게 가장 슬펐던 부분은 “자신이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하면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이 실제로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거였어.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창피하고 불쾌한 구직과정,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의 엄한 질책 등 모욕을 계속 주다 보면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낮게 여기게 되고 그것이 저임금을 유지하는 일부요인이라는 거였어.
남 얘기 같지가 않더라고. 가령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제때 밥 먹고 제때 잠자겠다는 요구를 내세웠다가 회사가 동원한 용역들에게 매 맞고 경찰에 잡혀간 노동자들이 있어. “아침에는 아침밥, 점심에는 점심밥, 밤에는 잠을 자자!”가 그들의 요구였어. 밥 때와 잠자는 때를 난폭하게 바꾸는 근무시간 때문에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40~50대 나이의 노동자들에게 정신교육이라며 오리걸음 걷기 등의 기합을 준 회사도 있었어. 베트남에서 온 건설 노동자들 열 명이 구속되기도 했어. 야간 근무조로 12시간을 일하고 아침 7시에 밥을 먹는데 30미터 높이의 작업장에서 밥 먹으려고 내려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아냐. 그런데 5분이라도 일찍 내려오면 임금에서 1시간 임금을 제하는 등 야박하게 굴기가 다반사였대.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예나 기계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출근을 거부했는데 그걸 업무방해죄로 잡아간 거야. 또 여기저기 대학에서 청소일을 하는 분들이 노동조건을 놓고 다투는데 최저임금을 달라거나 밥을 식당에서 먹게 해주고 휴게실을 만들어달라는 등의 최소의 최소에 해당하는 요구사항들이 많아. ‘그까짓 거도 못해 주냐?’고 생각할 일들이 노동자에게 금지되는 것은 그렇게 계속 모욕을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싸구려로 여기게 만들고 그걸 이용해 계속 헐값 대우를 하려는 음모라는 생각이 들어.
수 년 또는 수십 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대량으로 해고돼서 장기간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고, 헐값의 대우와 소모품 폐기 처분하듯 하는 해고에 맞서 6년 이상 싸운 사람들도 있었어. 그럴 때 구경꾼인 사람들이 쉽게 던지는 말은 ‘원래 먹고 사는 게 그렇게 냉혹한 거다. 회사가 어려워서 자른다는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 혹은 ‘최저생계비도 못되는 그런 일자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버티냐? 그냥 딴 데 가면 그만이지’라는 식이야. 물론 당장의 생계 문제도 걸려있고 그건 중요한 문제야.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들이 버티고 싸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에 모욕을 입고 물러설 수는 없다는 거야. 나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고 나는 싸구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싸우는 거야. 그런 싸움으로 인해서 ‘차마 말조차 못하고’ 문제로부터 ‘떠나가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인간대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모두에게 던지고 있는 거야.
웃기는 얘기지만 난 달걀 후라이를 할 때 달걀을 깨는 순간을 무서워해. 그 순간에 기름이 튀어 오르는 게 무서워서 달걀을 놓쳐버리곤 하거든. 그래서 달걀을 잘못 깨서 후라이팬 밖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늘 걱정돼. 맛있는 요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달걀 후라이 하는 건데 적어도 잘못 깨지는 않겠다는 소심함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제도적인 모욕을 없앤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아주 소심한 일이야. 당장 눈앞의 고통에 빨간약을 바르고 싸매는 것이 급해서 해야 할 일인 것이지, 장래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유별난 개인이 남을 모욕하고 학대할 수도 있지만, 아예 법과 제도로 모욕하게끔 만들어 놓는 일이 있어. 가령 한 남성이 여성을 무시하고 깔볼 수도 있지만 아예 법으로 만들어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또 성적이 뒤처진 학생을 우습게 보는 것이 개별적이라면,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등록금을 남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학교 규율로 만들어놓는 것은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거야.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반말을 하는 어른도 있지만, 학교에서 학생은 맞아도 되고 머리카락을 잘려도 된다는 관행을 놔두는 것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그래서 요즘 학생인권조례 만든다고 엄마아빠에게 서명해달라고 했던 건 그 반대로 ‘사람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만들자는 거였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많은 선생님이나 언론들이 교실붕괴를 얘기해. 물론 말썽장이도 많고 수십 명이 있는 교실에서 질서를 잡고 교육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렇지만 그 많은 어려움이 학생이라 불리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모욕할 이유는 되지 못해. 학생인권조례는 제도적으로 창피와 모욕을 주는 것만은 피하자는 아주 소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적극적이라면 교실안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학비 등 모든 비용을 없애자, 입시교육이 아니라 취향별 교육을 받게 하자 등 요구할 수 있는 게 많아. 그런데 지금 요구하는 건 최소한 대놓고 모욕하지는 말자는 거야.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자율성에는 바보같이 행동할 권리, 현명하지 못하게 행동할 권리도 있어. 자율성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한이 있어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질 권리가 포함돼. ‘잘못되면 어떡해?’가 아니라 ‘잘못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인정하는 게 최소한의 출발점인 것이지.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인정하자는 것, 노조의 단체행동을 인정하자는 것은 충분히 살만한 임금, 일을 안 해도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보장의 권리, 뭐 그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모욕하지 않는 최소한의 규정인 거고, 성폭력을 좌시하지 말자는 건 적극적 성 평등은 못돼도 최소한 모욕하지는 말자는 소극적인 거야.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일을 허용해 두면 그걸 당하는 사람들이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호소하기가 더 힘들어져. 당하는 쪽에선 오히려 당할만하다는 혐의를 쓰게 되고 모욕을 주는 쪽에선 그게 선이라고 의기양양할 테니 말이야. 모욕감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에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조치야. 사람사이에 서로 공감을 하고 사랑을 하는 일을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제도적인 노골적인 모욕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는 있어.
아주 옛날에 미국사회에서 이주민이고 허드렛일을 하고 남과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죄 없이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미움에 찬 저주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어. 나는 모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꿈이 이런 거라고 생각해. 모욕주고 모욕받는 일을 벗어나서 이런 공감과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꿈 말이야.
“아들아 … 행복한 유희 속에서만 네 전부를 다 소진하지는 말거라. … 박해받고 희생당하는 이들을 도와라.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더 좋은 친구들일 테니까. … 인생이라는 이 투쟁 속에서 너는 더욱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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