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1. 7. 8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모욕을 거부하는 사회(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엄마는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다르다고, 괜히 대학 보내서 딸 버린 것 같다는 원망을 하곤 해.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된 후로 엄마 딸이 아닌 딴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다른 사람이 돼버렸어. 어릴 때의 나는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모범생이었어. 규칙으로 정해진 건 도무지 어길 줄 모르고, 시키지 않아도 미리 찾아서 할 일을 하고, 어른들에게 깍듯하여 동네방네 칭찬만 먹고 자라는 그런 아이였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말투도 거세지고, 법도 무서워하지 않고, 경찰서에도 들락거리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위아래 안 가리고 면전에서 따지는 그런 인간이 돼버렸으니 엄마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내 모습에 놀라곤 해. 그런데 그건 엄마가 추측하는 것처럼 괜히 대학 보내서 몹쓸(?)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니야. 날 180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건 모욕과 폭력이었어. 그리고 그것에 맞서서 나를 지키려다 보니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내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첫 경험은 매 맞는 일이었어. 난 자라면서 엄마 아빠한테 맞아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집단으로 맞는 일이 흔했어. 맞는 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나만 맞는 게 아니었기에 참아 넘길 수 있었어. 반 전체가 맞거나 지각한 사람 모두 맞거나 할 때는 별로 창피할 것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어. 성적표가 나오는 날처럼 집단으로 맞을 것이 예상되는 날에는 교복치마 속에 반바지를 껴입고 가곤 했어. 심한 경우엔 종아리를 때리지만 그건 자국이 남으니까 주로 엉덩이를 때렸거든. 그렇게 맞다보니 주간행사처럼 느껴졌어. 그렇게 면역되어버려서였는지 전원이 아니라 몇몇 아이만 찍혀서 따로 매를 맞을 때도 무덤덤하게 지켜볼 수 있었어. 내가 따로 찍혀서 맞는 게 아닌 이상 별 문제로 보이지 않았어. 따로 찍혀서 맞는 아이에 대해선 그 애가 맞을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나만 찍혀서 매를 맞게 됐어. 나는 공상을 무지 즐겨 해서 수업 시간에 집중이란 걸 잘 못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강연회 같은 데 잘 안가. 가봤자 딴 생각만 하니까 그냥 발표문만 챙겨 읽고는 해. 수업시간에 머릿속에서 온갖 주인공들을 데리고 얘기를 꾸미고 있다 보면 너무 빨리 종이 울리곤 했어. 그런 나에 대해 아는 선생님들은 “숙아,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라고 가끔 내 공상 속을 비집고 들어오곤 하셨어. 그럼 나는 머리를 한 번 털고 집중하려고 노력하곤 했지. 그런데 그날은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선생님이었어. 내가 싫어하는 수학 과목이었거든. 성적이라는 업적으로 등급이 나눠지는 학교 사회에서 그 시간은 내가 존중받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수학 선생은 먼저 백묵을 내 머리에 집어던졌고, 다짜고짜 의자 밑으로 끌어내려선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어. 내 머리는 산발이 됐고 머릿속은 뒤집힌 서랍이 돼버렸어.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꿇어 앉아있어야 했어. 아픈 것 보다는 굴욕감이 날 힘들게 했어. ‘무슨 생각하고 있니? 집중하면 안 되겠니?’라고 말 한마디 먼저 건네줄 수는 없었던 거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도살장에 끌고 가는 동물처럼 날 패대기쳐야만 했을까? 종은 도대체 언제 울리는 거야? 학교 안에 숨을 곳이 있을까? 이참에 아예 학교를 관둘까? 나 홀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


처참하게 얻어터지고 있는 나를 다른 친구들이 멀뚱멀뚱 쳐다봤을 때 야속하고 괘씸하게 느껴졌어. 또 영화 속 광경이 떠올랐어. 감옥이 있고 죄수들이 있는 장면, 한 죄수가 간수에게 두들겨 맞는데 수치심만 집어 삼키며 지켜봐야 하는 동료 죄수들이 나오는 그런 영화 장면이었어. 그 장면 속에 딴 친구가 그렇게 맞고 있을 때 무덤덤하게 바라봤을 내 눈동자가 겹쳐졌어. 그 때의 수치감은 아주 오래 갔어. 집에 와서 머리를 박박 감아도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어.


이게 중1 때의 경험이었다면, 그런 식의 경험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고3 때였었어. 내 담임은 고3 담임만 18년을 한 입시전문 베테랑을 자처하는 분이셨지.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에 단 한 명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게 그분의 원칙이었어. 나도 처음에는 그 원칙에 따랐고, 그걸 따르는 동안에는 난 선생님의 사랑받는 제자였고, 교실의 규율을 잡아주는 그 선생님은 내게 최고의 선생님이었어. 그런데 얼마 못가 지쳤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70여명이 가득 차 있는 교실에서 하루 종일 환기는 드물었고, 온갖 땀 냄새와 반찬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보내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선생님께 말했지.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으니 정규수업이 끝나면 귀가해서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때 선생님은 이전까지 날 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변했어. 한 명이 빠져 나가면 전체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그런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도 난 그러고 싶다고 했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댔어. 그러자 선생님은 “네 종교가 OO지? 네 종교에서 네 하나님은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디?”라고 했어. 난 뭔가가 내속에서 허물어져 내리는 걸 느꼈어.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그때 나에게 신앙은 나의 전부와 같았거든. 야자 안한다고 해서 내 하나님을, 내 신앙을 뭐라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 그냥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와 저녁 내내 울며 시장바닥을 쏘다녔어. 그 분노와 모멸감을 식히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리고 결심했지. 이대로 굴복할 순 없다고. 정규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4시경, 그리고 보충수업 2~3시간이 더 있고 또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학습. 나의 의무사항은 정규수업시간까지라고 여겨졌어. 정규수업이 끝나면 담임이 종례를 하러 교실에 들어오는데, 난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왔어. 가끔 종례를 하러 오는 담임과 복도 한복판에서 마주쳐 서로 눈싸움을 했지만 그냥 버텼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학년 주임이 날 불러서 담임 속 썩이지 말라는 경고를 했고, 그런 신경전이 고3말까지 이어졌어.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고, 나는 내 결심대로 계속 행동했어. 왜 불러서 패지 않고 가만 놔둘까 의아했지만 의문은 막바지에 밝혀졌어. 대입이 끝나고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도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지. 다른 아이들이 다 원서를 써서 나가고 교무실이 텅 비도록 담임은 날 쳐다보지 않았어. 내 원서를 써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나서서 거들어 주셨기에 간신히 원서를 작성할 수 있었지.


나의 신앙을 들먹이며 나를 모욕했던 사람 덕분에 난 자유가 뭔지 알게 됐어. 정규 수업만 마치고 가방을 메고 나온 학교 밖에는 찬란한 태양과 맑은 공기가 있었어. 그걸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느끼고 들여 마시며 학교건물을 뒤돌아볼 때 나는 가슴 벅찬 뭔가를 느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씻고 빨래와 청소도 하고 저녁노을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다시 공부를 하는 게 정말 좋았어. 난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아니라 정말 자율학습을 하는 거였으니까.


난 그때 받았던 모욕에 대해 대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몸으로 옮겼어. 만년 모범생이었던 내가 저지른 최초의 반항이자 대형 사고였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만큼 내 자신이 맘에 들었던 때가 없어. 내가 모욕감을 접고 원래 담임이 정했던 테두리로 돌아가 얌전히 굴었다면 난 다시 사랑받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나를 나로 만들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난 그때 그렇게 대들고 버텼던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학창 시절의 그런 경험이 어린 날의 풋내나는 행동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것은 그런 나를 지지해주는 비슷한 목소리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야.


“폭력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떤 특정한 행위에 대한 권력의 승인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노예가 노예주인의 허락을 받아서만 할 수 있는 일, 가령 일요일에 교회에 가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하거나 한가로운 시간에 옷을 수선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야. 유명인의 말뿐만 아니라 내 눈앞에서 실행에 나선 사람도 있었어.


“저희 바람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 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10여년 후에 나처럼 강제 자율학습에 대해 따지고 나온 고등학생이 한 말이야. 그 학생은 강제 야자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겠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지. 난 그때 정말 반가웠어. 자기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조건에 맞서 싸우는 동료를 만난 것이어서 말이야.


요즘 책에서 모욕과 품위에 대한 얘길 읽었어. 사람은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 된다고 했어. 그래야 자신의 소중함과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니까. 여기서 명예란 무슨 등급을 매겨서 달라지는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지는 존중받을 자격을 말해.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순간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 이후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런 변화의 가능성만으로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어. 품위 있는 사회란 구성원들의 변화의 힘을 눈여겨 볼 줄 아는 사회야. 그런 눈을 갖고 있기에 그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한 모욕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사회야. 따라서 품위 있는 사회란 사람을 모욕하는 제도를 허용할 수가 없어. 가령 어리다는 이유로 때려도 된다는 것이 합법화돼있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어린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고, 경쟁적으로 등급을 매겨서 사람대접을 달리하는 사회나 일하는 사람을 헐값으로 대우하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야.


학교에서 그렇게 모욕에 맞선 이후 엄마 딸은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겪고 모욕을 참아낼 것을 강요받는 일을 많이 보게 됐어. 그럴 때 멀뚱멀뚱 쳐다보지 않고 내가 모욕당한 것처럼 울컥하다보니 엄마 딸이 많이 변하게 된 것 같아. 모욕하고 창피 주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제 자신의 값어치를 ‘싸고 형편없는’ 것으로 느끼게 유도하는 일만큼 나쁜 일은 없는 것 같아.


미국의 어떤 작가는 직접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해서 경험한 바를 책으로 썼어. 가난한 사람들이 집세를 더 많이 지출할 수밖에 없는 생활조건이나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하면서도 얼마나 박한 대우를 받는 지 등에 대해 쓴 거야. 그 사람의 고발 중에서 내게 가장 슬펐던 부분은 “자신이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하면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이 실제로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거였어.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창피하고 불쾌한 구직과정,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의 엄한 질책 등 모욕을 계속 주다 보면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낮게 여기게 되고 그것이 저임금을 유지하는 일부요인이라는 거였어.


남 얘기 같지가 않더라고. 가령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제때 밥 먹고 제때 잠자겠다는 요구를 내세웠다가 회사가 동원한 용역들에게 매 맞고 경찰에 잡혀간 노동자들이 있어. “아침에는 아침밥, 점심에는 점심밥, 밤에는 잠을 자자!”가 그들의 요구였어. 밥 때와 잠자는 때를 난폭하게 바꾸는 근무시간 때문에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40~50대 나이의 노동자들에게 정신교육이라며 오리걸음 걷기 등의 기합을 준 회사도 있었어. 베트남에서 온 건설 노동자들 열 명이 구속되기도 했어. 야간 근무조로 12시간을 일하고 아침 7시에 밥을 먹는데 30미터 높이의 작업장에서 밥 먹으려고 내려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아냐. 그런데 5분이라도 일찍 내려오면 임금에서 1시간 임금을 제하는 등 야박하게 굴기가 다반사였대.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예나 기계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출근을 거부했는데 그걸 업무방해죄로 잡아간 거야. 또 여기저기 대학에서 청소일을 하는 분들이 노동조건을 놓고 다투는데 최저임금을 달라거나 밥을 식당에서 먹게 해주고 휴게실을 만들어달라는 등의 최소의 최소에 해당하는 요구사항들이 많아. ‘그까짓 거도 못해 주냐?’고 생각할 일들이 노동자에게 금지되는 것은 그렇게 계속 모욕을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싸구려로 여기게 만들고 그걸 이용해 계속 헐값 대우를 하려는 음모라는 생각이 들어.


수 년 또는 수십 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대량으로 해고돼서 장기간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고, 헐값의 대우와 소모품 폐기 처분하듯 하는 해고에 맞서 6년 이상 싸운 사람들도 있었어. 그럴 때 구경꾼인 사람들이 쉽게 던지는 말은 ‘원래 먹고 사는 게 그렇게 냉혹한 거다. 회사가 어려워서 자른다는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 혹은 ‘최저생계비도 못되는 그런 일자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버티냐? 그냥 딴 데 가면 그만이지’라는 식이야. 물론 당장의 생계 문제도 걸려있고 그건 중요한 문제야.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들이 버티고 싸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에 모욕을 입고 물러설 수는 없다는 거야. 나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고 나는 싸구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싸우는 거야. 그런 싸움으로 인해서 ‘차마 말조차 못하고’ 문제로부터 ‘떠나가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인간대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모두에게 던지고 있는 거야.


웃기는 얘기지만 난 달걀 후라이를 할 때 달걀을 깨는 순간을 무서워해. 그 순간에 기름이 튀어 오르는 게 무서워서 달걀을 놓쳐버리곤 하거든. 그래서 달걀을 잘못 깨서 후라이팬 밖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늘 걱정돼. 맛있는 요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달걀 후라이 하는 건데 적어도 잘못 깨지는 않겠다는 소심함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제도적인 모욕을 없앤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아주 소심한 일이야. 당장 눈앞의 고통에 빨간약을 바르고 싸매는 것이 급해서 해야 할 일인 것이지, 장래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유별난 개인이 남을 모욕하고 학대할 수도 있지만, 아예 법과 제도로 모욕하게끔 만들어 놓는 일이 있어. 가령 한 남성이 여성을 무시하고 깔볼 수도 있지만 아예 법으로 만들어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또 성적이 뒤처진 학생을 우습게 보는 것이 개별적이라면,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등록금을 남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학교 규율로 만들어놓는 것은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거야.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반말을 하는 어른도 있지만, 학교에서 학생은 맞아도 되고 머리카락을 잘려도 된다는 관행을 놔두는 것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그래서 요즘 학생인권조례 만든다고 엄마아빠에게 서명해달라고 했던 건 그 반대로 ‘사람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만들자는 거였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많은 선생님이나 언론들이 교실붕괴를 얘기해. 물론 말썽장이도 많고 수십 명이 있는 교실에서 질서를 잡고 교육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렇지만 그 많은 어려움이 학생이라 불리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모욕할 이유는 되지 못해. 학생인권조례는 제도적으로 창피와 모욕을 주는 것만은 피하자는 아주 소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적극적이라면 교실안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학비 등 모든 비용을 없애자, 입시교육이 아니라 취향별 교육을 받게 하자 등 요구할 수 있는 게 많아. 그런데 지금 요구하는 건 최소한 대놓고 모욕하지는 말자는 거야.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자율성에는 바보같이 행동할 권리, 현명하지 못하게 행동할 권리도 있어. 자율성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한이 있어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질 권리가 포함돼. ‘잘못되면 어떡해?’가 아니라 ‘잘못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인정하는 게 최소한의 출발점인 것이지.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인정하자는 것, 노조의 단체행동을 인정하자는 것은 충분히 살만한 임금, 일을 안 해도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보장의 권리, 뭐 그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모욕하지 않는 최소한의 규정인 거고, 성폭력을 좌시하지 말자는 건 적극적 성 평등은 못돼도 최소한 모욕하지는 말자는 소극적인 거야.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일을 허용해 두면 그걸 당하는 사람들이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호소하기가 더 힘들어져. 당하는 쪽에선 오히려 당할만하다는 혐의를 쓰게 되고 모욕을 주는 쪽에선 그게 선이라고 의기양양할 테니 말이야. 모욕감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에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조치야. 사람사이에 서로 공감을 하고 사랑을 하는 일을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제도적인 노골적인 모욕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는 있어.


아주 옛날에 미국사회에서 이주민이고 허드렛일을 하고 남과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죄 없이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미움에 찬 저주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어. 나는 모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꿈이 이런 거라고 생각해. 모욕주고 모욕받는 일을 벗어나서 이런 공감과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꿈 말이야.



“아들아 … 행복한 유희 속에서만 네 전부를 다 소진하지는 말거라. … 박해받고 희생당하는 이들을 도와라.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더 좋은 친구들일 테니까. … 인생이라는 이 투쟁 속에서 너는 더욱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작성일자 : 2011. 5. 13

작성자 : 배여진

이글은 격월간 <사람>에도 실렸습니다.


퉁명스러움과 사회적 정의(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엄마나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가진 불만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말버릇이야. 내 말투는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퉁명스러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지. 엄마는 뭘 물어봐도 뚱한 나의 대꾸에 “막내는 전화하면 이런 일 저런 일 상냥하게 얘기하는데, 넌 도대체 왜 그러냐?”면서 “딸이 너 같이 생겨 먹었으면 무슨 재미로 딸 키우겠냐”고 한숨짓곤 하지. 그럴 때 나는 “엄마 닮아서 그렇지”하곤 또 입에 빗장을 치지. 사실 엄마의 퉁명스런 말투도 장난이 아니어서 “여자가 도무지 애교라곤 없어”가 아빠가 평생 입에 달고 사는 불만사항인 걸.


나는 인권활동하면서 어쩌다 정치인들을 만날 때가 있어. 무슨 법을 만들지 말라거나 만들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야. 한 번은 어느 정당 정책위원장을 만났는데, 면담 끝나고 참석자들끼리 인사하는데 “제 정치인생 30년에 당신처럼 무서운 분은 처음 만납니다. 여자 분이신데 좀 부드럽게 하시죠”가 그 사람이 내게 건넨 말이었어. 얼마 후 그 사람이 성추행 사건으로 국회의원을 관두게 됐는데, 난 그 기사를 보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읊조렸지.


얼마 전에는 내 말투 때문에 버스에서 ‘패륜녀’가 됐어. 아빠는 늘 내게 상냥하게 전화하는데 난 늘 “왜? 그래서? 끊어!”라는 세 마디 밖에 안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난 공주고 아빠는 거의 하인 같은 분위기로 말을 주고받았기에 아빠와 통화할 때 내 말투는 남들이 납득 못할 천하 방자함이지. 게다가 아빠가 돈 문제로 집안을 시끄럽게 만든 직후 걸려온 전화인지라 난 아빠 전화를 이런 식으로 받았어.


“왜 전화했어? 내가 아빠 전화 안 받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자 아빠는 “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왜 집에 안 오냐? 아빠는 딸 보고 싶은데.” 나는 쏘아 붙였지. “아빠 꼴 보기 싫어 안 가”, 아빠는 계속 사정했지. “아빠가 이제 속 안 썩힐 테니까 집에 와라.” “몰라. 끊어!” 이렇게 전화를 끊고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뒤통수가 문득 따가운 거야. 둘러보니 버스 안의 사람들 모두, 특히 나보다 훨씬 젊은 애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무슨 아빠 전화를 저따위로 받냐?”고 수군거리고들 있는 거야. 아차, 하고 버스에서 빨리 뛰어내려 버렸지.


이 일을 후배들한테 얘기 했더니 “배운 녀자에서 패륜녀가 됐네”라고 한바탕 웃어 넘겼어. ‘배운 녀자’는 내가 얼마 전 신문에 쓴 칼럼 제목이야. 평소 내 말버릇을 아는 후배들은 더한 일 생기기 전에 말투 바꾸라고 조언했어. 자기들도 나랑 통화할 때마다 화난 것 같아서 겁난다고 말이야. ‘왜? 알았어. 끊어’ 이상의 말을 들어본 적 없는 그들이니 나도 뭐라 반박할 도리가 없었어.


퉁명스런 말투 뿐 아니라 나는 묻는 말에 대꾸하는 걸 정말 귀찮아해. 그래서 눈만 깜박거리거나 고개만 까닥거린 것으로 내가 대답했다고 혼자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중고교 시절엔 그 때문에 선생님들한테 머리를 많이 쥐어 박혔어. 게다가 인사 하는 걸 정말 싫어해.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가 아니면 뒷줄에 대충 서 있다가 뒤로 쓱 빠져버리고, 맞닥뜨려 인사해야 할 때는 쭈뼛쭈뼛이야. 이런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말을 해. ‘우리들이야 겪어봐서 언니 속이 안 그런 줄 알지만, 처음 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좀 고쳐봐’라고.


나도 사실 걱정이야. 나와 친한 사람들, 혹은 나보다 잘난 사람들한테는 내 태도가 그냥 ‘저 인간 되게 뚱하네’ 정도로 받아들여져도 상관이 없어. 하지만 나보다 못한(것이 아니라 자칫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처지의 사람들한테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겁나긴 해. 실제로 그런 일을 많이 겪으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말이야. 해마다 ‘친절해지자’를 새해 목표로 삼지만 ‘상냥함’은 접근불가 체질인지라 자주 속상해할 뿐 잘 고쳐지지는 않아.


애교 덩어리 아빠와 뚱한 엄마, 더 뚱한 딸, 쌀쌀맞은 딸, ‘욱’하는 아들과 상냥한 딸의 조합이 우리 집인 것처럼 이 세상에는 온갖 성격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어. 저마다의 뚱함과 쾌활함을 토해내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런 성질에 대해 겪으면서 이해하고 때론 부딪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제 성질의 장단점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나처럼 사람마다 제 성질이란 게 있는데 그걸 죽이고 일을 해야 할 땐 사정이 많이 달라져.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보수를 받으며 하는 일은 제 성질을 죽일 걸 요구하잖아. 그냥 묵묵히 참고 일만 하면 되는 수준이 아니라 늘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는 것 자체를 중요한 업무로 취급하는 게 요즘 세상이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늘 상냥하잖아. 전화로 뭘 문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화기 속에서 미소가 튀어나오는 것 같이 응대하는 사람들, 내가 냉정한 거절을 표해도 ‘감사합니다’로 늘 답하는 사람들의 속은 어떨까?


엄마 자식 중 하나가 간호사잖아. 걔가 병원에서 무례하고 포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제 성질대로 쌀쌀맞게 대할 수가 있겠어? 걔는 내가 보내는 문자에 ‘응’이라는 한 단어 말고는 한 마디도 보태본 적이 없는 얘야. 그런데 일을 할 때는 늘 미소를 짓고 늘 갖은 말로 설명을 하고 들어야 하잖아. 대형마트, 백화점, 비행기, 식당, 은행, 전화 등에서 우리는 늘 그런 일하는 사람들과 마주쳐. 그들은 늘 웃어야 해. 아무리 개차반 같은 인간을 겪을지라도 말이야. 설령 부당한 일을 겪을지라도 ‘웃으면서’ 항의해야 해. 아니 항의가 아니라 ‘제가 뭘 몰라서 고객님께 불편을 끼쳤나 봅니다. 뭘 더 도와드릴까요?’라고 다 자신이 덮어써야 해.


내가 가던 단골술집 여주인한테 들은 얘긴데 근처 은행 직원들이 자주 온대. 술 마시면서 주로 하는 얘기가 자신들이 겪은 소위 ‘고객’들 얘기래. 하루는 어느 고객이 와서 뭔 심사가 뒤틀렸는지 동전 주머니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욕을 해댔대. 다들 일하다 말고 그걸 주워서 그 사람한테 되돌려줬는데 욕을 멈추지 않더래. 그런데 그 사람이 뒤돌아나가는데 한 직원이 “고객님, 여기 500원 동전 하나 더 흘리셨습니다. 저희 은행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거야. 그런 순간에도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게 업무규칙이라며 그 은행원들은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였대.


그런데 내 주변의 사람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면 ‘어쩜 그럴 수가 있어.’라고 화를 내지만, 내가 손님인 경우에는 그런 감정이 잘 안 생겨.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다”는 게 요즘 사람들 사이 유행어야. 이 말을 약간 바꾸면 ‘불의는 참아도 불친절은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불쾌한 느낌을 받으면, ‘야, 딴 데 가자. 내가 내 돈 내고 사먹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돼?’라고 자리를 박차는 경우가 많아. 이미 물도 따라 마셨고 화장실도 한 번 다녀왔어도 말이야. 약간 불친절한 것 같아도 그냥 있자는 의견은 인기가 없고, ‘불친절은 참을 수 없다’는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늘 친절한 곳은 규격화된 미소와 인사를 제공할 수 있는 규모 있는 곳이고, 규격화되지 않은 응대를 하는 곳은 동네의 고만고만한 곳일 때가 많아. 그런 규격화된 친절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들은 친절에 점수를 매겨서 관리하니까 일하는 내내 노동자의 몸 뿐 아니라 감정도 쥐어짜고 있는 거야.


규격화되는 것은 친절과 공손함만은 아니야. 반대로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를 늘 유지해야 하는 일도 있어. 내 전화 응대에 불만을 쏟는 사람들에게 애써 변명을 할 때면 “빚쟁이 전화에 하도 시달리며 자라서 전화가 공포스러워 그래.”라고 답할 때가 있어. 그리고 그건 사실이야. “너 몇 살이냐, 니 부모 집에 있냐? 돈 안 갚으면 큰일 날 줄 알라고 전해라”는 전화는 정말 무서웠어. 또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은 늘 턱을 바싹 잡아당기고 있지. 식당에서 알바하다가 불심검문 나온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과 맞닥뜨려 봤는데 대한민국 주민증이 있는 나였지만 정말 무섭더라구. 주민증 없는 이주노동자가 그런 일을 겪으면 정말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또 우리를 집에서 내쫓으려 왔던 집달리 아저씨는 얼마나 무서웠는데. 우릴 길거리로 다 내몰고 난 뒤에야 자기도 엄마 아빠와 같은 교인이라며 어깨를 떨어뜨리고 돌아갔지. 직업상 그 아저씨는 무서움을 유지했지만 업무를 다 한 후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이었어.


이렇게 감정을 쥐어짜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많은 고통이 있을 거야. 언론 보도를 보면 위장병, 우울증 등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대. 소위 화병에 걸리는 거지.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고통도 큰 문제지만, 감정을 쥐어 짜이다 보니 편한 상대, 만만한 상대에 대해 함부로 감정을 발산하는 일에 대한 감각이 전 사회적으로 마비되는 것도 큰일이야.


가령 똑같이 일터에서 쥐어 짜이더라도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함을 만들어주는 것은 여성이고 엄마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지. 밖에서 시달리고 들어왔으니 집에서는 무조건 편안함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야. 돈을 주고 사는 물건 속에 사람의 친절도 포함돼 있다고 여기기에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동료라는 감각 스위치는 꺼져버려. 돈을 쓰는 곳에서는 늘 당연하게 친절함을 요구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늘 사근사근하게 굴 것을 요구하게 돼. 나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관계는 ‘피곤’한 게 돼버리고 만만하게 묻어갈 수 있는 덜 피곤한 관계만 쫓게 돼. 덜 피곤한 관계는 나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거나 만만한 상대와 맺는 관계이고, 피곤한 관계는 나의 편안함을 위협하고 나에게 각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그런 상대와 맺는 관계일 거야.


내가 지녀왔던 생각이나 습관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을 일으킬 때가 많고, 그럴 때 나의 기준이 되는 생각이나 습관이 어떤지를 따져보기 보다는 그 사람들이 위반한 선을 문제 삼게 돼. 그 위반선을 누가 정했는지는 잘 따져보지 않고 말이야. 전 사회적으로 살기가 힘들고 감정 다스리기에 시달릴수록 사람 사이 관계 맺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지쳐가고 있어.
인권의 기본은 타인과 관계 맺기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큰 고민이야. 사람 관계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늘어가는 반면, 그 관계를 올곧게 만들어갈 수 있는 장은 찾아보기 힘드니까 말이야. 인권에서 말하는 사람 사이 관계 맺기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거야. 나는 터뜨리고 요구할 수 있지만 상대는 참고 견딜 뿐 아니라 사근사근해야 한다는 관계는 도무지 평등하다고 할 수가 없어.


식당알바를 하다보면 조선족이나 중국에서 온 분들과 같이 일하게 될 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한국인 직원들과 그 분들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게 돼. 한국인 아줌마들은 먹을 것을 줄 때는 참 인심이 후덕해. 그분들에게 제일 먼저 챙겨주거나 더 많이 주거나 해. 그런데 문제는 지시 관계가 어그러질 때야. 한국인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약간 다른 의견을 표할라치면 먹을 것 줄 때의 후함이 당장 “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란 냉대로 바뀌어. 내가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에서 인심이 나오고, 그런 인심은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다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소.” 또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하면 포용할 수 없는 방자함이 돼버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아줌마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 탓으로 치자면 각자 성격만 뜯어고치면 되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아. 똑같이 힘들게 일하는 형편에서 그런 행세를 한국인 아줌마들만 할 수 있는 것은 불평등한 경제관계, 출입국에 따른 신분지위의 불안함, 한국이 이주자를 부릴만한 지위가 됐다는 자만심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작동하고 있어. 그런데 아줌마들 사이의 갈등을 개인의 태도로만 여겨버리고 고칠 것을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앞서 정치인에게 했던 것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져. 같이 먹는 것은 허용되지만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큰 거야. 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우리 한국인이고 너희는 인심 베풂을 받을 뿐 말할 자격은 없다고 하는 건 평등한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곧게 생각한다는 건 우리를 지배하는 불평등과 갈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따져 묻는 것이야. 내가 베푸는 인심이 아니라 고통 받는 타인에게 필요한 옳은 일이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 밀어내지 말고 같이 기대어 비빌 수 있는 언덕은 어떤 것일까를 궁리하는 거야. 이런 궁리를 하려면 대충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찢고 터뜨리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어.


개인이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면 화병이 나는 것처럼 불의에 대해 분통 터뜨림이 없는 사회는 문제를 곪게 해. 예를 들어 엄마가 영화에서 많이 본 것처럼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오랫동안 노예로 부림을 당했어. 흑인들은 백인과 평등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어. “나는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 누구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라고 한 흑인 청소부가 있었대. 이 흑인은 자신의 삶을 ‘피부색’만으로 판단하는 사회질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이 흑인 청소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봉합돼 있던 미국 사회의 문제가 터뜨려졌어. 착한 흑인, 고분고분한 흑인에게는 친절한 백인 주인이 대드는 흑인은 당장 나쁜 흑인으로 여기고 친절을 폭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어.


이런 경우는 백인과 흑인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도 많아. ‘여자니까’, ‘아랫사람이니까’, ‘외국인이니까’, ‘장애인이니까’하는 식으로 경계선을 긋고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로 인해 제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질서인 양 대접받아. 이런 질서를 깨려면 앞서 말한 흑인 청소부 같은 터뜨림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봐주고 보듬는 태도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해. 감정의 쥐어짜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해지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경계선은 손대지 말고 그냥 놔둔 채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야. 왜 유독 어떤 사람들이 친절과 고분고분함을 강요당하는지, 유독 어떤 직종의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가 집중되는지를 따져 물어야 돼.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안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아주 많아. 그런데 사회적 약자를 관상용 식물처럼 저만치 떨어뜨려놓고, 내가 움직여 다가갈 때만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못박아두고 생각할 때가 많은 것 같아. 사람들이 실제 겪는 고통은 내가 다가가고 싶을 때만 다가가고 피곤하면 다가가지 않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야. 사람들의 고통은 일상의 맞닥뜨림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문제야. 그러니까 가상의 고통 받는 약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현실 속에서 감각의 안테나를 치켜세우는 일, 돈 때문에 강요받고 요구하는 친절이 아닌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우리 식대로 만드는 친절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모욕을 당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 속에 더 깊이 끌려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은 마음과 몸의 힘든 노동을 요구해. 돌아보고 곱씹고 반성하고 또 공부하고 만나고 어울리는 등 갖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야. 그런 힘든 노동 없이 사람사이 관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 바라는 것이겠지. 이게 내 퉁명스런 말투 때문에 고민하게 된 사회적 정의야. 아울러 엄마한테나 주변사람한테나 좀 더 ‘친절한 은숙씨’가 되도록 노력할게. 다시는 버스에서 ‘패륜녀’로 찍히는 일은 없도록 말이야.

작성일자 : 2011. 3. 2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 엊그제도 통장에서 빠져나간 보험료를 보며 난 한숨을 쉬었어. 왜냐고? 엄마는 평생 보험을 부어왔어. 자식들 이름마다 교육보험이든 암보험이든 들어놨다가 큰돈이 필요할 때면 그걸로 대출을 받고, 쪼들릴 때면 원금을 떼이면서 해약하는 일을 반복했지. 잠깐은 숱한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것처럼 보험 모집인을 하기도 했어. 엄마는 내 이름으로 된 암보험도 하나 들었어. 그걸 몇 년 동안 엄마가 붓다가 내가 졸업할 무렵 나한테 넘겨줬지. 이제 네가 부으라고 말이야. 명색이 인권활동가인 나는 ‘공공복지’가 아닌 ‘사보험’에 의탁한다는 것이 탐탁치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넘겨받았어. 10년 만기였던 그 보험의 만기만을 기다렸지. 만기가 되던 해, 나는 해방감을 느꼈어.


그런데 웬걸, 만기가 되자마자 엄마는 보험전환계약을 하고 내게 서명하라 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로 엮어진 그 보험은 이름 자체도 복잡했지만 약관이란 걸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되는 구석이 없었어. “보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내게 엄마는 “시집도 안 가고 혼자 살려면 보험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성을 냈지. 결국 엄마 고집대로 난 서명을 했고, 보험료는 무려 4배나 올랐고, 만기는 20년으로 늘어났어. 무엇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내 생각대로 보험 계약 하나 맘대로 처리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났어.


그리고 비슷한 무렵, 큰돈이라곤 쓸 줄 모르던 엄마가 백만 원에 가까운 요를 사들였어. 무슨 요가 그리 비싸냐고 했더니 “내가 중풍이라도 걸리면 자식들 고생할 테니 큰 맘 먹고 샀다”고 했지. 숯이나 뭐 그런 것들로 만들어져서 중풍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말을 믿고 덜컥 사버린 거야. 노인들을 상대로 바람을 잡아 그런 물품을 판다는 얘기를 뉴스로만 봤어. 그런데 바로 울 엄마가 그런 물건을 산 것이지. 물론 그 장사치들은 중풍, 치매 등으로 자식들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온갖 공포를 불러일으켰겠지.



불안에 대처하는 사회적 방법


이렇게 불안은 우리 생활 도처에 있어. 큰 병 걸릴까, 다칠까, 직장을 잃을까, 홀로 될까, 자식에게 짐이 될까…….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혼자 힘으로, 그게 안 되면 가족의 힘으로 방법을 찾지.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불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반면 개인이나 가족에게만 맡겨두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어. 엄마가 날 걱정해서 들게 한 보험을 내가 싫다고 한 이유는, 내가 두 번째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이 두 번째 방법을 흔히 ‘사회적 권리’ 또는 ‘복지’라고 불러.


‘사회’라는 뜻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을 맺었다는 뜻이야. 결연했다는 것이지.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을 권리라고 해. 그런 사회적 권리가 표현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복지야.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는 우리들 삶이 온갖 불안에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 감싸고 입혀주자는 거야.


그런데 불안을 덮어주고 감싸준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야.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쪽을 째서 보이기 싫은 걸 내보이게 할 수도 있어. 초등학교 때 학기말이면 의무적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야 했어. 형편에 상관없이 모두가 정해진 액수를 내야했지. 그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는 몰랐지만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쓰인다 하니 그런가보다 했어. 근데 6학년 때는 달랐어. 그렇게 걷은 돈을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제일 가난한 두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어. 남학생, 여학생 한 명씩에게 준다면서 아이들에게 추천을 하라 했지. 아이들은 작은 쪽지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서 냈고, 나는 누구의 이름을 적었는지 기억이 안나. ‘가난한 친구’를 한 명 찍는다는 게 너무 힘든 일이어서 끙끙거렸던 기억밖에는 없어. 그 결과 늘 코를 흘리던 남자아이 한 명과 내가 그 돈을 받게 됐어. 선생님은 큰 소리로 우리 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들의 정성’이라면서 공책 몇 권과 연필 몇 자루, 그리고 봉투 하나씩을 우리에게 주셨어. 그 순간 교실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나만 그 가운데 총천연색이 된 느낌이 들었어. 그날부터 같이 등하교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질 못했어. 친구들도 쭈뼛쭈뼛 내게 말 걸기를 어색해했고, 나도 같이 어울리느니 혼자인 게 맘 편했지. 6학년 말이었던 게 그나마 큰 다행이었어. 곧 졸업이었으니까.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은 아니야. 관계로부터 버려지는 공포,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하는 공포로부터도 벗어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 복지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누구나 사람사회에 섞여서 사람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라 보고 복지는 그걸 존중하기 때문에 하는 거야.


누구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누구는 밥상 아래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다면 똑같은 양의 밥을 먹더라도 사람으로서 먹는 게 아닌 거야. 나란히 밥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을 때 두런두런 말도 주고받고 서로의 표정도 살피고 할 수 있어.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만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얼마나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느냐가 복지를 하는 중요한 이유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사람이 지하도에서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동료시민으로서 생각하기는 어려워. 다가올 선거에 대해 침을 튀기며 비평을 하는 사람이 선거용지 받을 주소지조차 없는 사람과 얘기하기는 어려워.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서로에게 보장해주지 않고서야, ‘같은’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에 그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회적 권리’로서의 복지는 불쌍해서 돕는 것과는 달라. 우리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사회에 대고 부양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권리야. 내 처지가 불행하고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회의 일원이니까 당연히 나를 이 사회 속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보살펴줘야 한다는 거야.


드레스코드는 누가 정하는 걸까?


사람들은 저마다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달라. 그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고 어떻게 결정할까?


엄마, 이런 저런 모임에 갈 때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옷을 갖춰 입지? 머리 모양부터 옷, 구두까지 신경 쓰잖아. 그걸 젊은 사람들은 ‘드레스코드’라는 외래어로 표현해(옷 입는 법, 옷 입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어).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고 대화에 끼지 못하게 돼. 심한 경우엔 문 앞에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일도 있어.


이 드레스코드와 관련된 영화가 기억나. 외국영화에선 파티에 갈 때 남자가 여자를 모시러오는 장면이 많이 나와. 여자는 예쁘게 차려입고 데리러 올 남자를 기다리지. 내가 본 두 편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다 가난했어. 둘 다 파티 같은데 가본 적도 없었어. 그래서 한 여자는 자기가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어. 하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이 자기가 데려갈 파티에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처해해. 그는 여자를 옷가게에 데려가서 그 파티에 올 사람들이 입을 법한 세련된 검정 드레스를 골라 입혀. 그 옷을 입고서야 여자는 파티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


다른 영화 속의 여자는 어땠는지 알아? 큰돈을 들여 세련된 드레스를 장만해 놓았는데 딸이 난생 처음 파티에 간다는 걸 안 아버지가 선물로 아주 우스운 분홍 드레스를 사놓은 거야. 아버지 눈에는 예뻐 보이는 옷이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던 딸은 고심 끝에 자기가 사놓은 옷을 두고 분홍 드레스를 입어. 여자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을 보고 난처해하지. 파티에 가서도 자기 외투로 여자의 옷을 덮어주고 그녀 옷이 다른 사람 눈에 뜨일까봐 안절부절 해. 결국 남자가 자기를 창피해하는 걸 안 여자는 파티장 밖으로 뛰쳐나와. “당신 눈에는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이건 아버지의 정성이고, 놀림 받을 줄 알면서도 선택한 건 나”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드레스코드란 건 원래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파티에 어울릴 법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만든 규칙이야. 이 규칙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다고 여기는 것을 파티장에 오려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자기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버지의 정성스런 마음을 담은 선물인 분홍색 옷을 거절하는 거야. 남자가 즉석에서 사주는 옷을 입고라도 드레스코드를 맞추는 여자와 자신이 택한 분홍색 옷을 고집한 여자, 엄마는 어느 쪽이 맘에 들어?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릴 권리로 볼 건가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거야. 사회에서 연을 맺은 우리들이 결정한다는 말이지. 똑같이 ‘복지’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도 나라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달라. 복지를 설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 개인이 감당할 몫과 사회가 감당할 몫을 어떻게 정하는가도 달라. 드레스코드가 다른 것처럼 말이야.


가령 가난한 사람들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복지를 하는 쪽이 있어. “너무 지저분해서 전염병의 위험이 있다”, “너무 가난해서 범죄의 위험이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야. 위험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사람다운 삶의 필요를 최소한도로 낮추고 가난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들에게만 복지혜택을 주려고 해. 복지를 받는 사람들의 자존감 따위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창피를 주는 것이 오히려 복지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스스로의 자립의지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경우엔 드레스코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주 일부로 제한돼 있어.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삶의 필요를 선택하여 그것만 복지의 대상으로 결정해버려. 복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도 일부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야. 그래서 복지를 찬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복지제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야. “우릴 뭐로 보는 거냐?”고 반발할 때가 많아. “우리를 당신들끼리 정한 드레스코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마라, 우리 삶의 필요는 일부 전문가들의 잣대가 아니라 우리가 결정한다. 공공복지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이야.


대놓고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 게 공평한 세상 이치라고 주장해.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 삶이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뼈 빠지게 노력한 사람들의 몫을 돌리는 건 부당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복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관리의 성적을 매기지 못할 만큼 비참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만 사람 된 정으로 베풀면 그만이라는 거야.


또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지를 할 거라면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복지라는 미명하에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란 건 굼뜨기 마련이니까 빠릿빠릿한 시장서비스에 복지를 맡기자”, “‘복지수급자’라고 불리는 것보다 ‘고객님’, ‘소비자님’이라 불리는 게 더 좋지 않냐?”면서 공공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왜 복지를 생각하게 됐느냐를 까먹고 있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격을 매겨 돈으로 사고파는 시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까 복지를 하는 거잖아. 우리 삶의 어떤 필요를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 아니라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공기’같은 것으로 만들자는 게 복지인 거야. 일등만 살아남고 강자들이 다 먹어치우는 질서에 대해 방호벽을 세우는 게 복지야. 그런데 이 사람들 말대로라면 또 돈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복지가 되는 거야. ‘선택의 자유’가 이런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야. 선택의 자유? 좋은 말이지.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공공성 위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 하던 유치한 일 중에 하나가 책상에 줄긋기였어. 친구끼리 토라지거나 짓궂은 남자애와 짝이 됐을 때 흔히 하던 일인데 책상 중간에 선을 긋고 넘어오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였지. 이쪽은 ‘내꺼’, 저쪽은 ‘네꺼’라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선을 그어도 그 책상을 유지하는 건 공동의 책상다리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건 나눠가질 수 없었어. 한쪽 다리가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책상 구실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권리로 정하고 그걸 개인의 힘이 아니라 공공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건, 개인의 삶을 망치자는 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뜻이야.


앞에서 말한 것 말고 복지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이 있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미 파티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특별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지 않는 거야. ‘우리 사회’라는 ‘파티장’ 안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자리가 마련돼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가난한 걸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로 누린다고 서로 인정하는 거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볼 것인지도 일부 전문가가 아니라 다 같이 의논해서 결정해. 그런 결정을 위해서 하는 일이 정치인 거야. 사람들은 투표로도 의견을 표시할 수 있고, 지역사회, 직장, 학교 등 자신들이 처한 다양한 자리에서 의견을 모을 수 있어. 사회에서 공동으로 책임질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삶의 필요라고 여겨져 온 건 아이 낳아 기르기, 교육하기, 건강돌보기, 장애인과 노인 돌보기, 기본적인 주거 등이야. 이밖에도 항목은 많을 텐데 그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서 공동의 곳간을 사용하는 일을 결정하는 게 정치가 하는 중요한 일이야.



복지란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복지는 내가 물질로 누리는 밥이나 학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어디에 우선적으로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 자체에서 시작 돼. 공동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를 정해야겠지. 한국보다 복지를 잘 하는 나라들에선 대개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여하게 돼있어. 왜냐면 많이 번 사람들은 그만큼 사회적인 자원을 더 많이 쓰고 사회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니까 그만큼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지. 한국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돈을 내 집을 얻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내게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걸 ‘억울하다, 아깝다’고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서로 기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 정신을 사회적 연대라고 해. 이런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인 얼굴이 복지가 되는 거야.


돈이 많은 사회라고 해서 복지를 잘하는 게 아니고 돈이 없는 사회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야. 세계 제일의 부자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나라의 복지 수준은 형편없다는 증거도 있어.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조정하는 일이 없으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산처럼 쌓인 돈도 소용없다는 것이지. “복지는 좋지만 돈은 어떻게 마련할래?”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돈과 복지를 따로 떼어놓고 선후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어. ‘복지와 돈’은 선후가 아니라 같이 존재하는 문제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부가 소수에게 불공평하게 쏠리고, 대다수에게 불리하게 분배되는 문제와 복지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아. 복지는 불평등의 뒷감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부의 생산과 분배를 정당하게 하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그에 덧붙여 복지는 우리가 생산에 신경이 팔려서 놓쳐버린 사람들에 대한 더 세심한 돌봄을 자극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복지제도가 사회적으로 잘 마련돼도 남는 문제들은 물론 있을 거야. 예를 들어 노인복지가 잘 돼서 엄마가 더 나이 들어 설령 아프게 될 때(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무료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고 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공복지로 제공되는 서비스에만 엄마를 맡겨놓고 생전 찾아보지도 않는다면 엄마 맘이 그냥 편키만 할까? ‘딸년이라고 찾아주지도 않네’라며 쓸쓸해하겠지. 마찬가지로 주변에 곤란한 사람이 있는데 “국가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세금 냈는데 저런 사람들 돌보지 않고”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당장 손 내밀 수 있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복지제도를 잘 갖추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 거기서 나오는 연대의 정신이 같이 가지 않으면 로봇에게 돌봄을 받는 것과 같이 차디찬 돌봄이 될 수 있어. 복지를 빚어내고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사람에 대한 존중에 있다는 건 아무리 되풀이 말해도 모자라는 말이야.

작성일자 : 2011. 1. 20

작성자 : 류은숙

* 이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5)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차별(류은숙)

엄마, 내가 도라지 무침만 보면 울컥하는 것 알아? 어릴 때 나한테는 김치만 달랑 든 도시락을 싸주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둘째에게만 새콤달콤하게 도라지와 오이를 버무려 싸주었쟎아. 집에서도 그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게 했어. “넌, 아무거나 잘 먹지만 네 동생은 아니잖니. 이건 동생만 줘라.”라고 하면서 말이야. “아무거나 잘 먹는 게 죄지” 구시렁거리며 난 밥만 씹어댔어. 어느 책에서 봤는데 원숭이들도 먹을 것으로 차별하면 음식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대. 부모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 어느 부모나 ‘열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있나?’란 대사를 내뱉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도라지 무침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있어. 맘껏 맛있는 것 못해주는 게 속상한데 거기에 밥도 잘 안 먹는 둘째가 더 맘에 걸려서 엄마가 그랬다는 걸 알면서 내가 괜히 투정부려본 거야.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문제는 내 반찬투정과는 좀 달라.

여느 엄마들처럼 엄마는 자식들 성적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어. 엄마가 고생고생해서 학교에 보냈으니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모두가 일등을 하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쟎아. 꼴찌에서 두 번째도 아니고 정말 꼴찌를 했던 막내, 그리고 재수, 삼수도 아니고 오수를 해야 했던 남동생이 엄마한테는 늘 한숨거리였지. 나와 둘째의 성적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엄마는 공부를 못할수도 있더란 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속상해서였겠지만 “내가 저걸 아들이라고 낳고 미역국을 먹었지”란 말을 남동생에게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해. 공부 때문에 주눅이 들어 인문계 고교에 안가겠다는 막내에게 “내 자식인게 창피하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어느 날 청소하다가 막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 게 됐는데, 정말 가슴 아픈 말들이 적혀있었어. 엄마한테는 그때 차마 말 못했지만, 그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살기 넘치는 저주와 원망의 말을 공책 가득 적어놓고 있었어.

엄마한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야.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식구인데’라고 감싸며 그런 일 없는 척 아닌척하지만 사실 서로 비교하고 상처주는 일이 없었던 집은 드물거야. 형제자매끼리 친척들끼리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어서 명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한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엄마만 우리를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한 것도 아냐. 나도 엄마 아빠를 다른 집 부모와 비교하곤 했어. 심할 때는 ‘내 부모는 따로 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날 이 집에 맡긴 거다. 어느 날 진짜 부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날 데리러 올 거다’란 상상놀이를 하기도 했어.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해 이 세상에는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일이 천지야. 문제는 누가 무엇을 가지고 비교할 힘을 갖고 있느냐는 거야. 가령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심하다고 느끼는 게 학벌차별이래. 학벌은 학교에 들어갈 때 한번 결정 나는 일인데 그것으로 평생의 사람대접이 좌우되니까 너무 심하잖아. 부당하다 해도 그게 평생의 사람성적표가 되니까, 엄마도 늘 성적타령을 했겠지. 그럼 그런 학벌을 가지고 비교하길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겠어? 좋은 대학 나와서 그걸로 꽤나 행세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지. 우리 막내 같은 사람이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잖아?

그래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비교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준으로 해서 남을 판단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지배하는 쪽과 지배받아야 할 쪽을 결정해. 그러니 비교 기준 자체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자기들의 색안경인거야. 허구한 날 중에서 택일을 하는 것처럼 하고많은 사람의 특성 중에서 힘센 쪽이 찍어서 이용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 그렇게 골라낸 특성에 대해서는 온갖 흉을 보고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갖다 붙여. 오랜 시간 그런 흉을 듣다보면 대개 사람들은 ‘정말인가보다’하고 믿게 돼. 그렇게 되면 추문의 주인공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리게 돼.

나 어렸을 때 엄마가 살림에 보태려고 우리도 세로 살던 집 방 두 개 중에 하나를 세놓았던 일 기억나? 어떤 부부가 계약금 5만원을 들고 와서 다음날 이사하기로 했어. 그런데 다음날 와서 무슨 사정이 생겨 이사를 못하게 됐다고 계약금만 떼이고 갔지. 그때 이웃들은 “◯◯도 출신이라 찜찜했는데 잘된 일”이라고 했어. 엄마도 거들면서 “남자 인상은 그래도 괜찮은데 그 부인 인상이 맘에 걸렸다”고 “◯◯도 여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어.

난 ◯◯도 출신인 게 뭐가 문제인지 궁금했어. 커서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도 출신이어서 그 반대편의 도 사람들을 경제로나 정치로나 못살게 굴었던 거였어. 그래서 ◯◯도 출신들에게는 ‘뒷통수를 잘 친다’, ‘음흉하다’는 등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어. 대학에서도 지배층 들과 출신이 같은 도 아이들은 그 지역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쓰는데, 억압받는 지방 아이들은 또박또박 서울말을 썼어. 자기 출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지금이야 옛일이 돼버렸지만, 나는 “◯◯도 출신이라 찜찜했다”는 사람들 말이 잊히지 않아. 정치로나 경제로나 힘센 쪽은 ‘◯◯도 출신’이란 기준을 빼들었고, ◯◯도 출신에게 근거 없는 추문을 갖다붙이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믿게 됐고, 그래서 ◯◯도 출신이 직장을 구하고 셋방을 구하고 공직에 진출하고 결혼을 할 때마다 걸러져서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어.

이게 ‘지역차별’이라면 다른 차별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일제시대 일본인과 조선인, 지금의 한국인과 동남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 앞의 것은 좋은 쪽이고 뒤의 것은 나쁜 쪽이라고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거야.

 

사실 ‘다르다’는 것으로는 할 말이 없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같은 게 없듯이 사람은 모두 다르거든. 그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야. 입 아프게 두 번 세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매순간 달라지고 있잖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 사람은 전부 다른 게 당연하니까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도 우스운 말이야.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혹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차이가 당연하다고 해서 사람마다 갖는 특징이 ‘원래 정해져있다’는 뜻은 아니야. 흑인은 ‘원래 게을러’라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원래 게으른 특징을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오늘날 잘 사는 나라들은 흑인들을 끌어다가 노예노동을 시켜서 잘 살게 됐는데, 왜 하필이면 ‘게으름뱅이’들을 일꾼으로 부렸을까?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뚱뚱한 걸 엄청 싫어하잖아. 그래서 늘 잔소리가 “난 널 예쁘게 낳아줬는데 네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리 됐다”고 하잖아. 만약에 누가 엄마보고 엄마 딸은 “원래 그렇다”고 하면 어쩌겠어?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야.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 차이를 가지고 사람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야. 어떤 차이를 가지면 유난한 대우를 하고 어떤 차이로는 모욕과 무시를 하는 걸 문제 삼아야지, 차이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차이를 무시하는 건 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거야. 나만의 특성, 나를 드러내 주는 차이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있다는 건, 타인과의 차이 덕분인건데, 타인의 차이를 지워버리면 나도 같이 지워지는 거야. 타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홀대하면, 내가 가진 차이가 제대로 대접받길 바랄 수 있을까?

 

차이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어.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특성 탓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의 결과야. 곧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대접하고 누구를 홀대할지를 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야. 트집을 잡고 얕잡아 보고 괴롭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잘못인 것이지,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탓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문제야.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어. 먼저 ‘참아준다’는 부류가 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차이를 참아주겠다고 하면서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어떨까? ‘넌 한국 사람이 아니지만, 한국사람 취급해줄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사람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차이를 지워버리라는 강요쟎아. 네가 입는 그 옷을 입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널 받아줄게. 그럼 그건 받아주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거지.

두 번째는 ‘불쌍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어. 차이를 동정하는 거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봐라’, ‘노숙인을 봐라’, ‘넌 그보다 낫잖니’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어. 자신보다 힘든 환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내 행복을 저울질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행복 자체가 비참한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사람이 가진 장애나 어려움을 그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이라 보고 사회 환경을 뜯어고치려 노력하는 거야. 장애인을 보고 혀를 차고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인이 사회에서 생활할 때 장애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개인적 운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인 거니까,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장애인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만들면 되는 거지.

세 번째로 ‘혐오하고 못살게 구는’ 부류가 있어. 올해 한국 사회가 들썩인 일이 있었어. 남성간의 사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됐어.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본 어떤 사람들이 무지 화를 내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까지 실었어. ‘이 드라마보고 게이(남성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야)된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으면 그 드라마를 방송한 방송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게이인 사람들이나 그 친구, 가족, 또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것이었지. 엄마가 당뇨병을 관리하고 살듯이 에이즈라는 질병도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병일 뿐인데, 그걸 무슨 죄 값인 것처럼 취급하면 아픈 사람의 고통이 배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동성애자가 에이즈의 근원이란 건 일찌감치 엉터리로 밝혀진 사실이야.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불쾌감과 혐오감을 진리라고 여긴 광고였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부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싸움으로 여기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한국에선 요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있거든.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이 법 자체에 물 타기를 하는 거야. 설령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별반 힘을 못쓰는 법이 되도록 하려는 거지. 그런데 동성애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은근히 관심이 사라진 부분이 ‘학력 차별’을 금지하는 거였어.

차별금지법을 제일 반대하는 것은 기업들이야. 사람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고 해고하는 데는 많은 차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것은 간섭이라며 기업들이 아주 싫어해. 정부도 마찬가지야. 정부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명분을 갖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은 부자인 시민과 서민인 시민을 구별해서 아주 달리 취급할 때가 많아.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을 분류하고 선별대우를 하면서 안 그런 척 하려 하거든. 그런데 정부나 기업이나 대놓고 차별을 말하면 명분이 깍일 뿐더러 많은 비판과 저항을 받을 수 있어. 그런 판국에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립이 부각되면 저절로 차별금지법의 힘이 줄어드니까 정부와 기업은 뒤돌아서 웃을 수 있는 거야. 겉으로는 기독교인과 동성애자의 싸움, 군필자인 남성과 여성의 싸움, 명문대와 기타대의 싸움처럼 보이는 일들 뒤에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힘센 세력이 있는 거야.

 

대표적으로 매를 맞고 있는 건 동성애자들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을 숨죽이며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있어. 만약에 자신을 드러내면 동성애자들이 받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어. 공개적인 모욕, 멸시, 공격, 폭력이 예상되기 때문에 주눅이 들고 국가에게 당당히 보호를 요구할 수가 없게 돼. 눈에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이 있는 사람들, 그런 탓에 하나의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는 게 더 힘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이 대표적으로 당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동성애자들만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야.

 

가령 여성들은 차별받는다는 이유로 ‘여성’임을 드러내고 뭉칠 수라도 있어. 그런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병을 드러내고 뭉치기 어렵고, 학력차별의 경우처럼 오랜 정치경제적 고질병인 경우엔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뭉치기가 어려워. 그래서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결이란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우리 사회가 은근히 차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돼.

 

차별받는 사람들은 ‘화’를 낼 권리가 있어. 비슷하게 싸잡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다른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어. 그런데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과 차이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야. 모욕과 폭력을 당해 화를 내는 건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차이를 이유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야. 가령 장애인이라고 감금하는 일, 동성애자라고 직업을 뺏는 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자기 취향이고 자기 자유라고 말하는데, 그런 취향과 자유는 차이가 아니라 범죄인 거야. 살인을 취향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야.

 

차별이 가져오는 제일 무서운 결과는 분열과 애꿎은 사람들끼리의 싸움박질이야. 사회적 불운을 겪는 사람들끼리 창피를 주고 서로를 미워하면 사회적 불운을 고치는데 힘을 합칠 수가 없게 돼. 가령 학력이 낮아서 일하는 만큼 대우를 못 받는 남성이 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의 절반임금밖에 못 받는 여성이 있다고 해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할 때, 남성이 ‘난 여자가 나와 똑같은 임금 받는 꼴은 못 본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여자보다는 많이 받아야겠다’고 여성을 차별한다면, 이 남성이 얻게 되는 건 뭘까? 그래서 자기 자존심이 올라갈까? 자기 월급이 올라갈까? 결국 좋아할 건 사장밖에 없어. 일하는 남성이랑 여성이랑 힘을 합쳐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일을 사장은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성차별을 은근히 좋아할 거야. 차별을 통해 타인을 낮춤으로써 내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동반추락일 뿐이야.

 

차별받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을 싫어해. 가령 장애인, 동성애자, 비정규직, 혼혈인, 동남아인, 이런 식의 이름들인데,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이름들이 필요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이걸 ‘깔때기’처럼 사용하는 게 싫은거야.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점을 살려서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해. 가령 엄마를 ‘노인’, ‘저학력여성’ 이란 깔때기로 싸잡아 부르면 화가 나겠지? 이런 식의 싸잡는 이름에는 엄마가 자식 넷과 손주들을 키워냈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하고, 정직하고 알뜰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차별을 극복하려면, 깔때기같은 한두 가지 성격으로 싸잡아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중요해.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란 양희은의 노래가사가 있어. 이 노래가사를 들으면 푸근한 맘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어.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사건 속의 사람을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사람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돼.

난 어렸을 때 내가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어. 내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은 외교이고, 내가 문밖에 나가 구멍가게에서 뭘 사는 것은 무역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회가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 그것도 좋은 뜻으로가 아니라 구별해서 대우를 달리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싸잡는 이름을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로 다루는 게 필요해. 그래야 ‘너는 장애인이고 나는 비장애인인데’, ‘너는 남성이고 나는 여성인데’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회적 불운을 제거하고 더 평등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뭉칠 수 있는거야. 그렇지 않고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들끼리만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잘 될 수가 없을 거야. 이름 붙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이름을 대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가 없잖아. 싸잡아서 다수인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서만 싸우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다수가 되기 전에는 권리를 누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가진다는 걸 위해 같이 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을 벗어던져야 하는 거야.

 

차별하는 쪽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말이야.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누군가에게 창피를 주고 모욕을 주는데 부러 힘을 써. 그래서 온갖 불쾌하고 낮춰보는 말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해. 게이인 한 남학생이 직접 겪은 일인데, 같은 반 친구들이 졸업사진을 찍으면서 그 학생 어깨위로 올라서 밟았다는 거야. ‘너는 호모(남성 동성애자를 혐오해서 부르는 말이야)니까 짓밟아줘야 한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상대방이 모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상처받을 자존심이 있고 모욕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란 걸 인정하는 거야.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망치겠다고 덤벼들었다는 얘긴데, 그럼 오히려 그렇게 모욕하고 괴롭히는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상대방을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우습지 않아? 자신들이 모욕하려 하면서 사실은 그런 상대방의 존엄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서 자신들이 괴롭힌 상대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건 뭘까? 남을 괴롭혀서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은 정말 못난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걸 통해 ‘나는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건 누가 봐도 한심한 짓이야.

 

결국 차별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사람들한테 싸움 붙여놓고 잇속을 챙기는 ‘남’들, 그런 ‘남’들에게 속고 지배받고 빼앗기는 사람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지지고 볶는 일이 차별이야. 엄마가 “남 좋은 일만 시키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뭔가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혀를 차지. 그렇게 엄마가 한심하게 여기는 짓, 그중에 제일이 차별이라고.

작성일자 : 2010. 11. 1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엄마, 김치대란 때문에 걱정이 많지? “그렇다고 안먹을 수 있냐?”하면서 김장 시름에 빠져있으니 말이야. 엄마가 나 주려고 깍두기를 담갔다니까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엄마한테 내미는 용돈에 김치값을 얹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이 들기는 하지.

 

요즘은 밥 먹을 때 주요화제도 김치야. 단무지나 소세지 같은 건 부잣집 아이들이나 싸올 수 있는 도시락 반찬이었던 시절, 맨날 김치만 들어있던 양은도시락에서 국물이 새어나와 책이며 공책에 김치물이 배는 게 질색이었던 이야기, 도시락 반찬이란 게 나눠먹어야 맛인데, 엄마는 그 커다란 총각김치를 칼질도 안하고 싸줘서, 달랑 총각무 하나들고 도시락을 다 비워야 하는 게 싫었다는 이야기, 김장할 때 옆에서 쌈 배추 받아먹던 입맛 도는 이야기, 겨울 내내 먹던 김치찌개, 고구마와 동치미국물, 김치부침개, 봄에 너무 시어진 김치를 헹궈서 꼭 짠 후 기름에 볶아먹기 등 김치로 만든 음식이야기에도 끝이 없지. 그런데 세상에 말이야. 최고급 커피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락에 김치 싸오는 사람이 부자라는 얘기가 유행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내게 떠오르는 제일 큰 김치 사건은 이런 일이야. 외할머니 댁에 가서 들통 가득 김장김치를 얻어오던 밤이었어. 초등생인 나에게 엄마와 맞든 들통은 너무 무거웠어. 버스 막차를 타느라 빨라진 엄마의 걸음을 따라 뛰는 것도 힘들었어. 게다가 더 무서운 건 통행금지 시간이 다됐다는 거였지. 12시가 가까워지면 골목 여기저기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통행금지에 걸린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었어. 김치통을 들고 가는 모녀가 치안과 안보에 무슨 문제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와 난 통행금지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 무거운 김치통을 쥐어들고 뛰고 또 뛰었지.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흠뻑 젖었던 기억이 나. 호각소리를 따돌리고 간신히 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엄마는 반평생 넘게 겪었겠지만 한국에선 해방 이후 40여년 가까운 세월,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됐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였다는데,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란 TV 광고와 더불어 9시면 쌔근쌔근 자야 하는 줄 알던 나이 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어. 내가 통행금지의 공포를 느낀 건 광주민주화항쟁이 있던 때였어.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땐 밤 10시인가로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어. 석양을 보면 뭔가 가슴이 젖어드는 감흥이 있어야 하는데, 그땐 해가 질 무렵부터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동동걸음치며 불안에 떨었어. 식구 중에 귀가 안한 사람이 있으면 뒤가 마린 양 앉아서 기다리질 못했지.

 

그런데 김치통을 들고 뛰던 그 밤과 오늘의 김치파동이 나한테는 똑같이 ‘자유’의 문제로 여겨져. 김치를 갖고 자유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구? 맘대로 원하는 시간에 못 돌아다녔으니 통행금지가 자유롭지 못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비싸서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냐고 묻고 싶을거야.

 

자유라고 하면 남 눈치 볼 것 없이 내 맘대로 하는 것, 켕기는 것이 있을지라도 ‘대한민국 은 자유주의 국가인데 무슨 간섭이냐‘고 큰소리치면 장땡인 것, 자유부인 같은 영화제목처럼 무슨 도덕적 금기를 어기는 것….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자유의 사연도 많아.

 

솔직히 엄마한테 ‘자유’란 말은 그다지 달가운 말이 아닐 것 같아. 엄마가 우리한테 무슨 소리를 할라치면,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좀 내버려두라’고 ‘자유를 달라’고 했으니 엄마한테는 자유가 좀 징그러운 소리일 것 같아. ‘통행금지, 그게 있어서 애들이 밤늦게 싸돌아다닐 걱정 없지, 범죄 걱정 없지, 나라에서 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 엄마는 통행금지가 없어졌을 때 아마 그 당시 젊은이들처럼 환호하진 않았을거야. 또 엄마에게 그놈의 자유란 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텅 빈 말이었을 거야. 평생 생계를 위해 싼 값의 일과 그 돈으로 자식돌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가져보지 못한 엄마에게 ‘자유’란 늘 ‘장차 올 것’이었어. 빚 다 갚고 나면, 전세방이라도 얻고 나면, 자식 공부 다 시키고 나면 올 것, 궂은 과업을 다 마친 후에나 오게 될 해방이 자유였을거야. 그래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참고 견디는 것인지라, 엄마는 자유란 말을 평생 입에 담아본 적도 없을 거야. 엄마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말을 자주 썼지. 틀려먹은 세상일과 행동거지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지 좋은 것만 하고 사나’ 라고 엄마는 타박하쟎아. 그럴 때, 엄마가 생각한 건 ‘사람의 도리’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엄마가 생각하는 ‘징그러운’ 자유, 그리고 ‘자유’라는 말 대신 쓴 ‘고생 끝의 해방’과 ‘사람 된 도리’처럼 자유라는 말에는 정말 많은 표정과 뜻이 있어.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인지에 대한 얘기에서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

 

먼저 ‘자유’라고 하면, 흔히 내가 뭘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하고 하지 못하게 막는 간섭이나 강요, 위협이 없는 것을 말해. 그런데 통행금지처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절대 돌아다니지 마라, 안 그러면 처벌 된다’라는 강압이 없더라도 자유롭지 못한 일은 무지 많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있쟎아. 그런 사람들에게 ‘넌 네 좋은 것을 선택해 할 수 있어’라는 건 말뿐으로 되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걸 하려면 그걸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해. 그 뭔가의 대표적인 것이 지금 세상에선 ‘돈’인 경우가 많지. 내가 그림이 좋았고 또 날 눈여겨본 선생님이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하셔서 내가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 하지만 미대에 가려면 입시미술 전문 학원을 다녀야 하고 따라서 비싼 학원비랑 재료비가 든다는 걸 엄마는 전혀 몰랐어. 그저 재주가 있다하니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선뜻 그러라 한 거였어. 그걸 아는 나는 간단하게 미대를 포기했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것에 다가갈 수단이 없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 ‘하지 말라’는 강압이 없었어도 말이야. 김치를 먹든 양배추를 먹든 그건 선택이겠지만, 김치를 살만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건 선택이 아닌 것이지. 그래서 김치 먹기가 힘들어진 것은 자유가 그만큼 없다는 것 혹은 줄어들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야.

 

김치가 없는 상차림을 생각할 수 없는 나라에서 그게 밥상 위에 못 오를 만큼 비싸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김치파동이 나기 전이나 후에나 그에 대한 분석과 진단들을 내놓았어. ‘4대강 사업 같은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다’, ‘농업천시 때문이다’, ‘환경위기 때문이다’, ‘시장의 큰 손들의 횡포를 방치해서이다’ 등등 말이야. 그런 의견들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들이 진지하게 고려되는 분위기라면 뭔가 대책이 나왔을 거고 앞으로의 대책도 믿어볼만한 것 일거야. 그런데 정부 권력자나 시장의 큰손들이 싫어하는 의견이라고 해서 묵살하고,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해꼬지를 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어? 바른 말․책임질 말을 할 사람이 주눅 들어 줄어들게 되고, 쓴 말을 새겨들어서 대책을 세울 가능성도 줄어들 거야.

 

엄마, 노벨상 알지? 그 유명한 노벨상을 탔던 한 경제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 언론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사람이 굶는 일 같은 건 생길수가 없다고. 왜냐하면 언론이 자유로우면 무슨 문제가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리 문제를 알고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굶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고 말이야. 또 그 학자가 한 말은 지금 세상에 굶주림이 발생하는 것은 식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것이야. 사실 먹을 것은 풍족한데, 사람들의 수중에 그걸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굶주리게 된다는 거야.

 

이 학자의 말을 우리 형편에 비춰 보면 이런 말이 돼. 김치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그걸 사 먹을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야.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낮은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세금을 걷는 일 등에서 부자에게 오히려 유리한 정책을 펴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이 심해져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야. 소득불평등이 심하면 민심이 뒤숭숭하기 마련이쟎아. 정부에 대해 불평하거나 쓴소리를 하는 게 듣기 싫어서 당국은 입단속에 나서게 되지.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자르거나 가짜 정보를 과대포장해서 널리 알리는데 엄한 애를 쓰게 돼. 그러면 사람들의 말할 자유가 더 많이 억압되고, 그런 억압의 결과로 시민들은 필수적인 정보와 판단의 근거를 얻지 못하게 돼. 시민의 감시와 쓴소리에서 벗어난 정부는 불평등한 판단과 결정을 계속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김치 파동과 같은 재앙이 벌어진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지 말라’만이 아니라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길이 막막해진 것도 자유의 문제인 거야. ‘말하고 듣고 따져볼 수 있는 자유’와 굶주림이 관계돼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은 자유로 연결돼 있어. 특히 엄마가 늘 강조하는 ‘사람된 도리’와 자유는 아주 끈끈한 관계야.

 

자유를 느낀다는 건 사람사이에서 서로의 처지를 느끼고 이해하는 일과 같아. 서로 처지를 이해하면 서로에 대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돼쟎아. 또 같이 힘을 합쳐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쟎아. 그런 관심과 책임감 속에서 같이 누리는 자유가 인권에서 말하는 자유라고 할 수 있어. 엄마가 ‘징그러워’하는 ‘자유’는 제 잇속대로 제 편한 대로만 하려하고 궂은일은 피하려는 거쟎아. 그러니까 엄마가 말하는 ‘사람도리’라고 하는 것과 자유는 별로 다른 것이 아니야.

 

시골로 귀농한 후배들이 있다고 했쟎아. 걔들이 바쁜 틈틈이 채소를 상자 가득 보내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엄마한테도 맛뵈기로 가져간적이 여러번있어. 그때마다 엄마는 반찬거리가 생겼다고 반색을 하쟎아. 그 후배들과의 관계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농산물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게 됐어. 한여름의 김매기, 비닐하우스 안의 뜨거움, 비오면 모종이 상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새벽잠 설치며 한밤중까지 랜턴까지 끼고 일하는 그 고됨을 무시할 수가 없어.

 

김치 파동은 김치를 사먹는 사람들의 자유문제만이 아니야. 그걸 생산하는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김치파동이 있기 전에도 농민들은 늘 불안하고 팍팍한 삶에 대해 호소했어. 하지만 농민을 직접 보지 않고 수퍼마켓에 진열된 물건을 살 뿐인 소비자인 우리는 수퍼마켓의 가격표가 거슬리지 않는 한 농민의 얼굴을 떠올릴 일이 없었지. 배추 한포기가 만원이 넘는다는 호들갑속에서 일찌감치 밭떼기로 넘겼다는 농부가 받았다는 형편없는 가격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아까워’라는 말을 남발하쟎아. 무슨 횡재를 놓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 농부가 김치파동이 날 줄 알고 아껴두었다가 배추를 비싸게 팔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애시당초 김치파동 같은 게 날 리가 없지.

 

동네시장 귀퉁이에 앉아 채소를 파는 사람들도 배추값이 올랐다고 수지맞을 일은 전혀 없어. 시골의 농부와 동네 시장과 평범한 사람들의 밥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건 서로 얽히고 설킨 문제니까 말이야. 생산자를 목조르고 동네의 작은 가게를 죽이고 소비자를 울게 하는 손은 어차피 같은 손이거든.

 

소위 자유를 좋아한다고 우기는 어떤 사람들은 이 손을 그냥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불러. 세상의 자유 중에 최고 좋은 자유는 시장의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 말에 따르면, 시장을 가만 내버려두면, 사람들이 다 알아서 열심히 살고 제일 좋은 것을 쫓아다닐 테니까 세상이 절로 좋아질 거래. 그래서 정부나 노동조합, 인권운동 같은데서 불평등이문제다, 소득재분배를 해야한다느니 어쩌구 하면서 시장 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고 기업활동에 방해를 하면 잘 돌아갈 일에 문제가 생기니까 가만 놔두는 게 최고라고들 말해. 가만 놔두는 게 그 사람들에게는 자유라는 말의 뜻이야. 말은 가만 놔두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가만 놔두는 건가? 불의한 일이 있을 때 아무말 안하는건 가만 놔두는게 아니고 불의한 쪽의 편을 드는 일이쟎아. 강자와 약자가 맞붙을 때 가만 놔두는 건 약자한테 깨지라는 말과 같은거쟎아.

 

엄마 말처럼 사람간에 도리가 있듯이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장에도 도리가 있는것 아니겠어? 길거리에 교통신호가 있듯이 시장에서도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이 있고, 그것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건 바로 사람이야. 엄마가 믿는 하나님 말고 이 세상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누군가 득을 봤다면 그건 누군가 손해를 봤다는 것이고, 누군가 승리했다면 누군가 패배했다는 것이지. 대기업이나 대형마트들은 ‘좋고 싸니까 우리한테서 사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누구에게 싸다는 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싼 가격을 위해 많이 뺏겼다는 말이야. 물론 더 노력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앞서 나갈 수도 있지.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한목소리로 칭찬해 주쟎아. 우리가 문제삼는 건 사람을 헐값으로 부려먹는다거나 농부같은 생산자에게 제 값을 안준다거나 하는 일이야. 또 시장을 통째로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 눈치도 안볼 조건이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거나 세금으로 닦은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시설을 누구보다도 많이 이용해놓고 사회에 대한 기여는 생각도 안하는 기업의 행태를 문제 삼는 거지.

 

시장이란 늘 사람들의 행동으로 만들어온 것이야.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사람들이 조작하는 것인데, 그럼 정의롭게 조작해야 하는 것이지. 생산자인 농부나 도시의 작은 상인이나 소비자에게 정의롭게 말이야. 생산자인 농부가 수지타산이 안맞아 제초제를 뿌려 애써 키운 작물을 죽이거나 트랙터로 갈아엎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다 망해서 큰 가게에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살아가고, 소비자인 사람이 열 지갑이 없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요즘 엄마 같은 방식의 소비습관이 뜨고 있는 것 알아? 엄마처럼, 동네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 동네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습관은 대형업체의 등장으로 구습이 됐다가 요즘 ‘윤리적 소비’라는 말로 되살아나고 있어. 다소 불편하더라도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한다거나 되도록 지역에서 이웃들이 생산한 물건을 쓰려하고, 싼 가격보다는 공정한 가격을 찾아 치르려고 하고, 좀 더 환경을 생각한 물건들을 찾아 쓰는 노력들을 말해. 엄마는 동네사람, 아는 사람의 집을 늘 찾아다녔쟎아. 코 앞에 더 싸고 더 좋은 가게가 있더라도 말이야. 난 머리를 깍아도 항상 엄마가 아는 사람집에 데려가는 게 싫었어. 엄마 아는 동네 사람이라고 너는 항상 거기가서 머리를 깍아야 한다는게 고리타분했어. 난 엄마가 권하는 미장원이 아니라 친구들이 가는 근사한 메이커 헤어샾에 가서 어울리고 싶어도 말이야. 그런데 엄마한테는 그게 사람의 도리였던 거야. 엄마의 그런 소비습관만으로 모든 것이 당장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가만 놔두는 게 아니라 뭔가 바꾸기 위한 시작일 수는 있을 거야. 인권의 역사에는 법과 제도를 바꾸고 때론 세상을 뒤엎어버리는 엄청나 보이는 일들이 많아. 아무리 엄청난 일이라도 그건 하나같이 사람들이 한 일이야. 서로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책임지는 일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말이야. 절이고 씻고 다듬고 버무려 오랜 기다림 속에 시원하고 감칠맛 나게 익어가는 김치처럼 우리네 삶도 익어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야.

 

서양 사람들은 인권을 말할 때 ‘빵과 자유’라는 말을 자주 써. 그 사람들은 빵을 주로 먹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빵’을 먹어야 사람이 살아가니 어느 누구도 빵먹는데서 제외되면 안되니까 여기서 ‘빵’이란 말을 사람 사이의 평등이란 말로 바꿀 수도 있어. 그러니까 ‘빵과 자유’라는 말은 ‘빵(평등)’이 있어야 사람은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사람이 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돼. 우리식으로 바꿔 말하면 ‘김치와 자유’가 되겠네.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지. 자유가 고통받으면 평등도 고통받고, 그 반대도 똑같다는 말이야. 그럼 그 반대로 자유로운 만큼 평등하고 평등한 만큼 자유롭다는 말도 될 거야. 혼자 살 궁리 말고 더불어 살 궁리를 하는 게 자유를 얻는 방법이란 말도 돼.

 

엄마가 고생 끝에 올 낙으로 아껴둔 자유란 말, 이젠 아끼지 말고 썼으면 해. 엄마의 인생속엔 언제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 때문에 엄마는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주고받으며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올 겨울에 배춧값이 얼만큼 오르든 내리든 어쨌든 적은 양이라도 엄마는 김장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아무리 비싸더라도 이집 저집에 김치를 선물로 안기겠지. 비슷한 재료로 담가도 집집마다 다른 맛이 나는 김치, 그런 개성이 자유의 맛인 것이고, 서로에게 선물로 안기는 김치는 우리에게 먹는 것 이상의 것이야. 대가없이 주는 선물을 빼앗긴 사회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일 테니까.

작성일자 : 2010. 11. 1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엄마! 나이 엇비슷한 선후배들이나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게 부모님 이야기야. 다들 하나같이 너무 서러웠던 가난과 부모님의 고생을 한 묶음으로 얘기들 해. 도매금으로 말하면, 집집마다 하나같이 아버지들은 왜 그리 사고를 치셨는지, 어머니들은 왜 그리 지지리 고생들만 하셨는지 몰라. 그래도 잘나가던 때가 잠깐 있었다는, 눈부시게 찬란한 날이 아주 잠깐 있었다는 얘기도 꼭 양념으로 덧붙어. 하나같이 ‘어쩜, 우리집하고 똑같다’라고 맞장구치며 얘길 나누지. 가끔은 누가 더 극적인 추락을 했고, 누가 더 어렵게 살았는지 경쟁하는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문제는 그 얘기들이 뻥이 아니라 다 사실이란 거고, 다행인건 다들 웃으며 술자리 안주삼아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무사히’ 성장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무사한 성장의 배경은 좋게 말하면 ‘교육’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학벌’일 수 있는 그런 거란 걸 같이 느끼곤 해.

 

그런 얘길 나눌 때마다 내가 보태는 얘기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아빠는 허구헌날 전세방까지 잡혀먹고 일 벌리다 홀랑 날리고, 엄마는 파출부다 보따리 장사다 안 해본 것 없이 다하고 말이야.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초등학교 밖에 못나와 허드렛일을 전전했던 엄마가 어떻게 자식 넷을 다 대학공부를 시켰느냐는 것이야. 지금 생각해도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던 것 같아.

 

지금도 생각나. 나 어렸을 때, 엄마는 돈을 벌어오면 제일 먼저 누런 봉투에 돈을 넣었어. 그 때는 학비를 학교에서 나눠주던 누런 봉투에 넣어서 서무과에 갖다내고 그 봉투에 도장을 받아왔어. 네 자식의 학비 봉투에 돈을 넣고 난 후에야 엄마는 쌀독을 채웠어. 쌀 대 보리의 비율이 4대 6인 혼합미를 사느냐 6대 4인 것을 사느냐는 남는 돈이 얼마냐에 달려 있었어. 어떤 달에는 쌀사기를 아예 포기하기도 했어. 그런 때는 생활보호대상자에게 동사무소에서 갖다 주던 밀가루 한포대가 한 달 식량이 됐지. 보리가 너무 많아 시커먼 도시락이 창피하다고 동생들은 도시락을 그냥 가져오기도 했고, 한 달 내내 먹는 수제비에 질려서 숟가락을 놓아버리기도 했어. 학비와 최소한의 끼니거리를 제하고 난후 나머지 생활은 그냥 버티는 것이었어. 그래도 우리는 학교를 거르는 일이 없었고,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한 일도 없었어. 엄마의 돈 쓰는 것 첫번째가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지.

 

그러던 어느날 동네 수퍼 아줌마한테 모진 소리를 들었어. 수퍼 계산대에 앉아서 온 동네 살림살이를 꿰뚫고 있던 그 아줌마의 형편은 그 골목에서는 꽤 사는 편에 속했지. 연탄을 사가도 수백 장이 아닌 몇 장씩만 사가고, 가끔 외상까지 지는 우리 집이 제대로 된 고객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어. 맏이라서 살림살이와 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던 나는 그 수퍼에 가는 게 정말 싫었어. 그 아줌마가 워낙 사람을 무시해서 말이야. 그 아줌마가 날린 결정타는 이런 거였어. “너희 엄마, 정말 웃긴다. 뭘 믿고 널 인문계에 보낸다니? 형편 더 좋은 집들도 안 그러는데. 우리 딸도 안 보낸다. 넌, 얼른 돈이나 벌어라. 너희 엄마 개꿈 같은 건 따르지 말고.”

 

정말 서러우면서도 그 아줌마 얘기가 맞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도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 ‘형편은 점점 더 나빠져 가는데, 빨리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계 고교 말고 취업을 준비하는 학교에 가야하지 않을까? 나중에 내가 돈 벌어서 공부하면 차라리 속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어. 엄마의 계획은 ‘계속 공부’말고 다른 것이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엄마의 개꿈은 현실이 됐고, 엄마는 자식 넷의 교육을 완수(?)하여 그래도 가슴 펴고 제 앞가림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어. 엄마의 고생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도 한참 모자라지만, 당시 조건이 받쳐준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해. 누런 봉투에 학비를 넣고, 밥만 챙겨 먹이면 공부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어. 과외는 전면금지였고, 당시 대입에서 수석을 한 학생들의 인터뷰는 언제나 ‘교과서만 갖고 공부했어요’라는 식이었어. 그 말은 겉치레였던 게 아니라 사실이었어. 단칸방에서 밥상을 책상삼아 공부한 청소부의 아들이 수석을 하기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도 돈을 아끼려고 서너 가지 과목만 참고서를 사고, 나머지는 정말 교과서만 갖고 공부했어. 가끔 형편을 아시는 선생님들이 교사용으로 제공받은 참고서를 그냥 주시면 정말 고마웠어. 나뿐 아니라 고생담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다들 한목소리로 말하는 게 자기들 학교 다닐 때 조건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거야.

 

물론 그저 세상이 좋아서였던 건 결코 아니었어.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독재자가 그나마 민심을 사려고 취한 조치가 ‘전면과외금지조치’란 거였으니까. 그 독재자는 데모하는 학생들도 많이 길러냈어. 단 하루에 수백 명이 넘는 대학생을 한꺼번에 잡아넣어서 대학이 경찰서로 이전했다는 소리도 들었지.

 

그런데 과외 없이 대학에 갈 수 있었던 혜택을 봤고, 학창시절에 사회 불의와 불평등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나의 세대 사람들이 학부모가 되면서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 초등학생 때부터 조기유학 보내고, 어학연수 보내고, 온갖 유형의 사교육에다 귀족학교 만들기에 몰두하여 특정 지역의 아파트값과 학원비를 천정부지로 솟구치게 만들었어. 빈부차이 없고, 부모의 경제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원하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게 믿어지지가 않아. 누런 봉투에 최소학비를 넣고 밥만 먹이면 공부시킬 수 있다고 느꼈던 엄마들이 이제 버틸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어. 속상한 일들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만, 그중에서 내가 요즘 가장 가슴 아픈 내용은 가난한 서민들이 자식교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야. 자식이 공부를 잘하려면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어. 없는 집 자식은 공부할 생각을 말라는 말이야.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학비부터 내고 생활을 설계할 수 있었다면, 요즘 서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자식의 학원비부터 끊을 수밖에 없대. 학교가 아닌 사설기관에 내는 ‘학원비’가 필수적인 교육비가 된 것, 가난한 사람들이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학교’에 다녀도 의미가 없다는 것, 이게 의미하는 것은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거야.

 

내 조카들, 엄마의 손주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요즘은 정말 많이 달라졌어. 지방에 사는 막내는 돈이 없어 아이들 학원을 못 보낸다고, 지방에 사니까 아이들이 더 처지는 것 같다고 친정에만 오면 속상해하지. 학원에다 인터넷 수강까지 하는 상대적으로 좋은 처지의 서울 사는 조카들은 그런 속에서도 불안해해. 더 좋은 동네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것, 그렇게 해도 좋은 대학에 가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 대학을 나와도 자기 앞가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우울해해.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할 때 태어난 첫 조카가 고3을 눈앞에 두고 있쟎아. 그 애와 어느날 얘길 나누었는데 도대체 ‘뭐가 돼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야. 선택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하고 낙오될 거란 두려움이 스무 살이 못된 아이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다는 게 놀랍고 무서웠어. 요새 아이들 말로 그걸 ‘잉여’라고 해. 쓸모없고 가치 없는 존재,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나 의미 있는 인생의 목표 같은 걸 갖기 힘든 자신들의 처지를 ‘잉여’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깔보고 비웃어. 일등이 되지 않으면 결코 무엇으로도 존중받을 수 없는 현 세태에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말하는 거야. 교육의 홍수 속에서 또는 가뭄 속에서 아이들은 불행한 것 같아. 불행하다면 과연 그것은 교육일까? 아마, 교육이란 말을 잘못 쓰고 있거나, 교육에 꼭 들어가야 할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이상한 맛이 나서일 거야.

 

먼저, 우리에게 교육은 ‘대학가기’와 같은 말처럼 쓰이는 것 같아. 엄마가 나를 위해 헌신했던 교육도 지금 조카들이 매달려 있는 교육도 사실은 ‘대학에 가기위한 수단’의 줄임말인 거지. 대학을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회적 대우, 직장에서의 임금차별이 너무 심해서, 사실 대학을 강요당한 건 아닐까? 지금은 80%가 넘게 대학에 가는 시절이지만 대학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늘어났어. 살아남기 위해 ‘필수’로 요구받는 자격의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부담’도 크게 늘어난 거지. 그리고 그 부담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일 수록 교육의 사다리에서 발판이 부서져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거야.

 

대학시절, 고등학교 때 한반이었던 친구를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어. ‘몇 년 만이네’ 하면서 차 한잔 하고 헤어졌는데, 그 얘는 졸업 후 계속 직장을 다녔지만 차별이 너무 심해서 야간 대학 경제학과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어. 그런데 공부가 하나도 재미없다는 거야. 하지만 직장에서 버텨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어. 일도 힘든데 야간 대학을 다니는 탓에 몸도 살림도 더 고되다고 했어. 자신에게 경제학이란 건 의미가 없는데, 직장에서의 경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학과라고 했어. 그 아이가 애써 야간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원하는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씁쓸하지만 내 짐작엔, 대학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의 차별 다음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의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차별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차별의 연쇄사슬 속에 매이는 거라면 교육에 뭔가 단단히 문제가 생긴거야.

 

‘교육에 대한 권리는 인권 중의 인권’이라는 말을 내가 보는 인권책들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말해. 이건 뭘 말하는 걸까? 분명 ‘대학에 가기 위한 교육’을 말하는 건 아니야. 교육이 인권이라고 말하는 건 자기 자신이나 보호자의 사회적 신분, 경제적 능력 등을 따져서 누구에겐 문을 열고 누구에겐 걸어 잠거서는 안된다는 걸 말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을 위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야. ‘삶’을 위한 교육이란, 제 자신이 귀한 줄 알고 자기 속에 담긴 보석을 발견해서 다듬는 과정을 말해. 이 과정 속에서 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품고 있는 보석도 볼 줄 알아야지.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와 존엄성을 알고 존중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해. 무시하고 호령하는 태도 또는 주눅들고 눈치보는 태도가 길러진다면 교육의 목적에 고장이 난거야.

 

청문회에 나오거나 신문방송을 시끄럽게 만드는 성추행, 각종비리 등의 주인공들을 보면 대단한 학력의 소유자들이야. 그런데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쟎아. 게다가 사람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걸 보면 그 거창한 학력이 오히려 꼴 사나와 보이쟎아. 학벌은 쌓았으나 사람과 삶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안했다고 사람들은 혀를 차곤하지. 학력과 교육은 같은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어.

 

또 다른 큰 오해가 있어. 인권이란 말이 유행을 타면서 대학진학을 위해 ‘내 자식 내 맘대로 내 돈 갖고 하고 싶은 대로 공부 시킬 자유’를 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야. ‘내 자식 내 맘대로 내 돈 갖고’를 외치는 사람들은 돈 주고 ‘상품’을 사는 거쟎아. 그런데 인권은 상품이 아니거든. 상품을 살 자유는 소비자가 누리는 자유인 것이고, 교육은 공기처럼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할 것이야. 공기를 탁하게 만들어 놓고 누구에게는 산소마스크를 주고 누구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면 공기를 마실 자유는 없는 거지. 교육이란 공기를 자유롭게 들여 마시기 위해서는 그걸 누리기위한 자원이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는 거야.

 

교육을 통해 자기 삶을 맘껏 호흡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평등한 조건이 필요해. 그러니까 기초교육은 물론 가능하다면 대학교까지 무상교육, 즉 돈 안내고 공부할 수 있어야 교육권이 인권으로 존중된다고 할 수 있어. 한국에서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하면서도 학부모들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하쟎아. 사교육이란 상품을 사지 않고는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 그건 무상교육일 수가 없는거야.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기에 ‘무상’으로 하는 건데, 별도의 돈을 요구한다면 그건 사기치는 것과 같아. 원한다면 누구나 대학까지 공짜로 공부할 수 있고, 거기서 고려되는 것은 각 사람의 자질과 취향이 돼야지, 돈 때문에 학교 문턱에서 좌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교육권의 원칙이야.

 

부모의 소득수준이 높은 만큼 사교육비에 쓰는 돈이 많고, 사교육비에 쓰는 돈만큼 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높아진다고들 말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칠 수 있는 최고 방법이 교육인데, 오히려 불평등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교육이 인권침해의 수단이 되고 있는거야.

 

엄마가 연속극 보다가 ‘마이걸’이란 연속극 제목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 있어. 엄마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맹모삼천지교’를 약간 비튼 ‘맹부삼천지교’란 제목이었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 후에야 엄마는 제목의 뜻을 물어봤어. 생활환경조사서에 국졸이라 쓰지 말고 높여서 중졸이라 쓰라고 했던 엄마였으니까 그런 단어를 들어보지 못했겠구나 짐작했어. 신문읽기를 좋아하는 아빠는 ‘뉴욕 필 하모니’가 뭐냐고 물어본 적 있어. 내 친구들 부모님도 마찬가지일껄. 한글을 모르는 엄마 얘기를 하다 눈시울 적시는 친구도 있어. 하지만 그런 얘기를 나눌 때의 우리는 엄마 아빠의 ‘무식’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몰라도 얼마나 사리분별 있고 현명한 분들인가를 얘기하기 위해 그런 사건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야. 그런 우리들이 교육의 울타리 속에서 만나 사람의 맘을 헤아리고 불의한 일에 분노하는 법을 배우면서 부모님의 사리분별은 이어받고 학력은 높였던 거야.

 

그런데 요즘은 공부 많이 하고 전문직인 사람의 자식들만 대학에 모여있대. 그러면 그런 대학은 높은 사람들만 모여사는 성채가 되는 것이고, 성문밖 사람들에게는 성안에 들어갈 기회가 없는거야. 이렇게 되면 교육은 인권이 아니라 특권이 되고, 누구는 교육 때문에 많이 자유로와지는 반면 누구는 교육 때문에 숨이 막히게 돼. 교육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교육권의 대표원칙이 무너지는 거지.

 

교육이 평등해야 한다는 건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교육이 평등해야 우리는 농어촌 출신, 나와 다른 형편과 처지의 사람, 서로 다른 인종이나 국가 출신의 사람 등과 골고루 어울릴 수 있어. 그런 어울림 속에서 불평등·편견·차별의식을 버릴 수 있는 법을 배우고 다른 세계와 문화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무엇보다도 교육의 사다리를 절대 걷어치워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밥그릇과 목소리를 한꺼번에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야. 임시적이고 언제든 버려지고 쉽게 교체되는 일거리만 늘어나는 세상을 바꿀 힘은 대통령이 외치듯이 어떤 경제기적이나 토목공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답은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거야.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관심을 갖느냐, 문제를 바꾸기 위한 일을 어떻게 궁리하고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는거야. 교육이 일부 사람들의 특권이 되면 될수록, 나머지 대다수는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어. 가난해진다는 건 경제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렇다는 말이야. 경제적으로 가난하면 정치에도 관심을 잃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결정을 특권층이 내리게끔 놔두고 손놓게 돼. 교육은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열쇠야.

 

그래서 교육은 학교교육에만 매인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어. 자식 교육을 다 마친 엄마도 교육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고, 나도 그렇고 조카들도 그래. 우리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우리 자신의 끝이 없는 교육과정이야. 엄마는 평생학습을 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어렸을 적 교회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풍금연주를 칠순이 다된 지금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난 엄마가 원하는 걸 공부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멋진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봤어. 교육의 사다리가 무너지는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 기회만 있다면 자기 나름대로의 풍금연주를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 그런 믿음 위에서 교육권은 인권인 것이야.

작성일자 : 2010. 10. 3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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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이 시간 쯤, 엄마가 뭘 하고 있는 줄 뻔히 알아. 방송 3사의 아침 연속극을 채널 돌려가며 다 보고난 후 또 유선방송 채널로 돌려서 주말연속극 재방송을 보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아이구, 김치도 담그고 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냐? 연속극에 미쳐서”라고 푸념하고 있을 거야. “연속극에 미쳐서”를 젊은 사람들은 ‘드라마 마니아’라고 해. 엄마를 방바닥에 붙잡아매고 있는 그것을 ‘드라마’라 부르기보단 ‘연속극’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다음 회를 고대하게 만드는 간질간질함으로 끝맺고 또 이어지고 이어지는 이야기니까.


난 엄마가 연속극에 미쳐 사는 요즘이 좋아. 엄마가 새벽 찬바람에 일 나가지 않고 아침에 뒹굴거리며 연속극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아. 파출부, 보따리 장사, 화장품 외판으로 점철된 엄마의 사투에서 마지막 일은 청소 일이었지. 장사는 지긋지긋하고 나이가 너무 많아 어디서도 써주지 않는다며 한숨짓던 어느 날, 엄마는 어떤 용역회사를 통해 지하철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됐다고 했어. 1주일 청소하고 15만원을 받아왔다는 말에 난 너무 속상했어. 엄마에게 월급봉투를 갖다 줄 능력이 없기에 당장 그만두라고 할 수 없는 자식이라 너무 미안할 뿐이었어.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아는 사람을 통해 호텔 청소원이 됐어. 공교롭게도 내가 일 때문에 자주 가던 국가인권위원회 옆에 있던 호텔이었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강의를 하거나 회의를 하다가 창문 밖의 호텔을 바라봤지. 청소를 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어. 어느 날 엄마를 만나려고 호텔 앞에서 기다렸는데 엄마는 호텔 정문이 아닌 엉뚱한 출입구에서 나왔어. “호텔은 여긴데 왜 거기서 나와?”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청소하는 사람들은 정문으로 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 그 한마디에 나는 그 나머지에 대해선 묻고 싶지도 않았어. 첫 버스가 다니기도 전 새벽 칼바람에 일 나간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밥을 먹는지, 일하면서 얼마나 어떻게 쉬는지 말이야.


꼬박 1년을 채운 뒤에야 엄마는 청소일을 관둘 수 있었지. 나와 동생들이 분담하여 매달 얼마씩을 엄마에게 드리기로 약속을 하고 ‘제발 관두라’고 해서 말이야. 그런데 가슴 한쪽이 켕기는 질문이 있어. 우리들이 엄마에게 일을 관두게 한 이유 중 제일 큰 이유는 과연 뭐였을까? 엄마에 대한 걱정이 과연 1순위였을까? 그게 아니라 장성한 자식들에게 청소일 하는 엄마가 ‘창피’한 것이 더 큰 이유는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내가 활동하는 단체의 후배가 모 대학 청소노동자들과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어. 대부분 엄마 나이대의 분들이었어. 가족 생계의 책임자들이었지만, 60만 원 정도밖에 못 받는 조건에서 일하고 계셨지. 학생과 교직원들이 등교하기 이전인 새벽녘에 강의실과 화장실 청소를 다해놓고 유령처럼 사라져 지하 모퉁이에서 식은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대학에서 나이가 많다고 한꺼번에 자른(해고) 거야. 그래서 그분들이 난생 처음 데모란 걸 하게 됐지.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말이야. 후배가 그분들을 오랫동안 만나러 다녔는데, 정말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거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 같은 청소일을 하더라도 대학에 가서 일한다고 하면, 자식들에게 낯이 선다는 거였어.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임에도, 저임금에 형편없는 처우도 모자라 수치심까지 끼어들어 괴롭히고 있었던 거야.


엄마가 일을 관둔 뒤 내 기억에서 지웠던 가슴 아팠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됐어. 많은 엄마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사건 때문이야. 등장인물은 계속 바뀌지만 뻔한 줄거리의 연속극처럼 말이야. 요즘 인터넷에서 ‘OO대 패륜녀’, ‘OO대 패륜남’이란 게 큰 뉴스가 됐어. 학생들이 청소일하는 분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했다 해서 붙인 이름이 패륜녀, 패륜남이란 거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 전체가 패륜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어.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유령’으로 취급하고 있다면 말이야. 이것과 관련해 나도 창피한 기억밖에는 떠올릴 게 없어.


병원에서 일했던 한 후배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어. 보통 같은 층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의사랑 간호사들은 부딪칠 때마다 서로 인사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청소일하는 분들도 보통 한 층을 담당하는데, 그분들과는 인사를 하는 경우가 없었단 거지. 먹을 거를 나눠먹더라도 그분들과는 나눠본 적이 없대. 그리고 신기한 건 아무리 오랫동안 봤어도 그분들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나도 그 말을 듣고 생각해봤지. 학교 다닐 때,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들렀던 교무과 직원 얼굴은 아직도 기억나는데, 4년 내내 봤던 청소하시던 분들의 얼굴은 한 명도 안 떠오르는 거야. 분명, 화장실에서 복도에서 수도 없이 부딪쳤는데 말이야. 게다가 우리 학과가 있던 건물은 아주 작았거든. 단지 떠오르는 건 그분들이 밥 먹던 광경이야. 학교식당에서 밥 먹는 걸 본 적은 없어. 지하의 작은 쪽방 같은 곳, 정말 성냥갑 같은 수준으로, 천정이 낮아서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 전기밥솥이랑 도시락에 싸온 찬을 바닥에 늘어놓은 모습이었어. 소위 정규직이었던 수위 아저씨들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자주 호통을 쳤어. 나와 친구들은 그 아저씨들을 ‘게슈타포’(옛날 독일에 아주 나쁜 정권이 있을 때 비밀경찰의 이름이야)란 별명으로 부를 뿐, 아주머니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또 기억나는 건 남학생들은 아주머니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볼일을 봤다는 거야. 나도 요즘 경험하는 건데, 주말에 식당에서 알바를 할 때면, 앞치마와 위생모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잖아. 그런 차림으로 화장실에 들어가면, 남자 손님들이 전혀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놓은 채 볼일을 보는 거야. 난 당황스러운데 상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 쪽에선 내가 전혀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 남학생들이 청소하는 아줌마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성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런 식의 ‘패륜’을 청소일, 식당일 같은 직업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바꾸면 된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험하고 지저분한 일 하는 사람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라’는 식의 설교로 해결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정작 중요한 것은 줄 것을 제대로 주는 거고, 원래 당연히 가지고 있던 권리를 되돌려주는 거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차갑건 따뜻하건 마찬가지인 거고, 옆에서 마주보는 시선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지. 이게 인권운동,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야.


엄마! 앞에서 내가 말했던 모 대학 청소노동자들은 그 후 노동조합을 만들게 됐어.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학교당국을 상대로 싸워서 계속 고용됐고, 임금도 조금 올려서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 수준을 받게 됐어. 최저임금이란 게 워낙 적기 때문에 거기에 턱걸이한 것을 기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원래부터 됐어야 했던 당연한 것을 어렵게 받아낸 것이었어.
그 청소노동자들이 한창 학교당국과 싸우고 있을 때, 내가 하는 교육에 집단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어. 난 그때 이런 얘기를 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회에선 누구나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죠. 물려받은 땅덩어리나 빌딩이 없는 이상엔 아무리 고소득 전문직이 됐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군가에게 일을 해준 대가로 먹고 살죠. 그런 ‘일’과 관계된 인권을 ‘경제적 권리’라고 해요. ‘경제적 권리’의 으뜸은 일할 권리예요. 일을 해서 먹고 살 것을 요구받는 사회니까, 당연히 사회에서 일을 마련해 줘야죠. 눈높이 낮추고 아무 일이나 해라, 그런 식 말고 제대로 된 일을 마련하는 게 사회의 의무죠. 그러니까 아무 일이나 주면 안 되죠. 사람답게 살 만큼의 임금을 줄 뿐 아니라 건강을 해치거나 위험한 일로부터 보호하고, 함부로 자르면 안 되고… 등등을 보장하는 성격의 일을 줘야 해요. 그런데 고용주들이 이런 걸 알아서 해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항상 긴장해야 해요. 우선 노동자들은 뭉칠 권리가 있어요. 뭉쳐서는 뭘 하나요? 고용주와 노동조건에 대해 얘기를 해야죠. 그런데 고용주가 얘기를 피하려 하고, 약속했던 것도 지키지 않으면 어떡해요? 고용주가 말을 듣게끔 뭔가 행동을 해야 하지요. 하던 일을 안 하겠다고 거부하거나, 적당히 하는 등으로 고용주한테 압박을 가해야 해요. 이런 것들, 즉 노동자들이 뭉치고 협상하고 행동할 권리를 통틀어서 노동권이라고 해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원치 않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을 해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가령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불의의 사고로 장애가 생겼거나,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져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없거나 원치 않는 실직을 했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삶을 중단해버려야 하나요? 그럴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 권리’란 인권이에요. ‘사회’란 말은 우리 사람들끼리 결연을 맺었다는 뜻이에요. 우리들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이잖아요. 내가 원치 않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권리,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만한 교육을 받을 권리, 이런 것들이 사회적 권리에 해당해요. 그 어떤 별도의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니까 떳떳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눈치 보거나 업신여김을 받거나 하지 않고 말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내가 말한 인권의 원칙과는 반대로 흘러갈 때가 많아. 지금은 6월인데 한국에서는 매년 이때쯤 ‘최저임금’이란 걸 정해. 올해 사용자 측에서는 겨우 시간 당 10원 인상을 얘기하고 있대. 원래 최저임금이란 걸 법으로 정할 때는, 노동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줘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거야. 그런데 그런 취지와는 반대로 ‘목구멍에 풀칠만 하는 수준’의 최저가 돼버렸어. 많은 고용주들은 최저임금도 안 줄뿐더러 최저임금만큼만 주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 최저임금 이상을 주지 않으려는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어.


대표적인 경우가 청소노동자인데, 엄마가 몇 년 전 받았던 게 바로 그 최저임금이야. 몇 년이 지났어도 최저임금은 제자리 수준이고, 청소노동자들 대부분은 거기에도 못 미치는 80만 원이 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있어. 문제는 그렇게 버는 ‘용돈’ 수준의 돈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야.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면서 철마다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 사람들이 일한 값을 제대로 준다 할지라도,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하기 때문에 허덕이고 살아갈 판에, 대가는 제대로 안 치른 채 ‘불우이웃’ 만들기에 나서는 거니까.


임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라면 당연히 갖는 ‘뭉칠 권리’가 없어. 엄마도 호텔에서 일을 했지만 그 호텔 직원이 아니었잖아. 파견용역회사와 계약한 것뿐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자기가 진짜 일하고 있는 곳에 고용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역회사가 중간에 끼어 있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조건이기 때문에, 큰 소리 내기도 힘들거니와 간혹 뭉쳐서 소리를 내더라도, 정작 일하는 곳에서는 ‘나는 당신들의 고용주가 아니라’고 발뺌 하거든. 그래서 안 그래도 불안한 고용조건을 더 컴컴한 사각지대로 내몰아온 게 정부와 기업이 계속해온 정책이야.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말이야. 일하는 사람을 쓰고 버리면 되는 일회용품 취급하는 게 효율성이라면 이거야말로 패륜 중의 패륜인 거야.


이건 청소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아르바이트에도 아주 중요해. 예전에 막내가 학비 벌겠다고 방학 동안 분식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었잖아. 언니는 그래도 좋은 대학 다닌다고, 몇 시간의 과외로 버는 돈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막내는 지방대생이란 이유로 방학 내내 고역을 치르고 벌어야 했어. 하루 12시간씩 쟁반을 나르다 오면 다리 아파 죽겠다고 했던 동생에게 정말 미안했어.


요즘도 과외를 할 수 있는 소위 일류대 학생들 말고는 많은 학생들이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수업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바쳐야 해. 대학생들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입에 풀칠하기 위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있어. 많은 경우가 시간당 2천8백 원, 혹은 3천 원을 받는다고 해.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시간당 4천 원 수준이야.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폼 나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이야. 문제는 용돈벌이가 아니라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서 그런 조건을 감수하며 일하고 있다는 거야. 이들 젊은이들은 적어도 시간당 천 원의 인상을 원해. 그래봤자, 시간당 5천 원이 되는 거야. 그런데 저쪽에서는 시간당 10원 인상을 얘기하고 있으니 납량특집 연속극 같아. 이보다 끔찍하고 무서울 수는 없어.


이것 때문에 요즘 시위가 벌어지고 있어. 시간당 10원 인상으로 최저임금을 마무리 짓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10원 대 1000원의 싸움이 아니라, 유령이 아닌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외침이야. 엄마, 혹시 뉴스에서 그런 게 나오거든(월드컵 때문에 기대할 수는 없지만), 또 데모한다고 욕하지 말고, 뉴스에서 얘기 안 해주더라도 내가 말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사람들이 데모를 한다는 걸 알아줘.


내가 데모하다 처음 잡혀갔다 나왔을 때, 엄마한테 혼날까봐 잔뜩 쫄아 있었지. 그때 엄마는 혼내기는커녕 나랑 같은 대학 다니던 교회 집사님 아들 이름을 대면서, “걔는 이런 것도 안 한다니?”라고 물었어. 엄마의 물음에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지지가 담겨 있었어. 엄마가 떠난 그 자리에서 똑같은 노동을 되풀이 하고 있을 수많은 아주머니들, 인권활동가인 엄마 딸이 주말에는 식당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엄마는 분명 지지를 보낼 수 있을 거야. 인권에서는 엄마의 그런 지지를 ‘연대’라고 표현해.


힘없는 사람들이라 무시하지만, 정작 그 힘없는 사람들의 노동이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어쩔 줄 모를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야. 고로 엄마의 힘을 제일 무서워한다는 거야.

작성일자 : 2010. 10. 3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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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할머니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슬펐어. 울 엄마한테는 이제 엄마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 등을 바라보려니 괜히 눈물이 났어. 나한테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한테는 엄마가 없으니 얼마나 기댈 곳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런 애틋한 마음과 달리, 소문났듯이 엄마와 나는 그리 다정한 모녀는 아니야. 내가 하도 무뚝뚝해서 엄마는 항상 나한테 “너 같이 생긴 거면, 도대체 누가 딸을 갖고 싶겠니?”라고 하지. 그럴 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 “사돈 남 말 하시네. 무뚝뚝하기론 엄마도 금메달감일세.”


그런데 왜 뚱딴지 같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느냐고? 작년에 여럿이 아닌 내 이름만으로 낸 첫 책이 나왔잖아. 그런데 엄마의 반응 때문에 난 한참 고민했어. 보통 엄마는 그냥 좋아하고 말텐데, 엄마가 퉁명스럽게 그랬잖아. “야!, 읽어보려 해도 도무지 무슨 소린 줄 알 수가 없다.” 내가 쓴 건 인권에 관한 책이고, 인권이란 누구나 같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엄마한테 읽힐 수 없는 글을 썼다는 게 날 무지 속상하게 했어. 무슨 학술서를 쓴 것도 논문을 쓴 것도 아닌데, 그럼 당연히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썼어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편지는 그런 반성과 아쉬움 속에 쓰기 시작했어. 내가 왜 인권운동을 하고 인권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를 이제부터 엄마한테 들려줄 거야.


먼저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해. 얼마 전 한 대학생이 자퇴 선언을 하고 학교 그만뒀다는 뉴스 봤지? 고려대학교에서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붙이고, 교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한 여학생 있잖아? 그 일을 사람들은 ‘김예슬 선언’이라 하는데, 그 학생은 대학과 국가와 시장이 한통속이 돼서 진리도 정의도 젊은이들의 우정도 잡아먹고 있다면서, 자신은 거기에 저항하는 작은 돌멩이 하나 되겠다는 의미로 자퇴한다고 선언했어.


엄마가 그 뉴스 볼 때 혹시 내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한테 아마 난 타작을 면치 못했을 거야. 아마도 엄마는 “으휴, 너 같은 딸년 둔 부모가 또 있나보다”라고 했겠지? 나도 그 뉴스 보면서 스무 해도 더 지난, 내 스무 살 때가 아프게 떠올랐어. 그때 난 엄마 몰래 대학 1학년 때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그만뒀었지. 엄마는 무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는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지. 내가 아무 말도 안했으니까.


김예슬처럼 1인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 내 심정도 마찬가지였어. 그땐 방법을 몰랐을 뿐이지. 온 세상에 대해 외치고 싶었어. 대학도 세상도 너무 이상하다고. 그냥 그런 세상과 둥글게 어울려 굴러갈 수 없다고.


‘공부해라!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너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그런 채찍질에 나도 대학만 보고 달린 아이들 중의 하나였지. 20년 인생을. 물론 엄마도 함께 달렸어. 엄마가 달린 길이 더 힘들었을 거야. 보따리장수, 파출부, 가내수공업, 그러다 화장품 외판원 리어카를 10년 이상 끌어서야 엄마는 날 대학에 보낼 수 있었어. ‘가난을 벗어나자’, ‘대학가서 참고 참았던 것 다해보자’, 뭐 여러 가지가 목표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학 간판이 내게 소중했던 건, 고생한 엄마에게 달아주고픈 훈장이 대학간판이었기 때문이야.


결과는 내 맘에 썩 들진 않았지만, 엄마가 부끄럽지 않을 만한 간판의 대학 입학이었어.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20여년 기다리고 기다렸던 인생의 봄날은 오지 않았어. 캠퍼스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수록 학생들의 옷차림이 경쾌하게 빛날수록 내 맘엔 겨울이 깊어졌어.


정문 앞엔 항상 경찰들이 도열해있고, 틈만 나면 가방을 뒤지던 시절이었어. 학교 안까지 경찰들이 뛰어 들어와 대자보와 현수막을 찢어발기고 학생대표들을 채가기도 했어. 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대학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상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수업시간에 교수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입을 다무는 건 양반 수준이었고, 일부 교수는 그런 현실에 항의하는 학생들(운동권이라고 불렀지)을 소리 높여 비난했어. ‘철모르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저런다’고, ‘여러분은 그런 선배들 따라하지 말라’고. 난 어두침침한 얼굴의 소수 운동권 선배들한테 마음이 가지도 않았지만, 교수들의 그런 비판은 비방으로 들렸고, 겁쟁이들의 책임회피로 들렸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 많은 학생 수에, 교실 모양만 계단식 강의실로 달라진 콩나물시루 속에서 토론이란 없이 필기만 해대는 수업이 계속됐어. 도서관에 가면 죄다 토플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어. ‘독서’를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어. 주변 학생들(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 당시 졸업정원제란 게 끝물이었지만 서로 노트도 빌려주지 않았거든)의 멋 내기와 소비수준을 보며, 나는 한없이 주눅이 들었어. 내로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왜 이리 많은지. 같이 대학을 졸업해도 저 아이들과 나의 삶은 같을 수가 없다고, 나는 잘해봤자 월급쟁이가 되고 쳇바퀴 같은 삶을 굴리게 될 텐데,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뭔가 이미 다 이룬 것 같았어. 부럽기도 하고 화도 났어. 대학에서 ‘지식인’을 한 명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절망했어. 간판을 따러왔고,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교문만 드나드는 내 모습이 나날이 싫어졌고.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수업에 들어가지 않게 됐어.


그리고 내가 신입생 1년여 동안 매일 한 일은 지쳐서 뒤꿈치가 끌릴 정도로 서울 거리를 쏘다니는 거였어. 남산에 하루에 세 번 올라간 날도 있고, 한강 다리란 다린 죄다 걸어서 건넜어. 다리 한가운데서 한참 물속을 쳐다본 적도 있어. 그렇게 쏘다니는데 많은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더라. 서울에 웬 지하공장이 그리도 많은지, 환기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일할 사람 구한다는 벽보와 전단지는 빼놓지 않고 다 읽어봤어. ‘구인’이라지만 결코 ‘구인’되고 싶지 않은 그런 일들과 조건뿐이었어. 지금은 죄다 아파트로 바뀐 산동네 집들, 가내 수공업으로 밥상이자 작업대가 되는 상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여인들, 엄마의 모습을 꼭 빼 닳은 모습들…. 내가 꼴 보기 싫어 뒤로 하고 나온 대학 캠퍼스와는 상반되는 환경, 상반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그럴수록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움에 죽을 지경이었어.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상담한다는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건 적도 있어. 상담원은 건조한 목소리로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서, 난 전화를 건 게 후회돼 빨리 끊어버렸어.


그리고 학기말이 됐어. 오랜 방황에 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게 살자는 결론에 도달했어.


‘난 학문에 뜻이 없다, 대학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다녀야 한다. 난 어차피 간판 딸 생각으로만 오갈 텐데, 이런 내 자신의 거짓부터 때려치우자. 뭔가 내게 맞을 다른 공간, 다른 일을 찾아보자. 뭔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살아보자.’ 또 다른 마음의 절반에선 이런 소리도 들렸어. ‘대학 졸업한 후에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대학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는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난 백 살 정도 늙어버릴 거야. 엄마가 얼마나 실망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엄마 때문에’란 이유를 대는 건 비겁하게 여겨졌어. ‘엄마가 대학등록금 내느라 허리 휘어지는데 내가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관두는 게 나을 거야. 엄마도 결국 내가 행복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드디어 12월 말 난 자퇴서를 냈어. 거기 들어가려고 글자를 배운 순간부터 외워 온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나오는 데는 1분밖에 걸리지 않더라구. 자퇴서에 이름 쓰고 학과장 확인도장 받아 제출하면 끝이었어.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너무 싱거워서 웃음이 났어.


그 후 엄마한테 자퇴를 발각당하기까지 반년 동안의 기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거야. 정말 철저하게 난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거든. 그전에는 사회 속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때까지는 언제 어디서나 ‘학생이에요?’라고 누가 물으면 ‘학생 아닌 사람도 있나? 뭐 그런 걸 묻고 그래’하는 생각으로 살았지. 그런데 이제 내가 ‘저 학교 안다녀요’라고 답해야 했고, 그러면 재수생이냐는 물음이 되돌아왔어.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어. 대학생이나 재수생이나 다 대학이란 걸 우선 기준으로 정해놓고 사람을 구분하는 거잖아. 대학생도 재수생도 아닌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어.


그때 문득 고 3때 같은 반 애들 생각이 났어. 일찌감치 취업을 결정하고 입시에서 빠진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정규수업 마치고 강제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고 부기학원 등 에 취업준비를 하러 갔어. 그때 담임은 가방을 챙기는 그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애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고 했어. 그 아이들은 무슨 죄인인양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사라졌어. 그 아이들은 일찌감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학교에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입시결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애들은 몇 명 안됐어. 학교에서 자랑스럽게 써 붙인 합격자 명단은 몇 명 되지 않았으니까. 그 명단에 들지 않은 아이들, 지방대나 2년제 전문대학에 간 아이들은 또 다른 의미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속에 들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들게 됐어. 나란 사람의 감정, 생각, 몸, 이런 것은 전혀 변한 게 없는 데, 대학이란 하나의 기준에 의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버린 거지.


그때는 대학만 그렇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그런 기준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대학’을 기준 삼는 것처럼,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뭔가’인 사람과 그 ‘뭔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 말이야. 그리고 그 ‘뭔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또다시 그 ‘뭔가’에 속하려고 대기 중인 사람과 전혀 ‘아무것도 아닌’ 사람 축으로 나뉘게 되지.


사람이 먼저 있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아무개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고유한 뭔가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거지. 그런 설명에는 정해진 뭔가가 아닌 사람 수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 있는 거야. 그런데 세상은 반대로 하고 있어. 세상이 정해 놓은 ‘뭔가’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구분하거나 일렬로 줄 세우는 거야. 출신 대학, 사는 지역, 아파트 평수, 직업, 출신국가, 쓰는 말, 종교, 사상, 피부색, 결혼여부 등으로 사람을 끊임없이 구분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어, 꼭 사람감별기계가 요란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자퇴 후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시도해야 했어. 구인광고를 읽고 읽다가 어느 신발가게에 취직하러 갔어. 주인아저씨는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음날 주민등록등본 갖고 출근하라고 했어, 하지만 다음날 나는 가지 못했어. 무서웠거든. 그런 식으로 시도는 계속 실패했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사람 쪽에 머물러 있는 게 나은 것 같았어. ‘학생’이 아닌 나를 설명할 ‘뭔가’를 정해 버리는 게 무서웠어.


알바로 근근이 용돈벌이를 하며 거리를 쏘다니던 어느 날, 시위대와 부딪혔어. 한국 역사에 기록될 대규모 시민항쟁이 벌어진 해였거든.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찻길 한 가운데로 뛰어들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 순식간에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오던 때였어.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는 깃발아래 갈 수가 없었어. 구경하다가 최루탄에 도망가는 보이지 않는 시민일 뿐이었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삶에 지쳐가고 있었어.


그때 쯤 엄마한테 자퇴 사실을 들켜버렸지. 엄마는 조용히 물었을 뿐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아무런 준비된 답도 없었는데,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왔어. ‘다시 공부할게.’ 1년 반 동안의 방황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어. 그래서 난 횟수로는 ‘재수’, 묵은 햇수로 따지면 ‘삼수생’으로 구분되는 그 ‘무엇’이 됐고, 다시 입시를 치르고는 대학생이 됐어. 대학생이 되고나니 ‘너는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해방됐어. 이제 난 안전한 성안에 들어간 거니까.


하지만 내 맘엔 비겁함에 대한 수치심이 남았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삶에 대한 미안함도 버릴 수가 없었어. 내가 일부러 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무심코 읊어대고 편승하는 ‘기준’ 때문에 분류되고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계속 신경이 쓰였어.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가 졸업 무렵 대학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인권’이란 단어를 처음 듣고 충격 받았던 건지 몰라. ‘바로 이거다’하고 말이야.


세상의 많고 많은 기준에 의해 ‘무엇’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많아. 하지만, 그 ‘무엇’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없는 게 많아. 특히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은 불평이든 제안이든 독백이든 대화든 말할 자격에 끼일 수 없는 것 같고 그게 더욱 비참한 것 같아.


김예슬 선언의 경우를 보면, 엄마가 보는 TV 뉴스 말고, 인터넷 뉴스 같은데 이런 반응들이 있어. 그 여학생의 경우엔 소위 좋은 대학 좋은 과 출신이니까 뉴스가 됐지, 지방대 출신의 학생이 자퇴 선언을 했으면 뉴스가 되기나 했겠냐고. 그 ‘무엇’에 속했던 그 여학생의 말은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만, 그 ‘무엇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말조차 꺼낼 수 없고, 말을 해도 누가 듣겠느냐는 반응이었어. 그리고 대학에 가보지 못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미치도록 그 대학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어.


그런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을 하라고 권하는 사회가 인권을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 내가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이란 기준보다는 ‘사람’이 먼저 존재한다는 거야. 그 어떤 잣대로도 잴 수 없고 계산해낼 수 없는 가치가 각 사람에겐 있다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속할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인권이야. 누구나 소중한 그 ‘무엇’이고,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어. 당연히 누구에게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도 있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외면하는 외부의 기준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삶으로 내쫓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거야. 엄마 말처럼 인권에서 밥이 나오겠어, 떡이 나오겠어? 그러나 서로의 평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로 인해 밥도 나누고 떡도 나누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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