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10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915호> 

 

인권의 역사는 승리와 연대의 기록만이 아니라 계급·인종·민족·성적 차별의 소용돌이이기도 하다. 그속에서 많은 투쟁의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바로 그 차별의 노예가 되어 투쟁의 목적을 잊기도 했다. 반노예제투쟁과 노동권쟁취를 위한 여성들의 투쟁이 쉽사리 망각되는 것도 그중 하나의 결과일 것이다.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라는 바로 그 대의 속에서 여성차별이 거친 숨을 쉬고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제 철폐를 위한 세계대회에 참석한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석을 갖지도 못했고, 노예제 폐지 조직에서 여성들은 봉사해야 할 뿐 가입 자격도 성명서에 서명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 여성은 청중석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연단에 설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들이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자 여성은 의장을 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남성이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노예제 폐지 투쟁속의 성차별 속에서 여성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만들 것을 결심하게 됐고 노예제와 성적억압이라는 두가지 악에 맞서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 뛰어난 순회연설가, 작가, 조직가가 되어갔다. 어떤 경우이건 변화는 한가지 또는 한 집단의 권리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를 위한 환기와 각성은 또 다른 이들의 권리에 불을 지핀다. 바로 그 예가 미국에서의 노예제 철폐 투쟁과 여성운동의 관계일 것이다. 여성들의 조직적인 대규모 투쟁은 노예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싹텄다. 노예 예방을 위한 운동에서 여성들은 운동의 대의를 깨달았고, 조직하는 법, 대중집회를 갖는 법 등을 배웠다. 용기 있는 행동과 경험 속에서 대중에게 연설할 권리를 얻었고 그렇게 노예해방과 여성해방은 상호를 강화하고 풍부하게 했다.

노예제 철폐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운동의 결속에 큰 역할을 한 인물 중에 흑인여성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가 있었다. 소저너는 노예로 태어나 일평생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그녀의 주인은 그녀가 사랑한 남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채찍질을 했다. 결국 주인이 강요한 남성과 결혼하여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1827년 그녀는 뉴욕주 법으로 자유를 얻었다. 그후 노예제폐지운동가가 되면서, 그녀는 노예시절의 이름인 이사벨라(Isabella Baumfree)를 버리고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진리를 전하고 다니는 사람)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가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연설을 한 것은 1851년 오하이오 주에서 열린 여성권 집회에서였다. 남성들로부터 야유가 터져 나왔고 누구도 이에 대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소저너가 말하려고 앞으로 나서자,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의 대의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발언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저너는 연단에 나가 말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연설은 충격을 줬다. 당시 의장을 맡았던 이의 표현에 따르면 흥분한 군중의 조소와 야유는 존중과 경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뛰어난 연설 하나로 평등이 왔다고 하는 건 환상일 뿐이다. 노예제 폐지운동에 함께했던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의 이런 활동이 남성을 부당하게 공격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뛰어난 연설가들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지지하기 보다는 '어떤 분파의 권리도, 어떤 계급의 권리도, 어떤 성의 권리도 옹호하지 않겠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권리를 옹호하겠다'는 식으로 점잖게 보편성을 옹호했다. 이런 식의 말뿐인 보편성 옹호는 남성만의 권리를 확인, 재확인했을 뿐이다.

앞서 말한 '변화는 한가지 또는 한 집단의 권리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화를 위한 환기와 각성은 또 다른 이들의 권리에 불을 지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권리 주체들만이 아니다. 지배자들, 억압자들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변화는 하나가 아니라 집단으로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지배계급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여성과 여성, 흑인과 여성, 남성과 여성, 이주노동자와 미국인 간에 선을 그어나갔다. 인종적, 성적 억압과 착취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공유하지 못한 운동은 공통의 적을 이롭게 했다.

예를 들어 북부 자본가들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 요구가 아일랜드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타 집단의 권리투쟁을 부르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압했다. 성급하게 여성의 권리를 요구할 때가 아니라 지금은 '흑인의 시간'(Negro's hour)이라 주창했다. 흑인의 참정권을 우선시한 그들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남부로 한몫 챙기러간 북부 자본가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전 노예소유주들을 견제했다. 그렇게 이용된 '흑인의 시간'은 지속되지 않았다. 목적이 성취되자 흑인의 권리에 대한 퇴보조치가 속속 취해졌다. 또 다른 예로 자본가들은 폭증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요구가 두렵고 싫어지자 이번에는 여성참정권을 옹호하고 나섰다. '비백인 이주 임금노예'에게 참정권을 주느니 백인여성에게 참정권을 줘서 백인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극단적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 의해 백인여성참정권이 옹호됐다. 이주노동자 여성들로부터 촉발된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으면서 여성참정권운동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라는 소저너의 외침은 "나는 노동자가 아닌가요", "나는 시민이 아닌가요", "나는 인간이 아닌가요"라고 메아리쳐 왔다. 그리고 이런 외침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같이 외쳐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Ain't I a woman?)(1851)

여러분, 이렇게 야단법석인 곳에는 뭔가 정상이 아닌 게 있음이 틀림없어요. 내 생각에는 남부의 검둥이와 북부의 여성 모두가 권리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백인 남성들이 곧 곤경에 빠지겠군요. 그런데 여기서 얘기되고 있는 건 전부 뭐죠?

저기 저 남성이 말하는군요. 여성은 탈것으로 모셔 드려야 하고, 도랑은 안아서 건너드려야 하고, 어디에서나 최고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한다고. 아무도 내게는 그런 적 없어요. 나는 탈것으로 모셔진 적도, 진흙구덩이를 지나도록 도움을 받은 적도, 무슨 좋은 자리를 받아본 적도 없어요.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날 봐요! 내 팔을 보라구요! 나는 땅을 갈고, 곡식을 심고, 수확을 해왔어요. 그리고 어떤 남성도 날 앞서지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나는 남성만큼 일할 수 있었고, 먹을 게 있을 땐 남성만큼 먹을 수 있었어요. 남성 만큼이나 채찍질을 견뎌내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난 13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리는 걸 지켜봤어요. 내가 어미의 슬픔으로 울부짖을 때 그리스도 말고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

이런 일을 사람들이 머리와 관련해 얘기할 때 뭐라고 부르죠? (청중 속에서 중얼거린다, "지성") 맞아요. 그거예요. 지성이 여성의 권리나 흑인의 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나의 잔이 1파인트도 담지 못하고, 당신의 잔이 2파인트를 담고 있는데, 당신은 내 보잘 것 없는 절반 크기의 잔을 채우지 못하게 할만큼 야비하지는 않겠지요?

저기 검은 옷을 입은 작은 남자가 말하네요. 여성은 남성만큼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요! 당신들의 그리스도는 어디서 왔죠? 어디서 왔느냐고요? 신과 여성으로부터 왔잖아요! 남성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죠.

신이 만든 최초의 여성이 혼자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만큼 강했다면, 이 여성들이 함께 세상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지금 여성들이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내 말을 들어야만 해요. 이제 늙은 소저너는 더 이상 할 말 없어요.

 

[류은숙] <2005년 10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915호> 

[류은숙] <2005년 9월 29일 인권하루소식 제2905호>

 

카트리나가 훑고 간 뉴올리언스의 처참한 광경에서 보이는 것은 허리케인만이 아니다. 인종주의의 거센 발톱이 비극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제국주의, 이런 것들은 인권의 역사에서 영웅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나왔다. 재산권을 핵심으로 한 인권의 주창자들은 그 이익을 위해 이런 '필요악'들을 창조했고 그것의 유지를 위해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당사자 자신이 아닌 '그들'에 의해 쓰여진 노예, 여성, 식민지 주민 등의 권리에 관한 문헌에는 우리가 충분히 기대하고 예상할 벅찬 감동의 문구 따위는 없다. 정떨어질 정도로 간결한 '그들' 자신의 목적이 표시될 뿐이다.

오늘 읽어볼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이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저 절절하고 화려한 독립선언서의 문구와는 사뭇 다르다. 독립선언서와 권리선언의 주창자들이 노예제에 대해 침묵했던 것, 노예소유주들과 떳떳하게 합의할 수 있었고 공공연히 인종주의를 드러냈다는 것, 링컨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미연방이었고, 미연방의 분열을 막기 위해 극복해야 할 제도로서 노예제를 바라봤을 뿐이라는 것이 이 선언의 배경이었다. "내가 사건을 통제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나를 통제해 왔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는 그의 말처럼 남북전쟁의 전세를 뒤집기 위해 링컨은 마지못해 이 선언을 선포해야 했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흑인들이 연방군에 결합하게 됐고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노예 해방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군사적 필요에서 왔던 것이고, 이전의 억압자들이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온 해방이 진정으로 흑인을 해방시킬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의 권리선언이 말하는 '모든 인간의 권리'에 대해 흑인은 어떻게 느꼈을까?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독립혁명이 진행되던 시절, 코네티컷에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을 꽤 잘한 열정적인 설교자가 있었다. 이 설교자에게는 잭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있었다. 주인은 계속 설교를 했고 그 노예는 주인의 설교를 들으며 경탄했다. 어느 날 잭은 주인에게 가서 말했다. "주인님, 저는 항상 자유에 대한 주인님의 설교를 보고 자유를 위한 기도를 듣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말씀을 듣는 게 좋습니다. 자유는 좋은 것이니까요. 주인님은 설교도 잘하시고 기도도 잘하십니다. 하지만 주인님 한 가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련한 잭은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인류사회는 노예제와 관련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형태의 노예제는 인권과 자유를 노래한 미국의 노예제로 알려져 있다. 그것이 역사상 다른 노예제와 구별되는 것은 '인종주의'를 새롭게 도입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노예가 된 대상은 오로지 흑인이었다.

다른 지역, 다른 사회의 노예는 주인과 협상도 할 수 있었고, 자유인이 되기도 쉬웠고, 가족과 재산을 누릴 수 있었다면 미국의 노예가 겪은 고초는 동물학대반대운동가들이 항의해야 할 수준을 넘는 것이었다. 동물에게도 하지 못할 짓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흑인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봤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 가한 일이었기에 그것은 인권침해가 아닌 것으로 정당화됐다. 흑인과 관련된 법률들의 주요한 특징은 노예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재산 소유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노예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소유주는 살해를 포함하여 노예에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권리가 있었다. 노예제가 법률상으로 철폐된 이후에도 인종주의는 살아남았다. 흑인을 "추하고, 구린내나고, 이성없는"(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존재로 여기는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인종에 대한 편견은 노예제를 폐지한 지역에서도 강력하게 나타났다. 또한 인종주의는 흑인만이 아니라 이후 서부로의 진출에서 멕시코인과 아시아인을 착취하고 살해하는데 동원됐다.

노예제와 흑인의 수난을 보면 인권의 보편성과 상호의존성이 새삼 떠오른다. 노예제도 폐지를 부르짖는 사람의 인쇄소는 불태워지고 테러를 당했다. 저명한 폐지론자들의 목에는 노예소유자들이 내건 현상금이 붙었다. 노예제는 흑인 뿐 아니라 백인들의 권리를 위협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백인노예해방론자들은 자신들의 언론의 자유가 노예해방과 관련돼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또한 수많은 백인노동자의 권리 침해는 흑인의 무권리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일부 사람의 인권이 침해될 때 다른 사람들의 인권도 상처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무튼 이 노예해방선언을 출발로 해서 이후 70여년 동안 미국 헌법에는 노예해방(수정 제13조), 흑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제14조), 흑인에 대한 투표권 부여(제15조)라는 수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들 조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들 법들의 효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흑인에 대한 여러 차별적 입법 조치가 있었다. 남북전쟁 이전의 노예법이 흑인법으로 변환되어 실질적으로 차별하는 작용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은 자신들을 배신한 이상인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를 위해 미국독립전쟁과 남북전쟁에서 피를 흘렸다. 그것도 흑인은 안 된다는 배척 속에서 이름도 없이 '검둥이'라 불리며 그렇게 했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은 노예제가 미 대륙의 주요한 약한 고리라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하려 했다. 영국군에 가입하는 모든 노예는 해방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남북전쟁에서는 북군이 똑같은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흑인은 자신들을 기만하는 이상인 인권의 보편성의 정당성과 진정성을 부여잡고 행동했다.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사회경제적 힘 관계를 적극적·실질적으로 고려할 때는 진정한 보편성을 지닌 인권의 실현을 향해 가는 지렛대 역할을 하지만 형식적 보편성에 머물 때는 그 정당성과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특수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1863년 노예해방선언(The Enamcipation Proclamation)

1862년 9월 22일을 기하여 미합중국 대통령은 다음 선언을 발표하였다.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지정된 지역에서의 노예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보존할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앞서 말한 1월 1일에 여전히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들과 주의 일부 지역이 있다면 이들 지역을 선포로써 지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까지 주 또는 주민 유권자의 과반수 이상의 선거에서 선출한 의원들을 성실하게 미 의회에 파견하고 있다면 이를 무효로 할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 주와 주민은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합중국의 권위와 정부에 대한 실제적인 무장 반란시에 미합중국 육해군 총사령관으로서 내게 부여된 권한에 의거하여, 이 반란을 진압하기에 적합하고 필요한 조치로서, 1863년 1월 1일부터 그 이후 100일 동안, 미합중국에 대항해 반란 상태에 있는 다음과 같은 주와 주의 일부 지역을 반란주로 지명하는 바이다.

아칸소, 텍사스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플로리다, 조지아,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등 (그 외 반란주 및 지역의 명칭 생략)

앞서 말한 권한의 힘으로 상술한 목적을 위하여, 나는 이상의 반란주로 지정된 주와 주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로 있는 모든 사람은 이제부터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육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유지할 것이다.

나는 자유가 선언된 상기의 노예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폭력을 삼갈 것을 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허용된 모든 경우에 적합한 임금을 벌기 위하여 충실히 노동할 것을 권유하는 바이다.

그리고 적합한 조건을 갖춘 자는 미합중국 군대에 입대하여 요새, 진지 및 기타부서에 배치되고, 모든 종류의 선박에도 배치될 것임을 알리는 바이다.

진실로 정의로운 행위로 생각되며, 군사상의 필요로 헌법에 의해 보증된 이 선언에 대하여 나는 인류의 신중한 판단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한다.

증인으로써, 나는 여기에 내 손으로 미합중국의 봉인을 찍는다.

미합중국 독립 87년, 1863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류은숙] <2005년 9월 29일 인권하루소식 제2905호> 

[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국가안보가 인권보장과 항시 충돌하면서 사실상 '정부보안', '기득권세력의 자기보호 카드'로 활용될 때마다 되레 인권운동가들은 '당신들이 안전을 책임질 것이냐'는 추궁을 받아왔다. 진짜 안전은 국민의 존엄성과 인권이 효과적으로 보호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더 많고 더 성능 좋고 더 비싼 무기와 감시체제가 보장하는 안전이야말로 진짜 안전이라는 공격 앞에서 눈총 받아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말만 들어왔고, 국가안보에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무릎 꿇리고 도둑맞아왔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인간안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넘쳐나는 '말잔치'에 또 하나의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라는 반응도 있고, 빈곤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안보'라는 개념으로 다룬다는데 반감이 있기도 하다.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데 그 위협이란 게 정당한 위협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것은 국가안보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와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있다. 가장 많은 비판은 '인간안보'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위협'이라 인식되는 요소가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고, 그런 모호성과 자의성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는데 별 도움 될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견은 있다. 그 의미를 좁게 또는 넓게 정하자는 주장간의 대립이다. 좁게 정하자는 것은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문제란 문제를 다 포괄하다 보면 그 개념이 모호해지고 그 문제의 취사선택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폭력'같은 것에만 개념을 한정하자는 것이다. 반면에 '안전'이란 폭력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곤, 질병, 환경 재해 같은 문제들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넓게 정하자는 주장이다. 어느 쪽이건 '안전'의 개념이 국가에 대한 위협, 영토에 대한 위협, 군사적 차원의 안보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인간안보라는 단어는 더 일찍부터 사용됐다고 하나, 그 개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를 통해서이다. 이 보고서가 정의하고 있는 인간안보의 개념은 앞에서 말한 '넓은' 정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의된 인간안보는 소위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고 둘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인간안보의 본질로서 '보편성, 상호의존성, 사후개입이 아닌 사전 예방, 인민 중심'을 들고 있다. 또한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을 '경제적 안전, 식량안전, 건강 안전, 환경 안전, 개인의 안전, 지역사회의 안전, 정치적 안전'이라는 7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듯 인간안보의 핵심은 안보의 '중심'을 국가로부터 '인민'으로 옮겨서 생각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안보의 관념은 냉전에 의해 크게 형성됐고, 주로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국가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는 그 시민을 보호할 권리와 수단을 독점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이해와 위협의 유형은 확장되고 변화됐다. 국경, 국민, 특정 체제의 가치와 제도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환경오염, 광대한 인구 이동, 에이즈와 같은 전염성 질병 같은 요소들을 인식하게 됐다. 너무나 많은 위험들이 아주 빨리 오늘날의 상호연관된 세계로 퍼진다. 이에 국제사회도 새로운 안보의 틀을 요구하게 됐다. 국가는 여전히 안보의 기본적인 조달자이자만 때때로 그 안보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국민에 대한 위협의 원천이 된다. 이런 이유로 국가 중심의 안보로부터 인민 중심의 인간안보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개인과 집단, 인민의 역할을 중시하게 됐다는 점이다.

인간안보의 주요한 관심은 국가보다는 개인과 집단이다.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요소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던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행위자의 범주가 국가만이 아니라 그보다 확대된다. 인간안보를 성취하는 것은 인민을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낼 인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한 강화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의 강화가 당연히 포함된다.

이처럼 인권과 인간안보는 그 동기나 관심 영역에서나 긴밀히 연결돼 있다. 또한 둘다 빈곤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권과 인간안보 둘 다의 공통된 목표이다. 국제인권의 초기 역사에서 냉전으로 인해 자유권과 사회권은 인위적으로 분리됐다. 그것에 저항하여 인권운동은 모든 인권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파편화된 인권이 총체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구조와 질서를 모색하면서 평화권, 환경권, 발전권이 속속 등장했다. 인간안보의 출현은 이러한 인권의 총체성과 불가분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건 안 하건 간에 또는 수용하건 안 하건 간에, 지배계급 혹은 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의 보안과 인간안보,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인간안보란 빈곤과 절망으로 극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고, 이로 인해 공포와 강압적 안전을 거래하는 일이 없는 사회를 설계하는 것이다. 공포 때문에 정상적 인간 활동을 줄인다거나 공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거나 공포 때문에 총과 무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불행히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후자이다. '안보'란 그런 속임수를 쓸 여지가 다분한 개념이기에 조심, 또 조심하고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거짓말쟁이 소년의 이야기를 어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사용한다. 이를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얘기로 바꿔보자. 두 번이나 속은 마을 사람들은 늑대에 대한 경보를 신뢰할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을 왜 하지 않았을까. 양떼와 소년의 목숨을 잃은 것은 거짓말쟁이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모두의 피해이지 않은가. 더구나 잃은 것은 귀중한 생명이요, 신뢰와 같은 사회의 버팀목이 되는 가치이다. 안보, 대테러를 명분으로 한 가짜 경보에 대피하면서 기본적 인권을 팽개치고 뛰어가 버리면 정작 안전을 위협하는 진짜 경보를 듣지 못할 수 있다.

1994 인간발전보고서-새로운 차원의 인간안보(일부 발췌)

50년 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핵 에너지의 발견에 대해 "모든 것이 변했다."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예견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핵폭발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철저히 파괴했지만, 인류는 세계적인 핵참화를 방지하려는 최초의 결정적인 시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50년이 지났고, 우리에게는 핵안보로부터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사고의 심오한 전환이 요구된다.

안보 개념은 아주 오랫동안 협소하게 해석돼왔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의 영토의 안보로서, 또는 외교 정책에서 국익의 보호로서, 또는 핵 학살의 위협으로부터의 지구적 안보로서. 안보 개념은 인민 보다는 국민국가들에 보다 결부됐다. 열강은 전 세계적 냉전을 치르면서 이념투쟁에 사로잡혔다. 개발도상국들은 최근에야 독립을 얻었고 자신들의 약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또는 인지된 위협에 대해 민감했다. 일상생활에서 안전을 추구하는 보통 사람들의 정당한 관심사는 잊혀졌다. 이들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은 질병, 굶주림, 실업, 범죄, 사회갈등, 정치적 억압, 환경적 위험의 위협으로부터의 보호로 상징됐다. 물러간 냉전의 어두운 그림자와 더불어 이제 우리는 국가간이 아닌 국가 내부의 많은 분쟁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안감은 격변하는 세계적 사건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일상생활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것이 더 많다. 자신과 가족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까? 직업을 잃지 않을까? 거리와 이웃들이 범죄로부터 안전할까? 억압적인 정부에게 고문을 당하지 않을까? 성별 때문에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종교적 또는 인종적 출신 때문에 박해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최종분석하면, 인간 안보란 아이가 죽지 않는 것, 질병이 퍼지지 않는 것, 일자리가 삭감되지 않는 것, 인종(민족) 긴장이 폭력적으로 격발되지 않는 것, 반대자가 침묵당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안보는 무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다.

간단하지만, 인간안보의 사상은 21세기의 사회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인간안보의 기본 개념을 고려할 때 4가지 본질적 특징에 초점을 둬야 한다.

□ 인간안보는 보편적 관심사다.
인간안보는 부유한 나라이거나 가난하거나 모든 곳의 사람들과 관련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많은 위협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실업, 마약, 범죄, 오염, 인권침해이다. 문제의 강도는 지역마다 다를 수 있으나 인간안보에 대한 이 모든 위협들은 현실이며 증가하고 있다.

□ 인간안보의 구성요소는 상호의존한다.
세계 어디서건 인민의 안전이 위험에 빠지면 모든 국가들이 연루될 수 있다. 기아, 질병, 오염, 마약 거래, 테러리즘, 민족 분쟁, 사회적 해체는 더 이상 고립된 사건이 아니며 국경 내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영향은 전 지구를 휩쓴다.

□ 인간안보는 사후 개입이 아닌 사전 예방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 더 쉽다.
이들 위협에 대해 막바지보다는 시작단계에서 대처하는 것이 대가를 덜 치른다. 예를 들어 HIV/AIDS의 직간접 비용은 1980년대에 대략 2천4백억 달러였다. 수십 억 달러라도 기초 건강 보호와 가족계획 교육에 투자됐다면 이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 인간안보는 인민 중심적이다.
인간안보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얼마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느냐, 시장과 사회적 기회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느냐, 분쟁 속에 사느냐 평화롭게 사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몇몇 분석가들은 인간안보를 엄격하게 정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와 같은 여타의 근본적인 개념들처럼, 인간안보는 그것의 실재보다는 부재를 통해 더 쉽게 규명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전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명백한 정의가 있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인간안보는 두개의 주요한 측면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안보는 기아, 질병, 억압 등의 만성적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이다. 둘째, 인간안보는 일상생활의 유형-집이건, 직장이건, 지역사회이건- 속에서 갑작스럽고 해로운 붕괴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한다. 이러한 위협은 모든 수준의 국민 소득과 발전 수준에서 있을 수 있다.

인간안보의 상실은 느리고 조용한 과정일 수도 있고 갑작스럽고 소란한 긴급상황일 수도 있다. 잘못된 정책 선택으로 인한 인재일 수도 있고 자연의 힘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또는 환경 파괴가 자연 재해를 초래하고 인간 비극이 뒤따르는 경우에서처럼 두개의 합성일 수도 있다.

안전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인간안보가 인간발전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발전은 보다 광의의 개념이다. 인간발전은 이전 인간발전보고서에서 인민의 선택의 범주를 확장하는 과정으로서 정의됐다. 인간안보는 인민이 이러한 선택을 안전하고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오늘 갖고 있는 기회가 내일 전적으로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안보와 인간발전은 연관된다: 한 쪽에서의 진보가 다른 쪽의 진보의 기회를 강화한다. 하지만 한쪽에서의 실패는 다른 쪽의 실패의 위험을 또한 증가시키며 역사는 그 사례들로 가득차 있다.

실패한 또는 제한된 인간발전은 인간박탈-빈곤, 굶주림, 질병, 인종(민족) 집단 또는 지역간의 지속적인 불균형-을 초래한다. 권력과 경제적 기회에 대한 접근에서 이러한 것들이 적체되면 폭력을 초래할 수 있다.

 

[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광주항쟁, 부안반핵투쟁에 '광주꼬뮌', '부안꼬뮌'이라는 말을 붙이곤 한다. 꼬뮌이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상징되는 꼬뮌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그해 5월 28일에 최후의 총성이 멎을 때까지 불과 70여 일 동안 프랑스 빠리에 존재했던 민중권력을 말한다. 빠리꼬뮌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부르주아운동을 제쳐놓고 스스로의 권력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이전 권력 그대로에다 등장인물만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빠리꼬뮌은 '권력의 보편화'를 기치로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분야의 공직자를 선출하고 그들을 소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적 권리로 선언했다.

그 권력의 주인공들은 하루 11시간 이상 노동하면서도 극빈 상태에 가까운 빈곤으로 고통 받는 생산자들이었고, 권력의 위기를 타개하려 대외 전쟁을 벌여놓고 나자빠진 권력자들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지켜낸 전사들이었다. 외국의 군대보다 무장한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한 권력자들은 '적'인 프러시아와 협상하여 진압군을 조직했고 무자비하게 꼬뮌을 진압했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꼬뮌은 위험스런 도발에 불과한 사건이었고 잘 진압되었다. 3만여 명을 총살하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4만여 명 이상을 가두거나 추방시키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일을 잘 치러낸 머혼(MacMahon)은 훗날 프랑스의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빠리꼬뮌은 광주꼬뮌으로 부안꼬뮌으로 세계 어디서나 민중의 항쟁이 있는 곳이라면 기억되고 되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빠리꼬뮌은 '헌법'이라든지 '인권선언'이라는 명칭을 가진 문서들을 내놓지 않았다. 권력자들이 안팎으로 꼬뮌을 옥죄어오는 엄중한 상황이었기에 체계적으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시민혁명의 인권선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행동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빠리 민중은 대대적인 환호 속에서 사형집행수단으로 유명한 '길로틴(단두대)'을 불태웠다. 빠리꼬뮌 지지자들을 총살하는 정부 정책에 맞서 "눈에는 눈"이라는 정책 성명이 발표됐지만 실제로 빠리 노동자들은 그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꼬뮌의 생명존중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노동민중에게 절실한 조치들이 속속 취해졌다. 노동에 대한 사적착취라는 이유로 전당포가 폐쇄됐고, 프러시아군이 빠리를 포위한 기간에 발생한 채무의 회수를 중지했고, 임대료를 체불한 세입자에 대한 강제퇴거를 금지했다. 빵집 노동자의 야간작업을 금지했고, 경찰이 지명한 사람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발부했던 노동자 등록카드를 폐지했다. 소유주들이 문을 닫은 작업장이나 공장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에 넘겨주었다. 꼬뮌은 또한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여 빠리에 세워졌던 기념물을 맹목적 애국주의와 민족적 증오를 선동하는 상징이라 하여 끌어내렸다. "꼬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라는 이유로 외국인이 꼬뮌의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정식으로 만들어진 인권선언은 아니지만, 꼬뮌이 채택한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1871년 4월 19일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을 중심으로 그 인권보장의 구상을 살펴보자.

선언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에 덧붙여 "그리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완전한 행사의 보장"을 말한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비롯하여 근대인권선언에서 선언된 '모든 인간'은 현실속의 구체적 인간간의 관계를 결코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토지나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노동력밖에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똑같이 대하려 한 구상이었다. 여러 자유와 권리를 내세웠지만 그 중핵은 사적소유권이었기에 사적소유권을 누릴 수 있는 '일부 사람'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듯이 가장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민중의 정치참가가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민중의 의사표현을 억압하고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을 사수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적소유라는 인권은 자기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는 개인의 권리이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한 가운데 사회와도 무관하게 자신이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만의 이용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전체사회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자본가의 재산 소유권은 노동자에게 미치는 모든 파괴적인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보호돼야만 한다는 자유의 원칙이 옹호되었다.

꼬뮌은 구체적인 인간인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하며 생산수단의 사유와 그것에 봉사하는 정치원리를 부정하고 나섰다. 이는 "권력과 소유권을 보편화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수립"을 꼬뮌의 과제로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예속"을 "조국에는 불행과 파탄"을 가져온 "군사주의, 관료주의, 착취, 투기, 독점, 특권의 종말"을 말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꼬뮌에서 말하는 사회권의 내용은 사회복지에 대한 권리 등 사후적 조치의 것이 아니라 "교육·생산·교환·금융을 진작시키고 보급하는데 적합한 제도의 설립"이라는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통해 도모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꼬뮌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중핵으로 했던 근대의 인권관과는 다르다. 자유의 이름 하에 자유로부터 가장 단절됐던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개인적 자유, 양심의 자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 "꼬뮌 업무에 대한 시민들의 항구적인 개입"을 위한 "집회와 선전의 권리", "꼬뮌의 자치를 위한 행동의 자유"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은 민중 자신에 의한 정치였다. 앞서 말한 표현, 집회, 선전의 자유는 민중에 의한 정치의 일상적인 통제를 가능케 한다. 또한 "책임 있는 모든 방면·서열의 행정관 및 사법관의 선거나 경쟁을 통한 선출,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리"에서 드러나듯 민중은 모든 공무원을 선임하고 언제든지 통제·파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한 공무원은 출세의 목표가 도구가 아니기에 그 임금을 평균 노동자 임금을 넘지 못하게 했다. 권력기구의 핵심인 군대와 경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꼬뮌은 상비군이 인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험하다고 보고 그것을 폐지했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지휘자를 선출하고 국민방위군과 도시 방위대를 조직"하는 것이 민중의 권리였다.

'꼬뮌의 유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문서는 체계적이지 않지만 근대인권의 그림자 속에서 싹틔운 민중의 인권구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마찬가지의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계속 단련시켜야 할 과제와 목표를 가득 안고 있는 것이다.

빠리꼬뮌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1871)

아직도 빠리에 포위공격과 포격의 공포를 주고, 프랑스인의 피를 흐르게 하고, 우리의 형제들·여성들·아이들을 포탄과 총탄 속에서 으깨어져 사라지게 하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분쟁 속에서, 여론은 나뉘어져서는 안되며, 국가적 의식도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빠리와 국가 전체는 완성되고 있는 혁명의 본질과 대의명분과 목적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결국 고통과 슬픔, 불행 우리는 이것들의 희생자인데 의 책임을, 프랑스를 배신하고 빠리를 외국의 손에 넘긴 후에, 공화국과 자유의 파탄 속에 그들의 배신과 그들의 죄에 대한 이중의 증거를 숨기려고 맹목적으로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완고하게 수도의 파멸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꼬뮌은 빠리 인민의 열망과 소원을 명시하고 규정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아직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베르사이유를 둘러싼 정치가들에 의해 왜곡된 3월 18일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밝힐 의무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빠리는 프랑스 전체를 위해 행동을 하며 고통을 겪는다. 빠리는 전투와 희생을 통해, 지적·도덕적·행정적·경제적인 쇄신과 영광과 번영을 준비한다.

빠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인민의 권리 그리고 사회의 정상적이고 자유로운 발전과 양립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인 공화국에 대한 재인식과 공화국의 강화,
프랑스 전역에 걸쳐있는 각 꼬뮌에게 그 권리 전체를 보장해주고,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완전한 행사를 보장해주는 꼬뮌의 절대적인 자치,
꼬뮌의 자치는 단지 계약을 준수하는 다른 꼬뮌이 갖는 동등한 자치권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이들 꼬뮌의 결합은 프랑스인의 단일한 통일체를 보증해야 한다.

꼬뮌의 고유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꼬뮌의 예산 및 수입과 지출의 표결; 세금의 결정과 부과; 지역 서비스의 지도; 사법과 내부 치안, 그리고 교육의 조직; 꼬뮌 소유의 재산의 관리·운영.
책임 있는 모든 방면·서열의 행정관 및 사법관의 선거나 경쟁을 통한 선출.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리.
개인적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
자신의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과 자신의 이해의 자유로운 옹호를 통한 꼬뮌 업무에 대한 시민들의 항구적인 개입; 이러한 권리를 꼬뮌은 보장해야 하며, 꼬뮌의 유일한 책임은 집회와 선전의 권리를 자유롭고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휘자를 선출하고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국민방위군과 도시 방위대의 조직.

빠리는 연합한 꼬뮌들의 대표인 위대한 중앙행정부에서 위와 같은 동일한 원칙들이 실현되고 실천된다는 조건 하에서, 지역의 보장을 명목으로 한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꼬뮌의 자치를 위하여 행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빠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과제로 남겨두고 있다. 빠리 민중이 요구한 행정적·경제적 개혁의 수행; 교육·생산·교환·금융을 진작시키고 보급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설립; 그리고 당대의 필요성과 이해 당사자들의 소망을 충족시키면서, 권력과 소유권을 보편화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수립.

우리의 적들이 빠리의 자유 의사 혹은 빠리의 패권을 다른 지역에 강제하려 한다고 빠리를 비난할 때, 혹은 빠리가 여타의 꼬뮌의 주권과 독립을 해치는 진정한 음해 기도가 될 수 있는 독재권력을 요구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은 서로를 속이거나 혹은 조국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적들이 빠리에 대해 혁명이 수립한 통일된 프랑스(Unit fran aise)를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은 서로를 속이거나 혹은 조국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성(Unit ),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제국과 군주제와 의회제도의 남용을 강제했던 그러한 통일성은, 단지 전제적이고 어리석고 제멋대로이거나 번거로운 중앙집권화에 불과했다.
빠리가 원하는 정치적인 통일성은 만인의 복지와 자유와 안전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도모하는 모든 지역적 창의성의 자발적인 결합이며, 모든 개인적 힘(에너지)의 자연발생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이다.

3월 18일, 민중의 발의로 시작되었던 꼬뮌 혁명은 실험적이고 긍정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정치의 시대를 열고 있다.
꼬뮌 혁명은 정부를 지지하고 성직자 중심으로 돌아가던 낡은 세계의 종말이며, 군사주의와 관료주의, 착취, 투기, 독점, 특권의 종말이다. 이러한 것들에 프롤레타리아는 노예상태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조국은 불행과 파탄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거짓말과 비방으로 기만당해온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심하기를!

빠리와 베르사이유 사이의 투쟁은 기만적인 타협으로 마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국민방위군이 불굴의 투지로 가열차게 추구하는 승리는 소신과 권리 속에 남을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 호소한다.
무장한 빠리가 그 용맹만큼이나 침착함을 지녔다는 점을, 그리고 빠리가 열정만큼이나 저력을 가지고 질서를 옹호한다는 점을, 빠리가 영웅의식을 지닌 만큼이나 합당하게 헌신한다는 점을, 빠리는 단지 만인의 영광과 자유를 위한 충성심에서만 무장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프랑스가 이 피의 전투를 그치게 되기를!
거역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존엄하게 표명함으로써 베르사이유를 무장해제하는 것은 바로 프랑스의 몫이다.
우리의 정복과 쟁취로부터 혜택을 입도록 되어 있는 프랑스가 우리와 연대할 것임을 선언하기를! 그리고 단지 꼬뮌의 소신이 승리하고 빠리가 몰락함으로써만 끝이 날 수 있는 이 전투 속에서 우리의 동지가 되기를!

빠리의 시민인 우리는 역사를 환하게 비춘 모든 혁명 중에서도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풍요로운 근대적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투쟁하고 승리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1871년 4월 19일 빠리꼬뮌

 

 

[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류은숙] <2005년 8월 11일 인권하루소식 제2873호> 

 

인권의 역사를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3세대론'이 있다. 근대시민혁명과 국가의 불간섭을 요구하는 자유권 중심의 인권보장체계를 1세대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하는 사회권 중심의 인권체계를 2세대로, 3세계와 중심부 국가들 간의 빈부격차, 국제무기경쟁과 핵전쟁의 위협, 생태 위기 등의 국제문제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나온 자결권, 평화에 대한 권리, 발전권, 환경권 등을 3세대 인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대론을 앞 세대 이후에 후 세대가, 앞의 권리 대신에 뒤의 권리가 나타났다는 식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인권 개념의 출현 시기부터 주류의 인권구상과는 구별되는 민중의 인권구상이 독자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을 자칫 놓칠 수 있다.

근대화 곧 자본주의화를 목표로 한 부르주아지가 계약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인권을 열어젖히는 데 힘이 되어준 것은 다수의 민중이었다. 이들 없이는 구체제와 특권층의 권력을 결코 타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 등 구 특권층에게 수탈당했던 민중은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도 부르주아지에게 수탈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들은 구체제의 반대편에 서서 부르주아지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민중에게 돌아온 성과는 거의 없었다. '재산에 의한 제한 선거제'로 정치생활로부터 소외되고 '굶주릴 자유'에 내팽겨쳐진 이들은 스스로의 인권구상에 나서게 된다. 그런 인권구상이 체계적으로 표현된 것 중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 읽어볼 바를레의 '엄숙선언'이다.

바를레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상퀼로트 운동이 고양됐던 시기(1792-1793)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상퀼로트란 프랑스어로 '반바지를 입지 않은', 즉 상류층이 걸친 반바지를 입지 않은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주축은 수공업자, 소상점주인, 소상인 등 도시 민중이었다. 바를레의 엄숙선언은 1793년 5월 발표돼 6월 7일 국민공회에서 낭독된 것으로 '상퀼로트'의 입장에서 민중의 헌법구상, 인권구상을 체계화 한 것이다.

근대인권은 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으로부터의 불간섭을 요구하는 자유권 중심의 인권체계였는데, 여기서 자유라 함은 재산권의 자유를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자유의 이름으로 봉쇄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엄숙선언'에서 보이는 인권구상의 차이는 재산권에 대한 제약과 실질적 평등의 추구라는 점에 있다.


재산권의 제한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는 "소유권은 불가침의 신성한 권리"(17조)라고 선포하고 있다. '엄숙선언'에서도 재산권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제약이 따른다. '재산의 향유는 점유할 권리로서 시민의 자기보존의 필요성에 종속'(16조)된다고 봤고, '재산상의 불평등을 정당한 수단에 의해 타파'(17조)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절도, 투기, 독점, 매점 등 공공의 희생 위에 축전된 재산'은 '국유화'(20조)된다고 했다. '엄숙선언'이 "제1의 가장 신성한 재산"(18조)으로 승인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수단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들'이며 "제2의 재산"은 "노인, 병약자, 노동을 할 수 없는 자"의 "휴식"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재산권은 사실상 '생존권, 노동권, 휴식권'의 보장의 의미를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민주권의 원리

근대시민혁명은 재산권의 보전이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이라 했기에 재산권의 절대적 자유를 위해 국가권력의 틀을 짰다. 그래서 민중의 정치참여는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 필연이기 때문에 그를 막기 위한 '국민대표'와 '국민주권'을 권력의 형태로 삼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국민이 주권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주권의 행사는 '국민대표'에게 위임돼 있다. 그리고 '국민대표'는 제한선거 등으로 의회를 장악한 부르주아지가 차지하는 것이다.

'엄숙선언'에서는 이러한 '국민주권'과는 다른 '인민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주권의 행사는 모든 나라의 인민에 귀속"되며, "결코 대표될 수 없다"(8조)고 했다. 이에 인민은 '직접 모든 공직을 선출할 권리', '사회의 이익을 토론할 권리', '법률제정에 참가할 권리', '의원 소환 및 처벌권', '조세결정권', '공적 사무에 대한 보고 요구권', '법률안 검토 및 거부 혹은 재가권', '헌법 수정권'(10조) 등을 주권 행사의 당연한 권리로 갖는다.

이는 인민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고 권력 담당자를 통제하지 않으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권 구상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엄숙선언에 붙어 있는 '주권자 인민인 85현의 프랑스인에게'라는 제목의 호소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명증된 진리가 있다. 인간은 본래 교만하게 창조되었고 고위직에 앉으면 필연적으로 전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창설된 여러 기관을 억제·구속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기관들은 모두 압제의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인민 자신 이외의 억제력은 모두 잘못이다. 주권자는 끊임없이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 주권자는 대표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시민의 권리행사를 위한 기본 전제이기에 교육의 권리가 중시·강조되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모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신성한 책무인 덕육, 지육 그리고 공중도덕의 보급만이 시민의 권리 향유를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든다."(5조)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다.


저항권의 구체적 규정

프랑스 인권선언은 "압제에 대한 저항"(2조)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으며 "법에 저항하는 자는 유죄"(7조)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이와 달리 '엄숙선언'에서는 저항권의 행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주권이 찬탈된 경우', '군대나 무력이 국가 안에서 우월할 경우', '공적기관이 헌법적 한계를 일탈할 경우', '국가가 공금을 유용하고 빈곤을 극대화 할 경우'에는 "봉기야말로 독립을 보장하는 것, 권리 중 가장 정당한 것, 의무 중 가장 신성한 것"(22조)이라며 "압제에의 저항은 귀중한 봉기의 권리"라고 드높여 외치고 있다.


인류애와 평화주의

프랑스 인권선언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보장은 공공의 무력을 필요로 한다"(12조)고 말한다. '엄숙선언'은 이와 달리 "여러 나라 인민은 하나의 가족을 형성"(2조)하며, "여러 나라 인민 사이의 전쟁은 국왕, 전제군주, 야심가, 지배적인 음모가들이 범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3조)라고 규정하며 인류애와 평화주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위와 같은 민중의 인권구상은 "사회계약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특별히 전념하지 않으면 안된다"(28조)는 한마디에 모아진다. 이러한 인권구상은 한 때 크게 부상하여 일정한 개혁조치를 낳았지만 혁명의 약화와 반동으로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고난 속에 싹튼 민중의 인권구상은 부르주아지의 인권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바뵈프의 '평등주의자들의 음모', 꼬뮌 전사들의 인권구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행진 속에서 근대 인권보장체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행진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상태에 있어서의 인간권리에 관한 엄숙한 선언(1793)

(Varlet: Declaration solennelle des droits de I'homme dans l'etat social -1793.6)

전문

사회상태에서의 인권의 유지에 유일하게 적합한, 단일하고도 불가분의 공화정부로 조직될 것을 결정한 프랑스 국내의 주권자인 인민은, 무엇보다도 무지, 오류, 미신이 여러 나라 인민의 예속에의 제일 원인임을 고려하고, 또한 항상 단일하고 불변의 자연으로부터 퍼낸 여러 원리가 어느 날 사람들을 통치할 보편적인 법전을 형성할 것을 고려하고, 나아가 관습의 상위함과 차이, 법률의 불완전함이나 무능, 여러 나라의 혁명은 그 여러 제도가 의거하는 불변의 기초를 사회상태의 인간이 미처 승인하지 않았음에 유래한다는 점을 고려하고, 이에 엄숙한 선언과 더불어 사회상태에서의 인권 즉 세계와 함께 오랜 동안 존재하며, 신성하고도 양도할 수 없으며, 시효로써 소멸함이 없는 권리를 명백히 할 것을 결의했다. 이 선언이 자유롭게 창조된 모든 인민에 대하여 폭군의 멍에에서 벗어남에 있어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위하여. 사회에 결합한 사람들이 늘 그 권리와 분리될 수 없는 그 의무를 상기하기 위하여. 주권자인 여러 나라 인민에 의하여 창조된 여러 기관의 행위가 이후 간결하고도 다툼의 여지 없는 원리를 따름으로써 한층 더욱 존중되기 위하여. 그리고 인민의 일부가 더 이상 타인에 의하여 억압 받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 본래적인 존엄에 따라 그 권리에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고 교화된 모든 사람이 각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온당하고도 정당하고도 항구적인 법률에 의하여, 나아가 공공의 복리에 의하여 그들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리하여 완벽하게 그 주권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 시민은 모든 주권자인 여러 나라 인민에 대하여 만물의 창조주인 최고존재 앞에서, 그리고 그 비호 아래 사회상태에서의 아래와 같은 인권을 선언하고 표명한다.

제1조 자유란, 질서와 사회적 조화를 관장하는 윤리적 존재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덕과 모든 재능, 모든 번영의 근원이다. 자유만이 왕좌에서 통치하여야 하며, 그것만이 성당 속에서 현명하고도 사려 깊은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정의와 온전함과 선행의 이념의 기초를 두고 있는 신을 표상하여야 한다.

제2조 여러 나라 인민은 하나의 가족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폭군의 압제로부터 그들의 상업상의 교섭을 지킨다는 동일한 이유, 그리고 그들이 의무를 지고 있는 친밀한 원조의 상호성에서 그들이 일체가 되어 생활할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3조 여러 나라 인민 사이의 전쟁은 국왕, 전제군주, 야심가, 지배적인 음모가들이 범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다. 인류에 대한 이들 억압자는 인류의 법률의 보호 외에 있으며 그들을 지상에서 소탕하는 자는 전 세계의 공로자이다.

제4조 전세계의 인간은 자유롭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게 태어나, 존재하고 또한 계속 그리하여야 한다. 이 제일원리가 무시되고 오해되는 곳에서는 어디든 전제와 무정부상태가 지배한다.

제5조 모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신성한 책무인 덕육, 지육 그리고 공중도덕의 보급만이 시민의 권리의 향유를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제6조 평등은 자유로부터의 직접적인 귀결이다. 다음은 이 귀중한 권리에서 유래한다.
시민은 출생, 재산 혹은 신분상의 차별 없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또는 각자가 타인으로 하여금 품게 하는 존경과 신뢰의 정도에 따라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있다.
사회의 필요에 따라 요청되는 조세의 분담은, 그것이 납세의무자의 능력에 따라 누진적이라는 조건에서만 평등하다.
적은 임금으로 생활하는 개인은 생활에 필요한 노동생산물에 과세 당하지 아니한다.
지위에 관한 모든 차별적인 휘장은 직무 집행 시 외에는 부착하지 못한다.
사회적 포상은 이루어진 봉사의 가치에 따라 등급이 설정되며, 항상 오로지 덕행과 개인적 공로에 대하여 인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공동의 이익을 위해 이용된다.

제7조 사회의 조직은 사회상태에서의 인권의 유지를 그 유일한 목적으로 한다. 이들 권리라 함은 주권의 행사, 사상의 자유, 행동의 자유, 개인의 자유 안전 보전, 재산의 향유 및 압제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제8조 주권의 행사는 모든 나라 인민에 귀속된다. 모든 권력은 본래적으로 여러 나라 인민 속에만 존재한다. 그것은 단일, 불가분, 불가양이며, 시효로 소멸되지 아니한다. 그것은 또한 위임장으로써 위임될 수 있으나 결코 대표될 수는 없다. 모든 국가에 오직 하나의 권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주권자인 여러 나라 인민의 권력이다. 창설된 여러 기관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며, 항상 그것(여러 나라 인민)에 종속한다.

제9조 위임자의 정식 위임에 의하지 않고 공무를 집행하는 자는 인민의 주권을 침해하는 찬탈자이다.

제10조 여러 나라 인민의 주권 행사는 8가지의 상호 동등한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사회상태에서 사람이 가지는 다음의 권리들이다.
직접 모든 공적 기관을 선출할 권리
사회의 이익에 대하여 토의할 권리
법률을 제안할 것을 위임 받은 수임자에게 개별적으로는 소망과 의향을, 전체적으로는 의사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법률의 제정에 참가할 권리
자신의 위임자의 이익을 배신하는 의원을 소환하여 처벌할 권리
공적인 조세의 필요성을 확인할 권리. 즉 자유롭게 공적인 조세를 승인하고 그 용도를 지켜보고 그 세액, 기준, 징수, 기간을 결정할 권리
모든 공무원, 행정관, 관리, 인민의 공금의 관리자에게 그 사무에 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
수임자가 그것에 법률로서의 효력을 부여하고 집행 가능케 하기 위하여 제기했던 법률안을 검토하고 거부 또는 재가할 권리
임의로 사회계약을 재검토하고 개조하고 수정하고 변경할, 국가 속의 전체로서의 시민의 권리

제11조 사상의 자유는 우선 모든 사람이 최고존재에 대하여 경의를 바칠 경우에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자유의 대원칙에는 어떠한 종류의 예외도 없다. 고로 국가는 신앙의 표명이 사회계약에 의하여 확립된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 아닌 한 신앙에 관한 사항에 조금도 개입할 수 없으며, 개입해서도 안 된다.
사상의 자유는 또한 사상의 자유로운 전달과 모든 의견에 대한 관용도 확인한다. 사고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이다. 따라서 사람은 그 능력을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 제지, 제한 당함이 없이 자유롭게 쓰고, 말하고, 출판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제12조 행동의 자유란, 자유롭게 왕래하고 집합하고 창설된 기관의 통치나 활동을 비판하고 감독하고, 요컨대 사회와 동포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지 않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모든 개인에게 속하는 자유를 말한다. 이리하여 사회에 있어서 각자의 권리 행사는 다른 공동의 구성원에게 같은 권리 향유를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계약에 의하여 확인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제13조 개인의 자유란, 투표하고 선거하고 토론하고 그리고 각자에게 귀속되는 주권의 부분을 집회에서 행사하는, 모든 개인에게 속하는, 다툴 수 없는 권리를 말한다. 사회계약은 시민이 이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 중지 혹은 정지될 수도 있음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개인의 자유란 모든 사람이 그 노력과 시간을 자유롭게 계약할 수는 있으나 자신을 매매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인격은 양도하지 못한다.

제14조 개인의 안전은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누구도, 사회계약에 의하여 정해진 경우가 아니면, 그리고 그것이 규정하는 형식에 따르지 않으면 체포되거나 소추되거나 구금되지 않는다.
자의적 또는 옳지 않은 명령으로 불안에 직면해 있는 모든 시민은 단호히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각 개인은 신체에 대한 공격을 받은 경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힘으로써 그 힘을 격퇴할 수 있다.
누구도 범죄가 있기 전에 공포되고 공정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법정에 소환되어 심판 받지 아니한다.
피고인은 유죄선고를 받기 전에는 무죄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를 체포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판단될 경우에도 그 신병을 확보하는 데 있어 필요 이상으로 엄한 강제는 모두 사회계약에 의하여 엄중히 억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15조 개인의 보전은 고의의 살인범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모든 악인이 처벌될 것을 요구한다. 형벌은 범죄에 비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16조 재산의 향유란 점유할 권리를 의미한다. 재산은 그 전원이 자기의 보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민의 보호 하에 있다.

제17조 토지 점유권은 사회에 있어서는 한계를 가진다. 그 범위는 상업, 농업이 어떠한 경우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국가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가 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자유, 안전, 신체의 보전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재물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사, 가장 불변의 권리란 부를 획득하기 위한 야심을 억제하고 정의에 걸맞는 방법으로 부의 거대한 불평등을 타파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의 압제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제18조 사회상태에서 사람은 다음 4가지 종류의 재산을 승인한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고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제1의 가장 신성한 재산은 그들에게 생존하기 위한 필요불가결의 수단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들이다. 그에 못지 않게 본질적인 제2의 재산은 노인, 병약자 혹은 노동을 할 수 없는 자에게 휴식이라는 형태로 주어진다. 그것은 극빈자에 대한 자선의 실시 및 건장한 빈자에 대한 노동의 제공을 통한 구제에 있다. 제3의 재산은 상업, 농업의 생산물 또는 공사의 지위 및 직무에 대한 급여이다. 제4의 재산은 세습재산 및 상속재산 또는 증여로 이루어진다.

제19조 소유권은 불가침의 권리이므로 그것을 가진 자는 누구나 그 행사가 결코 사회의 파괴로 향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 성질 여하에 관계없이 임의로 자기의 재산과 수입을 처분할 수 있다.

제20조 절도, 투기, 독점, 매점에 의하여 공공재산의 희생 위에 축적된 재산은 사회가 확실한 사실로써 공유재산의 사적 소비의 증거를 확보한 경우 즉각 국유재산이 된다.

제21조 긴급한, 확실하게 증명된 공공의 필요가 요구하고, 그리고 언제나 정당한 사전 보상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제22조 압제에의 저항은 귀중한 봉기의 권리이다. 봉기의 권리는 오로지 필요한 법 외에는 인정해서는 안 된다. 국왕, 전제군주, 독재자, 야심가, 지배적인 음모가, 폭군 등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 그에 의하여 국민의 주권이 찬탈되어 침해 당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군대나 무력이 국가 안에서 우월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사회계약이 정한 한계를 창설된 여러 기관이 일탈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국민의 공금이 소비되고 국비의 소비가 사회의 빈곤을 극대화할 경우 압제는 존재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제봉기야말로 독립을 보장하는 것, 권리 중 가장 정당한 것, 의무 중 가장 신성한 것이 된다.

제23조 주권자인 국민이 사회상태를 형성할 때 그 여러 섹션은 내용을 명시한 위임장을 휴대한 의원을 파견한다. 집합된 그 대리인들은 자기의 위임자의 의도를 개진하고, 그들에게 법안을 작성하고 제시한다. 다수가 이를 승인하면 그 기본적 협약이 사회계약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체계가 된다.

제24조 법률은 일반의사의 표명이다. 이 의사는 주권자집회에 집합한 시민이 섹션 마다 표명한 부분적인 소망을 수집하고 비교하고 검토하는 일에 의해서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제25조 구가에 있어서 창설된 기관의 중 첫째는 국민대표부라고 불린다. 둘째는 법률집행위원회라고 불린다.

제26조 사회계약은 공직의 종신제를 정식으로 금지해야 한다.

제27조 사회계약은 공직의 겸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모든 창설된 기관과 기관 사이에 명확한 분리를 확립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제28조 사회계약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특별히 전념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제29조 사회계약은 나아가 공무원의 야심을 제약할 것을 특별한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따라서 어떠한 자도 의무에 위반한 경우에 그 사명의 크기에 비례하여 형벌이 과해진다.

제30조 사회상태에서 인권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보편적으로 주권자인 여러 나라 인민의 독립을 필요로 한다. 그러함이 마땅하다.

 

 

[류은숙] <2005년 8월 11일 인권하루소식 제2873호> 

[류은숙] <2005년 7월 5일 인권하루소식 제2845호>

 

인권이 서구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서구사회에서 종교적 자유의 획득이 모든 정신적 자유의 선구적 역할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서구 중세 봉건 사회 속의 종교란 어떤 것이었나. 오늘날 국가가 수행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기능을 거의 다 담당했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에스코트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영원절대의 진리체계가 설교될 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회권력이 강대한 질서 속에서 그에 대한 도전을 한다는 것은 지옥의 불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도전을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내면의 자유도, 양심의 자유도 얘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종교적 관용'이란 어떤 의견, 신앙 또는 종교적 행위는 교회 또는 국가에 의해 승인되고, 다른 것은 용인도 승인도 되지 않는 국가정책을 말한다. 관용은 특정 종파에게만 주어지거나, 설령 관용되었다 할지라도 특정 종파의 사람은 공직이나 특정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적 관용은 종교적 자유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관용할 수 있는 권력은 또한 관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인권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 예가 오늘 읽어볼 영국의 관용법이다. 명예혁명 이후 제정된 여러 법률 가운데 하나인 '관용법'은 영국 국교회를 따르지 않은 신교도들에게 일정정도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이다. 하지만 가톨릭에 대한 엄중한 저지는 분명하고, 신교도인 비국교도에 대한 관용이란 것도 형벌을 줄여준 것이 고작이지, 선서를 강요하는 등 그 많은 속박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국가는 비국교도를 개종시킬 의도는 버렸으니 알아서 조용히 처신하라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국왕이 신봉하는 교의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는 의도를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이전 시대와는 획을 긋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관용은 박해가 성공할 전망은 없고 불안과 혼란만을 조장한다고 봤을 때 권력측이 감수하는 타협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개혁과 종교적 관용을 거쳐 종교적 자유로 고양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고방식과 원칙이 뿌리부터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교적 자유에 발동을 건 것은 사회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종교의식이 영리활동에 끼치는 방해에 대한 도전이었다. 새로이 전개된 경제활동은 내세를 위한 준비로서 현세를 바라보는 도덕률, 현세적인 부의 획득이나 부를 위한 부의 추구를 가로막는 신성한 제재와 인습을 돌파해야 했다. 천국의 이익이 아닌 지상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자들은 그런 이유로 체제화된 종교적 지배에 저항했다. 불가침의 절대적 교리를 논의의 도마에 올림으로써 합리주의적 사고를 자극했고,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전통의 지배권을 이완시켰다. 그에 따른 중간 결과는 교회를 대신하여 세속의 지배자가 인민이 신봉해야 할 종교를 결정하고 이단의 교리는 국가권력으로 탄압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권위가 다른 권위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었다.

이제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국가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원칙이었다. 이단을 근절하는 일이 국가의 의무라고 여겨지던 국민교회의 시대를 지나 국교분리의 요구가 달성돼서야 개인의 종교적 자유로 도약할 토대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사람의 영혼의 구제 문제는 국가의 권한이 아니며, 국가의 임무는 사람들의 사회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있다. 정신생활에 중추부분인 종교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이 관여할 수 없는 내면적 자유가 있으니, 정부의 기능인 형벌의 부과라는 외면적인 힘으로써는 사람들의 내면적 확신을 없애거나 생기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였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관용론도 무신론자에게나 이교도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가 이제 국가적 사항이 아니라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라고 인식되었다 해도 종교적 편집이나 종교적 대립이 지양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일들이 사사로운 일로 방임되는 것이었다. 종교적 자유가 인정됨으로써 인간은 비종교화된 국가를 매개로 마음대로 종교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이기심과 자유경쟁이 판치는 사회에서 생활의 안정을 확보한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자기와 신사이의 사사로운 일이 되었을지 모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종교가 이용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극우 보수 종교가 국가권력을 창출하고 조종하는 일을 우리는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앞장서서 '종교의 자유'를 세계를 향해 서슴없이 설교하는 것도 자주 본다. 참된 종교의 자유는 대립의 지양이지, 대립의 방임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는 부분적이고 한정되고 모순된 것이었지만, 자유의 속성 자체가 그것을 억누르는 체제를 부단히 변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또한 생각한다. 종교의 자유로부터 고양된 인간 내면의 자유, 정신의 자유는 변혁을 위한 행동에 필수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관용법(The Toleration Act, 1689)

영국 국교회의 반대자들인 신교도 백성들에게 일정한 법률의 형벌을 면제하기 위한 법

어떤 사람들은 종교 행사에 있어서의 성실한 양심에 평안하므로 폐하의 신교도 백성들을 이해와 호의로 통합하는 것이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다.
…가장 훌륭하신 국왕과 여왕폐하에 의해, 성직자인 상원의원과 성직을 갖지 않은 상원의원들의 충고와 동의로서, 그리고 현 의회의 하원의원들에 의해 … 가톨릭교도들의 의원직 취임을 방지하는 법이 제정됐다.
…덧붙여 상술한 맹세를 하고 선언하고 서명한 모든 사람과 사람들(비국교도)은 어떠한 형벌, 벌금, 또는 몰수를 면할 수 있고, …영국 국교회를 따르지 않음을 이유로 해서 어떠한 교회 재판소에서도 기소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는 자들의 회합이 자물쇠나 빗장이나 걸쇠로 잠긴 장소에서 종교 의식을 위해 열린다면, 그러한 회합이 열리고 있는 중 어느 때든지, 그러한 회합에 참여하려 한 자와 참여하고 있는 모든 자들은, 상술한 맹세와 선언을 하고 서명했다 할지라도, 그러한 회합을 이유로 하여 이 법으로부터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며, 이 법에서 열거한 상기 법률들이 정한 모든 형벌과 벌금에 처해질 것이다.
이 법에 담긴 그 어느 것도 상기한 사람들(비국교도)에게 십일조의 납부 또는 기타의 교구의 의무, 또는 교회나 성직자에 대한 그 어떠한 의무를 면제하는 것으로는 해석되지 않을 것이며, 그와 같은 이유로 교회 재판소나 그밖의 다른 곳에서의 기소를 면제하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 것이다.
…기도 방식 통일령, 성례전 및 기타의 의식들의 집행, 영국국교회의 주교·사제·부제를 택하고 서품하고 성별하는 형식, 종교 행사를 위한 회합을 집전하는 법은 이 법률에 의해 허가되고 용납된다.
…그러한 사람(맹세하고 선언하고 서명한 비국교도)은 어느 때든지 자물쇠, 빗장, 걸쇠를 풀지 않고서는 어느 곳에서나 설교해서는 안된다.
…모든 치안 판사는 장차 어느 때든지 종교 행사를 위한 회합에 가려는 자에게 상기한 선언을 하고 서명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또한 상술한 맹세 또는 이하에서 언급된 충성선언을 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맹세를 주저하고 그로인해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치안판사는 그 결과로서 그 자를 보석 없이 투옥해야 한다. … 그러한 자가 일반재판소나 사계법원에서의 2차 제출에서도 상기한 선언과 서명을 거절한다면, 그 자의 거부는 그때 그 자리에서 기록되며, 그때부터 천주교의 영국국교기피 죄인에 해당하는 모든 의도와 목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며, 그에 따라 상기한 모든 법률에 따른 모든 형벌과 벌금을 치러야 할 것이다.
…영국 국교회의 반대자들이 해야 할 선서는…나는 선언합니다. 어떠한 외국의 왕자, 사람, 고위성직자, 국가, 군주도 이 왕국 내에서는 어떠한 권력도, 관할권도, 우월성도, 고귀함도, 교회에 관한 권위나 성직의 권위도 가질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써 기독교적 신앙의 공언에 서명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공언합니다. 그리고 …신구약 성경이 성령감화에 의해 주어졌음을 인정합니다.
…신성한 사업을 위해 만들어지고 제공된 모든 법률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 법률에 의해 용인되거나 허가된 종교 의식의 회합에 가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상기한 법률을 위반하는 모든 자들에게 집행될 것이다.
…이 법률이나 이안에 담긴 그 어떤 구절도, 설교로나 글로써 신성한 삼위일체교의를 부인하는 천주교도 또는 영국국교기피자, 그 무엇이건 누구이건 간에 그런 자에게 어떠한 편안함이나 혜택, 이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해석돼서는 안된다.
…종교적 회합의 장소가 공인될 때까지는, 종교의식을 위한 어떠한 회합도 이 법률에 의해 허가 또는 용인되지 않는다.…(그 회합의 장소를)등록해야 한다…

 

[류은숙] <2005년 7월 5일 인권하루소식 제2845호>

[류은숙] <2005년 6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831호> 

 

국제인권기준이라는 것에는 반드시 '반차별' 조항이 있다. 세계인권선언의 반차별 조항(제2조)을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구체화한 것이 이 협약이고, 이 협약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규약(제 13조)을 비롯한 주요인권조약에 자리 잡은 교육권 조항의 모태가 됐다.

현대의 인권기준이라는 것이 1·2차 세계 대전의 폭탄비와 피바다 속에서 인류가 얻은 뼈아픈 결과라는 것을 이 협약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수호의 방벽도 인간의 마음 속에서부터 구축돼야 한다"는 유네스코의 창립정신을 따라, 교육을 통한 인류의 연대, 인권과 평화의 실현을 목표한 것이 이 협약이다.

그러나 입으로 '차별 철폐'를 외친다 하여, 정말로 '센' 법률로 제정됐다 하여 차별이 해소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국가는 공적생활에 있어 사람의 재산이나 학력, 기타의 차이에 구애되지 말고, 국민을 모두 주권에 대한 평등한 참가자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귀에 닳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차별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팽겨 쳐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기심과 자유경쟁이 판치는 시장에서의 사적차별은 제멋대로 운동하며 차별의 곡선을 갈지자로 그린다. 국가의 법률 혹은 국제기준에 따른 차별이 '반차별 조항'에 의해 철폐되어감에 따라, 즉 '공적 평등'이 진행함에 따라 사적차별도 진행되며 제멋대로 활개 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공식적 평등과는 반비례로 각종 이유에 따른 증오와 반감, 차별이 고조되어 가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을 법에서 금지했다 하여 사적 사업장에서의 그에 대한 반감이나 차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각종 법률이나 규제 속에 등장하는 반차별 조항이나 원칙은 현실에서의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반비례적 온도계라 할 수 있다. 헌법의 평등 사항은 현실에서의 불평등에 무력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인권의 주인들은 더욱더 적극적인 국가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협약이 보여주는 바도 이런 맥락에 있다. 세계대전이라는 참화 이전에 교육의 의미란 것이 지식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에 머물렀다면, 전후 교육의 의미란 '권한 강화'이다. 교육에 대한 권리란 수동적으로 특정된 내용을 주입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권한강화요, 창조의 과정이다. 왜냐? 알 수 있어야,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교육의 권리에 다가설 수 있고, 그것 말고도 다른 권리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의 불평등을 용납하지 않는 대표적인 원칙은 첫째,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모든 교육기관과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교육은 안전한 물리적 조건하에서 이뤄져야 한다, 셋째, 교육은 모든 사람이 (경제적 및 기타의 이유을 불문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교육의 권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자체가 인권이란 의미 뿐 아니라 그것 없이는 다른 권리를 위해 나서거나 옹호하기 힘든 권리 자체의 모태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 협약이 말하는 주요한 원칙은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며, 이는 모든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으며, 물리적으로 가능한 속에서 경제적으로 제반 교육환경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협약은 1960년 12월 14일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 총회에서 채택되었고, 62년 5월 22일에 발효되었다. 2004년 12월 31일 현재 가입국 수는 91개국이고, 남북한 모두 가입하지 않았다.

최근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의 '학력 콤플렉스'니 '대학 나온 대통령'이라는 발언으로 온 언론매체가 떠들썩했다. 무릇 정치권이란 '립서비스', 즉 말로나마 인권을 옹호해야 하고, 그런 약속에 대해 속으면서도 내심 기대하게 되는게 우리들이다.

전 씨의 발언은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은커녕 '규정'으로나마 금지돼 있는 반차별의 원칙을 옹호해야 할 립서비스마저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립서비스조차 안하겠다면 그 노골적인 반감과 차별의 행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래서 사립학교법의 개정이나 교육상의 반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조치들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나오는 것이 '언행일치'인가 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 즉 "인권에 대한 존중"이라고 국제기준들은 하나같이 말하고 있다. 전 씨를 비롯한 소위 '학력 콤플렉스'가 없는 분들이 알맹이가 빠진 교육을 받은 것이 틀림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교육상의 차별금지 협약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 총회는 1960년 11월 14일부터 12월 15일까지 파리에서 열린 제 11차 회기에서,
세계인권선언이 비차별의 원칙을 주장하고 또한 모든 인간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였음을 상기하고,
교육상의 차별이 그 선언에 천명된 권리의 침해임을 고려하고,
헌장의 규정에 따라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는 인권에 대한 범세계적인 존중과 균등한 교육기회의 조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국가간의 협력을 조직할 목적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며,
이에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는 각국 교육제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교육상의 모든 차별을 금지함은 물론 교육에 있어 모든 사람들의 기회와 처우의 균등을 촉진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고,
교육상 차별의 여러 측면에 관한 제안을 이 회기 의제 17.1.4항으로 상정받았고,
제10차 회기에서 이 문제는 회원국에 대한 권고뿐만 아니라 국제협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결정하여,
1960년 12월 14일 이 협약을 채택한다.

제1조 1. 이 협약의 목적상, "차별"이라 함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경제적 조건 또는 출생에 기하여, 교육상의 처우균등을 무효화시키거나 손상시키는 목적이나 효과를 가진 모든 구별, 배제, 제한 또는 특혜를 포함하며, 특히 다음을 포함한다.
(a) 어떠한 사람 또는 집단에 대하여 일정 유형이나 단계의 교육에 관한 접근을 배제시키는 것.
(b) 어떠한 사람 또는 집단을 저급한 수준의 교육에만 한정시키는 것.
(c) 이 협약 제2조의 규정에 따를 것을 조건으로, 사람들 또는 사람집단에 대하여 별도의 교육 제도를 수립하거나 유지하는 것.
(d) 어떠한 사람 또는 집단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과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을 부과하는 것.
2. 이 협약의 목적상, "교육"이라 함은 모든 유형과 단계의 교육을 가리키며, 교육에 대한 접근, 교육의 수준과 질, 그리고 주어진 교육 여건을 포함한다.
제2조 다음과 같은 상황은 그 국가 내에서 허용된다면 협약 제1조의 의미상의 차별에 해당한다고 간주되지 아니한다.
(a) 학생의 성별에 따라 분리된 교육 제도 또는 기관을 설치하거나 유지하는 것. 단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동일한 기준의 자격을 갖춘 교사진을 제공하며, 같은 수준의 교육시설과 장비, 그리고 같거나 동등한 교육과정을 이수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b) 종교상 또는 언어상의 이유에 따라 학생의 부모나 후견인의 희망과 합치되는 교육을 제공하는 분리된 교육제도 또는 기관을 설치하거나 유지하는 것. 단 그러한 제도에 참여하거나 그러한 기관에 출석하는 것은 선택에 의하여야 하며, 제공되는 교육이 특히 동일한 단계의 교육을 위하여 담당기관이 작성하거나 승인한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c) 사립 교육기관을 설치하거나 유지하는 것. 단 그 기관의 목적이 특정 집단의 배제를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이 제공하는 것에 추가되는 교육시설을 제공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 기관이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운영되고, 제공되는 교육이 특히 동일한 단계의 교육을 위하여 담당기관이 작성하거나 승인한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제3조 이 협약에서 의미하는 차별을 불식시키거나 방지하기 위하여 당사국은 다음을 약속한다.
(a) 교육상의 차별과 관련된 모든 법률조항 및 행정지침을 폐지하고, 관련된 모든 행정관행을 중단한다.
(b) 필요한 경우에는 입법을 통하여 학생이 교육기관에 입학할 때 차별이 없을 것을 보장한다.
(c) 학비, 장학금, 기타 다른 형태의 학생에 대한 지원, 외국유학을 위하여 필요한 허가나 편의제공에 있어서 능력이나 필요에 기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공기관에 의한 국민들간의 어떠한 다른 처우도 허용하지 아니한다.
(d) 공공당국이 교육기관에 부여하는 지원의 형태에 있어서, 학생들이 특정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을 근거로 한 제한이나 특혜를 허용하지 아니한다.
(e) 자국 내 외국인 거주자에게 자국민에게 제공되는 것과 동일한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제4조 협약 당사국은 상황과 국가 관행에 적합한 방법으로 교육문제에 있어서 동등한 기회와 처우를 증진시킬 수 있는 국가정책을 수립, 발전, 적용할 것을 약속하며, 특히 다음을 약속한다.
(a) 초등교육을 무상, 의무교육으로 한다. 다양한 형태의 중등교육이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이용가능하고 접근 가능하도록 한다. 고등교육은 개인 능력에 기하여 모두에게 동등하게 접근 가능하도록 한다. 법률에 규정된 학교출석 의무를 모두가 준수하도록 보장한다.
(b) 같은 단계의 모든 공교육 기관에서의 교육수준이 동등하도록 보장하며, 제공되는 교육의 질과 관련된 여건들 또한 동등하도록 보장한다.
(c) 초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과 초등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한 사람들의 교육, 그리고 개인 능력에 따른 그들의 계속교육을 적절한 방법에 의하여 장려하고 강화한다.
(d) 교직에 대한 훈련을 차별 없이 제공한다.
제5조 1. 이 협약 당사국은 다음에 동의한다.
(a) 교육은 인간성의 원숙한 발달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지향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사이의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켜야 하며, 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을 지원하여야 한다.
(b) 부모 또는 해당되는 경우 후견인의 다음과 같은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첫째, 공공당국이 운영하지 않는 기관을 자녀의 교육기관으로 선택할 자유. 단 이는 담당기관이 작성하거나 승인한 기본적 교육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둘째, 그 국가 내에서 법률의 적용을 위하여 따르는 절차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아동의 종교 및 도덕 교육을 확보할 자유. 어떠한 사람이나 사람집단도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종교교육을 받도록 강요받지 아니한다.
(c) 소수민족의 구성원에게 학교의 운영과 함께 각국의 교육정책에 따라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여 스스로의 교육활동을 수행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단 다음을 조건으로 한다.
(i) 이 권리는 소수민족 구성원이 공동체 전체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국가 주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사되어서는 아니된다.
(ii) 교육의 기준이 담당기관이 작성하거나 승인한 일반적 기준보다 낮아서는 아니된다.
(iii) 그러한 학교에 참가하는 것은 선택에 의하여야 한다.
2. 협약 당사국들은 이 조 제1항에 선언된 원칙의 적용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한다.
(6-19조 생략)

 

[류은숙] <2005년 6월 14일 인권하루소식 제2831호> 

[류은숙] <2005년 5월 24일 인권하루소식 제2817호> 

 

인권을 보장한다고 큰소리치는 정부들에 대한 비판에는 "본문에는 권리를" 그리고 "그 각주에는 권리의 침해를"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선전되는 문구에는 엄연히 '인권'이 있는데 현실을 규정하는 힘센 손에는 언제나 '예외규정'이 들려있다는 말이다. 오늘 읽어볼 선동법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인권선언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미국 버지니아 권리장전(1776년)은 "출판의 자유는 전체 자유를 지켜 주는 거대한 방파제의 하나이며, 독재 정부 이외에는 아무도 이를 제지할 수 없다"고 했으며, 미국 헌법 수정 제 1 조(1791년 발효)는 "연방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또는 자유로운 신앙 행위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또한 언론, 출판의 자유나 국민이 평화로이 집회할 수 있는 권리 및 불만 사항의 구제를 위하여 정부에게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본문이라면 각주에는 '선동법'이 있는 것이다.

인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투쟁의 대상이자 무기는 언론의 자유였다. 인간과 인간성의 발현을 억누르는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투쟁은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속에 품은 생각을 해방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 목표를 구상·설정할 수 있는 자유(사상의 자유), 그 표현·교환의 자유(언론의 자유), 그 실현을 위한 행동의 자유(집회·결사의 자유)가 삼두마차인 것은 당연했다.

17세기 종교전쟁과 그에 따른 참상에 시달리던 유럽에서 국가권력이 관여할 수 없는 내면적 자유의 확립, 즉 종교와 국가의 분리는 중요한 투쟁이었다. 종교가 지배하는 영역과 수행하는 기능이 광범위했기 때문에 사회적 투쟁은 불가피하게 종교투쟁이 되었던 것이다.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모태로 했고, 허가제와 출판에 대한 통제는 종교의 지나친 영향으로 간주됐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고전으로 알려진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Areopagetica)'는 출판에 대한 허가제를 도입한 의회에 대해 부르짖는다. "좋은 책을 죽이는 자는 이성 자체를 죽이는 것이요, 신의 표상을 눈에서 지우는 것이다", "모든 자유들보다 나에게 알 자유, 발언할 자유, 자유롭게 논쟁할 자유를 달라. 진리가 자유롭다면, 그것은 모든 가능한 실수를 극복하고 승리할 것"이라고. 이러한 신념은 의견과 언론의 자유투쟁의 초석이 되었고 18세기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을 통해 재차 제기됐다.

그래서 미국의 권리장전에서처럼 근대시민혁명의 선언과 헌법들은 정신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인권의 시금석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장되고 투쟁된 언론의 자유는 일부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장악한 의회에서의 언론의 자유였던 것이지, 시민개인(무식쟁이이자 무산자로 치부된)의 표현의 자유는 결코 아니었다. 시민 개인의 정치 비판은 때로 의회를 모욕하는 것으로서 '자유로운 언론기관'인 의회에 의해 탄압 받기가 십상이었다. 밀턴과 같은 언론의 자유 예찬은 '위대한' 지식인의 자유의 옹호였지, 일반 시민의 권력비판의 자유, 다수자가 증오하는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를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흔히들 미국의 경우에는 언론의 자유를 위한 토양이 풍부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다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간 청교도들 자신이 종교개혁의 급진파였기 때문이다. 신문에 혹독한 세금을 부과했던 영국 정부의 인지법에 대한 식민지인의 저항도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대한 투쟁은 유럽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계속돼야 했다. 국가가 특별히 어느 하나의 종교를 선호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관용할 것은 희망사항이었지, 권리장전 1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완수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미국이 독립한 후에는 언론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필요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이 예상되면서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이 1798년 '선동법'이란 이름으로 통과됐다.

이 법률은 이후에도 계속 들먹거려질 '국가안보'에 대한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즉 "미국 정부, 의회, 대통령에 반하여 글쓰고, 말하고, 출판하는 것이 범죄"라는 것이다. 이 법은 전쟁의 위협이 지난 후 폐지되었지만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이런 류의 법률은 계속 출현했다. 최근 세계를 대상으로 "보편적 민주주의"를 증진하는데 미국의 외교정책을 헌신하겠다는 미국의 '민주주의 증진법'(2005년 3월 미의회 상하원 동시 상정)은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행사할 권리를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비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해 공식적 비난, 공관장의 소환, 경제제재, 미국 입국 금지 등 갖은 조처를 다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을 '본문'으로 읽어야 할까, '각주'로 읽어야 할까?

'선동법'을 치켜든 우리 사회를 돌아본다. 삼보일배를 하던 울산건설플랜트노조 노동자들이 전원 연행되었다고 한다. 두발자유화를 외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이 '불온'하다는 얘기가 자주 나오고 있다. 이런 '보통' 사람들에게 신체는 가장 중요한 표현의 수단이고, 그 자신이야말로 자유로운 언론의 기관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거대한 언론사의 데스크를 호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언론의 자유가 '본문'에 있다면, 이들의 투쟁을 '폭도'나 '불온'으로 내모는 선동법이 '각주'에 있는 것이 언론의 자유의 현실임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1798년 미국의 선동법(THE SEDITION ACT OF JULY 14, 1798)

"미국에 반하는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법"이란 제호의 법률에 부가되는 법

1. 의회에 모인 미합중국 상·하원은 이와 같이 제정한다. 타당한 권위로 통치되는 미국 정부의 여하한 조치에 반대하거나 또는 미국 법률의 시행을 훼방할 목적으로, 또는 미국 정부의 공직자가 그 책임이나 임무를 인수, 수행, 집행하는 것을 위협 또는 방해할 의도로 누구(들)이든지 불법적으로 결합하거나 공모한다면, 그리고 누구(들)이든지 앞서 언급한 의도를 갖고 반항, 폭동, 불법집회 또는 결합에 조언, 자문, 알선 시도를 하는 자는 그러한 음모, 위협, 자문, 조언, 시도가 의도한 효과를 발생했는지 여부를 떠나 심각한 비행으로 간주되며, 미국이 관할하는 법정에서의 유죄판결에 따라 5천 달러 이하의 벌금과 6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그리고 이 액수와 기간에 적절하게끔 법원의 재량에 따라 동법원이 지시하는 액수의 보석금을 판결할 수 있다.

2. 미국 정부 또는 미국의 의회 또는 미국의 대통령을 비방, 모욕, 불명예스럽게 할 의도로 또는 그들에 대한 반대와 선량한 미국 국민의 증오를 선동할 목적으로, 또는 미국의 법률에 대하여 또는 미국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이나 미국의 법률을 이행하는 데 있어 행해진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 반대 또는 저항할 목적으로, 또는 미국의 법률에 저항, 반대, 무효화시킬 목적으로, 또는 미국과 그 국민이나 정부에 반하는 외국 국가의 적대적인 구상을 지원, 고무, 교사할 목적으로 미국정부 또는 의회 또는 대통령에 반대하는 잘못된 중상적이고 악의적인 저작을 쓰고, 인쇄하고, 발언, 출판하거나 그런 저작, 인쇄, 발언, 출판을 입수하거나, 의도적으로 그러한 저작, 인쇄, 발언, 출판을 지원한 자는 누구든지 미국 관할권하의 법정에서 유죄로 판결되면 2천 달러 이상의 벌금과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이하 3, 4항 생략)

 

[류은숙] <2005년 5월 24일 인권하루소식 제28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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