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59 호  [기사입력] 2007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대대적인 6월 항쟁 20주년 기념행사가 뜨거운 태양 아래 지나갔다. 자극되는 많은 기억들 사이로 ‘공식화’된 행사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내몰린 느낌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을 비판하며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강조하는 의견들도 많았다. 6월 항쟁 20주년에 대한 어느 신문의 사설 제목은 “연대하자, 불평등을 극복하자”던데, 10주년 때 창간됐던 어느 잡지는 “자유와 평등을 넘어 사회적 연대로”를 큰 제목으로 뽑았던 것 같다. 어떤 자리, 어떤 입장에서 6월 항쟁을 맞았던 간에 앞에 놓인 과제는 연대를 요구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문득 널리 인용되는 문장이 떠올랐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로 시작되는 이 말은 자기 반성과 더불어 방관자와 무관심을 비판한다. 상호의존성과 연대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전세계적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유명한 인용문의 주인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마틴 니묄러로 알려져 있다. 마틴 니묄러의 생은 극과 극이다. 목사와 평화운동가가 되기 전의 그는 1차 대전 때 독일 잠수함(U 보트)의 지휘자였고, 또한 한 때는 히틀러와 나치당의 지지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나치의 교회문제 간섭으로 인해 반대 입장에 서게 됐다. 니묄러는 1931년 ‘목회자 긴급 동맹’을 결성하여 나치에 대한 저항에 나섰고 전국적으로 설교를 하러 다니던 중 1937년 비밀경찰에 체포된다. 나치 수용소로 보내진 그는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종교인으로서의 그는 고백교회의 창설자이기도 하고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의장도 지냈다. 전후 평화운동가로서 활약한 그는 서독의 서구와의 군사 동맹에 강력히 반대했고, 핵무기 경쟁에 반대하며 세계적 화해와 군축을 위해 싸웠다.

오늘의 인용문은 마틴 니묄러의 ‘고백’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나, 하나의 원본이 있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이를 ‘시’로 부르기도 한다. 그가 행한 수많은 인터뷰와 설교에서 질문과 의도에 따라 혹은 강조하고 싶은 바에 따라 지칭하는 대상과 배열되는 순서가 달랐다고 한다. 또한 인용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니묄러가 처음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1946년에는 ‘공산주의자’, ‘불치병 환자’, ‘장애인’, ‘유태인 또는 여호와의 증인’, ‘점령된 국가의 인민’을 언급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많은 독일인들이 불치병자나 장애인이란 이유로 정책적으로 살해당했던 배경이 있다.

미국에서 이 말이 널리 인용되던 때에는 매카시즘의 영향과 인용하는 이의 편향된 의도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사라지고 ‘유태인’이 맨 앞에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 박물관에 새겨져 있다는 문구가 대표적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자’가 사용된다. 회자되는 다양한 종류의 표현 중에서 흔히 인용되는 것은 1968년의 미국 의회에서의 연설 기록으로 알려진 것이나, 이 또한 ‘정본’이라고 주장되는 문장이 조금씩 다르다. 오늘 소개하는 문장은 의회 기록으로 알려진 것 중 하나이다.

정확한 문장이 무엇이었냐를 다투기보다는 여기에 담긴 의미에 더 주목할 가치가 있다.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자들이 즐겨 인용했다는 것처럼 이 말의 메시지와 영향력을 빌어 오늘날에도 계속 비슷한 문구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세계화 반대자’, ‘무슬림’, ‘성적 소수자’, ‘이주자’, ‘시위대’ 등이 들어가는 다양한 개작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개작을 한다면 그들이 잡으러 온 사람들 속에 누구를 넣고 뺄 수 있을까? 오늘 한국 사회에는 잡힐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더욱 중요한 것은 “결국 나를 지켜줄 만한 사람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는 수많은 ‘나’와의 연결이 절실한 때이다.

마틴 니묄러 “그들이 왔다”(Martin Niemöller, "They Came,")

“제일 먼저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지만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지만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지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셰린 이샤이의 ‘세계인권사상사’에서 재인용)

인권오름 제 59 호  [기사입력] 2007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63 호  [기사입력] 2011년 08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얼마 전 취임한 검찰총장(한상대)의 취임사가 화제가 됐다.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며 ‘전쟁’, ‘응징’, ‘제거’, ‘싸움’ 등 군대 전투 교본에 쓰일 법한 단어를 엄청 써댔기 때문이다. 병역면제, 위장전입, 탈세, 부동산 투기 등 현 정부 공직자들의 필수스펙을 갖췄다는 것 따위에는 더 이상 눈길도 가지 않았다. 그런 것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공포가 먼저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의 취임사는 나를 20여 년 전의 검사 책상 앞으로 다시 불러갔다.

대학 4학년 때였다. 보안과 소속 경찰들이 대학가 복사집 휴지통을 뒤져 찾아낸 ‘위험’한 폐지를 증거물로, 복사집 앞에서 경찰차도 아닌 택시로 대기하고 있다가 나를 낚아챘다. 소위 위험한 폐지 속에 담긴 생각들이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혐의였다. 그 폐지에는 학교 주변의 지나친 상업화와 외래화(소위 미국화)에 대한 걱정 등을 친구들과 토론하여 적은 글이 담겨있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연행사실은 전혀 통고되지 않았다. 한 신문에서 북한을 추종한 대학생이 잡혔다고 1면 하단에서 보도했다. 신문 보도를 보고서야 지인들은 내 연행사실을 알았다. 경찰의 심문에 따졌다. 내가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말하는데 북한에서도 진달래꽃이 예쁘다고 하면 북한을 추종하는 거냐고.

삼일 후에 불구속으로 풀려났으나 사건 종결을 위해 검사 앞으로 불려가야 했다. 반말을 찍찍 던지며 허튼짓 하지 말라고 호통 치던 그의 책상 유리에는 전국 공안검사 조직도가 반듯이 끼어있었다. 검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 조직도를 계속 노려봤다. 저 조직도에 있는 엄청난 수의 공무원들이 매일 나에게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검사 책상 옆 벽에는 공안수배자 사진이 담긴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거기 담긴 여러 대학교 학생회장들의 얼굴들이 나를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군사독재 시절에나 통했을 공포 취임사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문민을 지나 소위 CEO(씨이오) 대통령이 있는 사회에서 왜 필요한 것일까?

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게 몇 년 전 은행에서 경찰이 내 신상정보를 요구해 가져갔다는 연락이 왔다. 찾아서 따져보니 국정원 어느 분실에서 와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개적인 인권활동을 하는 나에 대해 수사할 일이 없었다. 수사를 하려면 명확한 혐의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고소, 고발을 했으나 검찰에선 받아들이지 않았고 재판에서도 나에게 왜 내사를 받았는지를 증명하라 했다. 그런 일로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오가던 때인지라 소위 검찰청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검찰청입니다’란 말에 메시지를 확인하려면 9번을 누르라는 지시를 따랐다가 거금의 전화요금이 떨어졌다.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으나 아무런 결과 통보도 받지 못했다. 그런 명백한 범죄에 대해 할 일도 많을 텐데 왜 법조문에도 나와 있지 않을 ‘종북좌익’이라는 범죄를 굳이 만들어 ‘전쟁’까지 하려드는 것인지, 권위를 위해 숫자를 늘리지 않아 엄청난 과로 속에서 일하는 직군이라는데 법조문에 없는 범죄까지 만들어 굳이 일을 더 많이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일전에 검사 스폰서 사건이 터졌을 때, ‘검사의 역할에 관한 유엔 가이드라인’을 소개한 일이 있다. 오늘은, 유엔 가이드라인보다는 동급의 스펙을 갖춘 같은 검사들의 얘기라면 좀 통할까 하여 호주 검찰청장을 지내고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국제검사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Prosecutors)의 대표를 했던 ‘검사’의 얘기를 끌어왔다. 제목이 ‘인권과 검사’이다.

이글에서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을 인용한 부분은 내게 이렇게 읽혔다.

“정부를 비판하는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정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은 ‘종북좌익세력’, 아이들에게 보편적 급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종복좌익세력’,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수해대책을 비판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대량신상정보유출에 주민번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 재벌을 비판하고 노동자 옹호하는 사람은 ‘종북좌익세력’이다.
자유로운 생각은 범죄,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범죄, 일인시위도 범죄, 두 명 이상 모여도 범죄, 불경한 트위터 계정을 갖는 것도 범죄, 직업이 없는 것은 범죄, 비정규직인 것은 범죄, 일하다 해고되는 것은 범죄, 가난한데 아픈 것은 범죄, 가난한데 대학 다니는 것은 범죄, 반값 등록금 요구하는 것은 범죄”

남아공 법무장관의 글은 또 이렇게 읽혔다.

“검사들은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 체제의 일환이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종북좌익세력의 딱지를 붙여 정부비판을 단속하는 체제의 사수자이다. 공정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기득권층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장애물로 간주된다. 그래서 국제인권법이 불법화한 법적 관행들이 규범이 됐고 많은 시민들을 협박하고 처벌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공포 취임사’가 아니라 인권옹호를 다짐하는 취임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것도 ‘종북좌익세력’의 꿈인가.

인권과 검사(니콜라스 코디리, 2001)

“형법은 그 나라 최상의 변호사들을 매혹해야 한다. 어떤 법 분야도 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형법은 공정한 재판과 법의 지배가 전국의 법정에서 매일 시험받는 곳이다. 그리고 나쁜 짓을 저지른 자의 공포가 기본적 인권에 대한 존중과 만나는 곳이다.”(커비 제이, 호주 고등법원)

호주 연방 검찰청의 20차 연례 회의에서 2000년 6월 호주 법무장관 모리스 로젠버그는 말했다. “검사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어렵다. 그 의무는 견고한 전문적 판단과 법률적 유능함, 상당량의 실생활 경험과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일할 능력을 요구한다. 모두가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든 사건에서 정답을 보장할 비결은 전혀 없다. 많은 사건에서 누가 합리적인 사람인지는 다를 수 있다. 확실성과 절대적 진실을 기대하는 검사는 일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검사 재량의 행사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다. 문제가 많고 복잡할수록 실수할 여지가 커지기 마련이다.”

로젠버그는 또한 신중하고 공정하게 행동할 검사의 의무와 공익이 요구하는 바를 고려할 것을 언급했다. … 적어도 지난 50년 동안 검사들에게 점차적으로 요구된 바는 검사의 어려운 의무의 행사를 형사 사법 절차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권보호와 준수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은 그것을 요구한다. 1966년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은 그것을 상세화하고 있다. 국제검사협회의 기준은 그것에 즉각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강제하고 있다. 1993년 세계인권대회의 비엔나 선언과 행동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주목했다.

“법 집행과 검찰기관 그리고 특히 독립적인 법관과 법률 전문직을 포함한 사법운영은 국제인권규범에 담긴 기준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인권의 완전하고 비차별적인 실현에 필수적이며 민주적 절차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불가결하다.”


다음의 명제들은 또 다른 다양한 성명에서 나온 것들이다.
1. 형사법을 이행하는 검사들은 아주 공정하게 해야 한다. 형사적 기소 과정의 궁극적 목적은 공정한 재판이며 사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피고인에게 공정한 것이다. 공정함은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 법률 체계 전반에서 성취돼야 하는 것이다.
2. 검사들은 형법제도에서의 위치와 역할 때문에 인권을 보호하는 데 특히 강력한 위치에 있다. 보통법 체제에서는 경찰에 대한 감독 역할이 거의 없지만, 검사들은 불법적 또는 부적절하게 획득한 증거 사용을 다루는 태도에서나 보강 수사에 대한 경찰 조언에서 재판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대륙법 체제에서는 검사들이 행사하는 준사법적 권한으로 피의자(그리고 관련자 누구나)의 권리가 충분히 보호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도록 착수 때부터 수사를 감독할 수 있다.

… 2000년 국제검사협회가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연례회의를 가졌다. 남아공은 인권을 이해하는 나라이다. 아주 오랫동안 시민 대다수에게 권리를 박탈해온 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탈취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고통 받은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구 남아공에 대해 썼다.

“아프리카 아동은 ‘아프리카인 전용’ 병원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인 전용’ 버스로 집에 가고 ‘아프리카인 전용’ 지역에서 살고, 설령 학교에 갈 수 있다면 ‘아프리카인 전용’ 학교에 다닌다. 그 아이가 자라면 ‘아프리카인 전용’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아프리카인 전용’ 마을에서 집을 빌리고, ‘아프리카인 전용’ 기차를 타며 낮이건 밤이건 언제고 멈춰 세워지고 신분카드를 제시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게 없으면 체포되고 감옥에 던져질 수 있다.
‘백인 전용’ 문으로 드나드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버스를 타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식수대를 사용하는 것은 범죄, 백인 전용 해변에 들어가는 것은 범죄, 밤 11시 이후 거리에 있는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범죄, 신분증명서에 틀린 서명을 한 것은 범죄, 실업자인 것은 범죄, 잘못된 곳에 고용된 것은 범죄, 특정 장소에 사는 것은 범죄, 살 곳이 없는 것도 범죄였다.”

남아공의 법무장관인 마두나 박사는 우리의 회의를 위해 이렇게 썼다.

“법원 또한 억압의 장치로 사용됐다. 검사들은 백인의 특권과 세뇌를 유지하는 사법 체제의 일환이었다. 검사들은 사회와 기본적 인권의 보호자들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차별정책) 체제의 사수자였다. 공정한 재판의 이상들, 침묵할 권리, 법률적 변호, 피고인이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서들은 사법 제도에서 금기가 됐고 백인의 특권을 유지하는데 장애물로 간주됐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불법화된 법적 관행들이 재판의 규범이 됐고 많은 피고인들이 유죄가 되고 심지어 사형당하는 근거규범이 됐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하 남아공은 잘못될 수 있는 것의 극단적 사례이며, 여기에 다른 나라들과 미래의 모든 곳에 대한 교훈이 있다. 그때 그런 식으로 인권을 바라봤던 검사들과 다른 공무원들은 틀림없이 지금은 자신들의 인권이 충분히 존중되고 법의 지배에 따라 다뤄지기를 원할 것이다. …

틀림없이 검사직을 수행하는 데 인권을 방해물로 생각하는 검사들이 여전히 있다. … 아무리 편리할지라도 “이기려는” 검사의 의도는 직간접적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
- 제한 없이 범죄를 수사하거나 수사를 지도한다. 어디나 갈 수 있고 무엇이건 수색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죄다 감시 장치와 전화 도청으로 감시하고 듣고 누구나 심문하고 구금하고 재산을 압수한다.
- 마음대로 용의자를 구금하고 보석(또는 조건부 석방)을 거부한다.
- 제한 없이 용의자를 심문하고 대답을 요구한다.
- 법률 자문에 대한 용의자의 접근을 방해한다.
-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밑을 파고 파괴한다. 소위 “문제 야기자”들을 표적삼고 제거하려 한다. …
- 진행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정치적 압력에 굴종한다. …
- 피고인에 대하여 재판에 앞서 해로운 선전을 유포하도록 언론을 선동한다. …
- 피고인의 묵비에서 유죄를 추정한다. …

이런 시스템이 작동하는 곳에서 우린 뭘 얻을 것인가? 구 남아공이나 과거의 독재로 악명 있는 특정 체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국가에서 그런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이 처벌받지 않고 작동하는 것을 무엇으로 방지할 것인가? 인권이다. 즉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9조(신체의 자유와 안전), 10조(구금된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받을 권리), 14조(재판의 평등/무죄추정의 원칙 등), 17조(프라이버시를 존중받을 권리), 19조(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 등의 조항들에 반영돼 있는 권리들이다. 이런 권리들은 형사법 체제가 침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며 모든 나라의 국내법에 반영돼야만 한다. 인권이 없는 법과 질서를 갖는 것은 가능하지만 법과 질서 없이 인권을 갖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권 조항은 형사 재판이 수행되는 방식에 실제적인 효력을 갖는다. 인권의 원칙들은 실체적인 절차법으로 효력을 발해야만 하고, 검사들의 의지로 그 원칙들이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소망은 내부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인권은 추운 밤 우리가 끌어당겨서 따뜻하고 안전하게 덮을 수 있는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것이 아니다. 인권은 소수 좌경 세력만이 준수하는 그런 게 아니다. 인권은 형사법 체제나 법 실천에 선택적으로 추가하는 부속품(그러고 싶을 때만 끼워 넣는)이 아니다. 인권은 기본적인 것이다. 검사들은 인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인권은 우리에게도 속한 것이며 때때로 검사들도 인권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

결론적으로 다시 남아공으로 되돌아가본다. 1964년 6월 12일, 넬슨 만델라에게 종신형을 선고한 판사(Quartus de Wet)는 “두려움과 선호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남아공의 법과 관습에 따라 법을 집행하겠다”는 사법 선서를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만델라에 대한 종신형 선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법원의 기능은 다른 나라들 법원의 기능처럼 법과 명령을 집행하고 국가가 그 안에서 기능하고 있는 법률들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지만 정의는 어찌됐나? 민주주의에서 법률이란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에 따라 만들어져야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정치권력집단에 의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법의 지배는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지 않는다. 검사들 또한 인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권오름 제 263 호  [기사입력] 2011년 08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59 호  [기사입력] 2011년 07월 1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무차차’라는 시를 본 것은 유네스코에서 1995년 세계 관용의 해를 맞아 발간한 인권교육 지침서에서였다. 이 지침서는 <브라질여성>이란 인권소식지 1993년 겨울호에서 이 시를 발췌했다고 했다. 무차차는 ‘소녀’라는 뜻이지만 착취당한 경험에 대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어떤 연령의 여성이라도 상관없다는 설명이 붙어있었다.

나는 인권교육 프로그램에서 자주 이 시를 사용했다. 이 시를 보여주면서 이 시의 반복어구인 ‘나는 나는’이란 화법으로 우리 사회의 착취와 차별을 고발하는 글을 쓰게 했다. 참여자들은 때론 아이의 눈으로, 지방대생의 눈으로, 또는 저임금 노동자의 눈으로 또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나는’의 입장에서 할 말을 가슴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곤 했다.

“나는 나는”

‘그들/그녀들’로 지칭하는 것이 간접화법이라면, ‘나는/우리는’으로 말하는 것은 직접화법이다. 연대의 화법은 ‘그들은 이주노동자다’가 아니라 ‘우리가 이주노동자다’, ‘그들이 장애인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장애인이다’, ‘그녀가 김진숙이다’가 아니라 ‘내가 김진숙이다, 우리 모두가 김진숙이다’란 직접화법을 쓰는 것이란 걸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가사노동자로 일하는 소녀이다. 가사노동자라…. 연속극에 등장하는 부잣집에 늘 딸려 나오는 배역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니 그 사람들은 드라마 속이 아니라 참 가까이에 많이 있었다.

소설과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에 나왔던 식모는 어린 시절 앞집 옆집에 다 있었다. 시골서 올라온 어린 소녀들을 거둬준다는 명목으로 데리고 있다 했지만, 그 소녀들은 쉴 틈 없이 몸을 놀려야 했다. 중학시절 부자 친구 집에는 명절 때만 시골의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입주 가정부가 있었다. 그 집에 놀러가면 가지런히 깍은 밤과 사과를 간식으로 내놓곤 했다. 말없이 간식거리를 올려놓고 사라지는 그 아줌마가 어두운 밤 공중전화를 붙들고 있는 걸 봤다. “잘 먹고 잘 지내지? 엄마는 너희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조금 있으면 눈물비가 떨어질 것 같아 얼른 지나쳤다.

내 엄마가 처음 돈벌이를 나간 일도 가사 파출부였다. 엄마가 가는 날에는 모든 커튼과 이불 빨래를 다 꺼내놓는다고 했다. 잔치를 하는데 종일 일을 한 엄마에게는 먹어보란 소리 한번 안하고 정원의 눈을 치우게 했다는 얘기를 아주 나중에야 들었다. 요즘은 자연스런 영어 과외까지 일석이조이기에 특정 국적의 이주노동자 도우미를 선호한다는 기사를 어딘선가 본 것 같다. 가사분담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일정시간 고용 노동으로 처리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맞벌이 부부들도 흔히 보게 됐다. 그렇게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가정관리사로 이름이 변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거쳐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의 필수적 단역을 스쳐보듯이 그 ‘일’에 대해 ‘일’로 생각을 안 해왔던 것 같다.

가사노동자 권리 협약 채택

2011년 6월 16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 100차 ILO 총회에서 ‘가사노동자권리협약’이 채택됐다. 그 뉴스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더 놀란 것은 한국의 근로기준법이 ‘가사사용인’에겐 적용 제외돼 있다는 걸 몰랐던 것이었다. 일하는 사람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고용·산재보험 등에서도 제외된다는 것이고 일을 하다 임금을 떼이고 모욕을 당하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어디에 호소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법조문을 읽으면서도 그 ‘제외’라는 단어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었기에 그게 안 보였다. 그래서 무지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게 맞을 것 같다. 한국 정부가 협약에 대한 투표를 목전에 두고도 아무런 입장도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나 협약을 비준할 가능성이 별로라는 것에 화가 나지만 내 무지에 더 화가 났다.

이번에 채택된 ILO가사노동협약은 가사도우미, 보모, 운전사 등 전 세계 1억 가사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그 권리를 보호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뭐 대단한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너무 기초적인 걸 말하는 거다.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에도 다른 부문에서 노동자를 고용할 때와 마찬가지로 급여는 얼마이며 노동시간은 얼마며 등을 명시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충 ‘식구처럼 지내요’로 얼버무리지 말란 얘기다. 또 매주 최소한 하루 이상의 휴일을 보장하는 한편, 노조 결성 등 기본권 보장과 산업재해 때 보상절차도 두도록 했다. 이 협약이 이행되려면 물론 각 국가에서 협약을 비준해야 하고 그 기준에 맞는 국내법을 만들고 실행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상상력과 헌신, 문제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

집안 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무수한 가짓수의 일, 노약자 돌보기, 아이돌보기와 산후관리 등 정말 중요한 일을 왜 ‘일’로 여기지 않느냐, 당연히 ‘일’로 여겨야 한다, 그리고 그 중요한 일을 남에게 돈을 주고 시킬 때는 고용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기준이 있다는 것이 이 신생 국제협약의 메시지다.

이 협약의 채택을 위해 싸워 온 아프리카 지역 활동가 비키 칸요카는 이렇게 말했다. “내 국가는 탄자니아이고 가난한 국가이지만 2004년 고용노동규제법에서 가사 노동자를 인정했다. 이 법은 최저임금과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약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보장체계에 가사노동자를 포함하기 시작했다. 상상력과 헌신은 처음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

무차차

나는 나는 세탁기
내 몸 값이 세탁기 값보다 더 비싸지 않을 때까지는
주인님이 사지 않을.
주인마님의 시간을 덜어주고
거친 손을 막아주는
나는 나는 세탁기

나는 나는 진공청소기
주인마님이 필요로 하지 않는.
나는 차 청소기
세탁소
환자의 병실
시장 바구니

나는 주인마님의 해방자
바라는 모든 것들로 가득한
단추
나를 눌러만 주세요
나는 더 싸니까 […]

인권오름 제 259 호  [기사입력] 2011년 07월 1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55 호  [기사입력] 2011년 06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6월 11일, 멋진 차가 출시됐다. 그 이름이 ‘희망의 버스’다. ‘희망의 버스’는 부산을 향했다. 150일이 넘게 비바람 햇볕 뒤집어쓰며 35미터 높이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 김진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은 산재와 인간 이하의 노동조건에 맞서다가 20년 전에 일찌감치 잘린 노동자다. 그런 그 사람이 지금 잘린 동료들과 함께 삶을 지켜야 한다고 크레인 위에 올라갔다. 그 크레인은 몇 해 전 그 사람의 20년 지기가 대량해고에 맞서 농성하다 홀로 목을 맨 곳이다.

주말 식당 알바가 생계줄인 나는 희망버스를 타지 못했다.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일을 하는데, ‘행락객 차량 때문에 길이 무지 막힌다’, ‘막힌다고 불평하지 말고 여유 있게 운전하시라’는 디제이들의 판에 박힌 말이 계속됐다. 하지만 ‘희망의 버스’ 운행소식은 전해주지 않았다. 한밤중에야 돌아와 컴퓨터를 켜니 희망 버스의 수난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문을 걸어 잠근 용역과 경찰이 환대(?)한 가운데 희망 버스는 사다리를 타고 넘어 연대의 신바람 속에 시승식을 치렀다. 남의 잔치에 배 아픈지 당국과 사측은 사법처리라는 애프터서비스까지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희망의 버스’를 보며 미국 시민권 투쟁의 ‘자유승차단(freedom rides)’이 떠올랐다. 버스에서 백인과 유색인종의 좌석을 구분하는 차별에 맞서 ‘버스 안타기 운동’이 있었고, 흑인에겐 밥을 팔지 않는 백인전용식당에 가서 ‘앉아 버티는 운동’이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자유승차단’ 운동이었다. 인종차별분리정책에 반대하는 흑인과 백인들이 함께 버스를 타고 인종차별이 심각한 미국 남부 전역을 돌면서 교통수단에서의 인종분리 관행을 깨려는 시도였다. 인종분리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해 행동으로 분리를 없애려 한 것이었다.

자유승차단원들은 가는 곳마다 몰매를 맞고 버스가 불에 타는 등의 폭력 세례를 받았다.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 경찰은 오히려 자유승차단원들을 체포해 가두고 감옥에서 온갖 부당한 처우로 괴롭혔다. 한 감옥에서는 수감자들이 저항의 노래를 부르자 매트리스를 빼앗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협박을 받은 수감자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하나님께 이를 거야”라고 노래했다고 한다.

이 운동에 대해 기록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종분리차별에 항의하는 집회 후 대규모 체포가 이뤄진 뒤 경찰서장이 자신의 책상 앞에 늘어선 죄수들의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아홉 살 가량의 흑인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자 아이는 서장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자유(Freedom), 자유요.”라고 답했다는 구절이다.

지금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인종분리와 차별을 어이없는 옛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앞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분리’와 ‘차별’에 대해서는 왜 어이없게 여기지 않을까?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분리되고 남녀가 분리되어 다른 취급을 받는다. 같이 이익을 내는 데 큰 기업은 다 먹어도 괜찮고 작은 기업과 노동자는 자기 몫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인데 언론에서 누구 입은 대서특필하고 누구 입은 죽어도 사연을 다뤄주지 않는다. 살아 보겠다는 이웃을 찾아 돌보겠다는데 외부세력 혹은 불법침입자로 분류․처벌하면서 비싼 광고비 들여 아름다운 연대를 홍보한다. 그 분리와 차별의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흑백이 구분되어 식당도 버스도 화장실도 학교도 분리․차별했던 관행과 다를 바가 없는 일들이다. 그런 분리와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저항에 몽둥이 들고 나오는 것도 다를 바 없는 광경이다.

이런 지독한 분리와 차별을 깨기 위해 희망 버스가 출시된 것이다. 희망의 버스 탑승자들은 감옥에 갇힌 자유승차단원들이 교훈과 노래로 용기를 얻은 것처럼 김진숙의 외침을 담뿍 받아 나누었다. 김진숙의 외침은 간단하다.

“모여야 안 짤리고 모여야 안 죽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모든 사람은 악당”
“한사람씩 나눠들면 가벼워지겠지요”
“내 걸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는 가능하고 그래서 연대는 용기이다”
“용기야말로 얼마나 찬란한 자유인지, 뼈가 저리지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는 것, 그것만큼 소중한 게 또 있을까요.”(김진숙 트위터와 『소금꽃 나무』 중에서)

희망의 버스는 이제 출시됐고 주문이 쇄도할 것이고 승차권은 동이 날 것이다. 자유승차단의 영어는 freedom rides이고 이 단어를 조금만 고치면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된다. 무임승차자란 정의로운 공동의 이해를 위해 힘을 모으는데 끼지 않고 결실만 나누려는 사람을 지목하는 말이다. 무임승차자가 아니라 희망의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렇게 분리와 차별에 저항하는 우리는 다시 또다시 만날 것이다.

“자유를 찾아”(In Pursuit of Freedom) (William Mahoney, 1961년)

5월 15일 월요일, 나는 하워드 대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봤다. 그네들과 나는 지난 일년 반 동안 워싱턴의 비폭력행동집단에 참여했다. 사진에서 그 학생들은 앨라배마 주 애니스톤의 변두리에서 불타는 버스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사진 설명에선 그 학생이 버스를 내릴 때 머리를 맞았다고 했다. 나는 격분했다. (…)

어느 날 저녁 늦게, 비폭력행동집단의 일원인 폴과 존이 몽고메리로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를 하러 내 방에 들렀다. 폴과 존은 자유승차단에 결합했다. (…) 폴은 가능한 한 많이 몽고메리로 내려와 달라고 간청했다. (…) 자유승차단은 가장 힘든 형국이었고 남부의 형제들은 모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시간 당 60센트의 일을 그만둬야 했고 시험을 일찍 치르거나 돌아올 때까지 미뤄야 했다. (…)

부모님이 내 결정을 반대하리란 걸 알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편지는 앨라배마로 출발하면서 부쳤다. 모든 혁명은 가족과 그런 갈등을 일으켰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자신을 위안했다. (…) 몽고메리행 표를 들고 워싱턴에서 고속버스를 탔다.

(…) 하루 동안 버스를 타면서 친구 프랭크와 나는 인종문제를 토론했고 다른 승객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해외에서 막 돌아온 공군이 우리 앞자리에 앉아 세 명의 다른 백인에게 ‘자유승차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합의는 인종차별철폐주의자들을 가장 가까운 나무에 목매달아야 한다는 거였다. (…) 한 순간 한 여성이 큰소리로 자신이 흑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말했다. 자기는 일자리에서 맨 마지막으로 고용되고 최악의 임금을 받으며 맨 처음에 해고된다고 말이다. 빈민굴에 살면서도 지불해야만 하는 임대료에 대해 불평했다. 앞자리에서 백인들은 그녀의 큰 불평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버스 승객들이 두 개의 다른 세계로 나눠져 있는 것 같았다. 각 세계의 거주자들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신속히 체포됐다. 우리가 백인 버스 정류장에서 꺼지라는 경찰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받는 동안 나는 수사관에게 물었다. 미국은 우리가 한 것처럼 행동할 권리를 우리가 가졌다고 전 세계에 공언한 법적․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걸 아느냐고, 당신이 우리를 체포함으로써 세계가 미국에 대해 가졌을지 모를 존중심을 깨뜨렸다는 걸 아느냐고 물었다. 그 경찰관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남부는 존중받아야 할 특수한 전통을 가졌다고 말했다.

(…) 우리는 감옥으로 옮겨졌고 먼저 체포된 사람들과 함께 갇혔다. 나는 거기서 친구들을 만났다. (…) 30여명 이상인 우리들은 5개의 감방과 꼭대기에 있는 식당에 있었다. 밤에 우리는 커다란 면화 더미 위에서 잤고, 더럽고 좁고 유혈이 낭자하고 바퀴벌레가 점령한 감방에 갇혔다. 덥고 과밀한 속에서 날들이 갔다. 식당에서는 카드를 하고 읽고 (…) 노래를 했다. (…)

6월 24일(토요일), 교도관들은 ‘자유승차단’의 노래 소리가 너무 커서 그 벌로 매트리스를 가져가겠다고 결정했다. 처음엔 그걸 농담으로 알았고 그 일에 대한 노래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시멘트 바닥 또는 에어컨 시스템이 폭풍바람을 내는 강철 지붕 위에서 사흘을 자고 나자 침묵하게 되고 우울해졌다. 자유승차단원이 또 크게 노래를 부르자, 손목을 죄는 차코를 채워 6명을 끌고 가서는 가로 세로 6인치 캄캄한 상자 속에 이틀을 처박아뒀다. 용감한 동료들은 독방에 처박히면서 노래했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다뤘는지 하나님께 이를 거야.”

동료 수인 중에서 짐 파머가 우리가 받은 처우에 대해 관리자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협력하지 않으면 조건이 더 악화될 거란 말을 들었다. 협력이 뭘 의미하는지 정의하는 규칙을 서면으로 만들자는 요청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최소 기준을 규범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당국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할지라도, 당국은 그들을 인간으로서 다뤄야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었다. (…)

우리들 대부분은 질서와 인생에서의 의미를 찾는 것이 집단의 헌신 속에서 가장 잘 수행될 수 있다고 느꼈다. 집단의 헌신 속에서 교훈이 전달되고 집단적 합창이 일어났다. ‘자유승차단’에 관계된 구절들이 흑인 영가, 노동가, 조합가로 불려졌다.

(…) 7월 7일, 40여일 만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집단이 풀려났다. 우리가 감옥을 떠날 때 감옥에 있는 자유승차단원의 수는 백 명에 가까웠다.

다양한 방향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는 원으로 둘러서서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나리.” 원을 둘러 내 동료들의 진지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열아홉에서 스무 살인 남녀들의 얼굴에서 주름진 눈썹을 봤을 때,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리란 걸 알았다.

인권오름 제 255 호  [기사입력] 2011년 06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51 호  [기사입력] 2011년 05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5․18 광주민주화항쟁 31년이다. 억눌린 공포 속에서 광주를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절이 길었고 많은 이들이 광주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라며 제 몸을 불사르거나 감옥에 갔다. 5․18은 자국의 군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향해 곤봉과 대검, 급기야 총탄을 날린 사건이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고문 받고 옥에 갇혔다. 하지만 발포 책임자는 규명되지 않은 채 국가지정기념일이 됐다. 명백한 학살자는 27만원이 전 재산이라고 우기는 속에 호의호식하고 있다.

5․18이 강요된 침묵에서 밝은 세상으로 나온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날이 되면 라디오에서 ‘오월의 노래’를 틀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꽃잎처럼 뿌려진 너의 붉은 피’라는 가사의 노래를 틀어주는 건 아니다. ‘오월의 노래’의 원곡이라는 프랑스 샹송을 틀어준다. 비장한 ‘오월의 노래’와는 달리 감미롭게 들리는 원곡이다.

학살자와 그 동조세력은 5․18 같은 사건이 빨리 잊히고 혹여 기억되더라도 박제된 과거로 남기를 바랄 것이다. 그게 아니고 살아 꿈틀되는 기억이고 추모이려면 어찌해야 할지가 오늘을 사는 이들의 숙제이리라. 숙제를 푸는 한 가지 방법은 광주와 같은 고통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기억을 나누고 간직하고 잊지 않았음을 확인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광주와 같은 일을 60여년이 넘도록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에도 총탄에 수백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총탄 앞에서 외치는 그들의 요구는 원래 살던 땅,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이야기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의 오랜 움직임은 강대국을 등에 업고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원래 살던 사람들을 무력으로 내몰고 그 땅을 제 것으로 삼는 일이었기에 ‘인종청소’라는 무시무시한 인권침해가 주요 전략이었다. 1948년 유대인 무장세력은 수백 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불도저로 밀어버리며 사람들을 내몰았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 여성과 아이, 노인들을 살해했다. 인종청소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자기 국가에 대한 정치적 자결권을 잃었을 뿐 아니라 물리적인 땅에 대한 소유까지 잃었다. 그렇게 1948년 5월 14일은 이스라엘 건국일이 됐고, 난민이 돼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월 15일을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라는 뜻)’의 날로 기념한다.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1948년, 유대인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개인적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유대인이 나치와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이라는 것이 유대인을 향한 나치의 악마적 행동을 삼간 것이 아니라 모방이었다는 것이야말로 유대인 최고의 비극이었다.”라고 쓴 적이 있다.

학살자는 광주에서의 학살을 얘기하면 ‘유언비어’라 했고,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선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했다. ‘유언비어’는 사실이자 진실로 밝혀졌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의 어법을 구사한다. 팔레스타인 땅을 빈 곳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7세기 이래로 그 땅에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식민화 관점으로 빈곳이고 쓸모없고 야만인 땅을 문명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팔레스타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 취해온 입장이다.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했다.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땅이 팔레스타인의 것이라는 것이고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정복자인 것이지 이 땅의 경작자가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은 침략자이다. 이 땅이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이 오기 전에 여기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땅이 속하게 된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버려진 황무지였다고 학교에서 가르쳐왔다. 황무지에 꽃을 피운 게 자신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황무지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은 풍부한 문화와 사회를 가졌다. 팔레스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숱한 인간의 생명을 비용으로 치르고 지은 집이 이스라엘이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의 고향지역에 따라 모여 산다고 한다.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음식을 만들고 같은 수를 놓으며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팔레스타인의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런 아이들의 미래는 같이 꾸는 꿈속에 있을 것이다. 무력으로 자기들만의 국가를 고집하지 않고 기독교인이나 무슬림이나 선주민인 팔레스타인 사람이나 비 선주민인 유대인이나 피 흘리지 말고 한 땅에서 섞여 사는 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삶을 이어가는 꿈 말이다.

이스라엘의 첫 수상 다비드 반 구리온(David Ben-Gurion)은 나크바에 대해 “늙은 자들은 죽을 것이고 젊은 자들은 잊을 것이다”라 말했다. 하지만 나크바는 잊혀지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그들과 연대하는 세계인들의 좌표가 돼왔다.

국제인권법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외면, 정착촌과 분리장벽의 계속적인 확대, 난민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려던 국제지원선단에까지 총격을 해대는 이스라엘의 인권침해가 기억을 기억에 머물지 않게 하는 부채질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5․18영령과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정의의 회복 속에 부활하시길 기도한다.

나크바(Al-Nakba)

임시천막이 건물로 바뀌었네
하지만 난민은 여전히 난민
기다림과 방임의 세월은
온갖 역경에 맞서 움켜 쥔
단호한 결단력으로 바뀌었네
고대의 사랑하는 땅에 대한
계속되는 기억들을 위해
노래와 얘기들은 계속 살아왔네
오랜 추방 속에서도 귀환의 희망으로
쫓겨난 이들의 캠프에서
삶은 재로부터 피어오르며
때때로
단호한 저항의 의지를 드러내네
부당한 취급을 당한 사람들, 이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
작디작은 땅에 대한 그들의 정당한 권리를
잃어버린 땅에 대한
고통과 애도의 반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갈 곳은 여전히 한 곳뿐
팔레스타인의 고향뿐

- 스테벤 카트시네리스(팔레스타인을 위한 호주모임)

 

나크바(Al-Nakba)

데이르 야신(Deir Yassin; 대학살이 있었던 마을 이름)
아몬드와 선인장,
기억의 뿌리에 달라붙은
학살의 유령들

아인 카렘(Ein Karem; 예루살렘 남서부의 마을 이름, 그리스도교의 성지)
초록 벨벳속의 아몬드,
팽창하는 암적색 봉오리는
지금은 더욱 쓰라리게 자란다

하와라(Hawara; 요단강 서안지대 이스라엘군의 검문소가 있는 곳)
어머니의 꿈은
검문소에서 사산되네
팔레스타인의 희망이

- 마리 퓨만(이스라엘정의평화위원회 의장)

인권오름 제 251 호  [기사입력] 2011년 05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47 호  [기사입력] 2011년 04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미안하다는 말을 잊은 사회

짧은 기간 영어권 국가에 인권 연수를 갔을 때, 내가 부러워하는 말이자 유일하게 할 줄 알았던 말은 ‘고맙습니다’(thank you)와 ‘죄송합니다’(I′m sorry)였다. 이리 툭 저리 툭 부딪쳐도 사과할 줄 모르는 아저씨들한테 이골이 난 나는 ‘미안하다’란 말을 자주 쓰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가끔씩 날 불러 밥을 먹여주던 한 선배는 그들 문화의 ‘미안하다’란 단어가 싫다고 했다. 진정성이 없다는 거였다. 눈길도 안 마주치고 그냥 기계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sorry’를 내뱉는 것에 질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관찰해보니 그런 경우도 많았다. 팔꿈치만 스쳐도 ‘미안’, 스친 척만 해도 ‘미안’, 그냥 자동으로 ‘미안’이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내빼버리는 무관심한 인사가 ‘미안’이라는 걸 발견할 때는 신경질이 났다. 진정성이 없는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모멸적인 일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말이 무지 듣고 싶다. ‘미안하다’는 말에 너무 굶주려서인가 보다. 누가 봐도 분명한 직업병에 시달리다 청춘이 목숨을 달리했는데 그 회사가 조문도 안 오고 무슨 비공개 합의서란 것만 주고받고 97일 만에야 간신히 장례를 치렀다. 끝내 사과는 안했다. 대형 금융사고가 나서 신상정보가 탈탈 털리고, 없는 돈 있는 돈도 운신을 못했는데 용역회사 계약직 혹은 범죄인 탓을 하면서 제일 센 자, 최고경영자(CEO)라는 자는 사과를 안 한다. 이런 저런 공약 중에서 안 지켜도 된다고 애원하는 강물에는 칼질을 하면서 다른 것에는 표 때문에 그랬다고 안면 깔고 사과를 안 한다. 처자식 얼굴 볼 새도 없이 죽어라 일했는데 ‘니들이 경영을 알아?’라며 하루아침에 잘라놓고 시대를 따르라고 윽박질 한다. 고달픔에 줄줄이 죽어나가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없다. 총기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학생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도 미안하단 말보단 무슨 제도 타령만 넘쳐난다. 학생도 인간대접을 받아 보자고 최하위의 조례라도 만들어 방파제 삼겠다는데 힘센 어른들 조직들은 꿈쩍도 안하고 있다 한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거리에서 모멸감을 참으며(‘애들은 맞아야 된다’, ‘너도 맞을래’라는 말을 하고 지나가는 어른들이 그리 많단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는 청소년들 가슴에 대못이 단단히 박혔다 한다. 과연 누가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할까?

‘미안하다’는 말은 분명 하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뭐든지 바로 잡고 새 출발을 하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위기를 잠시 피하고자 잠깐 미안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이건 아니건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할 때가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잊은 사회,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사회는 분명 나침반 없이 헤매는 사회일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케빈 러드 전직 총리의 국회연설이다. 그는 취임 후 첫 국회연설에서 원주민들에게 백인들이 저질러온 인권침해에 대해 사과했다. 원주민 토지 반환 문제 등 실질적인 문제를 외면했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죄합니다”, “미안합니다”란 그 한마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사과문에서 “도둑맞은 세대”란 문명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와 공동체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이나 고아원에서 기르도록 했던 일을 가리킨다. 역대 정부는 ‘과거사에 대해 우리가 왜?’라며 사과를 거부해왔다. 그에 비춰 케빈 러드의 사과는 인권의 역사에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1993년 당시 유엔의 특별보고관 테오 반 보벤은 ‘중대한 인권침해 희생자들의 배상 등 권리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 보고서에서는 ‘사실의 규명과 진실의 완전하고도 공적인 공개’와 ‘범해진 범죄에 대한 책임의 공개적인 인정’을 인권침해 피해자들에 대한 비금전적 배상형태의 우선적인 것으로 지적했다. 인정과 사과는 피해자들에게 주어져야 할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안으로는 4․3 제주항쟁, 4․19혁명, 4월 26일 강경대 사망 20주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이 이어지는 때이고, 밖으로는 점령과 비인도적 범죄, 환경난민이 넘쳐나는 때이다. 피어나는 봄의 꽃잎에 서러운 아름다움이 깃드는 이때,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를 아무리 읊조려도 아쉽기만 하다.

케빈 러드의 원주민 인권침해 사과 연설(Kevin Rudd, 2008년 2월 13일)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문화인 이 땅의 원주민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원주민들에 대한 과거의 학대를 반성합니다. 우리는 특히 도둑맞은 세대였던 이들-우리 국가 역사의 오점의 장-에 대한 학대를 반성합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음으로써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새장을 열고 미래에 대한 신뢰로 나아갈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동료 오스트레일리아인들에게 엄청난 비통과 고통과 상실을 가했던 의회와 정부들의 법과 정책들을 사죄합니다. 우리는 특히 사죄합니다. 원주민과 토레스 스트레잇 섬 아이들을 가족과 공동체와 나라에서 떼어낸 것을 특히 사죄합니다. 이 아이들, 그 도둑맞은 세대의 고통과 상처, 남겨진 후손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우리는 사죄합니다. 가족과 공동체의 파괴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들에게, 형제와 자매들에게 우리는 사죄합니다. 그로 인해 자랑스런 종족과 자랑스런 문화에 가해진 모욕과 멸시에 대해 우리는 사죄합니다.

우리, 오스트레일리아 의회는 이 사죄가 국가를 치유하는 일환으로서 받아들여지길 요청드립니다.

미래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위대한 대륙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쓰이고 있음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집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를 인정함으로써 첫발을 디뎠고 모든 오스트레일리아인을 포괄하는 미래를 주창합니다.

미래는 우리 의회가 과거의 불의를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결의하는 데 있습니다. 미래는 우리가 원주민이건 아니건 간에, 모든 오스트레일리아인들 간의 기대 수명, 교육의 성취, 경제적 기회의 격차를 좁히기 위한 우리의 결의를 견고히 하는 데 있습니다. 미래는 구시대의 접근이 실패해온 지속적인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의 가능성을 부여잡는 데 있습니다. 미래는 상호 존중, 상호 결의, 상호 책임에 달려있습니다. 미래는 그 출신이 어찌됐든 간에, 모든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이 위대한 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 새 장을 형성할 동등한 기회와 몫을 가진 진정으로 동등한 동반자라는 데 있습니다.

인권오름 제 247 호  [기사입력] 2011년 04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43 호 [기사입력] 2011년 03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3월 20일은 미영이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지 8년이 된 날이었다. 구실이 됐던 대량살상무기는 없던 것으로 일찌감치 밝혀졌다. 인권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라는 형용모순으로 석유에 대한 탐욕을 위장하여 지탄받은 전쟁이었다. 4천4백 명 이상의 미군이 죽었고 3만 명 이상이 심각하게 다쳤다. 9․11로 3천여 명이 사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이었다. 더 큰 고통을 받은 것은 미국이 ‘해방’시키겠다고 했던 이라크인들이었다. 정확하게 헤아려지지조차 않은 이라크 민간인들의 희생은 엄청난 것으로 추측된다. 이라크 침공의 직접적인 결과로 적어도 십만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총격으로 사망한 이들도 많지만 의약품과 깨끗한 물의 부족으로 죽어간 이들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더 많다. 폭격과 경제제재로 인해 전기 시설, 하수처리장, 수도시설, 병원 등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4백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고향을 떠나야했고 여전히 피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8년이 지난 지금, 이라크의 생활 조건은 사담후세인 시절보다 더 악화됐다고 평가된다. 이라크 포로에 대한 잔인한 고문으로 온 세계가 가슴 데인 기억이 있고, 이라크 땅은 우라늄과 방사능으로 오염되는 등 남겨진 상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문후유증과 유아사망률과 암발생률의 증가는 이라크인들이 평생 짊어질 짐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미군 철수 약속에도 불구하고 완전철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부끄러운 8년의 기억 위에 비슷한 사건이 재연되고 있다. 등장인물이 달라졌을 뿐 비슷한 시나리오다.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렇다. ‘인도주의적’ 폭격이란 형용모순, ‘독재’의 축출을 명분으로 한 ‘개입’과 리비아 시민들의 투쟁과의 ‘연대’는 얼마나 미묘하게 다른 것인가. 그 차이 때문에 폭격에 나선 이들의 말도 행동도 이리 새고 저리 새고 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살인에는 꾹 감은 눈이 왜 카다피에 대해서는 그리 불끈 떠지는 것인지 대답해 보면 갈팡질팡의 원인을 알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 국제외교, 군사 전문가 등이 이런 저런 소리를 쏟아낸다. 하지만 그걸 통해 판단할 기회와 통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멀 뿐 아니라 그걸 일방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내가 전쟁을 겪은 이라크인이라면, 내가 폭격 앞에 놓인 리비아인이라면, 내가 핵 앞에 놓인 일본인이라면, 내가 비정규직으로 쫓겨난 그이라면, 내가 꽃샘추위의 칼바람 한가운데 크레인위의 농성자라면, 내가 직업병으로 고통받다 죽은 젊은이라면……. 우리는 이런 물음 속에 고통을 한 호흡 들이마시며 느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호흡에 어떤 행동을 같이 토해낸다.

1958년 히로시마 원폭 희생자들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고 행동으로 옮긴이가 있었다. 그해, 앨버트 비즐로우(Albert Bigelow)란 평화운동가와 그 동료들이 작은 배를 타고 태평양 한복판 비키니 섬으로 향했다. 그곳은 미국의 핵실험 장소였다. 핵실험에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당국자 면담 시도가 별반 효과가 없었기에 ‘비폭력직접행동’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내린 결단이었다. 몇 차례의 항해 시도가 당국의 체포와 투옥으로 실패한 끝에 그가 탄 배 ‘불사조 히로시마’는 핵실험에 반대하여 실험지역에 들어간 최초의 배가 됐다. 비즐로우는 미 해군 장교로 2차 대전에 복무했다. 하지만 1945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여됐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평생 연금을 탈 수 있는 자격을 불과 한 달 남겨두고 해군에서 사임하고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호흡을 위해 두 개의 글을 소개한다.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것은 이런 때입니다’라는 이라크에서 온 편지는 ‘평화를 위한 여성들’(CODEPINK)사이트에 올려져 있는데 발신자는 이라크의 오마르이고 발신일은 2007년 12월 12일이다. ‘핵실험 장소에 내가 배를 저어가는 이유’란 비즐로우의 글은 앞부분에서 자신의 생에 대한 얘기와 청원과 서명운동 끝에 직접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 경과를 적고 있다. 아래 소개하는 부분은 이 글의 후반부이다. 지진은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라면 전쟁과 핵의 위험은 우리가 알면서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것을 일찍이 경고한 사람들을 기억할 이유는 오늘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아는 것은

갑자기 뜻밖의 무장집단이 급습할까봐 집에서 잠옷차림으로 지낼 수 없을 때입니다.
매일 24시간 중에 2시간에서 6시간만 전기가 들어올 때입니다.
집에 필수적인 장치가 고장 났어도 그걸 고칠 수 없는 이유가 한 두 가지가 아닐 때입니다.
당신과 아내가 감정에 대한 관심을 잃을 때입니다.
일상의 스트레스 때문에 당신과 아이들 사이가 엉망이 될 때입니다.
집을 나가면서 다시 귀가할 수 있을지를 확신할 수 없을 때입니다.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고 모욕을 꾹꾹 참아낼 것을 강요받을 때입니다.
백주 대낮의 무장 강도가 무서워 몸에 지닐 만큼 이상은 아무것도 사지 못할 때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려 진실해질 수 없는 제 모습을 보게 될 때입니다.
지금보다 과거가 얼마나 좋았던가, 늘 과거만 생각하고 있을 때입니다.
내일은 어찌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때입니다.
가족이나 내 자신을 지키기에는 자신이 너무 허약하다는 걸 깨달을 때입니다.
기도 장소로 갈 수 없을 때입니다.
거리에서 사랑 노래를 흥얼거릴 수 없을 때입니다.
자기 내면에서 절실히 ‘아니’라고 여기는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때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든 비자를 신청하면 거절 받게 된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
울 수조차 없고 온 세상이 날 잊었다는 두려움에 함몰될 때입니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당신 속에 품고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이라크인임을 의미합니다.

핵 실험 장소에 내가 보트를 저어가는 이유(Albert Bigelow)

나는 갑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했듯이, “행동은 웅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직접 행동이 없다면, 보통 시민에게는 그들의 정부에게 그들을 보게 하고 듣게 하는 힘이 없게 됩니다.
나는 갑니다. 모든 사람들처럼, 내 맘 속 깊이, 모든 핵폭발은 끔찍하고 나쁘며 인간존재에게 무가치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전쟁은 더 이상 봉건시대의 마상시합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생각지도 못할 파국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어린 아이들, 우리들 대부분,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이 지금 바로 최전선의 군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과 이 끔찍한 위험 사이를 가로막고 서는 것이 나의 의무입니다.
나는 갑니다. 잔학행위를 더 이상 방관하는 것, 그리고 방관함으로써 동의하는 것, 따라서 잔학행위에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는 비겁하고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퀘이커교도인 윌리엄 펜은 말했습니다. “선한 목적은 악마적 수단을 신성하게 만들 수 없다. 많은 선이 그 결과로 생긴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 공산주의자 밀로반 질라스는 말합니다. “목적을 보장한다는 수단이 악한 것으로 보여지자마자, 그 목적은 스스로 실현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나는 갑니다. 간디가 말한 것처럼 “신은 내 반대편 사람 쪽에 앉아 계십니다. 따라서 그를 해치는 것은 신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무력은 정복할 수 있지만 사랑은 얻을 수 있다”는 깊은 본질의 진실에 증인이 되러갑니다.
나는 갑니다. 정부들이 아무리 잘못이고, 옳지 않고, 뉘우칠 줄을 모를지라도, 나는 여전히 모든 사람이 정말로 양심을 품고 있으며 나의 행동이 그 선한 양심에 말할 것이란 걸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갑니다. 정부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돕는다는 희망을 품고 갑니다. 필요하다면 나는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을 겁니다. 공포와 무력과 파괴의 정책을 신뢰와 친절과 도움의 정책으로 변화시키는 걸 돕기 위해선 말입니다.
나는 말하러 갑니다. “이런 낭비, 이런 무기 경쟁을 멈춥시다. 그 대신에 군비축소 경쟁으로 바꿉시다. 악을 위한 경쟁을 멈추고 선을 위해 경쟁합시다.”
나는 갑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으려면 그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걸 당신이 볼 때면, 당신의 본능은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서운 냉담으로 얼어붙을 수도 있고 뭐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이건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행동합시다.

인권오름 제 243 호 [기사입력] 2011년 03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39 호  [기사입력] 2011년 02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애도’가 절실한 시절이다. 지나친 슬픔이란 없다. 슬퍼하고 또 슬퍼할 뿐이다. 연이은 죽음의 소식들에 문득 흘러간 동영상을 찾아보게 됐다. 80년대 한국 사회에선 많은 젊은이들이 독재에 저항하다 죽어갔다. 장례식은 흔한 광경이었다. 한 장례식에서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던 문익환 목사는 연단에 올라 추모사 대신에 민주화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애절하게 불렀다.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였다.

난 그때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다음 해에 다른 곳에서 나는 문 목사의 절규를 듣게 됐다. 문 목사는 연단 위가 아니라 연단 아래에 섰다.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어울러 받들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전태일 열사여, 김세진 열사여,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한없이 이어진 외침이 수십 분 넘게 이어졌던 것 같다. 죽어간 이들이 그리도 많았던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던 순간이었다.

강산이 몇 번이 바뀌었지만, 요즘 들어 ‘◯◯여!’를 목 놓아 부르고 싶은 심정인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부를 이름이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으면 장애아들이 정부지원을 받을 거라며 목을 맨 아버지여!
고시원비가 밀리고 살기 힘들다며 물에 뛰어든 10대 소녀여!
등록금이 없어서 불 피우고 목 조르고 약을 먹은 청춘들이여!
쪽방에서 나 홀로 죽음을 맞는 노인들이여!
직업병 인정도 못 받고 직업병으로 죽은 일류기업의 노동자여!
예술로 밥 먹으려 하냐는 조롱 속에 죽어간 창작자여!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 잃고 화병 얻어 죽어간 노동자여!
우리의 탐욕 때문에 산채로 묻혀 죽은 돼지와 소들이여!
땅 장사를 불필요한 삽질을 정화사업으로 포장하여 죽어가는 강들이여!

슬퍼해서 어쩔 거냐고 묻기 전에 일단 깊이 슬퍼하자. 애도가 우리 할 일의 시작이지 않을까 한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란의 ‘애도하는 어머니들(Mourning Mothers 또는 Park Laleh Mothers)’의 연대 메시지이다. ‘애도하는 어머니들’은 ‘검은 상복의 어머니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정권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 가족들의 모임이다.

1988년, 40여 명의 이스라엘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을 예루살렘에서 결성했다. 이 여성들은 팔레스타인 봉기에 대해 웨스트 뱅크와 가자지구 침공으로 대응한 이스라엘 당국에 맞서 항의했다. 이어서 아랍 여성들도 ‘전쟁, 부정의, 군사주의’에 대항하여 평화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이란에서는 정치적 양심수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상이 저질러졌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4,500명에서 1만 명에 이르는 이란의 정치수들이 이 해에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들의 가족들은 죽은 이의 시신조차 받지 못했고, 어떤 식으로든 장례를 치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학살된 이들은 대량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애도하는 어머니들’은 이에 맞서 싸웠고, 80년대의 파국을 반복하지 말라는 운동은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다. 2010년 1월에는 ‘애도하는 어머니들’의 회원 상당수가 체포되기도 했다.

‘애도하는 어머니들’은 이란의 테헤란에 있는 라레 공원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모여 침묵시위를 한다. 무슬림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이란의 인권운동가 시린 에바디(Shirin Ebadi)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토요일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에는 검은 옷을 입고 연대를 보여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다.

‘애도’를 계속하고 있는 이들 어머니들이 최근 민중항쟁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어머니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같이 슬퍼한다.’는 말보다 더 큰 연대는 없을 것 같다.

민주화 운동을 위한 투쟁, 그리고 오늘날 ‘삶’을 위한 투쟁의 목표가 다르지 않고, 정권의 폭력에 의한 희생과 기업과 시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사회의 방호벽 없이 쓰러져간 이들의 희생이 다르지 않다. 부디 우리의 깊은 애도를 받아달라고 손 모아 빌고 싶다.

이란의 애도하는 어머니들(Iran's Mourning Mothers)이 최근의 민중항쟁에서 자녀를 잃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2011년 2월 1일)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공감과 깊은 애도를 받아주세요.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mad Buazizi, 경찰의 모독과 압수에 분신 항거한 튀니지의 28살 난 노점상)의 경우처럼 자유와 더 나은 삶 말고는 요구한 바 없는 이들이, 이란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명을 잃었다는 소식에 우리는 아주 비통했습니다.

당신들의 목소리가 전해졌고 당신들의 나라가 승리를 느끼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압니다. 당신들이 자녀를 잃고 비통해하고 있다는 것을요. 자녀들이 결코 못 돌아올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떠남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의 달콤한 향기를 가져다 줄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대 운동에 동참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더 큰 목소리로 함께 외치고 우리의 모성애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퍼뜨릴 수 있도록요. 우리가 말하는 모성애는 세계의 우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 평화와 자유를 주장합시다.

우리, ‘이란의 애도하는 어머니들’은 그날을 소망합니다. 자유가 자녀를 잃은 우리의 슬픔을 줄여줄 그날을. 우리는 그날을 소망합니다. 모든 정치적 양심수들이 풀려나고, 고문과 사형이 폐지되고, 우리의 모든 나라들에 이런 극악한 행위를 저지른 책임자들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그날을. 그렇게 해야 인권 침해의 비밀은 드러나고, 우리는 어떤 공포도 없이 우리의 남아있는 자녀들의 미래를 건설하는데 집중할 수 있을 겁니다.

인권오름 제 239 호  [기사입력] 2011년 02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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