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03 호  [기사입력] 2012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여섯 개의 P (Six Ps)

빈민을 조직화하는 빈민에 관하여(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왜 사냐고 묻거든 (그냥) 웃지요”라는 구절이 시로 여겨지지 않는 시절이다. 이 시에서처럼 달관의 웃음이 아니다. 세상일에 어처구니가 없고 무기력감에 빠져서 생긴 얼버무린 표정이 피식 빠져나온 방귀처럼 얼굴에 ‘썩소’를 만든다.

배달시킬 때마다 몇 백 원씩 오른 새 가격표를 들고 오는 식당, 뉴스 창을 열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성적 비관‧생활고 비관의 자살기사들, 강정이든 쌍용차든 현장에선 끓어 넘치고 있는데 주요 뉴스 면에선 식어버린 문제들, 단식과 농성으로 스스로 뉴스를 만들고 있는 언론인과 가짜들이 판치는 거대 언론, 그 언론들이 즐겁게 챙기는 신구 공권력의 화신들과 양념치고 부채질해주는 소위 진보인사들…. 파국 앞에서 손 놓고 있는 무기력감의 ‘썩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 ‘뭘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과 대답을 피하고 서로의 눈을 피하는 상황을 비를 잊은 하늘이 노여운 듯 내려다보고 있다.

지난 주말 쌍용차 ‘희망걷기’ 행사가 있었다. 주말에 식당 알바를 하는 나는 한밤중에야 대한문으로 향했다. 종일 흘린 땀으로 몸에서 쉰내가 났지만, 땡볕에 종일 걸은 사람들의 땀내에 묻힐 것이라 생각하고 안 씻고 그냥 갔다. 역시나 스치는 사람들마다 땀내가 쩔어 있고 무대에 서는 이들마다 한을 토하듯 말을 끊을 줄을 모른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잘렸고 용역과 경찰에게 얼마나 두들겨 맞았으며 지금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비슷한 사연들이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온 세상을 짊어진 무게이다. 그들의 등 뒤로 보이는 무대 현수막의 “연대할 권리”라는 말이 신선하다. 연대할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고 하니 더 강한 느낌이 온다. ‘연대할 권리’란 말을 쓸 정도로 우리가 어느새 성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참가자들의 춤과 구호를 사진에 담아내고 있는 김진숙 씨가 보인다. 몸은 어떨지 모르지만 미소에는 건강미가 넘쳐 보인다. ‘저 사람이 살아있구나, 웃고 있구나’ 안도감이 밀려든다. 꼬리를 문 장례에 상복을 벗지 못한 쌍용차 노동자들도 간만에 웃으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 쌍용차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노점상들의 장터가 뒤편에서 열리고 있다. 매연과 먼지 섞인 김치부침개를 놓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얘기꽃을 피운다. 아는 얼굴들이 스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한다. 용산 참사 유가족, 고문피해자를 위한 센터를 열었다는 이전의 고문피해자, 목소리 톤이 높아 단골 사회자인 장애인권 활동가, 싸가지 없는 언론사 사장 등의 이름이 적힌 걸레를 나눠주는 언론 노동자, 서울 나들이를 감행한 강정지킴이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공통으로 느끼고 영향받는 사람들의 행진이 꼬리를 문다. 잠시나마 ‘썩소’가 아니라 그냥 웃는다. 그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웃는다.

문득 잊고 있었던 낱말들이 떠오른다. 단결하고 조직하고 계획한다는 말, 이 말들은 서로 같은 말이다. 같은 문제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말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그 조직화와 계획에 대한 것이다. 어느 날인가 빈민의 사회경제적 인권을 열쇠말로 하는 사이트들을 뒤지다가 거기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6P’란 걸 발견했다. 뭘 말하는 것인가 했더니 ‘흑표범당(the Black Panther Party)’의 역사에서 따와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었다. ‘흑표범당’이란 1960년대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FBI의 파괴공작으로 와해된, 흑인의 권리를 주창한 정치조직을 말한다. 흑표범당의 ‘6P’를 가져다가 단체마다 다양하게 고쳐 쓴 것들이 많았는데, 그 원조에 해당하는 글은 빈민운동가인 윌리 뱁티스트(Willie Baptist)의 것이었다. 뱁티스트는 그 자신이 홈리스 출신으로서 40여 년 이상 빈민 조직화와 교육활동을 벌여왔다. 그는 얼마 전 <빈민의 페다고지(빈민교육론)>를 출간하기도 했다. 뱁티스트는 연설이나 글 등에서 “빈민을 조직화하는 빈민”이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같은 제목의 연설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나는 홈리스였다. 나는 평생을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 사람들은 타이타닉 호에서 제일 좋은 의자를 잡으려고 싸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 의자들을 어떻게 타이타닉을 벗어날 수 있는 구명보트로 만들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는 더 좋은 의자를 원한다’는 것에 고정돼 있다. … 상황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리는 해체된 가족, 거대한 세계적 규모로 빼앗기는 일터를 보고 있다. ‘다운사이징’(감량경영)이란 그럴듯한 단어는 사람들이 해고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직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더 나은 자리를 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타이타닉을 벗어날 길을 찾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접근하려는 방법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 시기마다 불거진 문제들에 가장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투쟁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직면한 문제의 뿌리를 건드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늘날 빈부격차를 중대한 문제로 본다면, 가장 가난하게 된 사람들이 운동의 지도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빈민은 게으르고 제정신이 아니고 구제불능이며 도와야 할 사람들이라는 모든 편견과 반대되는 것이다. … 이 싸움은 동정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권력을 구하려는 싸움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정을 느끼는 관점을 갖고 있다면 뭔가 성취할 수 없다. 관계는 서로 간에 동료여야지, 불평등한 관계 속의 온정주의여서는 안 된다. 이 나라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 있고, 동정심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발전을 누려왔다. 자선사업, 사람들을 돕는다는 관념, 자조주의의 관념이 미국인의 정신에는 풍부하다. 이런 생각들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고려에 기초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통제를 위한 원천이자 수단이 되어왔다.”

그가 ‘6P’를 발굴하고 강조하게 된 배경 설명이 이 연설에 녹아있다. ‘6P’란 것은 간단하다.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를 모아내는 것이 프로그램(1. Program)이고, 안이하고 타성에 젖은 방식이 아니라 심사숙고하며 지속적으로 저항(2. Protest)한다. 서로의 기본적이고 긴급한 필요를 채워줄 방법을 일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생존프로젝트(3. Survival Project)이고, 주류 언론을 신뢰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으며 스스로의 목소리를 만들어 알리는 언론작업(4. Press Work)을 한다.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정치교육(5. Political Education)이고, 몇 몇 인물의 인품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계획을 통해 힘을 모으는 집합적인 지도력을 기르는 운동(6. Plans Not Personalities)을 한다.

간단하게 말했지만 그것의 실천은 간단하지 않다. 계속 만나고 움직이고 부대끼며 썩소와 미소의 차이, 무기력과 생동감의 차이, 고립과 연대의 차이를 배울 수밖에 없다. ‘연대할 권리’란 말을 찾아낸 사람들은 그것의 작동법도 만들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여섯 개의 P (Six Ps) , 윌리 뱁티스트

대개의 미국인들은 흑표범당을 생각하면 백인을 죽이려고 검은 총을 가지고 다니는 과격 집단을 떠올린다. 그런 이미지는 언론과 미연방수사국(FBI), 그리고 FBI의 대(對)파괴자첩보활동(COINTELPRO, 국가안보에 위험이 있다고 간주하는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FBI의 비밀파괴활동)이 만들고 부채질한 이미지이다. 그런 이미지를 부채질해서 그들은 흑표범당을 고립시키고, 흑표범당에 잠입하여 파괴했다.

이런 조직적인 잘못된 정보에 맞서 흑표범당의 의장 바비 실(Bobby Seale)은 이렇게 말했다. “심문관이 우리더러 백인 반대자라 하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서슴없이 백인 반대자라고 한다. 이건 뻔뻔한 거짓말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를 피부색 때문에 증오하진 않는다. 우리는 억압을 증오한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살해를 증오한다. 우리는 대규모 실업을 증오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하면서 인종주의에 푹 빠진 미국을 위해 싸우려고 흑인들이 군 복무를 하러 떠나는 것을 증오한다.”

사실은 흑표범당이 모든 민중의 경제적 안전을 위해 두려움 없이 싸웠고 쉴 새 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조직들보다도 더 흑표범당은 “모든 권력을 민중에게”란 요구를 옹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비난받았다.

그들의 효과적인 아동 무상 아침 식사 프로그램을 훗날 여러 주의 입법가들이 따라 했다. 무상 의료 진료소, 빈민이 감옥의 친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무상이동프로그램 등의 생존 프로그램들로 인해 흑표범당은 빈민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대파괴자첩보활동’은 이런 계획들을 위험하고 “사악한” 활동이라 비난했고, 지역의 FBI 요원들은 그것들의 파괴를 겨냥했다.

… 어떤 사회운동도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다. 이 풍요의 땅에서 만연한 빈곤을 끝내기 위해 오늘날 새롭게 떠오르는 운동은 지난 1960년대의 흑표범당의 역사적 경험에서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고 배워야만 한다. … 오늘날, 근본적인 경제적 조건은 경제의 모든 측면에서 기계화로부터 전자화로의 지속적인 팽창이다. 이런 변환의 결과는 구조적인 실업과 빈곤의 엄청난 증가이다. 이것은 단지 도시의 흑인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피부색, 모든 연령, 모든 지리적 영역의 문제이다. … 오늘날의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판단해야만 하고 오늘날의 상황에서 흑표범당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을 흑표범당의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흑표범당의 조직화 방식에서 ‘6개의 P’를 찾아냈다. ‘6개의 P’란 프로그램(Program), 저항(Protests), 생존 프로젝트(Projects of Survival), 언론작업(Press work), 정치교육(Political Education), 인품이 아닌 계획(Plans not Personalities)이다.

1. 프로그램(Program)
흑표범당의 목적은 10개의 강령 프로그램에 기술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들이 기반한 지역민들의 핵심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요구를 표현했다. 가령 제2강령은 “우리는 우리 민중의 완전 고용을 원한다.”, 제4강령은 “우리는 인간의 쉼터로 적합한 존엄한 주거를 원한다.”이고, 제7강령은 “우리는 경찰 폭력과 흑인에 대한 살해를 당장 중단할 것을 원한다.”이다.

… 사람들은 쟁점이 되는 문제들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행동할 동기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그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는 타인들을 찾게 된다. 이것이 조직화의 기초이다. 프로그램이란 그런 쟁점들을 요약하는 것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해결책을 이행할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이란 해결책을 향해 한 조직을 공통된 방향으로 결집시키며 그 모든 활동을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은 빈민이 빈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도구이다.

2. 저항(Protests)
흑표범당은 “타성적”인 것이 아니었다. … 가령, 지역사회의 의견을 세심하게 기록‧분석하고, 경찰의 행동과 민중의 권리를 지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조건과 법률들을 조사한 후에야 흑표범당은 그들의 유명하고 극적인 경찰 순찰대(경찰의 총에 맞서 총을 들고 흑인빈민가를 순찰한 활동을 말함)를 시행했다. 이런저런 저항들은 민중의 관심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의식을 건드렸다. 이런 정기적인 저항은 그들의 회원을 급격하게 늘렸고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투쟁하는 조직만이 투사들을 조직화한다. 심사숙고한 지속적인 저항은 빈민이 빈민을 조직화하는데 필수적인 도구이다.

3. 생존 프로젝트(Projects of Survival)
흑표범당이 시행한 무상 아침 식사 프로그램, 무상 의료 진료소 등의 프로젝트들은 회원들에게 지역사회에 지속적으로 접촉하게 했고 민중에 대한 사랑과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 이런 프로젝트들은 긴급한 요구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회원들의 정치적 훈련과 발전을 도왔다. 이런 활동들은 또한 그 자체가 저항과 정치 교육의 효과적 형태였다. 왜냐하면 생존 프로젝트들은 엄청난 풍요의 한가운데서 극심한 결핍을 양산하는 시스템의 광기와 비인간성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계속 움직이는 조직에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는 조직은 회원과 영향력을 모은다. 저항 활동은 시작과 멈춤, 들고 나는 성쇠가 있지만, 생존 프로젝트는 꾸준히 작동한다. 생존 프로젝트는 회원들을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게 하고 조직의 능동적인 구성원으로 몰두하게 한다.

빈민은 시시각각 당장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생존의 문제에 사로잡혀있다. 생존 프로젝트는 이런 즉각적인 필요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킨다. 빈민은 생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조직가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게 되고 조직가들은 정치교육과 투쟁활동을 정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4. 언론 작업(Press Work)
흑표범당의 신문(The Black Panther)은 널리 알려져 높은 평가를 받았고 조직화와 소통과 교육의 도구가 됐다. 이 신문의 배포 범위는 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흑표범당이 수행한 활동의 성격상 그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소통하기 위해 주류 언론을 신뢰할 수도 없었고 의지하지도 않았다. … 우리들 빈민 자신의 언론을 이용하는 것은 빈곤에 대한 싸움을 조직화하는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의식을 잃은 언론과 우리의 처지와 싸움의 성격을 검열하는 언론이다. 목소리가 없는 운동은 고립되고 파편화되고 패배하는 운동이다.

5. 정치 교육(Political Education)
흑표범당은 자기들 구성원에 대해서나 광범위한 대중에 대해서나 지속적인 정치교육에 몰두했다. …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정치교육 없이는 운동을 조직하고 유지하고 훈련하는 일, 그리고 지도자를 발굴하는 일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6. 인품이 아닌 계획(Plans Not Personalities)
흑표범당의 역사는 그들의 성취뿐만 아니라 단점에 대해서도 연구돼야만 한다. 흑표범당의 주요한 결점은 계획(정치교육 계획, 생존 프로젝트 개발 계획, 저항을 수행하는 계획, 언론작업과 배포 계획, 가장 중요하게는 이 모든 계획을 조직의 프로그램을 수행하려는 전반적인 계획에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인품에 너무 의존했다는 것이다.

FBI의 ‘대파괴자첩보활동’은 이런 약점을 이용했다. 서로 간에 개별적인 충성심에 기초해 형성된 내부 분파 집단들을 싸우게 함으로써 흑표범당을 찢어놓기 위한 목적이었다. FBI는 이 일을 스파이의 잠입과 기관원인 선동가를 통해서 거짓 흑색 정보 운동을 수행함으로써 해냈다.

“뱀의 머리 자르기”는 운동을 파괴하기 위한 오랜 교리이다. 지도자의 인품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운동은 적의 쉬운 먹잇감이다. 기획과 계획에 대한 헌신은 지도자들의 집합적인 발전을 허용한다. 계획을 통해 지도력을 통합하거나 집단화하는 많은 지도자를 가진 운동은 광범위하고 강력하며 심도 깊게 훈련된 운동이다. 그런 깨어있는 운동은 쉽게 잠입되거나 분열되거나 패배하지 않는다.

오늘날 모두가 “집합적인 지도력”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정말로 그것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심사숙고한 계획 없이 말뿐인 채로 있다. 그 계획은 ‘6개의 P’에 대한 고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03 호  [기사입력] 2012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99 호  [기사입력] 2012년 05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꽉 찬 오월이다. 무엇으로 꽉 찼냐 하면 기억으로 꽉 차 있다. 일 년 열두 달의 어느 날이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슴 아픈 날에 해당하겠지만, 오월처럼 아픈 기억으로 꽉 차기도 힘들 것 같다.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를 짓기 위해 농민들을 몰아낸 강제집행이 있었고,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는 당국의 확정발표가 있었던 오월이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이윤정 님을 떠나 보냈고, 쌍용자동차 22명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자리가 만들어진 오월이다. 파리 꼬뮌이 붕괴된 오월이요, 팔레스타인에 대재앙의 날이라 불리는 ‘나크바’가 있었던 오월이요,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이 있었다.

수백 년과 수십 년, 또는 수십 일의 차이가 있는 사건들이지만 공통점을 찾으라면, 피해자들의 고통은 선명하게 계속되고 있는데 가해자의 얼굴은 은폐돼있거나 진상규명과 사법적 처벌은커녕 사과와 가책이라는 인간적인 요구마저도 묵살되었다는 것이다.

5.18에 대한 오래된 영상집의 제목은 “기억을 기억하라”고 되어있다. 29만 원짜리 자기앞수표를 든 전두환의 벽보가 나붙었고 그림을 붙인 이가 즉결심판에 넘겨졌다는 뉴스가 일깨워준 것은 ‘기억은 충분히 기억되고 있는가’였다. 기억은 과거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이다. 기억이 희미하거나 무시되는 곳에서 또 같은 사건이 벌어지며 또 아픈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기억은 무시되거나 왜곡된다. 애써 규명한 진실들이 의도적으로 훼손되고 새로 짜깁기 된다. 기억하지 말고 빨리 잊으라고 재촉한다. 왜 그리됐는지 알려 하지 말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라 한다. 기억될 권리와 기억할 의무가 무시되는 곳에서 어떤 삶인들 의미 있는 존중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 한창 과거청산에 대한 논의가 일었을 때, 인권운동이 제시한 용어가 ‘불처벌’이었다. ‘불처벌’이란 법률상 또는 사실상 인권침해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불처벌’을 가르쳐 준 것은 국제인권사회와의 접촉이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1993)의 성과로서 유엔이 작성한 <인권침해자의 불처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기 위한 원칙들>이란 게 있었다. 인권운동은 그 원칙을 국내에 알리며 그에 걸맞은 과거청산을 위해 노력했다. 그 원칙은 <인권침해 가해자의 불처벌 문제>란 보고서에 담긴 것이었다.

1991년 8월 유엔인권소위는 이 보고서의 필자, 쥬아네에게 인권침해자의 불처벌에 대한 연구수행을 요청했다. 쥬아네는 이 연구를 통해 ‘불처벌’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제사회가 어떤 단계를 거쳐 왔는지를 검토했고 이 최종보고서를 쓰게 됐다.

첫 단계는 1970년대로, 인권단체와 법 전문가, 그리고 일부 국가의 야당들이 정치적 수인(양심수)들에 대한 사면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런 노력이 활발했던 곳이 독재 체제하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었다. 양심수 사면은 자유의 상징으로서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과 융합됐다.

두 번째 단계인 1980년대에 쇠퇴하기 시작한 군사 독재자들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자기 사면(self-amnesty)법’을 선포했고, 그것은 일종의 비상사태 시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불처벌을 보장한다는 식이었다. 그런 자기 사면법은 피해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고 피해자들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뭉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의 어머니들’이나 ‘라틴아메리카 실종자가족연합’ 등이었다.

세 번째 단계는 민주주의로 이행하거나 회복하는 과정에서 내전을 끝내려는 평화협상 과정에서 벌어졌다. 이전의 압제자들은 모든 것이 완전히 잊혀지길 바란 반면에, 피해자들은 정의를 요구했다. 도저히 균형을 맞출 수 없는 둘 사이에서 ‘불처벌’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네 번째 단계는 국제사회가 불처벌과 맞서 싸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시작됐다. 가령 미주인권재판소는 획기적인 규정으로서 ‘심각한 인권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은 공정하고 독립적인 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모든 사람의 권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했다. 비엔나 세계인권대회는 그 최종 문서인 ‘비엔나 선언과 행동강령’에서 불처벌에 대한 싸움을 지지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국제사회는 불처벌 문제 전반에 적용될 원칙들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그 원칙들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피해자의 알 권리, 정의를 추구할 권리, 그리고 보상에 대한 권리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니냐? 피해 당사자와 그 주변인들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어야,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것 아니냐? 이것이 ‘알 권리’의 내용이다. 권리가 있으면 그에 대응되는 의무가 있어야 한다. ‘알 권리’에 따른 의무는 ‘기억할 의무’라고 했다.

세월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이 옛 문서가 떠오른 것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원칙들 중 첫 번째조차 잘 실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에 대해 알 권리는 통제와 왜곡, 명예훼손의 위협에 시달리고, 스스로 기억을 지운 자들이 기억을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연애드라마 속의 기억상실증은 애틋할지 모르지만, 인권침해자들의 의도적인 기억상실증은 복장 터질 노릇이다.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내가 누군가를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누군가가 나를 알고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버림받은 사람보다 잊혀진 사람이 더 불행하다’는 신파조 대사가 정말 맞는 것 같다. 지금도 숨 가쁘게 달력을 채워가고 있는 가슴 아픈 일들, 그 속의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불의에 싸우기 위한 기본적인 일임을 옛 문서를 들추며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인권침해 가해자의 불처벌 문제I. 전체에 걸친 원칙들

A. 알 권리
17.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는 개별 피해자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람들만의 권리가 아니다. 알 권리는 또한 집단적인 권리로서, 장차 피해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역사에 다가가는 것이다. 알 권리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기억할 의무’로서, 국가가 당연히 취해야 할 의무이다. 그 목적은 수정이나 부정의 이름으로 역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겪어냈던 억압에 대해 아는 것은 한 민족의 역사적 유산의 일부이며 그런 것으로서 보존돼야만 한다. 이것이 집단적 권리로서의 알 권리의 주요 목적이다.

18. 두 가지의 일련의 조치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 제안되었다. 첫 번째는 가능한 빨리 비사법적 조사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고, … 두 번째는 인권침해와 관련된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다.

B. 정의에 대한 권리
1. 공정하고 효과적인 구제에 대한 권리
26. 이것은 모든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와 그 가해자들이 재판을 받고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것을 보장하는 공정하고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 정의에 대한 요구에 효과적으로 부응하지 않고는 어떠한 정당하고 지속하는 화해도 있을 수가 없다. 화해의 요소로서 용서란, 그것이 사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한, 피해자가 침해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하고 가해자가 참회를 보일 위치에 있어왔다는 걸 의미한다. 용서가 있기 위해서는 이것이 먼저 추구돼야 한다.

27. 정의에 대한 권리는 국가의 의무를 포함한다. 침해를 조사할 의무, 가해자를 기소하고 그 유죄가 성립된다면 처벌할 의무이다. …

C. 보상에 대한 권리
40. 보상에 대한 권리는 개별적인 조치와 전체적, 집단적 조치 둘 다를 포함한다.

41. 개별적으로, 피해자(친척과 부양가족을 포함하여)는 효과적인 구제를 받아야만 하며 적용되는 절차는 가능한 한 널리 공표돼야 한다. 보상에 대한 권리는 피해자가 고통받은 모든 상해를 포괄해야만 한다. 유엔인권소위의 특별보고관, 테오 반 보벤이 기초한 ‘대규모 인권침해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에 관한 권리의 기본 원칙과 지침’에 따르면 세 종류의 행위가 보상에 포함된다.
(a) 회복(피해자의 이전 상태로의 회복을 추구)
(b) 보상(신체적 및 정신적 상해에 대한 보상, 상실한 기회, 물리적 손상, 명예의 훼손, 법적 비용 등이 포함)
(c) 사회복귀(의료적 치료, 심리적 및 정신적 치료를 포함)

42. 집단적으로는, 도덕적 보상을 제공하기 위한 상징적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피해자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공식적인 선언을 하는 것, 기념하는 의식을 갖는 것, 공식적으로 기념거리를 명명하거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 기억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돕는 것 등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1940년과 1944년 사이의 비시 정권이 자행한 인권침해 범죄에 대해 프랑스 국가의 책임을 국가의 수장이 1996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데 50년 이상이 걸렸다. …

D. 재발방지의 보장
43. 같은 원인이 같은 결과를 유발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존엄성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침해를 감당해야만 할 것을 피하기 위한 세 가지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

(a) 준 무장집단의 해산…
(b) 모든 비상조치법의 철폐, 비상 법원의 폐지, 인신보호영장의 불가침성과 절대훼손 불가능성에 대한 인정
(c) 심각한 침해와 연루된 상급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퇴출…

맺는말
51.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 불처벌의 역사는 영구적인 갈등과 이상한 모순의 하나이다. 억압자와 피억압자간의 갈등, 시민사회와 국가와의 갈등, 인류의 양심과 야만과의 갈등, 구속에서 풀려난 억압자들이 다시 국가의 책임을 넘겨받고 국가적 화해라는 메커니즘에 사로잡히는 모순, 이것이 불처벌에 대한 애초의 약속을 약화시키는 모순”(E/CN.4/Sub.2/1993/6) 1993년 유엔인권소위에 제출된 준비 보고서의 도입부에 담긴 정서가 이랬다. 그런 정서는 아직도 유효하며 지금 이 보고서에 적합한 맺는말을 제공하고 있다.

인권오름 제 299 호  [기사입력] 2012년 05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95 호  [기사입력] 2012년 04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우울한 편지도 우울한 노래도 싫지만, 우울한 얘기는 더더욱 싫다. 하지만, 아무리 우울해도 꼭 들어야만 될 얘기일 때가 있다. 돌아오는 4월 26일은 1986년 체르노빌 참사가 난지 26년째 되는 날이다. 핵발전소 사고가 아니었다면, 평생 들어보지도 못했을 그 이름에는 수많은 생명의 흐느낌이 담겨있다. ‘정상적(?)’으로 죽고 싶다는 게 인간의 절실한 소망이 된 상황을 상상하는 건 고통스런 일이다.

여전히 고통 속에 있지만 희미해져가던 체르노빌의 이름이 되살아난 것은 아주 가까운 비극에서다. 올 초 이치우 할아버지께서 분신하신 밀양처럼 송전탑이 지나는 곳 그 어디나 원자력 산업의 거미줄에 걸려있다. 그 어디나 가까운 지인의 고향이거나 삶터요, 나와 관계없다 말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밀양만 봐도 내 동생과 조카들이 살고 있는 곳이요, 내가 즐겨먹는 청양고추와 얼음골 사과를 자랑하는 곳이요, 내 지인들이 조상 제사를 모시러 가는 곳이요, 대안학교를 세울 꿈을 꾸는 곳이다.

인류 최초의 원폭 투하 피해자들 속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경계 나눔이 부질없듯이, 작년 후쿠시마 참사와 지금도 한반도 곳곳에서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는 핵발전소의 우울한 결과를 어제와 내일로 나누는 것 또한 부질없이 느껴진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反하다>의 저자 하승우는 "나는 당신과 다르다가 아니라 나도 언젠가는 당신의 처지가 될지 모른다는 공통성, 그렇기에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말한다. 결국 우울한 얘기가 던져주는 깨달음은 ‘너도 당할 거야’란 협박이 아니라 ‘고통에 손 내밀라’는 간절함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인권은 핵의 무서운 파괴력에 맞서고자 재정비되어 부활한 사상이다. 반핵은 현대 인권의 모태이자 출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너무 오랫동안 핵에 대해 침묵한 것 같다. 핵발전소 폐쇄 운운하는 것은 과학자나 환경운동의 몫이라고 누가 영역을 나눠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인권규범을 들어 핵을 비판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후쿠시마 1주년을 맞아 세계적인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와 역시 세계적인 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핵 논쟁: 후쿠시마의 교훈과 인권>이란 주제로 토론을 했다. 앰네스티의 관계자는 인권과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과의 연관성, 그리고 그에 대한 핵발전소의 영향을 부각시켰다. 그린피스는 ‘핵에너지가 에너지 수요에 부응하는 최상의 방법이며, 안전하며, 탄소 방출을 줄여서 기후변화를 늦출 수 있는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해 ‘원자력에 대한 미신’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토론의 기초가 된 보고서가 그린피스가 올 2월에 발간한 <후쿠시마의 교훈>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 보고서의 서문에 해당하는 <후쿠시마와 인권>이다.

국제인권법에 근거해 원자력 산업을 비판한 사례도 있다. 저명한 국제법 학자이자 인권활동가로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해온 프란시스 보일(Francis A.Boyle)의 경우다. 보일은 후쿠시마 참사를 접한 후, 일본의 원자력 산업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근거규범인 로마 협약(2002년 7월 1일 발효) 7조에서 규정한 ‘인도에 반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주장한다. ‘인도에 반한 범죄’란 민간인 주민에 대한 광범위하거나 체계적인 공격의 일부로서 그 공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범하여진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민간인 주민에 대한 공격’이라 함은 그러한 공격을 행하려는 국가나 조직의 정책에 따르거나 이를 조장하기 위하여 민간인 주민에 대해 협약에 규정된 행위를 다수 범하는 것에 관련된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그런 행위 중에서 보일이 지목하는 것은 7조 k항의 “신체 또는 정신적·육체적 건강에 대하여 중대한 고통이나 심각한 피해를 고의적으로 야기하는 유사한 성격의 여타 비인도적 행위”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로마협약의 당사국이기 때문에 그 적용을 받는다. 나아가 보일은 이 협약의 당사국들 뿐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들의 원자력 산업은 ‘인류에 반하는 범죄’라고 말한다. 따라서 일본 시민들이 일본의 원자력 산업을 끝장내기 위해 이러한 법 규정을 이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타 민족들도 자국의 핵 산업에 대하여 마찬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반핵평화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쓴 히로세 다카시는 이런 말로 책을 맺는다.

“원자력 발전소의 물질적 피해 등은 수치로 나타내면 그뿐이지만, 죽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 하나뿐인 생명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이제 그만하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현실을 바꿀 수 있다. 요컨대, 희망에 찬 미래를 창조해 나가는 것은 지금부터의 어른들, 바로 그대들인 것이다.”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이끌었던 고 김형률 님은 생전에 한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말한다.

“입원해 있으면서 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해야 ‘삶은 계속될 수 있다’고 새겨듣는다. 오는 주말에 2차 탈핵희망버스가 고리와 밀양을 누빈다고 한다. ‘미어터지되 안전운행을 바란다’고 말하면 ‘원자력 발전소는 안전하다’는 말과 같은 모순일까?

후쿠시마와 인권

*그린피스 한국 홈페이지에 가면 이 보고서의 한글요약본과 영문본 전체를 볼 수 있다.


지진이 이 세상 어딘가를 강타할 때, 그것은 오랫동안 땅 밑에 존재해왔지만 지진이 터지는 순간까지는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힘과 틈을 가시화한다. 최하층의 바위 속 깊이 있던 단층선이 땅에서 새로운 균열을 내며 우리 발밑에 등장한다. 항시 변하고, 항시 움직이고 있는 우리 지구의 엄청난 힘이 무섭도록 명확해진다.

마찬가지로, 지진, 쓰나미, 홍수, 태풍 또는 화산 폭발이 됐든 어떤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은 사회 및 정치 체제의 표면 밑에 있는 틈을 노출시킨다. 그런 틈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언제나 대충은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껏 무시해올 수 있었던 것일 수 있다. 동 일본 지진의 경우에 지진, 쓰나미 그리고 핵사고라는 삼중의 비극이 일본의 사회․경제적 및 정치 기구 뿐 아니라 국제적 기구 속에 있는 전반적인 틈 내지 약점을 드러냈다.

아주 명백하게, 아마도, 지진과 쓰나미는 일본 원자력 산업의 규제와 운영의 약점을 드러냈다. 그것은 정말로 시스템의 ‘숨겨진’ 실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쓰고 경고해왔던 약점이었다. 가령 내 책꽂이에는 35년도 더 된 1975년에 나온 영어 잡지 Ampo의 복사본이 있다. 그 잡지는 ‘핵 원자로: 궁극적 오염을 무릅쓰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신규 원자력 발전소의 취약성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1971년(후쿠시마 다이치 발전소가 허가된 해)에 했던 미국정부의 경고를 지적하고 있다. 그 경고 내용은 비상 노심냉각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후쿠시마 같은 경수로는 ‘치명적인 핵 폭발과 광범위하게 퍼지는 방사성 낙진’을 겪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그러한 치명적인 폭발이 인간에게 끼친 결과를 후쿠시마현 언덕의 아름다운 고원에 있는 여관촌에서 끔찍하게 볼 수 있다. 잘 가꿔진 농장과 작은 상가가 마을 중심에 나란히 열을 지어있다. 지역 쇠고기와 산나물을 제공한다는 광고판을 내건 식당들이 행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자전거의 대열이 끊임없이 길을 스쳐가지만 그들 중 아무도 멈춰서지 않는다. 주차장은 텅 비었고, 들판에는 작물이 없다.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도 전혀 없다. 재난이 난지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여관촌의 온실에는 키 큰 잡초들만 무성하다. 후쿠시마 제1호 원자력 발전소에서 40km 떨어져 있는데도, 여관촌은 유령마을이다.

여관촌 마을 회관 바깥에서 내 동료 중 한명이 가져온 방사능 측정계가 시간당 13.26 마이크로시버트(microsievert)를 가리킨다. 이것은 자연 배경 방사능의 약 백배 수준이다. 그가 측정계를 회관 앞 하수구 위에 대자, 측정계는 아예 멈춰버렸다. 방사능 수위가 측정계의 용량을 넘어선 것이다. 여관촌 같은 장소에서 재빨리 배울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작은 장소 내에서 방사능 수준이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관촌은 운 나쁘게도 해안에서 부는 바람이 산과 만나는 지점에 있어서, 순식간에 방사능 투하의 위험지대가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핵사고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소개되어진 15만 명에 속하게 됐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현재 후쿠시마현의 사고 영향에 대한 조사의 상당부분은 전문적인 과학자들이 아니라 전혀 과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지역의 보통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이들은 절실하게 자기 주변 세상에 대해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가령, 미하루 마을에서는 지역 농부들(대부분이 노인이거나 여성인)이 작물을 기르면서 마을회가 제공한 방사능 측정 장비를 갖고 작물 테스트를 하고 있다. 그 결과는 깜짝 놀랄만하다. 일부 작물은 아주 높은 수준의 방사성 세슘으로 오염되어 있는 반면 어떤 작물은 전혀 오염을 보이지 않으며 협력하는 자원자들의 지원으로 전국의 소비자들에게 팔릴 것이다. 당국은 시장에서 팔리는 다양한 상품, 특히 식품의 방사능을 정확히 통제하고 규제할 능력이 없다.

후쿠시마 시내의 작은 쇼핑가에서는 벨로루시(체르노빌 사고로 최악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 중 하나)에서 수입한 전신 방사능 측정기(내부피폭 측정기)를 포함하여 방사능 측정 장비의 강력배터리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사에 대해 지역 시민들이 답변을 도와왔다. 하지만 기부로 재정을 충당하며 과로에 지친 자원 활동가로 인력을 꾸린 ‘시민 방사능 측정소’는 자문을 구하려고 끊임없이 몰려드는 질문과 요청에 고전하고 있다. 2011년 말 현재, 후쿠시마 시 일각의 외부 방사능 수준은 자연 배경 방사선의 10배에 이른다. 하지만 그 수준은 여전히 정부가 공식적으로 ‘안전’하다고 선언한 범위 내에 있다.

이런 불확실성에 당면해 많은 가족들이 흩어졌다. 배우자와 아이들은 일본의 다른 지역이나 심지어 외국에 가서 살도록 보내진 반면 생계부양자는 후쿠시마에 남았다. 위험이 아무리 적다할지라도, 결국 부모들이 원하는 건 제 때 움직이지 않으면 아이들이 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

그러나 그런 피난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별과 장소변화의 부담을 포함하여 명백한 심리적 부담이 있다. 학교를 바꿔야 하고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멀리 보내진 아동에게 특히 그렇다. 재정적 부담 또한 높으며 그 부담은 광범위한 사회가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함정이 있다. 도쿄전력의 현행 보상 체제는 정부가 지시한 피난을 기준으로 한다. 이것의 의미는 오직 강제적으로 이주한 사람들만이 보상을 청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정된 소개 지역민은 전력 회사 또는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겠지만, (특정한 소개 지역 바깥에선 일체의 건강 위협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시를 자발적으로 떠나길 선택한 사람들의 비용에 대해서는 지원을 거부했다.

2011년 12월 정부는 강제 소개 구역 바깥에 있지만 방사능 수준이 높은 23개 시 거주자들에게 한정된 액수의 지원을 주라는 자문단의 권고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하지만 거주자가 그 지역을 떠났거나 남아있거나에 상관없이 지불되는 이 지원은 오염지역에서 멀리 이동하여 발생하는 비용의 단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십만 명이 넘는 후쿠시마의 핵 피해자가 자신들의 청구가 처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보상받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청구를 해결하기 위해 재판을 해야 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전혀 받지 못할 것이다. 변호사와 독립적인 관측자들은 후쿠시마 피해자들에게 보상청구를 최대한 제한되고 관료적이고 어렵게 만듦으로써 청구를 억제시키는 것이 도쿄전력과 정부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2011년 5월 설립된 ‘코모도 후쿠시마’란 지역 민간단체의 한 자원활동가는 재난의 인간적 차원을 웅변적으로 묘사한다. 여관촌에서 세 개의 학교에 다니던 240명의 아동 중 상당수가 공식적으로 안전하다 선언된 후쿠시마 시로 피난하게 된 반면, 학교 캠퍼스는 여관촌 언덕 아래(소개된 지역 바로 바깥에 있는) 가와마타시 근처로 옮겨졌다. 피난하여 지금은 후쿠시마 시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면 아침 6시에 떠나 오후 늦게 돌아오는 학교버스를 타야만 한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 아이들은 방사능 공포 때문에 바깥에서 놀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후쿠시마 시에 있는 가족들의 피난처로 돌아와도 아이들은 여전히 정상 수준보다 10배 높은 방사능 수준에 노출돼있다. 많은 아이들이 피로 증세와 낮은 면역수준을 보이고 있다. 비록 그 누구도 그것이 아이들이 감당해온 사회적 붕괴 또는 높아진 방사능 수준의 결과라고는 말하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코모도 후쿠시마’는 지역 아동을 지원하는 수많은 민간단체들 중 하나로, 일본의 다른 지역과 외국에도 요양소를 세우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 요양소란 특히 취약한 아동(여관촌처럼 소개된 지역 출신 아동을 포함하지만 그에 국한되지 않는)의 방사능 수준을 낮추고 정신적 및 신체적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두 달 여 동안 아동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이 단체 회원들은 재난에 대한 반응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가족은 피난을 원하는 반면, 어떤 가족은 그렇지가 않다. 후쿠시마현의 많은 이들은 방사능의 위험을 정말로 무시할 수도 있는 반면, 걱정을 ‘과잉반응’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만 걱정하라’는 되풀이되는 지시로는 달랠 길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도달 가능한 최상의 건강 기준을 향유할 아동의 권리를 인정할 것’을 정부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에 책임져야 할 회사인 도쿄전력, 일본의 지역 및 중앙 정부, 그리고 세계 공동체는 후쿠시마의 아동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이행해야 할 것이다.

인권오름 제 295 호  [기사입력] 2012년 04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91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

이것은 세네갈의 시인이자 초대 대통령을 지낸 레오폴드 세다르 상고르가 1960년대에 유엔에서 연설할 때 했던 말이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경제‧사회적 권리의 어렴풋한 윤곽을 제시했다면, 아프리카의 소국 세네갈의 상고르 대통령이 말한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는 느낌이 팍 오는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래서 이 문장은 경제‧사회적 인권을 함축한 표현으로 널리 사랑받으며 인용돼왔다.

지구상의 남북문제나 지구화와 인권문제 등을 연구하는 전문 저술가인 존 매들리도 이 문장을 즐겨 인용하는 이들 중 하나이다. 그가 80년대에 유엔 영국 위원회의 기획으로 쓴 경제‧사회적 권리의 팜플렛 제목이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이다. 이 팜플렛은 국제원조, 무역, 초국적기업 등과 경제‧사회적 인권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그 중의 한 장이 군수산업에 대한 것이다.

이십여 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변치 않는 현실, 아니 손에 잡힐 만큼 턱 앞에 가까이 온 문제들의 다급성 때문일 것이다. 핵 안보 정상회의가 열린 서울은 삼엄한 경계에 싸였다. 그런 도시의 한복판에서 정리해고 되어 장기실업상태이거나 부당노동행위에 맞서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노동자들이 희망텐트를 치고 꽃샘추위를 여러 날 버텼다. 뭔가 변화가 있지 않으면 ‘외롭다’는 그들의 힘든 버팀은 계속될 것이다. 평화롭던 제주에서는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일 군사기지 건설 강행의 폭음이 멈추질 않고 있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이란 콧노래가 ‘초록빛 바닷물에 화약과 케이슨을 던지네’란 탄식으로 바뀌었다. 핵 사고와 방사능 유출을 현실적인 공포로 느끼면서도 원전을 포기 못하는 이중성이 갈짓자(之) 걸음이다. 핵발전소에서 대도시로 전기를 나르기 위한 죽음의 송전탑이 농촌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다.

그런데 정치의 꽃이라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주류 정치권은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고 남의 다리 긁는 소리들만 해대고 있다. 변덕스런 봄 날씨 만큼이나 내가 서 있는 땅의 공기가 불안하고 삶의 안정성은 시소를 탄다. 그래서인지 ‘모든 무기는 가난한 이들의 몫을 훔친 것’이라는 이 글의 메시지가 뒷덜미를 잡는다. 무기, 무기산업, 전쟁, 핵발전 등의 단어는 일상어가 아닌 듯 여겨지면서도 생활 구석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 순간순간 쓰지 말아야 할 것을 소비하는데 중독돼있고, 늘 ‘모자란다’고 푸념하면서도 엉뚱한 곳에 자원을 퍼붓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원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이들의 몫을 도둑질한 것이다.

이 글을 읽다보니 ‘너도 같이 훔쳤지? 훔치는 걸 보고도 가만 있었지? 그냥 계속 지켜보고만 있을래?’라고 묻는 목소리와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러구 살아!’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번갈아 들린다.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멘붕’(정신이 나간 상태)으로 살아갈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약탈로부터 지킬 것을 지켜야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나뿐 아니라 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살면서 곤란한 문제에 닥칠 때마다 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답을 애써 피해 다녔고 그래서 오랫동안 질척거리곤 했다. 도망치기를 그만두고 애초에 생각했던 답대로 결정을 하고나면 홀가분했던 경험이 많다. 요즘처럼 정신 사나운 때, 나 자신이나 내 주변 사람들이 도망치기를 멈추고, 당당한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지기를 시도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희망해본다. 무기를 먹거리와 바꿔서 근사한 아침밥상을 차려보는 꿈을 여럿이 같이 꾸고 싶다.

무기와 경제적 권리(존 매들리, 1982)

“제작된 모든 총, 진수된 모든 군함, 발사된 로켓이 최종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굶주리고 먹지 못한 사람들, 춥고 헐벗은 사람들로부터 훔쳤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아이젠하워 장군으로, 이 말은 무기 소비가 가난한 이들에게서 식량과 기타 필수품을 훔치는 것이며 따라서 빈민의 경제적 권리를 빼앗고 있다는 것을 잘 요약하고 있다.

1980년 세계적으로 5천1백억 달러가 무기에 소비됐다. 거대한 규모의 돈이 장차 사람들을 파괴할 수 있는 폭약을 설치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하지만 굶주림, 가난, 질병은 당장 사람들을 파괴하고 있다. 빈곤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돈이 그 대신에 무기를 비축하는 데로 간다. 우선순위가 나쁘게 빗나갔다. 한편으론 과잉 살상을, 다른 한편으로 저발전을 한다.

해마다 단 이틀이면, 세계는 유엔과 그 전문 기구들의 일 년 예산에 필적하는 돈을 무기에 써버린다. 군사연구와 우주 연구는 모든 사회적 필요를 합한 것 보다 더 많은 공공 예산을 받는다. 50만 명의 과학자와 5천만이 넘는 기타 노동자들이 오늘날 군사 장비의 연구와 생산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 무기에 쓰여지고 있는 돈의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에 쓰여진다면 수백만 인구의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의 군수 기계가 향후 10년간 일 년에 단지 3주씩만 멈춘다면, 그리고 그 돈을 3세계 전체의 물과 위생 프로젝트에 쓴다면, 유엔의 물 계획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깨끗한 물과 위생을 모든 사람에게 1990년까지 제공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건강의 증진과 개인으로서 자신의 잠재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전쟁으로부터 물로, 무기로부터 위생으로 6%만 돌려도 10년 안에 수백만 명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데 도대체 왜 안 되는 것인가? 세계의 정치인들은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자신들의 기여가 역사를 거스른 것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 더 많은 돈이 실제 또는 가상의 적에 보복하기 위한 전쟁 무기로 쓰여지고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적’은 무기 경쟁에서 떠오르고 있다. 이 ‘적’은 정치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현재의 정책에 대해 재고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무기의 성장 그 자체가 적이 되었다. 무기의 성장은 판단착오, 실수 또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고로 인해 전쟁 위험을 증가시켜왔다.

1979년 휴전 기념일 바로 전날, 세계는 핵전쟁을 6분 앞두고 있었다. 컴퓨터 에러 때문에, 미국은 ‘적색경보’를 진행했다. 믿어지지 않는 6분 동안, 적색경보는 핵 전쟁을 3시 40분에 시작할 신호를 보냈다. 제트 전투기들이 날았다. B52 폭격기가 즉각적인 이륙을 준비했다. 운 좋게도 이 컴퓨터 에러는 제 시간 내에 발견됐다. 하지만 우리가 늘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다.

무기를 만드는 것이 더 많은 안보를 가져온다고 믿는 정치인들은 근본적으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 더 많은 무기는 서구사회에 더 적은 실질적 국가 안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더 많은 무기는 빈민으로부터의 약탈에 의존한다.

3세계는 전체적으로 보건과 교육에 쓰는 것보다 세 배 이상의 돈을 무기에 쓰고 있다. 서구인들은 3세계를 손가락질하며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서구 스스로가 나쁜 선례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서구에서 우리는 군사력을 우리의 국가다움과 위대함의 표시라는 인상을 주려한다. 우리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 3세계가 빠져드는 것을 비난할 수가 없다. 이런 미묘한 압력위에 서구의 기업과 정부들이 사용하는 고도의 판매 기술(그리고 뇌물)이 첨가된다.

… 3세계와 서구의 무기 소비는 브란트 보고서(the Brandt Report)가 명확히 한 것처럼, “인류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더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인권의 부정은 무기 경쟁 때문에 더 악화되었고, 세계 불안의 원인이다. 오늘날 전쟁무기로부터 평화 장치로 스위치를 옮기는 것은 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경제적 인권, 안정, 그리고 더 나은 평화의 전망이란 이익이 상당할 것이다.

정치인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 이런 요인들에 더 무게를 둔다면 자신들이 공언한 인류에 대한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브란트 보고서는 말한다. “군사 지출이 통제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아낀 부분이 발전에 쓰일 수 있다면, 세계의 안보는 증가되며 현재 존엄한 삶으로부터 배제당한 상당수 인류가 더 밝은 미래를 갖게 될 것이다.”

인권오름 제 291 호  [기사입력] 2012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되고 첫 달을 맞으면 이런 저런 계획을 잡기도 하고 이런 저런 기대와 흥분으로 설레던 때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새해 첫 달의 그런 기분이 사라졌고 뭔가 불안한 것으로 바뀌었다. 폭설에 살림살이의 기능이 멎는다거나 꼭두새벽에 철거민이 불타서 죽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대지진에 마음이 갈라지면서 또 어디서 마음 뒤숭숭한 소식이 들려오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한 것이 새해의 가슴앓이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가슴앓이가 1월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이웃에서의 원전 참사가 내 집 앞 교통사고와 같은 일이 돼버리면서 어느 때고 어디서고 불안불안하니 계획과 기대란 단어가 초등학교 때 동그라미 생활 계획표 그리던 때를 떠올릴 때나 써먹을만한 단어로 여겨지게 됐다.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흔한 광경은 폐업과 새로운 간판이 붙는 일의 반복이다. 다닥다닥 붙은 작은터에 누군가의 퇴직금이나 대출금을 쏟아 부었을 고만고만한 가게가 들어서고 서너달을 버티지 못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그것으로 바뀌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종 지표의 악화를 신문에서 읽지 않아도 내가 숨 쉬는 거리의 광경이 생방송으로 그것을 전해준다. 두 집 건너 하나가 커피집이요, 떡볶이와 만두집이요, 편의점이다. 두 집 건너 하나 있으면서 다 알만한 상표를 내걸고 있으니 비싼 이름값을 치르면서 바지사장 역할로 종종거리다 털어먹는 사장님들 천지다. 그런 상표조차 내걸지 못한 집은 잡아먹힐 것이 너무도 뻔히 보이는 옹색하고 궁색스러운 모습이다.

그런 가게들 중 하나가 온갖 영화포스터와 유명 대사를 적은 색종이로 벽과 유리창을 채웠던 커피집이었다. 시각적으로 전혀 세련되지 않았지만 영화 카피와 대사를 읽는 맛이 쏠쏠했다. 지나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구절이 붙었나 살펴보곤 했는데, 어느날 맘에 들어온 구절이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였다. 어디서 인용했는지를 써놓지 않아서 누가 했던 말인지 모르겠거니와 그 누구의 말이 아니라 주인장의 삶의 철학이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몇 달을 못 버티고 포스터와 색종이들은 낱낱이 뜯기었고 다른 가게로 바뀌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말조차 지켜내지 못한 이의 절망을 느낀다.

돈과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계획도 도둑맞았다. 몇 살 쯤엔 학교를 졸업하고 몇 살 쯤엔 취직을 하고 몇 살 쯤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몇 살 쯤엔 은퇴한다던 계획을 할 수 있는 삶은 드물다. 사람의 삶뿐이 아니라 계절과 기온도 달라졌다. 이때쯤 펴야 할 꽃이 아무 때나 피고 선선해야 할 때쯤 무지 덥고 이때쯤 와야 할 비가 제멋대로 한꺼번에 내린다.

<사회적 감시(Socail Watch) 네트워크>는 전세계 60여개 이상의 나라들에서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감시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망이다. 해마다 감시의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내고 있는데, 올해 보고서의 제목이 ‘미래에 대한 권리’이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들은 익히 알려진 것들이다. 투기금융자본과 무역자유화가 얼마나 많은 삶과 자연을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지키지 않은 헛된 약속이 얼마나 많았는지, 상황이 얼마나 악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재확인이다. 그럼에도 이 보고서의 제목이 ‘미래에 대한 권리’라는 것에 설레었다. 무슨 근거로 ‘미래’를 말할 수 있단 말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계획할 수 있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극적인 대답은 없었다. 대신에 보여주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란, 계속 성장을 통한 파이 키우기는 오답이라는 것, 이미 대기 중의 자기 몫이라 할 것을 온실가스로 다 채우고도 모자를 만큼 에너지를 써대고 탄소를 배출하는 생활수준이 기준일 수는 없다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선을 지키는 삶이야말로 기준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삶은 새로운 자원을 더 써대지 않아도 지금 당장 누구에게나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불안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내일을 포기하고 오늘 다 써서 없애 버리는 것도 아니고 투기와 횡재와 약탈을 시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문턱을 지켜내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이며 그것을 위한 행동이 지금 있어야 미래가 열린다고 말한다.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간신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란 문구가 자꾸 겹쳐지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미래에 대한 권리; 사회적 감시 네트워크 보고서 2012년 개괄

유엔총회는 2012년 6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약칭 리우)에서 열릴 정상회의를 소집했다. 이 도시에서는 20년 전에도 역사적인 ‘환경과 발전에 대한 유엔 회의’가 열렸다. 지구정상회의로 널리 알려진 1992년 리우 회의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을 지지하고 기후변화, 사막화, 생물다양성에 관한 국제협약을 승인했다.

그 당시 브룬트렌드 위원회(‘환경과 발전에 관한 세계위원회’로서 그 의장이었던 전 노르웨이 수상 브룬트렌드의 이름으로 알려졌다)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미래 세대의 역량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재의 필요를 충족”하는 일련의 정책으로 정의했다. … 1992년 리우 회의는 무엇이 “현재의 필요”인지를 상세하게 정의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에 이어진 유엔 회의들에서 많은 사회적 약속이 정해졌고, 거기에는 빈곤 철폐와 성평등의 성취가 포함됐고 몇몇 지표와 목표들이 정해졌다. 하지만 바르샤바조약의 붕괴와 소비에트연방의 해체 후, 자유무역과 경제 자유화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 광범위한 합의인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세계무역기구(WTO)는 1995년 창설되면서 그 홈페이지에 “국가 시장을 국제무역에 개방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무하고 기여하며, 인민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빈곤을 감소시키고 평화와 안정을 배양할 것”이라 선포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1989년 수정된 세계은행(World Bank) 협약 조항들의 첫 조항은 “회원국의 발전을 위한 국제 투자를 장려하고 그를 통해 회원국에서의 생산성․생활수준․노동조건 향상을 지원함으로써, 장기간 균형 잡힌 국제무역의 성장과 국제수지 균형의 유지를 증진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세운다.

이런 두 개의 강력한 국제기구가 국제무역에 대한 지배와 부채 경제에 부과한 대부 조건을 통해 지난 이십년간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정책을 형성해왔다. 이들 기구 둘 다가 무역과 경제 성장을 그들 정책의 핵심 목표이자 회원국들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여라는데 확실히 합의하고 있다.

그리고 두 기구는 자기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20년 새, 세계 총수출은 거의 다섯 배가 됐고, … 지구상의 평균 거주자들은 소득이 두 배가 됐다.

존엄성의 결여

이런 지표들은 지구상의 자원이 풍부하며, 세계의 70억 거주자들의 필수적인 필요를 보장하기에 충분하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거주자들 중 너무 많은 사람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다. 2010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보고에 따르면, 8억5천만의 사람이 영양실조이며 그 숫자는 식품가격의 상승 때문에 더 늘어나고 있다.

지구적인 결핍 경향을 감시하기 위해, ‘사회적 감시’는 기본역량지표(Basic Capabilities Index)를 개발했다. 기본역량지표는 유아사망률, 훈련된 요원을 동반한 출산 수, 초등학교 등록률로 구성된다. 이런 기본적 복지 지표들은 “사회적 최저치(minimum social floor)”로 고려돼야만 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 이것은 100%여야만 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어떤 아동도 학교를 못 다녀서는 안 되고, 어떤 여성도 도움 없이 출산해서는 안 되고, 태어난 아이는 살아야 하며 적어도 5살도 되지 못해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피할 수 있었던 죽음의 주원인은 영양실조와 가난이기 때문이다. … ‘사회적 최저치’ 밑에는 존엄성의 결핍이 있다. … 하지만 세계는 이런 기본적 목표의 성취로부터 거리가 멀다. 1990년과 2010년 사이에 ‘기본역량지표’는 겨우 7포인트 상승했는데, 후반 10년 동안보다 전반 10년 동안에 조금 더 나아졌다. 이런 경향은 무역과 소득 지표와는 정반대다. 무역과 소득지표는 2000년 이후 더 빨리 성장했다. …

경제가 성장 경향을 보여줄 때조차 사회적 지표가 악화되는 명백한 이유는 국가 내와 국가들 간에서의 불평등의 증가이다. 2011년 국제통화기금(IMF)의 발표에 따르면, 2010년 미국의 일인당 순소득은 1980년대 수준보다 65% 이상이고, 영국의 경우는 77% 더 높다. 같은 기간 미국의 불평등은 지니 계수(Gini points; 가장 흔히 사용되는 불평등 지표. 계수는 0에서 1사이이며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다)가 35에서 40 포인트 이상 상승했고, 영국은 30에서 37포인트 상승했다. 이런 상승은 소득 분배의 심각한 역행을 반영한다. … 비정한 숫자들이 증명하는 바는 번영이 “넘쳐 흐르지”(낙수효과, trickle down)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빈민에게 이롭고, 떠오르는 조수는 크건 작건 모든 배를 띄우며, 일단 파이를 키워야 파이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사회 진보의 지표들이 보여주는 경향은 정반대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또한 ‘사회적 감시 네트워크’의 전 세계 회원들이 보고하는 바이기도 하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

경제성장을 모든 정부들은 최우선시한다. 일부 정부들은 성장을 핵심적인 정책 우선사항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2008년 시작된 지구적 금융 위기 동안 성장이 아주 둔화되거나 심지어 후퇴했기 때문이다. 일부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많이 했다.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들인데 그들의 경제성장은 필수품 가격의 상승 때문이다. 그런 성장은 대다수를 이롭게 하는 게 아니다. … 또 다른 성장은 사회적 혜택은 없으면서 환경 파괴의 결과를 낳았다. … 부자 나라든 가난한 나라에서든 똑같이, 지극히 소수만이 세계경제가 아주 잘 나갔을 때부터 2008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혜택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벼락 경기 때 이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세계의 최고 부자 국가들의 은행들(망하기에는 너무 덩치가 큰)을 구제하기 위해 돈을 낼 것을 요구받았다.

… 경제성장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에너지는 ‘사회적 감시’가 비난하는 많은 문제들의 핵심에 있다. 석유 채출은 쉽사리 오염으로 인식하지만, 수력발전, 바이오연료 등 “더 깨끗한” 에너지원이라고 가정되는 것에 문제가 많은 것으로 많은 국가들의 사례 증언들에서 등장했다. … 사막화는 되풀이해서 등장하는 주요 문제이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해마다 35만 헥타르의 경작지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뭄, 지나친 인간 착취, 지나친 방목, 남벌, 빈약한 관개시설의 결과로서 이런 관행들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힘든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가뭄과 정반대의 재난인 파국적인 홍수의 원인이다. … 기후변화로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나라들 중 하나는 방글라데시로 비와 홍수로 이미 식량부족이 야기되고 있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후 난민”이 되어가고 있다. 모순되게도 방글라데시는 문제를 가장 적게 일으킨 나라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방글라데시의 1인당 탄소 배출량은 세계에서 가장 적기 때문이다. … 반면 OECD 국가들은 세계 평균보다 훨씬 많이 소비할 뿐 아니라 대기 중 온실가스 축적에 역사적으로 원인이 돼왔으며 대기 중의 그들의 몫을 이미 다 써버렸다고 할 수 있다.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기본적인 존엄성의 수준을 실현하는 일이 지속가능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며 기존 자원으로 성취 가능한 것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잘못일 뿐 아니라 지구적 생태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지속가능한 발전의 기초인 권리

기본적인 시민‧정치적 권리가 없을 때 시민사회는 평화적으로 조직화할 수 없고, 인민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없으며 정부 정책의 질은 형편없게 된다. … 하지만 시민사회는 씨알 같은 기회가 생기자마자 놀라운 복원력과 창조성을 보여준다. 이라크에서는 2011년 2월 전국을 흔든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는 빈곤, 실업, 부패의 철폐를 요구하며 민주적 참여가 예전에 폭력적으로 억압되거나 침묵 당했던 사회에서 이라크 시민들이 시작한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불안이 드리워져 있고 시민적 자유의 결핍이 심한 상황이지만 시민사회 조직들이 성장하며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동지역의 “아랍의 봄”의 민주적 봉기에 결합하고 있다.

케냐에서는 진정한 주권과 시민권을 위한 오랜 투쟁 뒤에 마침내 2010년 획기적인 헌법을 협상하게 됐다. 기본적 권리, 참여, 시민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는 헌법은 평등과 기본적인 사회적 및 경제적 권리를 실현할 경제 건설을 국가의 중심적인 역할로 정의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환경과 관련해서 새 헌법은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모든 케냐인의 권리를 수립하고 있기에 또한 한 단계 전진했다.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의 헌법 개혁 과정도 원주민의 권리를 강화했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용어 대신에 자신들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헌법적 차원에서 ‘Pachamama(‘어머니 지구’라는 뜻)의 권리’를 수립했다. 하지만, 사회적 감시자들이 확인하듯이, 이들 권리를 경제성장을 위한 냉혹한 요구의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투쟁이 요구된다. 불가리아의 감시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환경 문제가 아주 중요했다고 회상한다. 냉담만 늘어난 수년이 지난 후, 지금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유전자변형작물의 시장 도입과 자연 지대의 보존을 위한 NATURA 2000 프로그램의 이행에서의 몇 가지 결점이 정치 논쟁과 시민 동원에서의 주요 사안이 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베를루스코니 정부의 우선순위에서 결코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때조차, 시민사회에 의해 성공적인 국민투표(원자력 반대, 물과 여타 공공서비스의 강제 민영화 반대, 수상을 법의 지배로부터 면제하는 것 반대)가 진척되어 거의 2천7백만의 이탈리아인이 투표했고 더욱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이탈리아를 추동하는 데 성공했다. … 하지만 성공은 아직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행, 감시와 집행, 인식 향상과 정치적 지지의 보장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 “미래에 대한 권리”는 현재의 가장 긴급한 과제이다. 그것은 물론 자연에 관한 것이지만 또한 우리의 증손자․증손녀에 관한 것이고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관한 것이고, 세계 70억 남녀와 소년소녀 99%의 기대이기도 하다. 이들은 20년 전에 지속가능성을 약속받았지만 그 대신에 발견한 것은 그들의 희망과 기대가 자신들의 통제를 넘어선 지구적 금융 카지노의 도박 칩 속으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 이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는 없다. 사람들에겐 미래에 대한 권리가 있고 미래는 지금 시작되는 것이다.

인권오름 제 283 호  [기사입력] 2012년 0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9 호  [기사입력] 2011년 12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에 겨울이 더욱 춥게 느껴진다. 살림살이에 엄청난 한파를 가져올 것이라 하는 법 내용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알려고 노력해도 이런저런 전문용어로 가득 차 있어서 친절한 정부의 설명이 필요할 터인데, 자세한 건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좋은 것이라는 선전만 가득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손잡고 구경한 장터 약장수의 공연 같다. 그냥 좋으니까 일단 한번 잡숴보라는….

나는 통상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 있다면 국제인권법이다. 미국에 대해서 이모저모를 많이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국제인권법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국제법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국제인권법에 대해 취해온 태도를 보면 한국과 FTA를 맺을 상대가 어떤 상대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미국은 주요인권조약을 거의 비준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규약), 아동권리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 장애인권리협약 등을 비준하지 않았다. 사회권규약은 1977년에 서명해놓고 30년이 넘도록 비준하지 않았고, 아동권리협약은 거의 모든 정부가 비준해 193개국이 당사국인 국제조약인데 미국은 비준하지 않았다.

주요인권조약을 비준하지 않을뿐더러 인권의 기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결의안 등에 반대표를 던지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가 ‘발전권 선언’이다. 개별적인 권리목록의 나열이 아니라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만들자는 취지의 이 선언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것이 미국이었다. 반대표를 던질 뿐 아니라 약소국과 따로 쌍무협정을 맺어 이미 만들어진 다자간 조약에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마지못해 비준한 몇 개 안되는 인권조약에 대해서는 조건을 잔뜩 단다. 그것을 ‘유보’라고 하는데 구속받고 싶지 않은 조항에 대해서는 자국에 구속력이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때 그 기초위원회의 위원장이 미국의 전 영부인인 엘리노 루즈벨트였고, 그 이후 여러 국제인권조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목소리가 높았던 게 미국 대표였다. 국제인권조약을 만들고 교육하는데 열심인 것도 미국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들이다. 하물며 미국 정부는 인권을 국제정치에 이용하며 인권을 이유로 전쟁까지 불사해왔다. 인권을 명분으로 국제정치에 개입하려면 국제인권법을 활용하는 게 당연할 텐데, 정작 미국 자신은 국제인권법의 당사국이 아니다.

십여 년 전 뉴욕 컬럼비아대 인권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세계 곳곳에서 온 15명의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5개월 여 국제인권법을 공부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의 세미나에는 우리가 읽고 공부해온 국제인권법 책의 저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같이 토론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나온 질문은 ‘왜 당신들 정부는 국제인권조약을 비준하지 않는가?’, ‘우리한테는 그렇게 국제인권법을 강조하면서 정작 당신들 정부가 비준하지 않는 것은 왜 내버려 두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하나같은 대답이 ‘미국법과 상충되는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 전통’ 때문이며 ‘미국의 시민권 기준이 월등하기 때문에 (국제인권법보다) 더 높은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 했다.

그런 대답에 우리 참가자들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라고 씁쓸해하곤 했다. 가령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이유는 협약이 18세 미만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사형을 금지하고 있는데,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청소년에 대한 사형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법을 우선시 하는 건 맞는데 과연 그게 더 월등한 기준인가란 의문은 계속됐다. 컬럼비아대 프로그램에 따라 뉴욕과 워싱턴디씨에 있는 40여개의 인권관련 연구소와 단체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특별히 ABA(미국변호사협회) 방문을 요청했다. 국제인권조약의 비준을 반대하는 의견을 내온 대표적인 전문가단체였기 때문에 그 이유를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ABA 공보담당 변호사의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법 우선주의의 전통은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것이며 미국법이 다른 기준보다 월등하다는 것이었다.

좀 더 상세한 이유를 알고 싶었던 나는 도서관을 뒤져봤다. 그때 찾아 읽은 책이 오늘 소개하는 <인권조약과 상원, 반대의 역사>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유지돼온 국제인권법 ‘반대’의 역사가 기록돼있었다. 최초의 반대는 ‘제노사이드 협약’에서 시작된다. 제노사이드 협약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바로 전날 채택된, 2차 대전 이후 최초의 인권조약이다. 제노사이드란 국민‧인종‧민족‧종교적 집단을 파괴할 의도로 집단살해하거나 중대한 위해를 가하는 등의 범죄를 말한다. 2차 대전에서 엄청난 반인도적 행위를 목격했기에 다시는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취지의 인권조약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인종을 이유로 한 학살과 분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횡행하던 인종 분리를 해체하는데 이용될까봐 두려워한 것이었다. 비준 반대자들은 인종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게 전통적인 미국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킨다는 공포, 미국법이 아닌 외부의 법으로 그런 강제를 받게 된다는 공포, 각 주의 자율성(특히 남부)이 침해받게 된다는 공포를 자극했다. 더 근본적인 공포는 당대 미국사회를 지배하던 내외부적인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공포였고 국제인권조약의 반대자들은 공산주의에 물든 세계정부(유엔을 말함) 운운하며 그런 공포를 대거 동원했다.

제노사이드 협약에 대한 논쟁에서 만들어진 구도는 모든 국제인권조약에 대한 반대로 이어진다. 유엔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든 이후 선언을 국제조약으로 만들려고 박차를 가한다. 여기서 미국은 엄청난 활약(?)을 한다. 무엇을 위한 활약이었냐 하면 전통적인 미국의 인권관에 따른 시민‧정치적 권리만을 인권으로 인정하게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조약을 두 개로 찢어놓기 위한 활약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한 개이니 그것을 국제조약으로 만들 때도 한 개여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한 미국 등의 완강한 반대로 인해 두 개로 갈라서 만들게 됐다. 또 시민‧정치적 권리는 당장 실현해야 할 의무를 가진 강한 권리로, 경제‧사회적 권리는 점진적으로 노력할 정도의 약한 권리로 만드는 것이 미국의 전략이었고 미국은 성공했다.

양대 규약(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아주 성공적이었고 전통적인 개인의 권리에 대한 미국의 견해를 보호하는 조항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인종적 혐오를 고취하거나 전쟁에 대한 선전을 금지하는 조항이, 미국이 원치 않는데 들어갔다는 정도였다. 원하는 바를 이뤘음에도 미국은 두 개로 분리돼 만들어진 양대 인권규약 중에서 ‘사회권 규약’(1966년 채택)은 여태 비준하지 않고 있다. 자기 뜻에 맞는 ‘시민‧정치적 권리규약’(1966년 채택)을 비준한 것도 한참을 미적거린 후(미국 비준 1992년)였다.

2011년 현재에도 미국의 주요 인권조약 비준기록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걱정이 된다. 통상법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강조하면서 비준하고 당사국이 된 국제인권조약의 실현에는 별 관심 없는 정부와, 자국법 우선주의를 끔찍하게 강조하면서 국제인권조약에 가입조차 하지 않는 정부가 만나 맺은 협정이 인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279 호  [기사입력] 2011년 12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1 호  [기사입력]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시월도 중순이 지났다. 바람이 매서워졌다. 이맘때면 라디오 음악 채널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노래가 있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잊혀진 계절>이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란 가사가 마음을 덥혀 준다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 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는 야릇한 추억과 슬픔을 부채질한다. 저마다 시월에 관한 사연을 터뜨릴만한 애틋한 계절…, 같이 기억하고 나누어야 할 사연 또한 적지 않다.

주말마다 일하러 가는 식당의 동료 한 사람은 나를 볼 때마다 “그 아줌마 아직도 못 내려왔어?”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나는 한숨으로 답할 뿐이다. 그리곤 생각한다. ‘벌써 일주일이 또 지났구나.’ 묻는 이가 의도한 바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안’ 내려온 것과 ‘못’ 내려온 것의 차이는 크다. 김진숙 씨는 ‘안’ 내려온 것이 아니라 ‘못’ 내려오고 있는 것이 맞고, 그것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그 질문은 한 사람이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그리도 오래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같은 사람으로서의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다.

이번주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더 무거웠을 것 같다. 8년 전 동료 김주익 씨가 그 크레인에서 목을 맨 날이 이번주 월요일이었다. 2003년 10월 17일 아침 9시경 129일째 홀로 고공농성 중이던 한진중공업노조 김주익 위원장이 목을 맨 채 발견됐다. 한진중공업은 2002년 3월부터 인력체질개선이라며 전체 노동자 가운데 25%인 650여 명을 강제사직시켰고 그때부터 시작된 임단협 투쟁이 해를 넘겨 계속됐다. 2003년 6월 노동부 중재로 임금교섭과 해고자 복직, 손배‧가압류의 원만한 처리 등이 잠정 합의됐지만 사측의 불이행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에 김 위원장은 홀로 크레인 위로 올라가 항의 농성을 시작했던 것이다.

한진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사측은 파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노조에게 150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고, 노동자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보내 미복귀 조합원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손해배상을 묻겠다고 했다. 이미 앞서 수차례에 걸쳐 손배소송이 제기됐던 터라 노조는 조합비 전액을, 조합원들은 임금의 절반을 가압류 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김 위원장 등 노조간부들은 살고 있는 집까지 가압류 당한 상태였다. 손배‧가압류를 통해 사측은 이미 김 위원장의 목에 올가미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김주익 씨의 사망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는 9월 9일자로 되어있었다. 한 달이 넘도록 유서를 품은 한 사람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 자기 소리를 듣고 달려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을 것이다. 같은 시월에 떠난 이는 또 있다. 23일에는 대구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이 분신했고, 26일에는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이용석 광주전남본부장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고 외치면서 비정규노동자 대회에서 분신했다. 두 분 다 병상에서 사투를 벌이다 운명했다. 이해남 씨는 어렵게 노조를 결성했다는 이유로 구속과 해고와 수배에 쫓겨야 했고 사측의 노조파괴공작에 노조원들은 손배와 가압류에 시달려야 했다. 이용석 씨가 고발한 비정규직 차별은 동료들의 증언에서 터져 나왔다. ‘정규직의 60%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다’, ‘정규직은 다 받는 식대나 출퇴근 교통비도 받지 못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같은 업무를 하는데도 부서 회의 때 부르지 않고 손님 오면 커피를 타는 것에서 사무실 걸레질까지 비정규직의 몫’, ‘정규직은 최고 90일까지 받을 수 있는 병가가 비정규직에게는 해당되지 않아 아파서 병원에 가려면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한다’…. 끝없는 차별의 사슬이었다.

그렇게 시월에 떠난 그들이 세상에 맞설 때는 사람들이 세상을 가리켜 ‘20 대 80’의 세상이라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금융가를 점령하고 있는 시위대들은 1% 대 99%의 싸움을 말하고 있다. 20 대 80이 1 대 99로 변한 것은 돈과 권력이 어디로 쏠렸으며 인간존엄성이 얼마나 황폐해졌는가를 한마디로 증언해준다. 저마다 다양성은 있다 할지라도 99인 사람들이 오늘날 외치는 것은 ‘함께 살자’가 아닐까? 함께 살지 않으면 그건 1인 저들이 100을 전부 가지게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건 끝이란 마지막 경고가 아닐까 한다. 김진숙 씨의 크레인은 함께 살아야 할 삶의 가치를 먼저 차지했고 점령했고 수많은 삶을 거기로 불러 모았다. 그에 화답하는 것은 김진숙 씨를 ‘못’ 내려오게 하는 장벽을 철수시키는 것이고 그게 ‘함께 살고픈’ 사람들이 점령해야 할 첫 번째 고지라는 걸 시월에 떠난 이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한다.

시월에 떠난 사람들의 유서

고 김주익 님의 유서

(…)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당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당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500억 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 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80여만 원.
근속연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 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한단 말인가.
이번 투쟁에서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차피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 한사람이 죽어서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그동안 부족한 나를 믿고 함께해 준 모든 동지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 것, 40년의 인생이었지만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가는 것뿐, 결코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 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휠리스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조차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

고 이용석 님의 유서

(…)
32년 평생(일생)동안 우리 공부방 어린 학생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그들이 내 삶의 스승이자 등대였습니다. 내 어두운 미래와 긴 터널 속에서 나를 빛으로 깨우게 한 나의 동반자였습니다.
(…)
동지여러분!
우리가 모인 이 자체가 노동자로서 승리입니다.
직원을 탈피한 진정한 노동자로서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자리 함께 하지 못한 동지들의 몫까지 우리가 싸워야 합니다. 노예문서 같은 비정규직 관리세칙을 파기하고, 고용안정을 외치는 우리의 요구는 당연한 것이며 마땅히 쟁취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나만, 우리만 함께 한다면 반드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이 모인 자리를 자축하며 즐겁게 투쟁합시다.
동지 여러분!
우린 정말 순수하고 자주적으로 일어섰습니다.
임금투쟁은 매년마다 할 수 있지만 기본 없는 노동조합은 결국 쉽게 어용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선 이 자리 이 시간들의 의미를 잃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짐을 챙겨 떠날 때 그 날 어머님이 시골에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도 차마 얼굴을 뵙지 못한 게 미안합니다.
(…)
동지여러분!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넷이 되듯,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00이 되지 않더라도 정당한 길을 간다면 그 뜻을 이룰 것입니다.
오늘 다 함께 하지 못함이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기약이라 생각하십시오.
오늘 동지들이 모여 있음이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린 정당하고 새로운 길을 찾았음이 꼭 승리하였습니다.

고 이해남 님의 유서

노동자가 가진 것 없고 배운 것도 없어 몸 하나에 인생을 의지하고 살면서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도 인간답게 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투쟁했고 투쟁한 대가로 구속도 되었고 해고도 되었다. 노동자가 법에서도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수배되고, 해고되는 정말로 웃기는 나라에서 더 이상은 살아갈 희망을 갖지 못할 것 같다.
(…)
마지막 바램이 있다면, 내 한 몸 희생으로 노동탄압, 구속, 수배, 해고, 가압류라는 것들은 정말 없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
사랑하는 가족에게
(…)
여보! 나중에 인호, 경호가 크면 이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지금은 아직 어리니까 이 못난 아빠를 야속하게 생각하겠지. 힘들고 어렵더라도 두 아들이 있지 않소? 경호는 듬직하고 의젓해서 믿을 만하고, 인호는 개구쟁이지만 손재주도 많고 영특해서 나중에 잘 될 것 같고. 여보! 나 없더라도 우리 조합원들이 잘 챙겨 줄 거야. 1주일에 한 번쯤은 애들 목욕 부탁도 하고…
인호야! 경호야! 정말 미안해… 못난 아빠 용서해 주렴. 그리고 모레가 인호 생일인데, 같이 못해 미안하다. 인호야.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너희들 자라는 모습 지켜볼게. 안녕.
(…)
대통령에게
(…)
대한민국 헌법 1조에 이렇게 되어 있더군요.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다” 정말로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 돈 있고 빽 있는 놈들은 수천억을 해 쳐 먹고도 검찰에 출두해서 며칠 콩밥 먹고 나오면 그만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 농민들, 빈민들은 생존권 사수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몇 년씩 구속되고, 수배되고, 가정까지 파탄되는 지금의 이 나라 현실이 아닙니까?
(…)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야 이 나라의 노동정책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제가 마지막 희생자가 돼야 합니다. 노동자들과 대화는 외면한 채 오로지 노동자 죽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악질 기업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정부 차원의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것만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이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인권오름 제 271 호  [기사입력]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67 호  [기사입력] 2011년 09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나는 시사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늘 보고 듣는 것이 인권소식이고 그건 대개 우울한 뉴스이기 때문에 굳이 어두운 구석을 파헤치는 시사물까지 챙겨보는 것이 정신건강상 별로여서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피디수첩의 본방을 일부러 사수했다. 피디수첩은 미국산 쇠고기에 관한 보도로 시민들에게 당연히 알려야 할 것을 알렸다. 언론의 제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3년여 재판과 온갖 괴롭힘에 시달렸다. 대법원에서 최종무죄판결을 받아서 그간의 고난에 대한 작은 위로나마 될까 했다. 그런데 정작 해당 언론사에서는 수치스런 사과보도를 한 것도 모자라 징계까지 한다고 하니 본방사수로라도 그 언론인들을 응원하고 싶어서였다.

피디수첩 사건을 보면서 영화 하나가 떠올랐다. 1996년 제1회 인권영화제 때 내가 자막을 넣었던 <진실을 말하고 튀어라>란 작품이다. 유난히 사연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자막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자원봉사자가 해준 번역문이 영화 전체의 1/4도 되지 못했다. 중간 중간 듬성듬성 번역한 상태라 자막 작업이 불가능했다. 영화 상영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영어 대본도 없었다. 게다가 110분이 넘는 긴 작품이었다. 정말 큰일이 난 것이다. 재미 동포 두 명을 긴급수배했다. 그 둘이 영화를 보며 영어를 받아 적고, 나는 그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바로 옆에서 자막기사가 자막을 넣는 동시작업을 밤새 했다. 아침 첫 상영 시간에 맞춰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뛰었다. 거의 정각에 도착했다. 자칫하면 상영을 못했을 것이라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기억이다.

자막을 넣을 때는 왜 이리 길고, 말도 많고, 자료화면도 많은 것인지, 좋아하는 여배우 수잔새런든의 속사포 같은 내레이션까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부담을 덜고 작품을 찬찬히 보게 되니 그렇지가 않았다. 그 작품은 104세라는 긴 생애동안 80여년을 언론인으로 산 조지 셀더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다. 그를 빛나게 한 것은 힌덴부르크 나치최고사령관, 레닌, 무솔리니 등을 인터뷰했다는 경력이나 수많은 언론상을 수상했다는 등의 업적 때문이 아니다. 그의 생은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을 추구한 평생에 걸친 투쟁으로 요약된다. 대상이 정부 또는 군부와 정보기관이 됐든, 대기업 또는 교회가 됐든 간에 비판에 성역을 두지 않고 펜을 휘둘렀다. 자본의 심각한 언론지배에 저항하고자 그는 독립 언론인의 삶을 추구한다. ‘자유언론을 바라는 수백만을 위하여’란 구호가 새겨진 주간지를 창간하기도 했고 많은 언론 비평서를 썼다. 영화에는 당시 98세인 셀더스가 출연하는데, 고령에도 타자기를 힘차게 두드리며 언론비평을 가하는 모습 그 자체가 비판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진실을 말하고 튀어라>란 작품에 대한 인권비평도 내가 썼는데 검열에 관한 부분을 옮겨본다.

타자기 앞에서 자기의 입을 틀어막고 글을 쓰는 언론인을 그린 삽화가 있다. 그림의 제목은 “자체 검열의 7가지 원칙”이며, 그 원칙이란 1) 검열은 국가 안보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2) 나는 우리의 지도자들을 신뢰한다. 3) 나는 고위층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4) 나는 이 직업이 필요하다. 5) 나는 승진이 필요하다. 6) 나는 감옥에 가지 않아야 한다. 7) 어쨌든 반대편은 나쁘다.

이런 검열원칙이 고전적인 정치권력의 압력에서 나온 거라면 셀더스는 그것과 더불어 자본의 언론지배를 더 중요하게 본다. 자본의 언론지배에 대한 경각심을 그가 했던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다.

-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무엇입니까?
셀더스: 여론이죠.
- 여론을 만드는 건 뭡니까?
셀더스: 주요한 힘은 언론이죠.
- 당신은 언론을 신뢰합니까?
셀더스: 야구경기점수는 이따금 있는 오타를 제외하곤 늘 정확하죠. 주식시장시세표도 일정 한계 내에서 정확합니다. 하지만 뉴스는 말이죠. 당신과 당신의 일상생활, 당신의 직업, 당신과 타인들과의 관계,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한 당신의 생각, 그리고 요즘 더 중요하게는 당신이 전쟁에 나가느냐 위대한 이상을 위해 생명을 무릅쓰느냐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뉴스로 말하자면, 거대 신문과 거대 잡지사의 98%(아니 99.5%)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 왜 언론을 신뢰할 수 없죠?
셀더스: 왜냐하면 언론이 거대 사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대 도시의 신문과 잡지들은 상업화되었거나 거대 기업이 되었고 소유주나 주주들의 이익 말고는 다른 어떤 동기로도 운영되지 않습니다. 거대 언론은 광고 없이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광고는 대기업으로부터의 돈을 의미합니다.

셀더스는 1914년에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20세기를 온전히 언론의 자유에 바쳤던 이 언론인이 지금의 한국 언론 상황, 피디수첩 사건을 보면 무슨 말을 뱉을지 상상이 간다. 1938년에 그가 쓴 책 <언론의 제국>에는 ‘자유 언론에 대한 열 가지 시험’이 들어있다. 지금의 언론은 이 시험지에 대해 무슨 답변을 써낼 것인가?

98% 아니 99.5%의 뉴스를 믿을 수 없다는 셀더스의 말처럼 나는 대개의 언론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믿을 수 있는 0.5% 내지 2%의 언론에 희망을 건다. 피디수첩은 그런 언론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인권활동을 하는 동안 피디수첩과의 인연이 적지 않다. 피디수첩은 전과 7범의 출소자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감옥실태를 고발하게 했고 법무부장관과 대담하게 해줬다. 인권을 유린하는 폐쇄적인 사회복지 시설을 인권단체가 치러 갈 때 카메라를 들고 호위하듯이 동행해줬다. 자신들이 받은 언론상 상금을 전액 인권단체에 후원했다. 인권단체인 우리조차 대중의 공격적인 힐난이 두려워 꺼려하는 문제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했다. 그런 언론이 거짓된 사과방송으로 모욕 받고 말도 안 되는 징계로 유린되는 것을 가만 두고 보는 것은 우리의 인권을 목 조르는 일이다. 다시 한 번 예전에 <진실을 말하고 튀어라>에 썼던 인권비평의 한 구절을 옮겨본다.

인권의 증진은 언론이 능동적으로 개입할 때 가능하며, 언론의 효과적인 작용은 인권 존중에 달려있다. 특히, 국경에 상관없이 어떤 매체를 통해서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얻고 전달할 수 있는 자유(세계인권선언 19조)의 존중에 언론의 생명이 달려있다. 그래서 이상적으로 우리는 언론이 자유롭고 비판적이며 건설적이기를 기대한다. 외부 압력에 의한 보도 통제에서 자유롭고 공공 당국만이 아니라 사적권력이 집중된 다국적 기업 등을 비판하고, 보다 나은 실천을 위한 제안과 아이디어를 위한 지면을 만들어내는 건설적인 언론을 말이다. 그래서 검열의 문제는 당사자인 언론에게뿐 아니라 언론이 직시해야 할 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일 수밖에 없다.

자유 언론에 대한 열 가지 시험(조지 셀더스, 1938년)

1) 정치 정당들에게 동등한 지면을 할당하라.
2) 소수 정당들에게 일정한 지면을 할당하라. 적어도 그들의 영향력에 비례하는 지면을 주라. (이 두 가지 시험은 독립적인 척 하는 대다수 언론들을 도마에 올릴 것이다.)
3) 연방통상위원회(FTC) 보고서를 보도하라. (이 보고서들은 충분치는 않지만 식량, 음료, 옷, 담배, 우유 등의 최대 생산업자들 다수가 사기 친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4) 담배와 자동차, 즉 최대의 광고주들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
5) 소비자들과 공정한 거래를 하라. (요즘 자유주의와 좌파의 주간지들만이 발행하고 있는 소비자 상품에 대한 보고서를 똑같이 보도하라.)
6) 조직화된 압력을 거부하라. (미국재향군인회, 가톨릭교회조직들, 기업과 광고조직들, 그밖에 또 저널리즘에 겁먹은 소들과 코끼리들에게 알려라. 더 이상 뉴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말이다. 모든 발행자들이 한 목소리로 이것에 합의하면 어떤 손실도 없을 것이다.)
7) 노동 뉴스를 전하라. 노동과 공정거래를 하라.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 분야에서 언론이 땅에 떨어질 만큼 악화됐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8) 허스트(역자 주: 당대 신문왕이라 불리던 미디어재벌)를 쫓아버려라. (AP 통신사는 뉴스를 훔쳤다고 허스트를 고발했고 재판에서 이겼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미국신문발행인협회도 그러지 못했다. 허스트를 배후에 두고 있는 한 어떤 언론 조직도 윤리적 주장을 할 수가 없다.)
9) 신문팔이소년들에게 몇 푼을 아낄 수 있다는 이유로 아동 노동을 옹호하는 일을 멈춰라.
10) 논쟁의 양측을 다 보도하라. (뉴욕 데일리 뉴스는 루즈벨트 대 랜든 선거전에서 “대통령 선거전”과 노동에 관한 “경제 전쟁” 둘 다를 보도했다. 그 보도는 그 신문에 자유를 줬다. 하지만 자유를 취하는 신문은 거의 없다. 양측 모두를 보도하길 거부한다면 어떤 신문도 자유를 주장할 수 없다.)

* 조지 셀더스의 글을 읽은 언론인, 편집자, 언론학과 교수들이 다섯 개의 목록을 덧붙여 제시했다고 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공익 대신에 공공의 복지를 옹호하라.
2. 급진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등에 대해 빨갱이사냥 없이 사실을 보도하라.
3. 미국 내의 협력적인 운동을 발굴하라.
4. 소비자 조합의 광고를 운영하라.
5. 편집 정책에 동의하는 기고만 싣는 것을 멈춰라.

인권오름 제 267 호  [기사입력] 2011년 09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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