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35 호  [기사입력] 2011년 01월 19일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2009년 1월 20일, 서울 한복판에서 6명의 생명이 불길에 쓰러졌다. 잘못된 재개발을 바로잡아달라고 외치던 철거민과 그를 진압하던 경찰이었다. 뉴스를 듣고 달려가 본 현장은 박살난 유리가루와 매캐한 그을음으로 난장판이었다. 그곳은 눈에 익은 골목이었다. 10여 년 전 사무실이 있던 곳 근처 시장골목이었던지라, 찬거리며 군것질 거리를 사러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사는 사람, 살고자 하는 사람을 함부로 내쫓는 법은 없다는 것이 주거권이라는 인권의 제일 원칙이다. 그 제일 원칙이 무너진 곳에서 사람은 살아갈 도리가 없다.

집 잃고 가게 잃은 사람들은 영혼이 쉴 집도 얻기 힘들었다. 장례는 355일만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그래서 올 1월은 용산참사 2주기지만 장례를 치룬지는 1년이 되는 이상한 산수가 적용되는 때이다.

용산참사가 있기 몇 달 전(2008년 8월), 지구 저쪽 편 남아공에서 먼저 떠난 영혼이 있었다. 아이린 그루트붐(Irene Grootboom), 그녀 역시 집 없는 이였다. 모든 부고기사가 마음 저미는 것이겠지만, 그녀의 부고기사에는 “집 없이 무일푼으로 죽다”란 제목이 붙어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무일푼이었을지 모르나, ‘그루트붐 판례’란 큰 재산을 전 세계 이웃들에게 남겼다. 그루트붐 판례란, 사람은 헌법상 보장된 주거권을 가지며, 국가가 취약 계층의 주거권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헌법상 국가의 의무 위반이라는 남아공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다. 이 판결을 이끌어낸 싸움에 앞장선 이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 판례는 강제퇴거와 철거가 벌어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인용되고 있고, 이 사건에 대한 연구물은 경제사회적 인권의 핵심주제를 차지하고 있다. 주거권의 전설, 주거권의 영웅이라는 호칭이 이런 연구물들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

남아공은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하에서 잔인한 철거를 자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를 물리친 후, 남아공에선 “모든 사람에게 주거를”이란 강령을 내걸고 주거권을 새겨 넣은 헌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그루트붐이었다. 그루트붐을 비롯한 4천명 명의 주민들은 공설운동장 윌러스덴의 끔찍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침수된 땅이었고, 수도도 하수구도 부족했고 쓰레기 수거도 거부됐다. 전체가구의 5%만이 전기를 공급받았다. 주민 대부분은 아주 가난했고 1/4은 전혀 수입이 없었다. 이들은 비용이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단지에 입주하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7년의 기다림에도 입주하지 못했다. 결국 390여명의 어른과 5백여 아동이 근처의 빈 사유지로 옮겨가 달동네를 이루고 살게 됐다. 그들은 이 마을을 뉴 러스트라 불렀는데, 그들 말로 “새로운 휴식처”란 뜻이었다. 이 마을로 옮긴지 3개월 후 땅 소유주는 퇴거명령서를 받아냈다. 갈 곳이 없다며 떠나기를 거부한 주민들에게 1999년 5월 18일 강제퇴거가 시행됐다. 이때는 남아공에선 막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뉴 러스트의 집들은 불도저로 밀리고 불태워지고 다른 소지품들도 파괴됐다. 주민들은 이전에 살던 공설운동장 근처로 가려 했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시당국에 호소했으나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한 주민들은 집을 얻을 때까지 “기본적인 임시 주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권리를 청구하려 시도한 것은 남아공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등법원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시의회 등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적합한 주거를 제공할 수 있을 때까지 최소한의 거주를 구성할 수 있는 텐트와 화장실,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물을 즉각 제공할 것을 명령했다. 정부는 항소했고, 결국 이 사건은 헌법재판소에서 크게 다뤄지게 됐다.

2000년, 헌법재판소는 “거처가 없는 사람에게는 우리 사회의 토대적 가치인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같은 가치가 거부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원칙적으로 주거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판결이 신청자들에게 즉각 주거 시설을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채울 내용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루트붐 자신은 약속 이행을 기다리기에 지쳤다며 움막에서 죽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얻어낸 판결에 대해 자랑스러워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두려워하지요. 우리는 가난했고 살 곳을 원했기에, 나는 전진하는 걸 선택했어요.”라는 게 그루트붐 판결에 대한 그녀의 소회였다.

그루트붐 사건에 함께했던 인권단체들은 주거권의 현실화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그루트붐 사망 이후 그녀를 추모하는 연속 강좌를 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오늘 읽어볼 제프 버들렌더의 강연이다. 제프 버들렌더(Geoff Budlender)는 그루트붐 사건당시 주장요지(http://www.escr-net.org/caselaw/caselaw_show.htm?doc_id=401409)를 썼던 인권변호사이다.

1990년대 주거권이란 말이 한국 사회에서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을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었다. ‘세계주거권회의’에서 한국을 남아공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비인간적으로 철거를 하는 국가로 지목했다는 거였다.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의 남아공의 행태와 비교됐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비교도 그보다 덜 수치스럽지는 않다. 그루트붐 판결과 용산판결의 비교….

용산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은 감옥에 있다. 하나같이 중형선고다. 참사이후 함께 했던 인권활동가에게도 재판 결과 어떤 선고가 떨어질지 모른다. 선고재판이 몇 차례 연기되는 사이 또 구속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만 깊어가고 있다. 약자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법원의 역할을 기대하는 버들렌더의 연설문을 읽어보면서, 이정도 바람은 아닐지라도 살인진압의 지휘자는 한 번도 서지 않은 법정에서 철거민들만 중형을 때려 맞는 상황만이라도 벗어나길 바라는 게 지나친 바램일까.

그루트붐 추모 강연; 법원, 책임성과 참여 민주주의(제프 버들렌더, 2010년 10월)

아이린 그루트붐은 헌법재판소에 사회경제적 권리사건을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제기했습니다. 이 사건은 사법부를 시험했습니다. 우리는 사회경제적 권리를 의도적으로 포함한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완전한 민주주의는 투표권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그랬습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정의를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존엄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고 인간으로서의 잠재성을 성취할 수 있게끔 하는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에 대한 접근의 형태로 말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법원의 첫째 할 일은 헌법과 헌법이 품고 있는 권리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집이 파괴당한 사람,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는 사람은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필수품 중의 하나를 부인당한 것입니다. 법원은 이런 일에 대해 팔짱을 낀 채 다만 불운일 뿐이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의 결과이고 언젠가는 변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법원이 뭔가를 해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법원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판사들은 흔히 이런 일이 어렵다는 걸압니다. 그들은 지적합니다. 사람들의 필요와 권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일이 대규모로 발생할 때, 대답해야 할 문제들 중 하나는 “누가 먼저냐?”라고 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누구의 필요가 우선순위를 누려야만 하느냐? 그리고 또 “돈이 얼마나 드냐?”는 질문이 있습니다. 적절한 주거 또는 교육에 대한 권리가 문제라면, 어떤 정도 질의 주거 또는 교육이 헌법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공돼야만 하는가? 누군가에게 더 많이 주는 것이 다른 이에게 덜 주는 것을 의미한다면 어떻게 그걸 판단할 수 있는가?

그루트붐 사건은 이런 것들이 우선적인 질문이 아니란 걸 보여줬습니다. 첫째 질문은 헌법적 권리에 대한 침해가 있었느냐 입니다. 침해가 있었다면, 법원의 첫째 의무는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청구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정부의 실패를 드러내고, 우리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교육합니다.

법원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긴급 구제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은 정부의 실패가 헌법 위반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헌법은 정부의 주거 프로그램이 합당해야만 할 것을 요구합니다. 집 없는 누군가가 집 없는 채로 제대로 된 집이 제공될 때까지 20여년 기다려야만 한다면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법원이 이런 선언을 했어도 질문은 남아있습니다. “누가 먼저냐?” 그리고 “돈이 얼마나 드냐?” 이런 질문에 직면한 법원은 대개 두 가지의 답변을 내놓습니다.

첫째, 법원은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법정 앞에 선 유일한 사람들은 청구자와 정부입니다. 다른 집 없는 사람들에게도 요구는 있지만 그들은 법정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사실과 요구를 법원에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사건에서 자신들 앞에 제출된 정보에만 제한돼 있고 다른 정보원에는 의존할 수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주택정책을 만들 기술이 없습니다. 판사들은 실제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게 뭔지,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지를 모릅니다.

둘째 답변은 그런 질문에 대한 결정은 그 결정에 대해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판사에게 투표하지 않고, 잘못된 결정을 한 판사가 투표로 밀려나지도 않습니다. 흔히들 이런 결정은 민주적으로 책임질만한 이들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답변들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들 답변 중 어느 것도 완전한 답변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루트붐이 집을 받아야만 하는지, 트란스케이의 진흙탕 학교의 아이들이 제대로 된 학교건물을 받아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코 선거 과정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5년마다 두 번씩 투표하지만 그것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투표입니다. 여당을 지지해서 찬성표를 던지지만, 긴급 주거에 대한 정책이나 학교에 대한 자원할당 정책에 대해서는 반대표를 던진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한 결정들이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과정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민주적 과정이란 걸 과장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간단한 질문을 자문해봐야 합니다. 언제 무주택자를 위한 긴급 주거의 제공에 반대해서 투표해봤습니까? 어떤 정당이 트란스케이의 아이들이 진흙탕 학교에서 계속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한 적 있고, 어느 누가 그런 정책을 지지해서 투표했던가요?

이런 결정들에 대해 정부는 민주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는 주장은 따라서 허구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세한 것에 대해 투표하지 않으며 결코 그렇게 할 기회를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둘째로, 이런 결정들의 대부분은 선출된 공직자들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루트붐 사건의 경우, 정부는 긴급 주거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결코 한 적 없습니다. 단지 정책에 격차가 있었습니다. 주거 정책은 공무원들과 전문가들이 세우고, 아마도 시장이 승인합니다. 주거 정책은 결코 민주적으로 책임질만한 심의 기구에서 고려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학교 건물에 어떤 예산을 할당할지에 대한 결정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에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결정은 사무실에 앉아있는 공무원들과 고위 정치인들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그들은 자원을 할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닫힌 문 뒤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합니다. 그들은 대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공적으로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판사들은 공공연히 국민 앞에 앉아있습니다. 판사들은 주장에 귀 기울여야만 하고 결정에 대한 근거를 대야만 합니다. 이것은 강력한 형태의 책임성입니다. 저는 현직 판사로도 있어봤고 정부 공무원으로도 일 해봤습니다. 판사로서 느꼈던 책임성의 압박감이 정부 부처의 수장으로서 취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결정보다도 훨씬 더 컸다는 것을 저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판사들의 비책임성에 대한 주장은 귀담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판사들이 선출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을 하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직접적인 책임성을 가졌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원할당을 놓고 경쟁하는 주장들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판사의 능력에 대한 질문은 유효합니다. 저는 분명히 판사들이 운영하는 국가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권리의 침해를 발견했을 때 판사들은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판사들이 상세한 권리구제를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적절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열쇠는 책임성을 증진하는 것입니다. 권력 행사에 대한 책임성의 원칙이 우리 헌법의 근본입니다.

일단 권리 침해를 발견했다면 법원이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정부로 하여금 침해를 구제하기 위해 무엇을 해왔고, 장차 무엇을 할 것이며, 언제 그 일을 할 것인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도록 명령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대중적으로 정부의 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집니다. 정부의 프로그램이 부적절하면, 대중적인 토론과 캠페인, 조직화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런 일들이 정부로 하여금 더 잘하도록 질책합니다. 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의 공적인 대표들에게 책임성을 물을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집니다.

정부가 장차 뭘 할 것이라고 말하면, 그것에 반하는 정부 행위가 검증될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집니다. 정부가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실패를 정당화할 수 없다면, 법정에 재소환될 수 있거나 또는 여론의 법정에서 정부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해야만 할 겁니다. 또다시 참여와 민주주의는 깊어집니다.

법원이 할 수 있는 두 번째 일은 정부의 계획, 그 계획들의 이행여부에 관해서, 그것들이 헌법적 기준을 충족시키는 지를 법원이 판단할 수 있도록 법원에 보고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 구조적 금지명령(structural interdict)으로 일컬어집니다. 정부에게는 권리의 효력을 발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여지가 주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부가 하기로 결정한 것이 헌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가를 결정할 것을 법원에 묻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법원은 법원의 능력을 벗어난 문제를 결정할 것을 피하면서도, 되어진 일이 사실상 헌법의 기준을 충족시키는가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법원이 할 수 있는 세 번째 일은 “현장에서” 참여와 책임성을 증진시키는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헌법재판소는 사람들의 퇴거를 원하는 지자체는 퇴거 절차를 진행하기 전에 주민들과 “의미 있는 약속”을 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올리비아 로드(Olivia Road) 사건은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이 사건에서,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수백 명이 정말 끔찍한 사유 건물에 살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위험했죠. 화재위험이 아주 컸고 심각한 건강 위해요인이 있었습니다.

시당국은 사람들을 퇴거시키도록 법원에 청구했습니다. 주민들은 나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은 돈벌이라도 하려면 시내에 살아야만 하고 갈 곳이 아무데도 없으니, 굶어죽을 도시 외곽으로 내쳐지느니 차라리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살던 건물에 머물겠다고 했습니다.

법원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끔찍한 고통과 고난을 야기할 줄 알면서도 퇴거를 명해야 할까 아니면 그 역시도 큰 고통을 야기할 줄 알면서도 살던데 그냥 살도록 허용해야 했을까요?

법원은 둘 다 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양 당사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대하여 쌍방이 “의미 있는 약속”을 할 것을 우선 명령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시당국은 거주자들을 동등한 자격으로 다뤄야만 했습니다. 쌍방은 그들이 법원에 되돌아가야만 하고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쌍방은 자신들이 부당하게 행동한다면, 법원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명령을 할 것이란 위험을 알았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시당국과 무력한 거주자들 간에 놓인 예전의 불평등성이 갑자기 변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시 당국은 화재 위험과 건강 위해성을 제한할 수 있는 몇 가지 응급 보수를 건물에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일단 건물 보수를 한 후에, 시에서 거주자들이 이주할 수 있는 다른 건물을 찾았습니다. 거주자들은 이주에 합의했습니다. 거주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임대료를 지불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분명히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 해결됐습니다.

법원이 한 일은 민주적 책임성을 증진시킨 것이었습니다. 법원의 결정은 시 당국으로 하여금 시의 조처에 대해 거주자들에게 책임을 지게 만들었고 정당화하고 설명하게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법원에도 그것을 정당화하고 설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거주자들을 정부의 관대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정부와 협상할 위치에 있는 권리 소유자로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권리의 목적입니다. 권리는 권력관계를 바꾸고 다스립니다.

우리의 최종 헌법을 채택한 후 14년, 깊은 불평등과 빈곤이 사회정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건설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조롱해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적 참여, 권력의 책임성을 증진시킴으로써 우리의 최상의 목적을 성취하는데 법원이 도울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인권오름 제 235 호  [기사입력] 2011년 01월 19일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31 호  [기사입력] 2010년 12월 1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12월 10일은 전 세계적으로 기념하는 인권의 날이었다. 인권실현을 위해 전진해온 발걸음을 북돋아주고, 무시하고 외면한 부분을 돌이켜보는 날이다. 그런 일 중에 하나가 이런저런 이름의 인권상 시상이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상들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상이다.

상을 받는 사람의 활동 내용과 태도를 보며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인권문제들을 알게 되고, 외면했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되고, 수상자로 인해 드러나는 삶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게도 된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의혹'을 공론화시킨 활동으로 불교인권상을 수상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의 시상식판은 크게 엎어졌다. 제 역할을 못하는 현병철 체제하의 국가인권위는 상 줄 자격 없다는 이유로 수상자들의 수상거부가 잇따른 것이다.

예산날치기 정국에 아이들 밥그릇과 약통이 엎어지고, 4대강 파헤치기가 초고속 질주하게 됐다. 이속에서 국가인권위가 취해야 할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과 감시의 역할, 사회적 약자의 인권보장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그런 국가인권위가 독단과 아집으로 황폐화된 상태이니 인권탄압의 세찬 바람을 피해 뛰어든 건물이 냉동창고인 꼴이다.

이런 와중에 국가인권위가 주는 상을 거부한 사람들의 소신은 전혀 다른 성격의 감동을 줬다. 수상자들은 상을 받지 않았으나 이미 우리에게 상보다 더한 것을 주고받게 했다. 이들 인권상 수상 거부자들을 위하여 아래 세분을 가상으로 모시고, 축하의 말을 들어보았다.

저는 케이트 로키입니다. 작년 인권의 날에 호주국가인권위에서 인권상을 받았지요. 이번에 한국의 인권위원위에서 인권영상공모전 대상을 받기로 돼있었던 ‘장애IN 소리’의 선철규 씨,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저의 수상 소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당신들이 시상대에 섰다면 세상에 대해 외치고 싶었던 말을 저의 수상 소감으로나마 대신 해볼까 합니다.

“장애를 갖고 산다는 일은 여전히 아주 힘듭니다. 우리는 나라를 발전시켜왔고 앞으로 전진해왔다고 생각하고 장애 문제에 잘 대처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불평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잘 압니다. 제가 심각한 청각장애라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21살에 생을 거의 마칠 뻔 했거든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인생에서 아주 많은 장벽에 직면합니다. 재정적으로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말입니다.

잠시라도 귀가 안들린다고 상상해보세요. 아침에 시계소리도 들을 수 없고 전화에 응답할 수도 없고 텔레비전 소리도 안들리고 영화관에 갈 수도 없어요. 당신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청각장애는 아주 사람을 고립시키는 장애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까지 장애인의 삶을 낫게 만들려 분투해왔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혼자라는 느낌을 갖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저는 알거든요.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국가의 위대함은 그 국가가 가장 약한 구성원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측정돼야 한다”고요.

저는 우리가 위대함을 성취하길 원합니다. 저에게는 죽기 전에 성취하고 싶은 4가지 꿈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득에 상관없이 보청기와 인공귀를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이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TV를 볼 수 있고 영화관에 가고 DVD와 온라인 영화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세계의 생활 조건으로 야기되는 중이염 때문에 예방할 수 있음에도 청각을 상실하게 되는 원주민 아동의 수가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원합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서 가능한 것을 알게 되고, 굉장한 일을 성취하는데 도전하길 원합니다. … ”


저는 하비 밀크입니다. 저는 미국사회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당선된 정치인으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197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78년에 암살됐지요.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았는데요. 요즘 한국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을 혐오하고 공격하는 언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 일터에서의 성소수자 차별실태 분석’이란 논문을 써낸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성전환자와 관련한 논문으로 최우수상을 받게 된 이상윤씨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게다가 그런 큰상을 거부했다니 더 큰 박수가 나옵니다. 이상윤씨의 수상거부소감에서 “나는 희망의 이름으로 수상을 거부한다”는 구절, 정말 맘에 와 닿았습니다. 제가 했던 연설 중에 ‘희망의 연설’로 알려진 것으로 답할까 합니다.


“… 6개월 전에 아니타 브라이언트(동성애권리에 반대해 온갖 혐오적인 캠페인을 벌인 미국여가수)가 말하길 캘리포니아의 가뭄이 동성애자들 때문이라 했어요. 제가 당선된 다음날,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요. 제가 선서를 하던 날, 시청에 걸어 들어갔고 날씨가 아주 좋았어요. 그런데 제가 “맹세합니다”라 말하자마자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계속 비가 오고 있으니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비를 멈출 유일한 방법은 절 소환해서 해임하는 것이겠지요. 농담입니다.

… 제가 여기서 말하려는 바는 이겁니다. 여러분이 신문과 라디오에서 보고 듣는 것들은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저들이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는 바를 표현한 겁니다. … 모든 라디오와 TV 방송에서 모든 집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사람이 좋게든 나쁘게든 동성애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대화의 장벽을 열어젖히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사람들의 의견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편견을 부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1977년에 우리는 대화가 시작된 것을 봤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성애자가 선출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 다른 모든 집단처럼, 우리 동성애자들은 우리의 지도자에 의해,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에 의해, 눈에 보이는 사람들로서 판단돼야 합니다. 안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옥의 변방, 신화 속에 머물러있습니다. 동성애자에게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자매도 없고, 이성애자 친구도 없고, 중요한 자리에 전혀 있지 않은 것 같은 신화 말이죠. … 우리 중 일부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은 우리가 오해받고 있기 때문이고, 친구들이 그 분노와 좌절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저는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망 없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동성애자건, 노인이건, 흑인이건, 자신들에게 이질적인 언어로 자신들의 문제와 열망을 설명하려 애쓰는 라틴계 사람들이건간에.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이 건물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자랑스럽기 때문에 “나”라는 말을 씁니다. 제가 오늘밤 동성애자 자매들, 형제들, 친구들 앞에 선 것은 제가 여러분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입니다. … 찾아야 할 유일한 것은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희망을 주어야만 합니다. … 희망이 없이는 동성애자 뿐 아니라 흑인, 노인, 장애인, 우리들은 포기하게 될 겁니다. … 동성애자가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겁니다.


저는 마틴 루터 킹입니다. 저는 인종차별주의를 비롯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에 맞서 싸우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꿈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미국사회처럼 한국에서도 인종주의, 나이주의, 성차별주의 등이 기승을 부리겠지만 여러분이 거기에 굴하지 않을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언론은 있지만 여론은 없는 학교’라는 탁월한 글로 청소년인권문제를 다룬 김은총씨의 문장에는 힘이 넘치더군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김은총 씨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어렵게 <이주노동자 방송국>(MWTV)을 운영해온 분들에게서 참 언론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노벨상 수락연설(1964년)로 여러분을 응원할까 합니다.


“저는 인간이 단지 삶의 강물에서 유영하는 부유물일 뿐이고, 그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저는 무장하지 않은 진실과 무조건적인 사랑이 현실에서 최후의 힘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일시적으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악한 승리보다 강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나라들의 유혈이 낭자한 거리에 부상당한 채 쓰러지고 널브러져 있는 정의가, 이 치욕의 수렁에서 일어나 가장 고매한 자리로 올라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모든 민족들이 자신의 신체를 위하여 하루에 세 끼 식사를 할 수 있고, 자신의 정신을 위하여 교육과 문화를 누릴 수 있으며,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인간적 존엄과 평등, 그리고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허물어뜨린 것들을 타인중심적인 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 이 믿음은 우리에게 미래의 불확실성과 직면할 용기를 줍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자유의 도시를 향해 큰 보폭으로 내달리다 지칠 때, 우리의 발에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낮게 드리운 구름으로 인해 우리의 낮이 황량해질 때, 또 지난 날 그 어느 밤보다 우리의 밤이 더 어두워질 때, 오히려 진정한 문명이 태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창조적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위드북스에서 인용)

인권오름 제 231 호  [기사입력] 2010년 12월 1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27 호  [기사입력] 2010년 1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수능일이 코앞에 왔다. 일 년 중 누구에게는 가장 긴장되고 누구에게는 아주 서글프거나 막막하기만 한 날이 온 것이다. 대학입학시험같은 걸 생각도 못해본 사람한테는 시험이란 것 자체가 부러울 수 있을 게고, 시험 잘 치르기를 바라는 부모들 마음엔 벌써부터 엄청난 등록금 걱정이 들어앉아있을 게다. 인생의 마지막 시험이 아니라 하염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질 시험들의 시작일 뿐이란 생각에 수험생의 해방감은 아주 짧을 것 같다. 

문제는 시험만이 아니다. 거대한 채무자의 대열에 끼게 될 학생이 대다수일 것이라는 문제다. G20으로 떠들썩하던 기간 중 한 여대생이 학자금 700만원을 갚지 못해 고민하다 자살했다. 청년유니온(만 15세부터 39세까지 가입하는 세대 노동조합, 지난 3월 13일 창립식을 가졌지만 노동부가 조합 설립신고서를 계속 반려하고 있어 노동조합의 법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있다)의 구성원이 쓴 글에서 ‘매달 학자금 융자금을 갚을 때마다 죽은 그녀를 기억할 것’이라는 말에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수능을 치르는 날을 전후해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학생들은 공공서비스 삭감에 항의하고 대학교육의 전면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들 중에 한 구절을 옮겨본다.

* 무상교육이란 뭘 의미하는가?

이 사회에서 어떤 서비스도 문자 그대로 ‘무상’인 것은 없다. 문제는 누가 지불하느냐이다. 우리는 모든 학비의 폐지를 원한다. 그래서 고등 교육이 공공서비스로서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길 원한다. 이건 졸업 전이나 후에 학생이 상환하는 형태를 말하는 건 분명 아니다. 학비는 일반 세금에서 충당돼야만 하고 모든 학생에게는 살아갈만한 보조금이 제공돼야만 한다.

* 하지만 돈이 없다고!

어디에 돈이 없는가? 언론이 보도한 부자 목록에 따르면 2009년에서 2010년 사이 가장 부유한 1천명의 부는 엄청나게 증가했고, 대표적인 100개 기업 운영자들의 봉급은 작년에 55%나 올랐다. 가장 부유한 0.01%의 소득은 500% 치솟았는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10% 올랐을 뿐이다. 이런 통계들로 지면을 채우는 건 쉬운 일이다. 가난한 다수는 공공서비스의 삭감 때문에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너희들의 대안이 뭐냐고?

이런 위기를 정말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정부가 있다면, 해결방법은 ‘공정’이다. 부자들, 대기업, 은행들의 엄청난 부에 세금을 물려라. 소득세, 기업세는 계속 낮춰져왔다. 부자들의 이윤이 중요한지 아니면 그 나머지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와 일자리가 중요한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 그래, 돈이 있다 치자. 그렇다 해도 다른 공공 서비스를 제쳐두고 대학생들에게 그걸 쓸 이유가 뭐냐고?

대학 교육만이 아니라 중등교육, 초등교육도 중요하고 연금도 중요하고 의료보장도 중요하다. 어떤 한 분야의 공적서비스를 삭감하게 내버려두면 그건 멈출 수 없는 미끄럼틀을 허용하는 거다. 어떤 한 분야의 공적서비스 이용자들이나 그 부문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정부의 분리지배방식을 허용하게 되면 모두의 운동이 약화될 것이다. 필수적인 모든 공적서비스를 요구하며 싸우는 것이 우리의 대안이다.

*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 가냐고? 대학생을 지원하는 건 중산층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계급이 돈을 내는 걸 의미한다고?

많은 사람이 대학에 가면 안 되는가? 대학은 전통적으로 부잣집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 고등 교육의 확대는 좋은 일이었다.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정부 돈 안들이고 학비와 민영화로 대학교육을 하려는 것이었다. 왜 엘리트만이 대학교육의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가? 세상에 대해 배우고 정신을 확장하고 같은 일을 하는 타인들과 어울릴 권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 아닌가? 중산층의 자녀를 위해 노동계급이 돈을 낸다는 말은 틀렸다. 사실은 부자를 위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여긴다면 부자에게 세금을 매겨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부자들이 지불할 수 있도록 하는 걸 지지해라.


대학교육이 ‘공공 서비스’라는 말은 이 학생들만의 주장이 아니다. 유네스코가 1998년 채택한 “21세기를 위한 세계고등교육선언: 전망과 행동”에서는 ‘공공 서비스’로서 고등교육을 칭하며 그를 위한 재정의 확보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인 재정지원은 사회가 고등교육에 제공하는 지원을 의미하며, 따라서 고등교육의 발전을 보장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고 질과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교육적, 사회적 사명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려면 고등교육과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다”(제 14조 a항)

교육권이란 인권을 국제인권기준에서 말할 때, ‘필수요소’로 꼽는 것이 있다. 가용성(availability), 접근성(accessibility), 수용성(acceptability), 적합성(adaptability)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요소는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가 국제인권조약에서 말하는 교육권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내놓은 일반논평 13(1999년)에 담겨있다.

가용성은 교육기관이 충분히 이용될 수 있는 정도여야 함을 말한다. 접근성은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교육에 접근할 수 있음을 말한다. 접근성에는 여러 측면이 있는데, 특히 ‘경제적 접근성’은 ‘누구나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교육’을 강조한다. 초등교육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완전 무상을 강조하며, 중등 및 고등교육에 대해서도 점진적인 무상교육 도입을 지시한다. ‘수용성’은 모든 교육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수용성’은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기준에 맞는 교육을 보장하는 것이다. 즉 학생의 존엄성과 인권을 해치는 방식으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적합성’은 교육 내용과 과정이 다양한 여건에 놓여있는 학생들의 필요와 사회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일하면서 공부해야 하는 학생에게 적합하게 조정될 수 있는 교육환경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가로지르는 것은 한마디로 교육은 학생이 감당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등등 감당할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 요소의 적용을 고려함에 있어서 언제나 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할 것은 학생의 최상의 이익이다.

교육권을 위해 평생 헌신했으면서도 “교육권은 아직 인권이 못되었다”고 개탄한 카타리나 토마세브스키(유엔 최초의 교육권특별보고관, 2006년 타개)는 정부들이 입으로는 교육권을 외치면서 교육에 과도한 비용부담을 지우는 것을 “돈벌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수능시험문제만 낼 것이 아니라 그 시험 못지않은 호된 시험을 좀 치러봐야 하지 않는가? ‘자기 앞가림 하는 것은 네 책임이다, 책임은 각자 져라,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먹고 살라’고만 한다면 사회와 국가가 왜 있으며, 인간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회와 국가 속에서 살아야 하고 그 속에서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 700만원 때문에 죽어간 젊은 영혼 앞에서 그동안 외던 답 말고 달리 고심한 답안지라도 내밀어야 하지 않겠는가.

21세기를 위한 세계고등교육선언: 전망과 행동(World Declaration on Higher Education for the 21 Centry: Vision and Action, 1998 유네스코 세계고등교육회의에서 채택)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고등교육의 무한한 다양성과 고등교육을 위한 이전에 없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사회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중요성의 인식이 또한 증가하고 있고, 미래구축을 위해, 젊은이들이 신기술, 지식, 아이디어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고등교육은 ‘모든 유형의 연구, 훈련, 또한 국가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인정한 대학과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중등교육 이후의 연구를 위한 훈련’을 포함한다.



제 3조 공정한 접근
(나) 고등교육에 대한 공정한 접근은 모든 수준의 교육과의 연계성, 특히 중등교육과의 연계성을 강화함과 동시에, 필요할 경우 재정비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고등교육기관은 초기 아동교육과 초등교육으로부터 평생교육 체계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자체 내에서도 그러한 체계의 일부로서 작용하면서 북돋우는 기능을 해야 한다. … 고등교육은 아무런 차별 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라) 일부 특정집단 사람들, 원주민, 문화·언어상의 소수집단, 취약집단, 강점된 민족,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 물질적인 특별지원과 교육적 해결책을 통해 이들 집단들이 고등교육에 접근할 때 직면하는 난관들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제 14조 공공 서비스로서의 고등교육을 위한 재정의 확보
고등교육 기금을 확보하려면 공공 및 민간부문의 자원이 모두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가)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인 재정지원은 사회과 고등교육에 제공하는 지원을 의미하며, 따라서 고등교육의 발전을 보장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고 질과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원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교육적, 사회적 사명이 조화롭게 이뤄지려면 고등교육과 연구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나) 고등교육이 지속적인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점을 감안할 때,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수준의 교육을 사회 전체가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관과 가정, 그밖에 고등교육에 관계된 모든 사회적 주체들은 물론, 경제, 의회, 대중매체, 정부 조직 및 민간조직의 참가와 인식의 정도가 매우 중요하다.


이 선언서를 채택하면서, 만인에게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각자의 특성과 역량에 따라 고등교육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재확인한다.

인권오름 제 227 호  [기사입력] 2010년 11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류은숙

며칠 전부터 핸드폰 기계가 먹통이 됐다. 꼬박 6년을 쓴 기계다. 전화를 무지 싫어하는 나는 생활필수품이란 핸드폰을 장만하지 않고 버텼는데, 이를 보다 못한 아빠가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그것도 없이 어찌 사냐’면서 억지로 만들어준 물건이었다. 지인들에게 악명 높은 통화습관으로 알려진, ‘응, 알았어, 끊어’외엔 별말 안하고, 번호 노출 안하고 너무 안 써서인지 한 기계로 6년을 버텼다. 기계가 다된 김에 아예 핸드폰을 없앨 것인가, 남들처럼 최신 폰을 장만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주변 사람들은 6년이나 한 기계로 버텼다는 걸 신기하게 여긴다. 뭐 그게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런데 말이다. 조심조심 쓴 기계도 닳아버리는 6년여 세월동안 한 자리에서 같은 소리를 외쳐온 사람들이 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구로디지털 산업단지에 자리 잡고 디지털위성방송기술의 선두주자임을 자랑해온 기륭전자를 상대로 6년여 다윗의 싸움을 펼쳐온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2005년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분노해서 노조를 만들고 처우개선을 요구했다가 200여명이 해고됐다. 그때 비정규직 파견노동자들이 받던 임금은 그해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1850원이었다. 밥벌이도 밥벌이지만 인간대접을 받아봐야겠다고 싸움에 나선 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요 며칠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의 극한을 시험하는 행동을 할 때만 잠깐 주목받을 뿐, 사람들의 시야밖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94일 씩이나 단식을 하기도 했고 서울광장의 16미터 무대 조명탑, 구로역 광장의 25미터 감시카메라(CCTV) 철탑 등에 오르기도 했다. 굶는 일이라면 진저리가 쳐질 텐데 얼마 전 다시 세 번째 단식을 시작했다. 협상이 또 깨졌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회사와 그걸 방치하는 정부에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들이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굶고 밟히고 협박받고 손해배상 두들겨 맞으며 6년여 한 자리에서 외친 요구는 억울하게 해고됐으니 ‘일자리를 돌려 달라’는 것이고, 파견노동자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로 직접 고용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 회사 다니면 그 회사 직원인 것으로 아는 일반인의 상식을 존중해 달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물러서면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견노동과 무노조, 무권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강자는 언제나 이기고 챙기며, 약자는 언제나 지고 잃는다는 패배감을 벗어날 수 없기에 계속 가야한다고 말한다.

국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노동 기준이라는 게 있다. 시장에서 강자들의 횡포가 심해질수록 노동규범이 위협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결코 이것만은 건드려서는 안 되고, 이걸 지켜야만 다른 노동기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취지로 세계정상들이 합의한 ‘핵심’ 기준이다. 여기에 속하는 항목은 달랑 네 가지다. 이걸 또 압축하여 두 개만 추려 보면, 그중 하나가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가 고용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다. 세상의 노동인권기준을 압축하고 압축하여 남은 단 두 가지 핵심기준도 못 지킨다면 노동자의 다른 권리상태는 볼 것도 없이 빤한 것이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요구는 이 ‘핵심’에 해당한다.

많고 많은 노동자들이 이 핵심 노동기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1978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절규를 담은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이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소수의 남성들이 장악해서 기업주에 순응하는 어용노조에 맞서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만든 노조를 지키려 싸웠다. 이에 노조를 파괴하려는 사측은 깡패들을 동원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세례까지 퍼붓고 공장 밖으로 내쳤다. 여공이라 불리던 그녀들은 부당함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고 동일방직 투쟁은 서슬 퍼런 유신체제의 폭압에 맞선 대표적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 호소문을 읽다보면 기륭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일들이 30여 년 전 선배들이 겪었던 일들과 겹쳐진다. 용역깡패들이 성적인 폭언과 폭력을 가하고 경찰은 폭력을 방관하고 사회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아 저런다는 회사 측의 선전과 정부의 외면까지 꼭 닮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닮은 게 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이렇게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기륭노동자의 말이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는 동일방직 노동자의 선언과 만난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냉장고가 커지고, 티브이가 평평해져 화려해질수록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일회용 휴지보다 못한 처지로, 김치마저 먹지 못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는 지적은 “100억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는 고발을 이어간다. 진짜 닮은 것은 이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줄 수 있기 위해 싸운다.”며 “탄압 때문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륭 노동자들의 의지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는 동일방직 여공들의 다짐을 빼닮았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핸드폰이 존재의 근거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디지털 세상이다. 인간과 세상의 소통을 돕는다는 디지털 세상을 만드는 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들의 태반이 비정규직이란다. 무소통과 무권리위에서 소통의 기쁨과 권리를 말하는 것이 참 이상해 보인다. 핸드폰 없이 살아볼까 생각하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대신 이런 걸 이상하게 봐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올해는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과 함께 자기 몸을 불사른 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기륭여성노동자들에게는 새로운 장이 열리는 해가 됐으면 정말 좋겠다. 

인권을 강도당한 노동자들의 호소(1978년 동일방직 노조)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왔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겠다.”
이 울부짖음은 지난 2월 21일 인천 동일방직에서 노동조합을 파괴하려는 깡패들에게 당한 우리 근로자들이 똥물을 뱉으며 통곡하던 말입니다.

가죽장갑을 끼고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이 몇몇 깡패근로자들은 똥을 바께스로 들고 와 머리부터 뒤집어씌우고 손으로 찍어 투표하러 오는 저희들의 입속에 쑤셔 넣고 걸레에 묻혀 얼굴에 문대고 가슴에 집어넣었으며 똥으로 뒤범벅이 되어 눈도 못 뜨는 우리들 머리채를 나꾸어채 끌고 다녔으며 이빨로 입술을 물어뜯기도 했습니다. 이 기막힌 만행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자처하는 경찰들과 근로자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섬유노조 본조 그리고 회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공공연하게 자행된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저희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1972년에 어용노조를 우리의 손으로 선거를 통해 정상을 회복한 후 탄압, 감시, 징계 그리고 채찍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1976년 2월 대의원 선거 때부터 관의 노동조합 말살계획은 표면화되었으나 우리는 위협, 매수, 모략에도 굴하지 않고 이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30도가 넘는 땡볕아래서 물조차 마시지 못하며 밤낮없이 만 3일을 단식농성을 했고 경찰과 회사 측 깡패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에 우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저항을 했고 노조를 지키기 위해 수치심도 버렸으며 회사 밖에서 농성하던 우리의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72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50여명은 기절하고 1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고 한 동료는 난폭한 경찰의 만행에 쇼크로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6개월을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저희들은 인권을 위해 구둣발에 짓밟혔고 경찰차 바퀴 밑에 드러누웠으며 휘두르는 몽둥이에 쓰러졌습니다. 경찰은 회사와 결탁하여 지부장을 공금횡령으로 뒤집어씌우는 공작을 하다가 실패를 하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로 우리들을 취조하고 빨갱이 년들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21일 아침 투표장인 조합사무실은 몇몇 술 먹은 회사 측 남자조합원들이 몽둥이로 다 때려 부숴놨고 투표하러 온 우리들을 구타하고 탈의장에 벗어놓은 옷도 모두 똥을 부어 놓았으며 회사 측 지부장 입후부자 박복례는 깡패들에게 둘러싸여 저년에게 똥을 먹이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눈도 못 뜨고 귀와 입으로 온통 똥을 먹은 우리는 영하의 새벽공기를 잊고 땅을 치고 통곡을 하며 “아무리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는 똥을 먹을 수는 없다.”라고 가슴을 쥐어뜯었습니다. 치안유지를 위해 동원된 경찰들은 도와달라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야! 이 썅년들아 입 닥쳐 있다가 말릴 꺼야”하며 욕설만 퍼붓고 구경만 하였습니다. 이래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일까요?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100억불 수출의 도구로 사용된 저희들은 1,000불 소득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똥을 먹어야 하는 인권유린의 현장에서 신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설움이며 고통입니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민주주의도 배웠으며
적어도 우리의 지도자는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회사 측의 꼭두각시에게 우리 노동조합을 넘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싸워 승리할 것입니다.
정의는 쓰러지지 않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와 같이 고통당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권리를 포기하게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힘찬 격려와 협조를 바랍니다.

전국 섬유노조 동일방직 지부. 1978.3.

인권오름 제 223 호  [기사입력] 2010년 10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19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웰빙이다 올바른 식습관이다 유산소운동이다 해서 건강관련 기사가 넘쳐난다. 하지만 온종일 시간을 보내고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노동환경과 사회환경이 건강하지 못하면, 혼자서 아무리 좋은 것 찾아 먹고, 걷고 뛰고, 마음수련을 한들 그리 대단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넷에 뜨는 무수한 자극적인 기사제목들을 클릭하지만 부러 안보게 되는 뉴스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어느 공사장에서 인부가 떨어져 숨졌다, 작업 중 화재로 이주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사망했다는 등의 재해기사다. ‘또 어떤 집의 가장이, 어떤 집의 귀한 자식이 사고를 당했을까?’ 안 봐도 구구절절할 사연이기에 애써 외면하게 된다. 내 맘 아프고 상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번에도 외면했던 기사가 용광로에 떨어져 한 청년이 사망했다는 기사였다. 제목만 보고 “아휴...또”하고 외면했다. 그런 외면은 며칠가지 못해 덜컥 걸렸다. 죽은 청년을 애도하는 어떤 이의 시가 간곡하게 불렀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읽어보았겠지만, 혹시 몰라 한번 더 인용해본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이 시를 읽고난 후 외면했던 기사를 찾아 읽어보니, 이름도 없이 김 아무개씨인 29세 청년이 새벽 2시에 일하다 뜨거운 용광로에 빠져죽었다는 냉정한 단신기사였다. ‘왜’,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 어떤 책임을 누가 소홀히 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기사를 찾아 읽다보니 절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을 한국 사회에 가져다준 고 문송면이다. 1988년 사망 당시 15살이었다. 그의 추모비에는 송경동 시인의 시가 담겨있다.

1987년
열 넷 가난한 농꾼의 아들로
서울 공장에 팔려와
당신 몸에 심어진 것은
소년노동 철폐와 산재추방의 꿈이었다.
열다섯 당신은 죽지 않았다.
당신은 수은보다 더 오래
이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오늘도 평등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순박한 거처가 되고 있다.
우리의 출발이며
우리의 끝일 당신과 함께
우리는 오늘도 바라나니
해밝고 강인한 꿈들이여 부활하라. (송경동 문송면 20주기에 추모비에 쓴 시)


15살의 문송면이 왜 죽었고 책임자들은 어찌 처신했는지에 대한 얘기는 1988년 당시에 나온 대한변협 인권보고서를 옮겨본다.

“협성기공은 온도계 및 압력계를 만드는 회사로서 생산직 노동자들은 주로 지방출신 15, 16세의 야간부 학생들이다. 문송면군은 1987년 12월경부터 협상기공에서 신나를 사용하여 압력계 카바를 닦는 작업과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작업을 하였다. 작업환경은 공간이 너무 좁고 환기시설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았으며, 수은주입시 수은은 증기로 새어나오고 일부는 액체상태로 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 사업장은 노동부에서 작업환경을 개선하라는 행정명령까지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송면군은 1988년 1월 말부터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 여러 병원에서 검사를 하였으나 병명을 알 수 없었다. 3월 9일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검사를 실시한 결과 3월 24일 수은중독 및 유기용제 중독으로 진단되었다. 이에 가족들은 산재처리를 위해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산재요양신청서 중 회사서명란에 날인을 받기 위해 회사에 찾아갔다. 그러나 가족의 몇차례 방문과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에서 그랬다는 증명을 대라”, “법대로 할테면 해봐라”는 등의 말을 해대며 날인을 거부했다.
...노동부에서는 진정서만 접수시키고 산재요양신청서는 ... 반려시켰다. ...문송면군은 6월 29일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옮겼으나, 7월 2일 결국 사망했다. 가족들은 “노동부와 회사측이 송면이를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며 울분을 참지 못했다.”

1988년 문송면의 죽음에 억장이 무너진 사람들의 마음은 2010년 용광로 청년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1988년의 슬픔은 한국에서 산재추방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2010년의 슬픔은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이다. 애도 속에서 기억하고, 타인의 존재가 내속에 들어와 있기에 슬픔을 느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속에 인권실천의 출발점이 있을 테니 말이다. 노동자의 죽음 또는 심각한 부상과 질병, 기업의 발뺌, 정부의 무대응의 고리를 깨기 위해 기억과 애도는 꺼뜨리지 말아야 할 불씨일 것이다.

세계의 노동단체들이 보고하는 최신 정보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해마다 36만건의 치명적인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약 2백만건의 치명적인 직업병이 발생한다. 하루하루, 96만 여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다치고 직업병으로 평균 5,330명의 노동자가 매일 사망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는 ‘산재노동자를 기억하는 날’을 두고 있다. 기억과 애도의 촛불을 밝히고 현황과 대책을 점검하기 위함이다. 이런 선례를 따라 1996년부터 유엔에서도 산재노동자의 날(매년 4월 28일)을 기념하고 있다. 단지 기념일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걸 계기로 산재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건강을 해치는 노동자들을 기억하고, 산재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산업안전과 건강에 대한 변화와 진전을 일궈내자는 의미에서다.

‘산재노동자를 기억하는 날’에 대한 홍보물들을 찾아 읽어보았다. “현행 생산 체제가 조직되는 방식은 흔히 노동자들이 고도의 생산성에 대한 압력을 가한다. 그런데 보호는 약하고 직업안정성은 취약한 가운데서 이런 압력을 받기 때문에 생명과 안전을 임금 때문에 무릅써야 한다. 그래서 산재를 ‘안 보이는 문제’로부터 ‘보이는 문제’로 만드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고, 산재문제를 개인적 문제가 아닌 집단적 해결로 다뤄야 한다. 즉 노동조건에 의해 야기된 건강 문제로 논의해야지,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드는 문제를 단지 개인적인 문제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사람을 해치는 것은 모두를 해친다”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이런 홍보물들이 하나같이 인용하고 있는 것에 ‘서울’의 이름이 보였다. ‘서울’이 왜 여기에 등장할까 하여 찾아보니, 바로 오늘 읽어볼 ‘산언안전보건 서울선언’때문이었다. 이것은 2008년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사회보장협회(ISSA),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KOSHA)이 서울에서 개최한 세계산업안전보건대회에서 결의한 선언이다. 당시 언론들은 ‘안전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다고 치장했고, 안전보건에 관한 최초의 국제헌장이라고 서울선언을 홍보했다. 기업인단체 등 각종 경제단체 등이 이 선언을 홈페이지에 퍼나르고 있었다. 그 후 선언의 채택을 기념하기도 했고, 후속회의가 열려 서울선언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의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도 했다.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는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이라는 이 선언을 그냥 지킬 것 같지는 않기에, 산업안전보건 마저도 생산성의 이름으로 싸안아 버릴지 모르기에, 우리에겐 더 많은 애도와 기억과 실천 노력이 요구되는 것 같다.

산업안전보건 서울선언(Seoul Declaration on Safety and Health at Work, 2008)안전보건대표자회의

2008년 6월 29일 국제노동기구(ILO), 국제사회보장협회(ISSA), 한국산업안전공단(KOSHA)이 대한민국 서울에서 공동으로 개최한 제18회 세계산업안전보건대회를 계기로 고위 산업안전보건 전문가, 사업주 및 노동자 대표, 사회보장기구 대표, 정책 결정자 및 정부대표가 한자리에 모인 안전보건대표자 회의에서 전 세계 산업안전보건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전세계에서 직업과 관련된 재해와 질병으로 연간 230만여명이 사망하고,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세계 총 생산의 4%에 이르는 심각한 상황이다.

산업안전보건을 개선하면 작업조건, 생산성, 경제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는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권이며, 세계화는 반드시 노동자의 안전보건을 보장하기 위한 예방대책과 같이 진행된다.
...

산업안전보건 증진, 산업재해와 직업병 예방은 국제노동기구(ILO) 설립목적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계획(Decent Work Agenda)에서 가장 중요하다. 산업재해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노동자의 건강을 증진하는 것이 ISSA의 사명이며, 적극적 사회보장의 개념적 체제에서 가장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산업안전보건을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사회 각 주체의 책임이며, 모든 사회구성원은 산업안전보건이 국가 계획에 우선 반영되도록 하고, 안전보건 예방문화를 형성하고 유지함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한다.

2. 국가의 안전보건 예방문화는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모든 수준에서 존중하는 것이며, 정부, 사업주, 노동자는 명확한 권리,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확보하는데 적극 동참하며, 예방의 원칙을 최우선시하는 문화를 조성한다.

3. 국제노동기구(ILO) 산업안전보건협약(1981년) 제155호 제2절의 규정을 감안하여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등 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의 체계적인 접근방법으로 산업안전보건의 개선을 장려한다.

4. 정부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국제노동기구(ILO) 산업안전보건 증진체제에 관한 협약(2006년) 제 187호와 산업안전보건 관련 협약을 우선 비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해당 협약을 이행하여 국가의 산업안전보건 수행성과를 체계적으로 증진토록 한다.
* 국가 안전보건 예방문화를 조성하고 향상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 강력하고 효과적인 근로감독제도 등 적절한 안전보건 기준을 집행함으로써 노동자의 산업안전보건을 보장한다.

5. 사업주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높은 수준의 산업안전보건 기준은 기업의 우수한 사업실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경영활동에 재해예방을 통합하여 운영한다.
* 사업장 안전보건을 효과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구축한다.
* 노동자 및 노동자 대표에게 산업안전보건과 관련되는 모든 조치에 대하여 조언, 훈련, 정보를 제공하고, 노동자 및 노동자 대표가 이에 참여하도록 한다.

6.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안전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함에 있어, 안전보건과 관련된 사항에 대하여 조언을 받는다.
* 개인보호구 사용 등 안전보건 수칙과 절차를 준수한다.
* 안전보건교육을 이수하고 안전보건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에 참여한다.
* 사업장 안전보건에 관한 대책에 대하여 사업주와 협력한다.

인권오름 제 219 호  [기사입력] 2010년 09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15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람이 제 동료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설명이 필요 없는 책, <간디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귀한 얘기들이 아주 많지만, 이 글에서는 앞에 인용한 한 문장에 주목하려 한다.

이 문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발라순다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타밀 출신 계약 노동자였다. 그는 유럽인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자기 주인에게 이빨이 두 개 부러질 지경으로 몹시 얻어맞았다. 이에 발라순다람은 간디에게 법적인 도움을 구하게 됐고, 간디 자서전에 나오는 이 부분은 간디와 발라순다람이 만나는 장면에 관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을 만나는 인도인은 인도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거나 그게 아니면 영국식 옷을 입고 시중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발라순다람은 간디를 만날 때 유럽인 주인에게 하듯이 터번을 벗으려 했고, 이에 화들짝 놀란 간디는 그를 제지했다.

간디는 타밀 사람이 받는 굴욕을 같은 사람으로서 받는 굴욕으로 느꼈고, 즉각 그것을 중단시켰다. 변호사인 간디가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고 발라순다람이 간디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도 간디에게는 굴욕이었다. 이 두 번째 굴욕도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쓴 것이다. 동료 인간을 얕보고 낮추는 것을 요구하는 관행 위에서 누리는 고결함은 가짜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간디의 이런 행동과 깨달음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과 실천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존엄성의 실현을 위한 싸움을 가까운데서 목격하고 있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룬 머리는 지끈, 땀띠와 모기로 이곳저곳 근질거리는 몸은 불쾌 그 자체다. 제 몸 돌보기도 헉헉거리는 이런 때, 물도 없이 밥도 없이 혹은 전기도 없이, 정치와 돈과 언론에 철저히 무시당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몇 사례만 언급하려 해도 숨이 차다.

도시속의 섬이 돼버린 철거반대 농성지인 홍대 앞 ‘두리반’, 칼국수와 보쌈을 팔던 식당이다. 세입자를 보상대책도 없이 내쫓고 개발이익을 보려는 건설사에 맞서 2백일이 넘게 버티고 있다. 20여일 전에 전기마저 끊겼다. 강을 흐르게 놔두라고 이포보와 함안보 크레인 위에 올라간 환경운동가들, 숨을 태우며 4대강 사업에 맞서고 있다. 돌아온 비리재단에 학교를 내주라는 명을 받게 된 상지대의 학생과 교직원들, 주인더러 강도에게 집을 비워주라고 명하는 그런 법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고 있다.

나는 이들 싸움의 공통점을 ‘존엄성’의 실현이라 본다. ‘존엄성’은 인권과 늘 같이 다니는 말이지만, 참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헌법과 국제인권문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대한민국 헌법), “모든 사람은 내재된 존엄성을 가지며 그 존엄성을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남아공 헌법), “모든 인류 구성원의 내재된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함이…”(세계인권선언 전문) 등과 같이 존엄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존엄성’을 인권의 기초로 규정한 것은 과거와 다른 현대 인권의 으뜸가는 점이다. 과거에는 ‘존엄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썼다. 일단 어원으로 따져볼 때 오늘날 쓰는 ‘존엄성’이란 말을 사용한 예가 드물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 유대교 경전과 기독교 성서, 중세 철학 등에서 존엄성과 비슷한 말을 찾아보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고들 말한다. 또한 어쩌다 ‘존엄’이란 말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든 인간의 것으로 여겨서 쓴 것이 아니었다. 사회 속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또는 직위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기거나 어떤 사람이 가진 명성 또는 명예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겼다. 또는 어떤 사회가 중요하다고 선택한 속성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이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고 여기는 식이다. 심지어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그 사람에게 매겨진 가격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었다.

오늘날 인권의 기초가 되는 존엄성은 아주 다르다. 사회적 위계나 서열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기에 존엄하다는 생각은 현대의 인간 존엄성 사상에서 제일 먼저 걷어차인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 존엄성은 ‘평등’에 기초해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존엄하다. 사회적 지위, 인종, 성, 국적, 다른 어떤 사회적 지위의 표시에 상관없이 사람은 존엄성을 갖는다.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은 ‘존엄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존엄성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굴욕과 인간성 말살을 참을 수 없기에 거기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반대로 존엄감이 없거나 부족해 동료 인간을 상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린 분노하고 존엄감의 결여를 탓한다. 하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부족함을 탓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권의 장에서는 늘 존엄성을 둘러싼 오해와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계속된다. 내가 높은 사람이니까 존엄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복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복종 받지 못하면 질색을 하는 사람, 모욕과 굴욕을 받아도 그게 그런 건지 잘 모르는 사람, 높은 쪽을 떠받들고 복종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잘난 쪽은 잘나서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고, 복종하는 쪽은 복종하기에 인권을 제기할 줄 모른다. 주인과 하인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하인의 복종 없이 주인의 잘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호의존성은 양쪽의 존엄성 상실을 보여준다.

반면 존엄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동료 인간을 위해 복무한다. 그런 실천은 영웅적 희생이나 용기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기초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권의 요구가 정당해진다. 인권의 요구는 그것 없이는 존엄한 삶이 가능할 수 없는 조건을 내민다. 존엄하니까 인간은 착취나 굴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존엄한 인간은 정부나 그 누구의 개입 또는 강제 없이 내 삶을 내가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자유). 누구에겐 조각칼을 쥐어주고 누구는 맨손으로 하라 할 수 없다. 삶의 자유로운 조각을 위한 기본 조건은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한다(평등).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한 정치․사회․경제적 및 국제질서 구성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연대).

한편 인간 존엄성에 대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과거의 유물이다. 과거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식물이나 바위보다 더 많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여기고 자연을 점령하고 복종시킬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보다 특별대우를 받을 까닭이 뭐야?’가 현대 인권에 담긴 질문이다. 인간이 존엄하다 할 때 인간만이 중심이고 자연 속의 다른 종을 배제해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세상 만물은 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존엄성을 자연 만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에 존엄할 수 있다.

존엄성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존엄성 말살에 복종하지도, 굴종으로 협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저들은 내가 높은 사람이니, 내가 결정했으니 복종하라 강요하고, 내게 돈과 힘이 있으니 떠받들라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존엄성에 가격을 매기고 포식성을 드러내고만 있으니 간디 말대로 “사람이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간디 자서전> 중에서

나는 발라순다람이 손에 터번을 들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당하는 모욕을 나타내는 특별한 아픈 사실이 있다. 나는 이미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계약 노동자나 낯선 인도인이 유럽 사람을 찾아갈 때는 그 앞에서 머리에 쓴 것, 그것이 캡이거나 터번이거나 간에, 또 그렇지 않고 머리에 두른 스카프거나 간에 그것을 벗어야 한다는 하나의 관례가 강요되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발라순다람은 내 앞에서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런 일은 처음으로 당해 보았다. 나는 창피라도 당하는 것 같아 그더러 터번을 두르라고 했다. 그는 하라는 대로 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난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언제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제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권오름 제 215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11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최근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둘러싸고 ‘내전’ 비슷한 것이 시작됐다. 입만 열면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하던 아이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어른들과 그 어른들의 애독지가 나서서 아이들더러 ‘홍위병’ 운운한다. 사실 홍위병의 뜻이 뭔지 아는 어른들이 얼마나 될 런지도 모르겠다. 중국 역사 운운하며 이 단어의 뜻을 캘 의욕은 없다. 아무튼 그 단어를 아이들을 대상으로 써댄 어른들의 생각은 자신들의 각본에 맞는 아이들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묻고 싶다.

그럼 소위 ‘홍위병’들의 요구사항을 보자. 함부로 머리 자르지 말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 잡듯 훑어내지 말고, 때리지 말고 모욕 주지 말라고, 갖은 이유로 차별하지 말라고, 함부로 소지품 뺐지 말고, 억지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붙잡아두지 말라고,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교육 말고 좀 다른 식의 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자신들의 생각에 대해 말할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 등이다.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하자면 ‘안습’한(슬프고 안타까운) 요구사항들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골랐다. 지금 시기에 꼼꼼히 다시 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전문과 54개조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인지라, 쉽게 고쳐 쓴 것을 골랐다. 누가 쉽게 고쳐 썼냐하면 영국의 9살 아동이 협약을 읽고 자신의 말로 쓴 것을 내가 몸담았던 인권단체에서 교육활동을 위해 번역하고 가다듬은 것이다.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하면서 처음 맡은 일이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국내에 알리는 일이었다. 1991년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한국 정부가 비준했다. 비준한 당사국은 2년 내에 최초보고서를 그 후 5년마다 추가보고서를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정부가 이 협약을 비준한 일도 최초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한 일도 당시에 국내에선 전혀 몰랐다. 정부는 입을 다물었고 어떤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내가 일하던 인권단체에 편지 한통과 함께 두툼한 영문 자료가 날아들었다. 편지의 요지는 이러했다. 자신들은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실천을 위해 일하는 국제인권단체인데, 얼마 전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것, 한국의 인권단체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자료를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정부가 얼마나 충실한 보고서를 제출했는지, 즉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국내에서 실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 검토하고 비판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인권단체의 역할이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그 후 1년여 20여개 인권사회단체 사람들과 유엔아동권리협약을 공부했다. 없는 자료를 구해 한자 한자 번역해가며 공부했다. 토론회도 열었고, 협약을 알리기 위한 캠페인도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의견을 모아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민간단체 보고서도 제출했다. 정부대표들과 유엔아동권리위원회가 마주하는 회의를 지켜보러, 없는 돈 털어 제네바에도 가야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온 얘기들을 녹음하여 녹취록도 남기고, 국내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유엔이 내놓은 권고안을 놓고 토론회도 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한 위원이 “한국의 아동에겐 아이일 권리가 없는 것 같다”고 개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1차 보고서 이후 2차 보고서 때도 마찬가지의 일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사, 학부모, 청소년 등에게 ‘아동 인권’, ‘학생 인권’이라는 말이 퍼져나갔다. 어떻게 하면 협약에 담긴 인권존중의 원칙을 실현할 것인가를 각계에서 고민하게 됐다.

이건 그동안 있어온 수많은 노력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이런 과정을 포함하여 사회각계의 오랜 고민과 실천을 통해 한국 사회에 출현한 과제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소년 본인들의 목소리가 등장하고 활발해진 것이 그 진짜 의미를 살리는 소금구실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갖은 양념과 장식으로 치장한 음식이라도 소금이 없으면 아무 맛도 낼 수 없다. 아동과 청소년의 의견, 관심과 참여야말로 학생인권조례건 무엇이건 이들 당사자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일에서 고려돼야 할 필수요소이다. 이게 유엔아동권리협약의 핵심원칙이다.

사실, 유엔아동권리협약의 존재를 전혀 모를 때에도, 한국의 청소년들은 여러 방식으로 인간다운 권리를 외쳐왔다. 헌법소원을 시도하기도 하고, pc통신 모임을 통해 두발자유를 위한 모임을 조직하기도 하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학교의 강제 종교 활동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들이 불온한 것이라면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불온하다는 것일까? 미성숙해서 위험하다고? 모든 사람은 평생 공부해야 하고 평생 학생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는 언제나 미성숙하고 위험하다. 그러나 감수한다. 실패와 실수를 감수한다. 그리고 또 시도하고 또 나아간다. 아동과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실패하고 실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가능성을 봉쇄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은 불온한 것을 때려잡는 일이 아니라 불량한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옳지 못한 것을 그냥 감수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밤 10시까지 혹은 새벽 2시까지 공부만 하라고 학교(학원)에 감금하다시피하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원치 않는 종교행사를 강제하는 것이 불량한 것이다. 불량한 것을 바로 잡으면 될 일이지, 강도를 잡지 않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일은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독재자는 시민들이 모이고 얘기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한다. 아이들이 모이는 것 자체에 부들부들 경기를 일으키는 어른들은 교육자일까? 존경할 만한 어른일까? 아이들과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방일까? 아이들이 모이거나 뭉치거나 의견을 교환하고 표현하는 것, 즉 시민․정치적 권리라는 인권이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것은 시민의 권리행사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독재자와 뭐가 다를까? 당신들이 제일 싫어하는 공산주의가 그런 것 때문에 망했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자유세계는 그런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자유세계라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정치가 그렇게 위험하고 나쁜 것이라면 왜 수많은 어른들은 기를 쓰고 정치를 하려할까, 왜 정치를 위해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대고 볼을 부벼댈까, 그런 여의도 정치 말고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의견을 내고 변화를 가꾸는 것이 진짜 정치라고 여기는 것이 그렇게 무섭나, 그렇게 되면 직업정치인들과 논평가들의 밥그릇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X자 마스크를 씌우려는 것일까?

사실, ‘학생인권조례’에서 논의되는 내용이나 그간 아동․청소년 인권으로 얘기돼온 내용들을 떠올리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과연 우리가 옹호하는 것이 ‘인권’이라 할 만한 수준의 것인가? 때리지 말라는 등등의 요구가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권리’로서 요구될 만한 수준의 내용인가? 고통 받고 학대받는 동물을 구원하자는 얘기 같아서 미안하다. 학대로부터의 자유와 보살핌의 권리를 넘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얘기해야 마땅한 마당에 ‘아동과 청소년은 동물수준을 벗어난 권리를 요구하는 게 사치인가’하는 한숨이 난다. 한 영화 평론가는 한국 영화에서 유괴당하고 살해당하고 중병에 걸리고 학대당하는 어린이 캐릭터의 역할에 대해 “고통에 붙박인 아이들의 캐릭터”라 한적 있다. 현재 아동인권, 학생인권에서 얘기되는 권리항목의 주인공들은 그저 고통에 붙박여 있다.

고통 받는 캐릭터를 벗어나 사회구성원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로 향상시키는데 학생인권조례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학교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등 유엔아동권리협약의 핵심조항들로 거론되는 것들을 입에 올리기 무섭게 홍위병이란 이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아이들을 고통의 캐릭터에 붙잡아 놓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 활동가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우고 의식화된다. ‘나이 어린 애들이….’, ‘대학이나 나온 후에 하면 안 되나’하는 불온한 생각들이 40대 중반이 된 내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오를 때가 솔직히 있다. 그럴 때마다 방글․쌩글․화통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들에 내속에 긴 세월 묵혀져온 위계니 뭐니 하는 것들과 현실주의로 둔갑한 배반의식이 뒷구멍을 찾게 된다. 청소년 활동가들은 기존의 틀에 구멍을 내고 있다. 있는 그대로 깁는다고 메워질 구멍이 아니다. 이미 새로 짜여 지고 있고, 실과 직조기를 손에 든 것도 그들이다. 불안한 어른들이 뭐라 하든, 그들은 고통의 캐릭터를 벗어나 자신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고,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1등 독식의 교육문화를 벗어나 공감하고 어우르는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다.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에는 나이 먹는 게 싫지만 젊어지는 것도 싫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젊은 게 좋아도 학교를 다시 다니기는 싫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런 우리에게 청소년활동가들이 다른 생각을 자극하는 것 같다. 다시 젊어질 수 있다면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고 싶다고, 신나게 다니고 싶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쉽게 쓴 유엔아동권리협약

우리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유엔아동권리협약이란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우리의 권리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또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책임지는 어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물론 우리 자신에게도 다른 아이와 어른들도 똑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협약(조약)이란 같은 법을 지키자는 나라들 사이의 약속입니다. 한 나라의 정부가 협약을 ‘비준한다’는 말은 그 협약에 쓰여진 법을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1991년 11월 20일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정부가 이 협약에 적혀있는 권리를 모든 아동과 청소년이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협약의 각 조항들은 우리의 권리를 하나씩 설명하고 있습니다. 협약은 법률가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어른들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조항들을 골라서 쉬운 말로 설명해 보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 협약의 제 42조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제1조
18세가 되지 않은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은 이 협약에 적혀있는 모든 권리의 주인이다.

제2조
우리가 누구이든지, 우리의 부모님이 누구이든지, 그리고 백인이건 흑인이건 간에, 남자이든 여자이든 간에, 영어를 쓰든지 한국어를 쓰든지 서울말을 쓰든지 사투리를 쓰든지, 무슨 종교를 믿든지, 또한 장애인이건 아니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간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이 협약에 적혀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제3조
어른이 우리에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그 어른은 최선의 것을 주어야 한다.

제6조
모든 사람은 우리들, 아동과 청소년 모두가 생명을 누리고 건강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12조
어른이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결정을 내릴 때 우리에겐 우리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른은 우리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제13조
우리는 말과 글과 예술 등을 통해 여러 가지 것을 알고 우리 생각을 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는 않는지 잘 생각해서 해야만 한다.

제14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고, 우리 자신의 종교를 정할 권리가 있다. 부모님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배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셔야 한다.

제15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사귀고 모임을 만들 권리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모임은 안 된다.

제16조
우리는 사적인 삶(프라이버시)을 누릴 권리가 있다.

제17조
우리는 라디오, 신문, 텔레비전, 책 등을 통해 세계 곳곳의 정보를 모을 권리가 있다. 어른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제18조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를 기르는 노력을 두 분이 함께 해야 하고,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해 주어야 한다.

제19조
아무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해쳐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우리가 매 맞거나 무관심 속에 내버려지게끔 놔두지 말고 우리를 보호해줘야 한다. 우리의 부모님에게도 우리들을 해칠 권리가 없다.

제22조
우리가 망명자인 경우, 우리는 특별한 보호와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23조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장애인인 경우,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날 수 있도록 특별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제24조
우리는 건강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아플 때 전문적인 치료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어른들은 우선적으로 우리가 아프지 않도록 먹이고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제27조
우리는 적절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 등을 주어야 하고 만일 부모님이 어렵고 힘든 경우에는 나라에서 부모님을 도와주어야 한다.

제28조
우리는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초등교육은 무료여야 한다. 또한 그 이상의 교육에도 무료 교육을 도입하여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학교 규율은 우리 모두가 귀한 사람이라는 데 어울리는 것이어야 하고, 뭐든지 이 협약에 맞도록 운영돼야 한다.

제29조
우리가 교육을 받는 것은 우리가 가진 사람됨, 재능, 정신적·신체적 능력을 맘껏 키우기 위해서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이해하고, 깨끗한 환경을 생각하며, 책임질 줄 알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30조
소수집단(예를 들어 미국의 인디언이나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에 속하는)의 아동과 청소년에게도 자신만의 문화를 즐기고, 자신들의 종교를 믿으며,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

제31조
우리에겐 쉬고 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제32조
우리가 일을 해서 돈을 벌 때는 건강에 안 좋거나 학교에 가지 못할 상황에서 일하지 않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우리가 일을 해서 누군가 돈을 번다면 우리는 우리가 일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제34조
우리는 성적 학대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도 우리 몸에 우리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없다. 곧 누군가가 함부로 우리 몸을 만지거나 사진을 찍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게 할 수는 없다.제37조우리가 큰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다. 잘못을 하면 벌을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에게 심한 창피를 주거나 상처를 주는 벌을 내릴 수는 없다. 최후의 방법인 경우를 빼고는 우리를 감옥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감옥에 들어갔을 경우 우리는 감옥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을 권리와 정기적으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제38조
우리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15살까지는 절대로 군대에 들어가거나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이 나이는 나중에 만들어진 국제협약으로 18세로 바뀌었다.)

제40조
우리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을 경우, 우리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 경찰과 변호사와 법관은 우리를 존중하여야 하고 모든 일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제42조
모든 어른과 아이는 이 협약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해 배울 권리가 있고 어른들도 역시 이 권리들에 대해 배워야 한다.

아동권리협약에는 모두 54개 조항이 있는데, 나머지 조항들은 모든 아동과 청소년이 자신의 권리를 가질 수 있으려면, 어른들과 정부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협약을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친구들, 부모님, 선생님과 협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세요. 다른 사람들에게 아동․청소년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다른 아이들을 돕는 일이 됩니다. 아동과 청소년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수록, 사람들은 모든 아이가 건강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자라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도와주려고 할 테니까요.

인권오름 제 211 호  [기사입력] 2010년 07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07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1963년 6월 11일, 팃쾅둑(Thich Quang Duc)이란 불교 승려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사이공의 번잡한 거리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한 채 자기 몸을 불살랐다. 몸이 타들어가는 동안 그는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당시의 광경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난 그 광경을 다시 보려했다. 하지만 한번으로 충분했다. 불꽃이 인간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천천히 사그러 들었고, 쭈그러들었고, 그의 머리는 검어지고 있었다. 공기에서는 인간의 살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인간은 놀랍게도 빨리 탔다. 내 뒤에서는 이제 모여들고 있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흐느낌 소리가 났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울 수도 없었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메모를 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없었고, 너무 당황해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불에 타면서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그의 평정은 그 주변의 통곡하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됐다.”

그를 이어 스물아홉 명에 이르는 비구와 비구니들(그중에는 세 명의 미국인도 포함됐다)이 팃쾅둑의 소신공양을 뒤따랐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이 자기 몸을 불살랐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오늘 읽어볼 팃낙한 스님의 편지이다. 소신공양이 이어지던 와중에 팃낙한 스님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공개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목적은 또 있었다. 저명한 인권운동가요, 휴머니스트인 킹 목사에게 전쟁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시민권 운동 밖으로 떨치고 나와서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고심 끝에 침묵을 끝냈다. 그는 <베트남 너머>라는 유명한 연설로 화답한다(이 연설문은 <인권문헌읽기>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는 표어에 완전히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킹 목사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미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단호하게 낸다.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는데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폭력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루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재물 중심의 사회로부터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계와 컴퓨터, 수익 동기와 재산권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인종차별주의와 극도의 물질주의, 군국주의라는 세쌍둥이 거인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을 한 후 정확히 1년 후에 킹 목사는 살해된다.

2010년 5월 31일 대한민국, 문수 스님이 낙동강 둑방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다. 남긴 유서와 가사에는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포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분신했던 수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특히 단 시간 내에 많은 분신이 이어졌던 때가 91년이었다. 당시 모 대학의 선전부장이었던 난, 맡은 역할 때문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분신소식과 그들이 남긴 유서와 영정사진을 받아들게 되는 원치 않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장례식 영구차에 붙일 이름 석 자를 붓글씨로 써야 했던 것도 나의 일이었다. 추모제를 하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이 전달되는 날도 있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듣게 된 분신, 소신공양이란 단어는 세월을 되돌리는 느낌을 줬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즐거워하길, 더 공감하고 더 사랑하길, 민주주의와 인권의 적들에 대해 더 각성하고 깨어있기를, 생명을 만끽하길, 더 나은 생활을 누리길,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되 되풀이하지 않기를….

사회적으론 어땠을까? 한편에선 끝없는 의도적 침묵이 이어졌고, 한편에선 흐느낌과 다짐이 이어졌다. 문수 스님 소신공양 이후 추모제와 선거가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와중에 어디선가 수많은 이들이 ‘공개편지’를 썼다고 생각한다. 공개편지는 누구에게 수신됐을까, 답신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올까, 강변에서 연서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서를 뜯어보는 심정으로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다. 포클레인이 내려치는 강변에서 내가 이름도 모르는 뭍 생명들은 <4대강 너머>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팃낙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An Open Letter from Thich Nhat Hanh to Martin Luther King, Jr., 1965년 6월 1일)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양심으로 이해하기에는 어쩐지 좀 어렵습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항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관심을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불태운다는 것은 자신이 말하려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일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뭔가 말하는 것은 최고의 용기, 솔직함, 결단, 진심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수행된 것으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수계식 중에 비구의 250 계율을 준수하며, 승려의 삶을 살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생을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바치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자기 몸의 작은 한 부분 이상을 태울 것을 요구받습니다. 물론 혹자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가 공동체 앞에 무릎을 꿇고 불타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런 말들을 할 때는, 온 맘과 정신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아주 큰 무게를 담는 것입니다.

베트남 승려는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베트남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고 온 힘과 결단을 다해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왜 분신으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자신을 불태우는 것과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것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불사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 아니라 불태운다는 것입니다. 소신공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의지와 결단의 표현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불교의 신념 속에서 생은 60년 또는 80년 또는 100년의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생은 신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은 보편적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파괴의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건설의 행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인민을 위해 고통 받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자살은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가진 자기 파괴의 행위입니다:
• 살아갈 용기와 어려움에 맞설 용기의 부족
• 생의 패배와 모든 희망의 상실
• 비존재(non-existence, abhava)에 대한 욕망

이런 자기 파괴는 불교에서 가장 심각한 죄 중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자신을 불사르는 승려는 용기를 잃은 것도 희망을 잃은 것도 아닙니다. 비존재를 욕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는 아주 용감하고 희망에 차 있으며 미래의 좋은 것을 열망합니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행위의 좋은 결과를 믿습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Jataka)에서, 굶주려서 자기 새끼를 먹어 치우려하는 사자에게 자기 몸을 내준 부처님처럼, 소신공양하는 승려는 전 세계 인민의 관심을 요청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최고의 자비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공양한 승려들이 압제자의 죽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압제자들의 정책을 바꾸는 것을 목적했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관용, 광신, 독재, 탐욕, 증오와 차별입니다. 나는 또한 진심으로 믿습니다. 당신(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햄, 앨라배마 등에서 주도한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은 백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무관용, 증오, 차별을 겨냥한 것이란 걸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이것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적입니다. 우리의 불운한 조국에서 우리는 절실하게 애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으로도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요. 제발 도처에 있는 인간의 진짜 적들,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있는 진짜 적들을 죽이라고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열강의 대적 속에서, 수백 수천의 베트남 농민과 어린아이들이 매일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은 이미 이십년이 된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비극적으로 찢겨졌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평등과 인권을 위한 가장 고된 투쟁에 몰두해왔기 때문에, 당신은 베트남 인민의 형용 불가능한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세계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들은 침묵에 머물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침묵을 유지할리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독트린이 정신적 요소들을 박탈하도록 놔두지 않을 강력한 종교적 기반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졌다고들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행동을 취해왔고, 칼 바르트(Karl Barth)의 표현대로, 당신속의 신께서도 또한 행위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침묵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 존중을 강조한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사랑할 용기를 강조한 폴 틸리히(Paul Tillich), 그리고 매카이(Mackay), 니부어(Niebuhr), 플레처(Flethcher), 도널드 해링톤(Donald Harrington). 이 모든 종교적 휴머니스트들과 더 많은 이들은 한 인류가 베트남에서 감내해야만 하는 것 같은 수치의 존재를 옹호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1965년 4월 20일, 사이공에서) 팃 지악 탄(Thich ch Giac Thanh)이란 젊은 불교 승려가 소신공양을 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이 불필요한 전쟁으로 야기된 고통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은 결코 필요치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또 다른 젊은 불교도, 휴 티엔(Hue Thien)이란 비구니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의도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제지했기에 성냥불을 켤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겁니까? 그리고 누구의 전쟁입니까?

어제 수업시간에, 내 학생 중 한 명이 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우리가 서로에게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각성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타인들의 무지의 피해자입니다. 타인들의 권력 의지와 지배에 대한 의지 때문에 우리가 상호학살에 더 빠지는 일을 벗어나게 도와주십시오.” 불교도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사랑에 대한 나의 신념, 교감에 대한 신념,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의 생각과 태도는 누가 인류의 진짜 적인가를 발견하는데 있어 모든 인류의 지침이 돼야만 합니다.

1965년 6월 1일
낙 한(Nhat Hanh)

인권오름 제 207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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