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2. 1. 19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2년 1-2월호에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11] 추위 속에서 돌아보는 사회적 권리(류은숙)

올 들어 제일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 라디오에서는 추운 것이 낭만을 자극한다면서 젊을수록 겨울을 좋아한다고 떠들어대는데 나한테는 추위가 서러움으로 여겨져. 추운거리에서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집과 휴식, 또는 기쁜 만남이 기다리고 있어서 일거야. 하지만 귀가할 집도 휴식도 만남도 없다면 종종걸음칠 까닭이 없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발걸음으로 잔뜩 움츠려들기만 할거야.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겨울은 오랫동안 참 추웠어. 어느 겨울에는 온 식구가 연탄가스를 먹고 죽다 살아났지. 한밤중에 동생의 신음소리에 눈을 떴다는 엄마 덕분에 우리 모두 살아나긴 했지만, 한겨울에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구역질을 한참 하다가 엄마가 떠온 동치미 국물을 한사발씩 억지로 마시고야 정신이 들었어. 악몽의 그날 밤 이후에는 구들장을 믿을 수 없어서 그해 겨울은 아예 불을 때지 않고 지냈지. 방안에는 겨울 내내 이불이 깔려 있었고 두껍고 무겁기만 한 그 이불속에 처음 몸을 집어넣으면 차가운 얼음조각 같았어. 한참을 웅크리고 있어야 체온과 더불어 이불속이 따뜻해졌지. 일하다 밤늦게 돌아온 엄마는 따뜻한 물로 발을 씻고 싶어 했지만 물을 데울 아궁이는 텅 비어 있었고 석유곤로에 물을 끓이기는 아까워했어. 그래서 나는 엄마 올 때쯤 옆집에 더운 물 한바가지를 얻으러 가곤 했는데, 그 집 아궁이도 시원치 않아서 아궁이에 얹어둔 큰 솥의 물은 늘 미지근한 수준이었어. 엄마는 지친 몸을 뜨거운 방바닥에 지지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추위와 싸워야 하는 또다른 전쟁터 같았지.

어느날 인근 아파트로 수금을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엄마는 한숨을 쉬었어. 받지 못한 물품 대금에 대한 한숨만이 아니라 “그 집 여자는 말이지, 이 한겨울에 집안에서 속옷 같은 반팔만 입고 지내더라”고 말이야. 한겨울에 발품을 파느라 뒤꿈치가 갈라터지곤 했던 엄마에겐 발 씻을 더운 물도 없는데 레이스 나부끼는 반팔 차림의 그 여자가 엄마 눈에 어떻게 보였을지 어린 나에게도 충분히 그려졌어.

내가 겨울에 제일 싫어하는 일은 바깥에 있는 항아리에 김치를 꺼내러 나가는 일이었어. 항아리 뚜껑을 열고 고무줄로 꽁꽁 싸매둔 비닐입구를 풀고 김치 한포기를 꺼낸 후 다시 푸성귀로 위를 덮은 후 꽁꽁 여매는 동안 찬바람은 냉혹하게 멈출 줄을 몰랐거든. 그렇게 꺼낸 김치를 역시 냉동고와 다를 바 없는 부엌에서 썰다 보면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어.

한겨울 제일 귀한 대접을 받은 것은 수도꼭지였지. 비닐과 헌옷으로 칭칭 감아놓고 얼지 않도록 밤새 물이 졸졸 흐르도록 신경써야했어. 졸졸 흐르던 물줄기와 함께 수도가 얼어버린 아침이면 평소에 아까워서 쓰지 못하던 더운물을 펄펄 끓여서 수도꼭지에는 아낌없이 쏟아부어야 했어. 그렇게 해서 물이 다시 나올 때 쯤이면 옷에 튄 물방울이 조각 얼음으로 우수수 떨어지곤 했지.

수도가 어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은 하수도가 얼어붙는 일이었어. 우리집이 제일 꼭대기 였기 때문에 하수도가 얼어붙으면 아랫집에 물이 넘친다고 해서 아랫집 아주머니가 득달같이 달려 올라와 절대 물을 버리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다 쓴 물을 받아서 산허리에 갖다 버려야 했어. 빨래라도 할라치면 열댓번은 왕복해야 물을 내다 버릴 수 있었고, 그 사이 빨랫줄의 빨래에는 고드름이 맺힌 채 동태처럼 굳어있었어. 그럴 때 하늘을 보면 석양 노을이 빨갛게 타오르는 것이 커다란 난로 속에 불타는 장작더미 같이 보였어.

엄마는 이런 궁상맞은 소리를 왜 자꾸 늘어놓냐고 하겠네. 창피하다고 말이야. 지금은 실내의 김치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고 온수가 나오는 보일러가 있으니까 된 거 아니냐고 말이야. 하지만 기억을 냉동시켜서 내버리기보다는 기억을 해동시켜 자꾸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할 때가 더 많아.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은 누구나 겪는 고통의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고 했어. 추위에 오그라드는 손발의 고통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고 냉대에 오그라드는 마음의 아픔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기에 사람은 서로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거지. 그런 공통의 경험과 느낌에서 끌어낸 것이 오늘날 인권의 목록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런 인권의 목록 중에서는 ‘사회적’ 권리란 이름이 붙은 게 있어. 내가 앞전에 쓴 글들 중에서 ‘사회’라는 말의 뜻을 얘기한 적이 있어. ‘사회’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을 맺었다는 뜻이고, ‘사회적 권리’라 함은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어. 추위로 인한 고통이 공통된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바람막이가 되려는 노력을 할 의무가 있어.

내가 추운 날의 기억을 자꾸 해동시키게 되는 것은 추위로 인한 고통을 ‘사회적’으로 느끼지 않는 일이 자꾸 벌어지기 때문이야. 개인적으론 추위를 벗어났더라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춥다면 나도 추운 것이라고 말하는 게 인권이거든.

연말이면 산동네에 연탄을 날라주는 봉사활동이 대서특필되곤 해. 연탄 가루가 묻은 얼굴이 화장한 얼굴보다 더 예쁘다는 말과 함께 유명 연예인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말이야. 나도 연탄을 나르는 그 사람들의 마음이 예쁘다고 생각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연탄은 참 위험하고 성가신 연료야. 연탄가스도 무섭지만 새벽이고 한밤중이고 때맞춰 갈지 않으면 잘 꺼지지. 다시 불을 붙이려면 독한 가스와 연기를 감수해야 하고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순간은 너무 짧아. 산동네에서 연탄을 쓰는 사람들 중에는 노약자나 홀로 사는 가구가 많다는 데 그런 연탄을 건사하며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곤 해. 연탄을 나르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연탄이 아닌 다른 대체 연료를 제공하자는 기획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궁금해지곤 해. 매년 변함없이 연탄 나르기 봉사만 계속된다면, 그런 봉사활동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연탄을 때야하는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기도 해.

연탄 나르기를 지켜보자니 또 해동되는 기억이 있어. 산동네에 살면 연탄 배달을 꺼려해서 배달료를 더 높이 부르곤 했어. 엄마는 그 배달료를 아끼려고 연탄가게에서 집게를 빌려서 자식들에게 직접 나르게 했지. 동생들은 창피하다고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나 혼자 겨울내 쓸 연탄을 날라야 했어. 무거운 것은 둘째 치고 연탄집게를 양손에 들고 나르다 보면 학교 친구들과 자꾸 부딪치게 되는 게 그게 참 창피했어. 연탄을 다 나른 후 얼굴에 묻은 검댕이는 문질러 지웠지만 마음에 묻은 검댕이는 잘 지워지지 않았어. 그 검댕이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가난은 창피한 것’이라는 생각이었어. 왜 창피했을까? 가난하다는 것 말고 나의 다른 점은 돌아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이랑 친구들이 날 따돌리고 멀리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야. 나름 단련을 해서 마음에 근육을 만들고 나서는 그게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쉽게 당당해지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야. 체념과 두려움이란 나 혼자 만드는 병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만드는 병이니까 말이야.

사회적 권리란 진짜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는 데서 시작해. 가난한 개인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이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의 고통을 내버려두는 사회가 가난한 것이고, 그런 가난한 사회가 창피하다는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가난을 열심히 손가락질 하지만 사회의 가난한 노력을 꾸짖는 일에는 게으를 때가 더 많은 것 같아. 또 사회적 권리란 누구나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것을 말해. 구석에 숨거나 처박히도록 내몰리지 않고 자기를 밝히고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해. 가령 옷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입기도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위해 입는 것이쟎아.

사회적 권리 중에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휴식처와 집에 대한 권리야. 줄여서 주거권이라고 말해.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고 아픈 사람에게 치료를 행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는 사람들도 주거권이 권리라는 말에는 고개를 가차없이 내젓곤해. 우리 사회에서 집이란 곧 재산이고, 수완 좋은 사람들의 투자가치이고, 남들과 경쟁하여 그 가치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런 집은 열심히 저축하고 대출받고 투자 정보 찾아 열심히 뛰어서 구하는 것이지, 집에 대한 인권이란 말이 안된다는 거야. 여기에 사회적 권리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있어. 사회적 권리라는 이름으로 요구하는 내용물이 즉각 눈앞에 나타나고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아예 권리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주거권이란 이름으로 당장 번듯한 집이 주어지지 않으면 주거권이란 권리 자체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고 무시해버리는 거지.

몇 년 전 복지시설을 나온 두 사람이 사무실을 찾은 적이 있었어. 거의 감금하다시피 해놓고 강제노동을 시킨 복지시설이었는데, 인권단체들이 그런 인권유린을 폭로해서 더 이상 그곳에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나올 수가 있었거든. 하지만 복지시설을 나온 이후 그들이 살아갈 길은 막막했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주민등록이 말소됐으면 부활시키고 자격이 되면 사회복지수급을 받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 뿐이었어. 그런데 대개가 조건이 되지 않았고 뿔뿔이 흩어졌지. 날은 춥고 오갈 데가 없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무슨 도움을 얻을까해서 다른 동료의 손을 이끌고 인권단체를 찾아온 것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뾰족한 일은 없었어. 그 중 한 사람이 “여기서 밥을 주길 해, 잠자리를 주길 해? 왜 이런데로 끌고 온거야?”라며 인도한 사람에게 성을 냈고, “역전에 있는 급식소에나 가자. 거기가면 밥이라도 주지”하고 가버렸어. 그들이 성을 내는 것도 당연했고 입만 열면 사회적 권리를 얘기하는 우리로선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어.

현실이 이렇다 보니 권리 얘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흔히 은행의 자동출납기를 생각해. 번호를 띡띡 누르면 현금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진짜 권리라고 한다면 띡띡 눌렀을 때 뭐가 당장 튀어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주거권이라고 하면 집이 툭 튀어나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인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당장 집이 툭 튀어나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럼 인권을 가지고 도대체 뭘 하자는 걸까?

인권, 특히 사회적 권리는 국가나 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행동할 의무를 요구하는 권리야. 가령 주거권이란 인권은 당장 집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주거권을 향한 행동들을 요구하는 거야. ‘걸어간다’ 혹은 ‘다가간다’고 말할 때 그런 행동에는 목적하는 방향이 있는 것처럼 주거권을 향한 행동이란 사람이면 누구나 사람다운 주거에 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처신하는 모든 것을 말해.

행동할 의무라 할 때, 일단 뒷걸음치는 행동은 안돼. 지금의 조건보다 더 나쁜 곳으로, 형편을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내모는 행동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는 것이야. 집 없는 설움을 겪는 이들의 대표격은 거리 노숙인이라 할 수 있지. 하늘을 지붕 삼아 냉대를 바닥삼아 살아가야 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올해 철도공사에서는 서울역에서마저 노숙인을 내쫓는 조치를 선택했어. 거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에 모여드는 것은 그나마 바람을 피할 뿐 아니라 동료들을 만나고 살아남기 위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야. 어느 학자의 말마따나 노숙인들은 역전에서 살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야. 그런데 철도공사에서는 노숙인을 내쫓는 일을 하라고 특수인력을 고용했고 쫓겨난 사람들은 당연히 갈 곳이 없어서 근처를 배회하거나 지하도나 공원 등 더 차가운 곳으로 갈 수 있었을 뿐이야. 시에서 임시 거처로 쓰겠다고 물색하는 곳은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고 결사반대한다는 이유로 쉽게 확보되지 않고 있다고 해. 그러니까 노숙인들은 더 나은 대안이나 선택지가 없는 가운데서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린 거야. 그런 조치를 결정한 공공당국이나 그런 조치를 지지하는 시민들은 주거권을 향한 행동이 아니라 뒷걸음치는 행동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꼭 거리 노숙인이 아닐지라도 불안하고 위험하고 불편한 주거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아. 그런데 도시재개발이란 게 그런 주거조건을 살만한 것으로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살던 사람들을 내몰고 때빼고 광내는 식으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뒷걸음치지 않을 행동의 의무가 있다면, 적어도 대안이 마련될 때까지는 살던 곳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의무가 있어. 미관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어찌 보일지 몰라도 연탄불과 더운물을 서로 빌려주고 급할 때 외상질 수 있는 구멍가게가 있는 삶의 공간이라면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될 의무가 있어. 그리고 대안이란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 것만이 아니라 사는 사람에게 최적일 수 있는 조건으로 고쳐가며 살 수 있도록 힘을 합하는 방법도 있어.

사람들의 눈높이는 다 다르니까 주거권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준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의견들도 물론 있어. 하긴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지낼 수 있는 주거환경을 모든 사람에게 당장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그건 바람직하지도 않을거야.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지낸다는 건 사치이지 기본적인 권리라 할 수는 없어. 눈높이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맞추고 합의할 수 있는 기본선은 있어.

유엔에는 주거권을 전담하는 위원회가 있는데 거기서 내놓은 주거권의 기준들은 엄마와 내가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야.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감당할 만한 가격의 주거여야 하고, 접근이 쉬워야 하고, 사람이 살만한 조건이어야 하고, 생계활동 지역과 가까워야 하고, 사회통념에 적합해야 한다는 거야. 각 항목은 더 상세하게 정해질 수도 있어. 가령 ‘사람이 살만한 조건’이란 수돗물을 사용할 수 있는지, 화장실이 있는지, 월 평균 중간층 소득과 비교해 임차료가 얼마나 되는지,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살 수 있는지 등이 포함돼. 이런 기준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매일매일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게 주거권을 향해 행동할 의무야.

지금까지 말한 모든 행동할 의무의 기본이 되는 것은 ‘차별하지 말 것’이야. 주거가 없거나 불안한 주거 상태에 처한 사람들 편을 들면 더 들어야지, 초라한 주거를 이유로 사람들을 체념하게 하고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말이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창피해야 할 것은 초라한 주거나 그런 주거에 거주하는 개인이 아니라는 것, 그걸 내버려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거나 오히려 못살게 구는 행동을 취하는 사회가 부끄러워할 일이라는 것이 사회권을 향한 행동의 지침이 되는 생각이야.

먼 외국에 주거권에 대해 재판을 하고 명판결을 내놓은 판사가 있어. 그 판사는 판결문에서 뭐라고 했냐 하면, “노숙인들이 … 몸을 누일 자리를 찾으려고 여기저기 정처 없이 헤맬 때 노숙인의 존엄성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행위로 인해 이런 사람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된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다 함께 비참해진다.”고 했어.

주거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매년 동짓날에 서울역에 모여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를 열고 있어. 벌써 십 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하루에 한 명 꼴로 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추모제는 계속되겠지. 그런 겨울 한가운데 얼마 전에는 <거리와 쪽방에서 살아가기 안내서>가 나왔다는 뉴스를 봤어. 길거리와 쪽방에서 겨울을 나야 할 사람들의 ‘살아남기’를 위한 정보를 담았다고 해. 이 뉴스를 보는 순간 한파가 몰려오는 것 같았어. 살아남기를 넘어서서 같이 잘살기를 위한 안내서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이것이 엄마가 궁상맞다고 여길 추위의 기억을 해동시켜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까닭이야. 서로의 기억을 해동시켜 맞대다 보면 그것이 공통의 경험이란 걸 알 수 있고, 지금 추운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그 고통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의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찬바람이 불어넣어주는 교훈이야.

작성일자 : 2011. 11. 21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11-12월호에 실린 겁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10] 미워도 다시한번 집회와 시위를 (류은숙)


내가 학생이었을 때, 큰 데모가 있을거란 뉴스가 나올 때면 어김없이 엄마는 날 붙잡고 당부를 하곤 했지. 오늘 어디 가냐고. 뉴스 보니까 데모한다는데 그런 위험한데 가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고 말이야. 그럴 때 엄마 맘은 어릴 때 물가에 나가 놀지 말라고 말할 때와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리고 대개 난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지. 엠티를 가거나 문상을 가기 때문에 못 들어올 거라고 말이야. 큰 집회 때 방송사 카메라가 주변을 돌면 나와 친구들은 앞다투어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박았어.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혹시나 신문방송에서 부모가 자기를 발견할까봐 걱정되어 전전긍긍했지. 집회 중간에 갑자기 후다닥 소리가 나며 자리가 뻥 뚫리는 일들이 있었어. 그건 부모님이 데모하는 자식을 잡으러 들이닥치는 일이었어. 그렇게 집으로 잡혀 들어간 친구들은 오랫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하곤 했지. 집회시위는 그렇게 호환마마처럼 무서운 것이었어. 전부를 걸어야 사랑이란 유행가 가사처럼 인생의 뭔가를 다 걸어야 하는 일로 여겨졌지.

그렇게 무섭고 욕먹던 집회와 시위들이 지금은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자랑스런 역사로 기억되고 있어. 옛날에 시위했던 일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자랑하는 경력 중 하나야. 하지만 현재의 집회와 시위들은 여전히 지청구를 먹고 있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니 예전보다 훨씬 더 호환마마처럼 무서운 일로 여겨지고 있어. 요즘 집회 시위 때문에 사람들이 겪는 수난은 한두 가지가 아니야. 시위 현장에서 사진 찍혔다면서 경찰에서 오라 가라 하고 경찰서에 잡아갔다 풀어주는 수준이 아니라 벌금을 때려. 벌금으로도 모자라 손해배상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청구하기도 하고, 전혀 봐줄 수 없는 범죄인 취급을 하기도 해. 집회와 시위의 참가자들이 외친 내용에 대해서는 무시하면서 ‘직업 시위꾼’이라고 조롱하거나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인데 ‘그럴 거면 북에 가서 살라’는 엉뚱한 대꾸가 돌아와.

얼마 전 희망버스가 서울에서 행사를 가졌어. 희망버스가 뭐냐 하면, 자기 돈과 시간을 내서 누구를 응원하러 가는 운동에 붙은 이름이야. 부산에 큰 조선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배 만들 때 쓰는 크레인이란 높은 기계가 있어. 아마 아파트 몇 층 높이는 될 거야. 그 중 하나에 사람이 올라가서 시위를 한지 일 년이 다 돼가. 쇠로 만들어진 기계의 조종실에서 먹고 자며 더위와 추위를 땅위에서보다 곱절로 겪고 있는 것이야.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하면 말이지, 그 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노동자들이 엄청나게 잘리고 회사로부터 사람취급을 못 받았거든. 그에 항의해서 잘린 사람들을 복직시키고 일하는 사람대접 좀 잘하라고 오십대 아줌마 노동자와 그를 응원하는 아저씨 노동자 몇 사람이 거기 올라간 거야. 올라가서 겨울과 봄, 여름을 지냈고 또 겨울을 맞이하려고 해. 희망버스는 그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자기 차비를 내고 버스를 대절하여 그곳에 가서 같이 밤을 지새우고 응원하는 일에 붙여진 이름이야. 몇 차례나 희망버스가 부산에 갔는데 그 중 한번은 서울에 모여서 행사를 가졌어.

주말에 식당알바를 해야 하는 나는 일 끝나고 밤중에서야 희망버스 행사에 갔어. 여름 끝자락인데도 열대야가 있어서 지독하게 더운 밤이었어. 시내에서 행진하여 서대문 독립공원까지 가는데 숨이 턱턱 막히고 아스팔트 지열은 숯불 같았어. 공원에서 사람들은 노숙을 할 참이었어. 다음날도 알바를 해야 했기에 나는 잠시 거기 있다가 자리를 떴어. 다음날 아침 알바하러 버스를 타고 독립공원을 지나는데 여기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이 보였어. 뉴스를 보니 청와대를 향해 인왕산을 오를 계획이었는데 경찰이 등산로를 막아서 못 올라가고 있다는 거였어. 내가 버스에서 본 모습은 산에 못 오른 사람들이 공원에서 기진맥진해서 쉬고 있는 거였어. 그때 버스 안에 있던 승객 두 사람이 낄낄대며 이런 대화를 나눴어.

“저 인간들 좀 봐라.”
“되게 할 일 없는가봐. 한심하다. 한심해.”
“저런 사람들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더라.”
“그러게 말이야, 한번 물어보고 싶어. 제정신이냐고.”

그들의 빈정거림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어. ‘아줌마들 같으면 이 더위에 씻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저렇게 고생하는 게 할 일 없어서 그러는 것 같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꽉 찼지만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쉴 뿐이었어. 똥 씹은 표정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엄마한테 걱정 끼치며 내가 참여했던 수많은 집회와 시위가 떠올랐어.

제일 많이 떠오른 건 더위와 추위,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냄새야. 뙤약볕 아래에서 신문지를 접어 만든 우스꽝스런 모자로 간신히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종일 버티는 건 고역이었어. 추울 때도 역시 신문지였는데, 시멘트 위에 깔고 앉은 신문지로는 올라오는 냉기를 막을 수 없어서 “이러다 우리 전부 치질 걸리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지. 그럴 때 우리의 끼니는 보따리 김밥 장사들에게 의존했는데 그 김밥에선 여름에는 약간 쉰 냄새가 났고 겨울에는 하드 같았어. 시금치가 아닌 부추와 단무지만 달랑 든 김밥을 주머니 사정이 형편없던 우리는 채 한 줄씩도 먹지 못했어. 몽당연필 같은 김밥 한 덩이를 나눠 들고 되도록 오래오래 씹었지. 음료수도 부족했지만 화장실 갈 형편이 못되는 상황인지라 목이 말라도 마실 것을 애써 참아야 했어. 그리고 하루가 아니라 몇날 며칠 이어진 시위일 때는 입 냄새와 땀 냄새를 쫓아야 했어. 최루탄 냄새가 더 지독했기 때문에 우리의 몸 냄새는 사실 맡으려야 맡을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몰라. 바람 한 점 없는 한 여름에 최루가스를 맡으면 죽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고통을 느꼈어. 한 번은 너무 독하게 가스를 마셔 거의 오바이트를 할 지경이어서 ‘내가 다시는 시위에 나오나봐라’하고 맘먹기도 했지만 또 그 자리에 다시 서 있곤 했어.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은 심정이었어.

그렇게 배고프고 덥고 춥고 냄새나는데 꾸역꾸역 모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일부러 고행을 하는 종교의식도 아니고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엄마 입버릇처럼 그런다고 밥이 나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학생 때 데모를 할 때는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까 저런 일을 한다는 비난을 많이 들었어. 데모가 대학생의 특권인 줄 아느냐고 말이야. 물론 처음에는 대학생의 특권이라 여겨지던 데모에 참가하는 게 무슨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던 것도 사실이야. 내가 학생 때는 데모하지 않는 대학생이 비정상으로 여겨질 만큼, 대학생의 배지 같은 게 데모였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가 세상을 이끈다는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야. 지금처럼 대개가 대학생이라 대학생을 전혀 유별나게 보지 않고 오히려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에 찌든 가여운 청춘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때는 대학생을 지성인이요, 사회를 이끄는 세력으로 봐주던 시절이었으니까. 대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고 대학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중요하다고 자부한 것도 사실이었어. 그런데 그런 우쭐함은 아주 잠깐이었어.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어. 흔한 농담에서 ‘공돌이’, ‘공순이’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우리는 집회와 시위에서 작업복을 똑같이 입은 사람들을 만나게 됐어. 그들은 공돌이, 공순이란 말 대신에 노동자라는 말을 썼어. ‘여러분도 일을 하고 봉급을 받게 되면 다 노동자인 사람’이라고 했어.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모습은 당당했어. 자신들이 일하는 처지와 환경이 어떠한지, 왜 그런 대접에 분노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말했어. 그런 말들은 내가 학교에서 읽는 어떤 책보다도 감명 깊었어.

장애인들과 말을 섞고 같이 밥을 먹게 된 것도 집회와 시위를 통해서였어.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내가 만난 장애인 친구는 단 한명도 없었거든. 아주 약한 소아마비 말고는 학교를 다니는 장애인을 볼 수 없었으니까. 집회에서 만난 장애인과 화장실을 같이 가고,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찾아 헤매면서야 사회가 만들어낸 장애의 고통을 알 수 있었어. 지금도 한 겨울에 장애인들과 집회를 하다 보면 마음이 참 아파. 털모자와 목도리로 꽁꽁 싸매고도 추워서 발을 동동 굴리며 나는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인들은 입술이 시퍼렇게 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면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 사람들이 때론 온몸으로 땅바닥을 기고 발음 안 되는 혀 대신에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에 전율을 느끼곤 해. 그 사람들의 말은 TV에서나 라디오에서는 들을 수 없어. 국회의사당에서도 볼 수 없어. 더 좋은 세상이 되면 안 그렇겠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보려면 집회와 시위에 나가야 해. 그래야 그들을 만날 수가 있어. 나보다 어린 청소년들, 국적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로 만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집회와 시위야.

그래서 집회와 시위는 내가 모르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얘기가 터뜨려지는 무대야. 내가 알려하지 않던 사연과 진실을 품고 있는 보물 상자야. 그런 보물 상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라면 자신들이 무시하던 사람과 사건에 맞닥뜨려 자기 사회를 돌아보고 문제를 점검하고 고칠 거야. 하지만 그런 보물 상자를 위험물질 취급하고 자물쇠를 채우는 사회는 신호를 무시하고 돌진하는 특권차량 운전자와 같을 거야.

모든 인권 중에서도 특히 ‘목소리를 낼 권리’는 모든 사람의 당연한 권리여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 혼자서 글 잘 쓰고 웅변을 잘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뭉쳐서 소리를 내도 들릴까 말까한 처지에 있어. 그래서 집회와 시위는 함께 목소리를 낼 권리인 거야. 지금 우리가 권리라고 말하는 것들은 죄다 한 때는 특별한 사람들만 누리는 특권이었던 것들이야. 특권이었던 것을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만드는 힘은 특권 때문에 홀대받은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는데서 나오는 거야. 특권을 모두의 권리로 만드는 것은 권리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야.

집회와 시위를 내가 처음에는 대학생의 특권의식으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금방 그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됐어. 집회와 시위는 지금의 사회질서 속에서는 목소리를 무시당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야. 엄마는 ‘너 아직도 데모에 나가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집회와 시위를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야.

또 다른 이유는 뭐라 정확하게 짚을 순 없지만 사람들에게 미안해서야. 미안하고 책임감을 느껴.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일에 대해서 누군가 목소리를 내긴 내야 하는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외롭지 않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이야. 그렇게 모이는 우리들 목소리의 방향은 두 개인 것 같아. 한 방향은 우리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쪽을 향해서 지르는 것이고 한 방향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야. 저쪽을 향해서는 ‘너희가 아무리 강해도 세상만사를 100% 너희 뜻대로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고 알리는 것이고, 우리를 향해서는 ‘너만 그런 고민 하는 게 아니었어. 나도 그랬어. 우리 서로 경쟁자로만 알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뭔가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서로를 토닥이는 거야. 집회와 시위 속에서는 국가대항 스포츠 경기 때 느꼈던 ‘우리’와는 다른 성격의 ‘우리’라는 걸 느껴볼 수 있어.

집회와 시위를 하다보면 정부나 시위 반대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말로 하라’는 것이야. 법 어기지 말고 교통방해하며 소란 떨지 말고 고상하게 말로 하라는 것이야. 하지만 그들이 말로 대접하는 것은 자신들이 만든 무대에 설 수 있는 사람의 말 뿐이야. 엄마도 그 우화 알지? 서로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내놓은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 말이야. 두루미는 여우를 초대해 놓고는 긴 주둥아리의 호리병에 음식을 내놓아. 여우의 주둥이로는 좁은 구멍의 호리병에 든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찬가지로 여우는 두루미를 초대해놓고는 납작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놓고 두루미의 주둥이로는 접시의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마찬가지야. ‘말로 하라’고 하면서 말할 수 있는 무대와 방식을 일방적으로 정하는 쪽이 있고, 그런 쪽에서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쪽의 말을 말로 대접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방식이 집회와 시위야. 집회와 시위는 모두에게 권리이지만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정직한 말보따리라고 생각해. 말을 독점한 사람들이 싫어하는 집회와 시위를 통해 말 못해온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말로 할 수 있는’ 기회와 통로야.

엄마가 신뢰하고 좋아할만한 분은 목사님일 테니까 내가 목사님 얘기를 할게.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람 중에 마틴 루터 킹이란 목사님이 있어.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어. 정부가 싫어하는 얘기를 하고 정부가 하는 전쟁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리 됐다고 여겨지고 있어. 그 목사님이 죽기 전 마지막 설교를 했던 교회에 가본 적이 있어. 내가 뉴욕에 인권연수 갔을 때 다니던 학교 바로 옆이 그 교회였거든. 그 교회 문가에는 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방에 걸어뒀던 골고다의 기도하는 예수 그림이 걸려있었어. 엄마가 좋아하던 그림의 원본을 그곳에서 보니 괜히 반가웠어. 그 목사님은 목숨을 위협하는 데모에 나갈 때마다 기도를 하고 나갔다고 해. 아마 그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간절한 기도였을거야. 한 번은 그 목사님이 데모를 하다가 옥에 갇힌 일이 있었어. 그런데 동료 목사들은 옥에 갇힌 그 분을 돕기는커녕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어. 과격분자니 어쩌니 말이야.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동료 성직자들에게 비난을 당했으니 그 목사님이 얼마나 속상했겠어. 동료 성직자들의 비난에 대해 그 목사님은 감옥에서 아주 긴 편지를 썼어. 그 중에 이런 말들이 있어.

‘왜 말로 안하고, 왜 협상을 안 하고 데모를 하느냐’는 비난에 대해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어. 협상이야말로 데모를 하는 목표라고 말이야.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에 맞서서 시위를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위기와 긴장감을 높여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가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데모의 의미라고 했어. 사회에서 다뤄야 할 쟁점들을 제대로 부각시켜서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시위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바라고 말이야. 사회가 발전하려면 대충 봉합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이 필요하고, 자신이 벌이는 시위의 목표는 그런 긴장감을 만들어서 협상의 문호를 열게 만드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어.

‘말로 하라’는 정부와 반대자들에게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 ‘말로 하자고!’, 그러려면 무시하고 듣지 않으려는 얘기들에 대해 귀를 열고 뭔가 양보하려는 태도로 나와야지, 우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 너희들 맘대로 해보라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좀 참고 기다리라’는 말에 대해서는 목사님은 이렇게 대꾸했어. 특권층이 자신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일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없었다고, 우리들의 권리는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요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피나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고. 기다리라는 말은 항상 결코 안 된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여 왔다고 말이야.

‘시위하는 사람들이 편의대로 법을 안 지키면 법질서가 바로 설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어. 법에는 공정한 법과 불공정한 악법 두 유형이 있다고 했어. 킹 목사 자신은 공정한 법을 지키는데 제 일인자가 되고 싶다고. 반대로 불공정한 법에 대해서는 복종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책임감을 지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사회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필요하다면 악법에 맞서 감옥의 형벌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법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앞에서도 말했지만 시위와 집회는 정말 힘들고 피곤하고 때론 위험한 행동이야. 그런데도 그걸 만들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어. 자신이 인간답다고 느끼려면 외면해선 안 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소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야. 최근에 장애인 시설에서의 성폭력 사건을 다룬 실화 영화 ‘도가니’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어. 많은 사람들이 ‘영화 한 방’으로 문제가 해결됐다는 말을 해. 난 그런 말에 좀 빈정이 상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진심과 성의를 의심해서가 아니야. 다만 그 영화를 보고 느끼고 분개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사건 이후 7년여 동안 농성하고 쫓겨나고 외면당하며 거리에서 외쳐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런 영화가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 한 방’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많았으면 좋겠어.

요즘도 시위 소식이 TV에 나오면 엄마는 지금 어디 있느냐는 확인을 하곤 하지.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휴대전화로 확인을 한다는 것이야. 그럼 난 ‘일 때문에 어디 와 있다’는 애매한 대답을 하곤 해. 그리고 엄마는 애매하게 속아주곤 해. 그냥 몸조심하라면서. 배고프고 춥고 욕먹어도, 미워도 다시 한 번 집회와 시위현장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우리에겐 열리고야 말 문이 있다고 생각해

작성일자 : 2011. 8. 30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9-10월호에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9] 고향에 대한 권리

 

엄마, 이 글을 쓰기 30분전 쯤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의 핸드폰 소식이 끊겼어. 경찰 유치장에 들어간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어. 엄마 아빠보다 두 살이 많으신 칠순을 넘긴 신부님이야. 내가 태어나던 무렵 신부가 되셨고 40여 년 이상을 복무하다 몇해 전 은퇴를 하셨지. 은퇴한 사제가 왜 유치장에 가게 됐으며 그곳에서 지인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마음이 편안하다. 있을 곳에 있다”였을까? 그건 한마디로 고향을 간직하고픈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야.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후 돌아가지 않은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먼 산 같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나한테도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건 몰랐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향수라고 하잖아. 그런 향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담은 책과 영화가 아주 많아. 이십대 때 내가 아주 힘들었던 어느 날, 나는 책속의 주인공들을 흉내 내어 고향에 가보기로 맘먹었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는데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표를 끊고 엄마 아빠의 고향이자 내 본적지인 그곳으로 향했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일찌감치 서울로 오셔서 생활하시다 돌아가셨기에 그곳에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힘들고 지친 내게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떠오르는 추억이 아주 많았어.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몇 년 간 중병을 앓아서 엄마 아빠는 나를 한동안 고향 할머니 댁에 맡겼잖아. 그래서 나는 도시 아이지만 시골생활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게 됐고 고향에 대한 향수란 걸 갖게 된 거야.

 

시골에서는 어린 아이도 할 일이 아주 많았어. 저녁나절 할아버지께서 독한 모기약을 뿜어 놓고 방문을 꼭꼭 닫아두시면 한 시간 쯤 후에 들어가 파리모기를 쓸고 닦는 일, 끼니때마다 남은 잔반을 모아 돼지 여물통에 갖다 넣는 일이 내 일이었어. 코를 처박고 먹어대는 돼지를 구경하는 일은 내게 질리지 않는 놀이였어. 졸려 죽겠는데 독실한 신자인 할머니는 저녁예배에 날 꼭 데려가셨고 예배당에서 방석을 베고 자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나온 언덕위로 별빛이 비처럼 쏟아지곤 했어. 그 예배당은 엄마 아빠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어. 뒷마당에는 키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떫다고 따주지 않으셔서 종일 운 적이 있었어. 결국 지친 할머니가 장대로 따주셨는데 정말 떫어서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감을 따는 계절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던 할머니 댁에는 저녁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마루위에 TV를 얹어놓고 평상에 앉아 연속극을 봤어. 나는 주인집 손녀 행세한다고 평상 가운데에서 이불을 두르고 위세를 떨곤 했지. 가을 벼가 익을 무렵 내 키가 벼보다 작았던지 바람 불 때마다 황금물결이 내 머리 위에서 출렁거렸던 기억도 나.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내 기억의 사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 하지만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질 무렵이었고, 시골 터미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표를 사긴 했는데 아는 이 없는 시골마을에 그 밤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어. 게다가 그 차가 막차였기에 나는 10여 분 정도 남은 추억들을 되새김질 한 후 ‘다음에 다시 오자’며 서울행 표를 끊을 수밖에 없었지. 그 후로 다시 가보진 못했지만, 그날 떠올린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내 굳은 머리와 맘을 따뜻하게 녹여줬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몇 해의 기억이 평생 그렇게 푸근한 것인데 가족 대대로 살아왔고 앞으로 자녀들도 살아갈 것이라 믿는 곳에서 쫓겨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그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따질 수 없고 잴 수 없는 것이겠지. 앞서 말한 신부님이 유치장에 끌려가신 이유가 그런 고향 때문이야.

 

그 신부님은 고향을 간직하는 게 평화라고 믿고 평생을 실천해온 분이야.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고향과 평화란 이런 것이야. 태어난 고향을 떠나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는 곳은 제2의 고향이 되지. 그래서 일자리에서 노동자가 함부로 쫓겨나지 않는 것, 또 쫓겨난 노동자가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평화라고 하셨어. 고향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 등 온갖 생물이 저마다의 색깔과 소리를 내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런 생명들이 서식처를 잃지 않도록 생명들의 고향을 보전해야 한다고도 했어. 농부가 땅을 또 어부가 바다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여성이라고 장애인이라고 이주노동자라고 무시하지 않고 품고 사는 것이 진짜 고향이고 평화라고 말이야.

 

내 생각도 신부님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부님이 쓰신 평화란 말을 인권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인권이란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코 박고 있으면 지켜지지 않는 거야. 모르는 사람의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고통에 대해 같이 아파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인권이야. 고통을 같이 겪는 것을 공감이라 하고, 그런 공감에 대해 책임지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인권이야. 그런데 안면도 없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책임이 그냥 생기는 건 아니잖아. 만지고 볼 수 있는 생명들을 만나고, 직접 사람들과 만나서 교감을 느낀 경험 없이 저절로 생길 수는 없는 것이지. 그래서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기억과 경험을 만들 수 있는 삶의 공간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야.

 

어린 날 고향에 대한 추억, 어린 나를 귀찮아하지 않고 놀아줬던 동네 언니 오빠들, 엄마가 그리워 울던 나를 업어주던 할머니의 등, 힘들어 하는 나에게 귀 기울여줬던 친구들, 이런 것들이 없다면 나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살아가기 힘들 거야. 그런 것을 통틀어 나는 고향에 대한 권리라고 말하고 싶어.

 

인권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권리들은 모두 ‘고향’을 핵심어로 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 예를 들어 사생활에 대한 권리, 집에 대한 권리, 교육에 대한 권리 등은 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할 권리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란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인 경우가 많아. 탐욕에 의해 고향이 파괴당하거나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 가난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감내하며 일해야 하는 사람들, 고향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사람들, 일자리를 얻고 가정을 꾸린 제2의 고향에서 해고되어 출퇴근길과 아이의 통학 길, 그리고 이웃들, 이런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정치경제 또는 이주, 환경, 인권의 문제로 얘기되지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고향에 대한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유치장에 들어간 신부님이 40여 년 이상 찾아다닌 것은 그런 고향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었어. 그리고 신부님이 이번에 찾은 것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들이었어.

 

이번 여름에 내가 제주도에 다녀왔다고 했잖아. 강정마을에 다녀왔던 거야. 엄마도 나랑 몇 해 전에 가봐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잖아. 섬 전체가 자연의 예술품의 전시장이라면 강정마을은 그중에서도 빛나는 작품들이 전시된 곳이야.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구럼비 바위는 한국에 하나밖에 없다는 용암너럭바위야. 맨발로 뛰어 놀아도 좋은 안전하고 넉넉한 바위이고 온갖 희귀생물이 그 바위틈에서 숨 쉬고 있어. 맑은 샘물이 그 바위 곳곳에서 솟아나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씻는다고 해. 그 이름도 정겨운 ‘할망물’이라고 불려. 마을로 들어가는 올레 길은 제주도의 올레길 중에서도 빼어난 경치를 뽐내는 곳이야. 그런데 정부에서는 그곳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선포했어. 이미 마을 주변에는 흉물스런 컨테이너 담장을 빼곡하게 둘러놨어. 구럼비 바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그 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고향을 빼앗겠다는 계획이야. 한국의 최남단에 세우는 해군기지가 북한과 관련이 클 것 같지는 않고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데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기 싸움에 소용되는 기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 평화의 섬이라 일컫는 곳에 그런 국제적 긴장과 갈등의 애물 덩어리를 만들면 평화의 섬이란 이름값을 하기는 어려워. 또 정부에서는 해군기지로 주민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는데 엄마도 나랑 가봐서 알겠지만 우리처럼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은 제주도의 자연과 거기에 어우러진 삶을 보러가는 것이지 군사시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잖아. 군사시설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다양한 게 취향이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야. 강정마을 사람들에게는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농부와 어부로 살아가는 삶이 가장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삶이야. 그래서 해군기지 건설이란 철퇴를 맞은 후 마을 사람들은 4년이 넘도록 그것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어.

 

내가 동료들과 그 마을에 갔던 날, 마을은 뒤숭숭했어. 그날 새벽에 경찰이 마을회장님을 비롯해서 몇 분을 잡아갔던 거야. 마을회관에서 밤중에 형사소송법 강의와 토론이 있어서 가봤어.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 시위도 하고 농성도 하고 경찰과 해군에 맞서 온갖 실랑이를 해야 하니 매 맞고 끌려가고 벌금이 떨어지고 소환장 날아오는 일이 마을의 일상이 됐어. 농사짓고 물질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된 거야. 고향을 지키겠다는 게 그 죄명이지. 그런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같이 고민하는 자리였어. 변호사의 법 강의가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는데 난 한숨과 감탄을 번갈아해야 했어. 고향을 고향 그대로 지키고 농부와 어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범죄가 되고 처벌받고 있다는 데 한숨이 났어. 한편 감탄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보여준 마을 분들의 태도였어. 나는 그런 성숙한 토론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어. 서로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하거나 잘난 척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모습이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토론회일수록 더 심하거든. 그런데 마을 분들은 앞서 말한 사람과 겹치는 얘기는 피해하면서 4년간 싸우면서 쌓아온 공동지식과 체험을 근거로 해군기지가 왜 안 되는 지를 조목조목 제시하셨어.

 

또 인상 깊었던 건 나처럼 처음 보는 이방인이 마을회관에 나타났어도 아무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 거야. 너무나 자연스런 일원으로 대해주셨어.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외부의 불순세력이 주민들 일에 참견하러 나타난 것일 텐데, 그럼 경계와 의심이 우선 아니겠어? 그런데 마을 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 그저 이웃으로 대해주셨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다녀갔고 또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어.

 

그런데 토론을 하면 할수록 막막했던 건 그 어떤 법도 그분들의 편이 아니란 것이었어. 그분들 편을 들 수 있는 현행법이 있다고 해도 그건 권력자들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고 있었어. 얘기가 이어질수록 법이 그분들에게 힘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들을 할퀴고 겁줄 수 있을까에 소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지. 법 전문가가 아닌 인권활동가로선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인권활동가들은 악법을 어김으로써 악법을 이깁니다. 혼자서 어기면 불법으로 처벌받겠지만 떼거지로 어기면 정의가 악법을 이깁니다.”라는 답변이 있었어. 그제야 마을 분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치셨어. 자정이 가까울 무렵까지 토론은 이어졌고, 그 밤중에서야 풀려난 마을회장님이 인사말을 하셨어(이분은 신부님 이 잡히던 날에 다시 연행되셨지). 하루 종일 자신 때문에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저는 평화,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선조들이 살아왔고, 우리가 더불어 살아온 이곳을 잘 지켜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도리를 다하고 살면 그게 평화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강정마을 지키자! 지키자! 지키자!”는 구호를 끝으로 모임이 마무리 됐어. ‘지키자’는 한마디 한마디에 고향에 대한 애틋함과 설움이 젖어 있었어.

 

정부가 해군기지를 밀어붙이는 두 가지 논리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야. 그런데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 뭐가 문제이기에 강정마을을 괴롭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유엔이 내놓은 비판과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어. 유엔은 전 세계 국가들이 회원국인 기구이고 물론 한국도 회원국이야. 이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인권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져서 60여 년 이상 인권에 대한 국제기준을 만드는 일을 많이 해왔어. 유엔도 분명 국가들의 기구이면서 왜 국가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논리를 반박했을까? 뭔가 타당한 근거가 있으니까 그랬을 것이고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거야. 유엔의 주장은 강정마을 분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아.

 

유엔의 이야기 중에 ‘인간안보’와 ‘발전에 대한 인권’이란 게 있어. 먼저 ‘인간안보’란 말은 ‘국가안보’를 반박하기 위해 만든 말이야. ‘인간 안보’에 따르면 지금껏 국가에서 주장해온 안보 개념은 너무 편협하다는 거야. 왜 편협하냐 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안전이 아니라 정부에게 필요한 안전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안전을 지키는 것은 시민들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인데 정부가 독점하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야. 국가들은 흔히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킨다는 이유로, 모호한 국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국가안보’를 사용해. 그리고 국가 권력자에 대한 약한 신뢰 때문에 초조해서 ‘이건 나랏일’이라면서 시민들의 참여와 권리행사를 막기 위해서 ‘국가안보’라는 걸 도깨비방망이처럼 휘둘러왔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국가안보의 주장은 사람들이 진짜 안전하고 싶은 영역에 대한 관심사를 쉽게 무시한다는 것이지. 가령 사람들에게 필요한 진짜 안전은 질병, 굶주림, 실업, 범죄, 정치적 억압, 빈부격차의 첨예화, 정치적 억압, 환경위협 등과 관련된 것이야. 그래서 안보에 대해 진짜 관심을 가진 정부라면 “나와 가족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까?” “직업을 잃지 않을까?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돈 걱정 없이 학교나 병원에 갈 수 있을까?” “정부로부터 감시나 무분별한 연행과 수사를 당하지 않을까?” “성별 때문에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종교, 인종 등의 차이 때문에 모욕이나 괴롭힘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등의 질문에 답해야 할 거야. 그런데 ‘국가안보’는 외부의 적을 운운하면서 내부에서 나오는 반대나 저항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국가가 맘대로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억누르기 때문에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국가가 오히려 자국민에 대해선 제일 위협적인 위험이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유엔이 내놓은 ‘인간안보’는 안보의 중심을 국가가 아니라 ‘사람’에게로 옮기자는 것이지. 사람에게로 중심 추를 옮겨서 저울질을 해야 진짜 문제들의 무게를 재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거야. 인간안보는 첫째 기아, 질병, 억압 등의 만성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 집‧직장‧동네 등 일상생활 속에서의 갑작스러운 어려움과 해로움, 생활의 붕괴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뜻한다고 했어. 그런 인간안보가 바로 서야 진짜 국가안보가 튼튼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

 

또 유엔에서 말하는 ‘발전’은 숫치가 높아지고 막대그래프가 올라가는 경제발전이 아니야. 경제는 성장했는데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 악발전이라고 해. 인권에서 말하는 발전에 대한 인권은 ‘저발전, 미발전, 미개한 곳’이라고 함부로 낙인찍히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유지할 권리야. 개발업자는 골프장과 호텔 짓는 것을 발전으로 여기지만 농사짓고 물질하던 농부와 어부의 삶이 그런 골프장과 호텔에서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는 삶으로 바뀌는 게 발전이 아니라는 것, 당국자는 군사기지 주변에 만들어질 시설과 거기에서의 소비증가를 발전으로 여기지만 그건 발전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에게 죄짓는 일이라 여기는 것, 무기경쟁과 기지건설로 만드는 긴장과 대립이 아니라 있던 무기와 기지도 없애고 줄이는 것을 진짜 발전으로 여기는 것이 ‘발전에 대한 인권’이야. 이런 점에서 강정마을 분들의 고향을 간직하려는 마음과 실천은 지구사회가 공통문제라고 느끼는 것들과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어.

 

결론적으로 인간안보와 발전이란 ‘일자리가 줄지 않는 것,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 사회양극화가 폭력적으로 분출되지 않는 것,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 침묵당하지 않는 것’이라 했어. 인간안보는 무기와 군사기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에서 지켜진다고도 했지. 유치장에 들어간 신부님이 바라는 것은 강정마을 사람들이 고향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강정마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 하나야. 어느 날 몸과 마음이 힘들 때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 푸근한 고향에 대한 권리가 참 사무치는 오늘이야.

작성일자 : 2011. 7. 8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7-8월호에 실렸습니다>

 

모욕을 거부하는 사회(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엄마는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너무 다르다고, 괜히 대학 보내서 딸 버린 것 같다는 원망을 하곤 해.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된 후로 엄마 딸이 아닌 딴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이야.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다른 사람이 돼버렸어. 어릴 때의 나는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 모범생이었어. 규칙으로 정해진 건 도무지 어길 줄 모르고, 시키지 않아도 미리 찾아서 할 일을 하고, 어른들에게 깍듯하여 동네방네 칭찬만 먹고 자라는 그런 아이였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말투도 거세지고, 법도 무서워하지 않고, 경찰서에도 들락거리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위아래 안 가리고 면전에서 따지는 그런 인간이 돼버렸으니 엄마도 당황스럽겠지만 나도 내 모습에 놀라곤 해. 그런데 그건 엄마가 추측하는 것처럼 괜히 대학 보내서 몹쓸(?) 사람들이랑 어울려서 그런 게 아니야. 날 180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건 모욕과 폭력이었어. 그리고 그것에 맞서서 나를 지키려다 보니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내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아.


첫 경험은 매 맞는 일이었어. 난 자라면서 엄마 아빠한테 맞아본 일이 없었어.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고부터는 집단으로 맞는 일이 흔했어. 맞는 게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나만 맞는 게 아니었기에 참아 넘길 수 있었어. 반 전체가 맞거나 지각한 사람 모두 맞거나 할 때는 별로 창피할 것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어. 성적표가 나오는 날처럼 집단으로 맞을 것이 예상되는 날에는 교복치마 속에 반바지를 껴입고 가곤 했어. 심한 경우엔 종아리를 때리지만 그건 자국이 남으니까 주로 엉덩이를 때렸거든. 그렇게 맞다보니 주간행사처럼 느껴졌어. 그렇게 면역되어버려서였는지 전원이 아니라 몇몇 아이만 찍혀서 따로 매를 맞을 때도 무덤덤하게 지켜볼 수 있었어. 내가 따로 찍혀서 맞는 게 아닌 이상 별 문제로 보이지 않았어. 따로 찍혀서 맞는 아이에 대해선 그 애가 맞을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나만 찍혀서 매를 맞게 됐어. 나는 공상을 무지 즐겨 해서 수업 시간에 집중이란 걸 잘 못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강연회 같은 데 잘 안가. 가봤자 딴 생각만 하니까 그냥 발표문만 챙겨 읽고는 해. 수업시간에 머릿속에서 온갖 주인공들을 데리고 얘기를 꾸미고 있다 보면 너무 빨리 종이 울리곤 했어. 그런 나에 대해 아는 선생님들은 “숙아, 지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라고 가끔 내 공상 속을 비집고 들어오곤 하셨어. 그럼 나는 머리를 한 번 털고 집중하려고 노력하곤 했지. 그런데 그날은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선생님이었어. 내가 싫어하는 수학 과목이었거든. 성적이라는 업적으로 등급이 나눠지는 학교 사회에서 그 시간은 내가 존중받을 수 없는 시간이었어.


수학 선생은 먼저 백묵을 내 머리에 집어던졌고, 다짜고짜 의자 밑으로 끌어내려선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어. 내 머리는 산발이 됐고 머릿속은 뒤집힌 서랍이 돼버렸어. 그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꿇어 앉아있어야 했어. 아픈 것 보다는 굴욕감이 날 힘들게 했어. ‘무슨 생각하고 있니? 집중하면 안 되겠니?’라고 말 한마디 먼저 건네줄 수는 없었던 거야? 그게 그렇게 어려워? 도살장에 끌고 가는 동물처럼 날 패대기쳐야만 했을까? 종은 도대체 언제 울리는 거야? 학교 안에 숨을 곳이 있을까? 이참에 아예 학교를 관둘까? 나 홀로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


처참하게 얻어터지고 있는 나를 다른 친구들이 멀뚱멀뚱 쳐다봤을 때 야속하고 괘씸하게 느껴졌어. 또 영화 속 광경이 떠올랐어. 감옥이 있고 죄수들이 있는 장면, 한 죄수가 간수에게 두들겨 맞는데 수치심만 집어 삼키며 지켜봐야 하는 동료 죄수들이 나오는 그런 영화 장면이었어. 그 장면 속에 딴 친구가 그렇게 맞고 있을 때 무덤덤하게 바라봤을 내 눈동자가 겹쳐졌어. 그 때의 수치감은 아주 오래 갔어. 집에 와서 머리를 박박 감아도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어.


이게 중1 때의 경험이었다면, 그런 식의 경험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고3 때였었어. 내 담임은 고3 담임만 18년을 한 입시전문 베테랑을 자처하는 분이셨지.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자율학습에 단 한 명의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게 그분의 원칙이었어. 나도 처음에는 그 원칙에 따랐고, 그걸 따르는 동안에는 난 선생님의 사랑받는 제자였고, 교실의 규율을 잡아주는 그 선생님은 내게 최고의 선생님이었어. 그런데 얼마 못가 지쳤고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70여명이 가득 차 있는 교실에서 하루 종일 환기는 드물었고, 온갖 땀 냄새와 반찬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보내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난 선생님께 말했지.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으니 정규수업이 끝나면 귀가해서 새 기분으로 공부하고 싶다고. 그때 선생님은 이전까지 날 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사람으로 변했어. 한 명이 빠져 나가면 전체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그런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그래도 난 그러고 싶다고 했고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를 댔어. 그러자 선생님은 “네 종교가 OO지? 네 종교에서 네 하나님은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가르치디?”라고 했어. 난 뭔가가 내속에서 허물어져 내리는 걸 느꼈어.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그때 나에게 신앙은 나의 전부와 같았거든. 야자 안한다고 해서 내 하나님을, 내 신앙을 뭐라고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 그냥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와 저녁 내내 울며 시장바닥을 쏘다녔어. 그 분노와 모멸감을 식히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다니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리고 결심했지. 이대로 굴복할 순 없다고. 정규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4시경, 그리고 보충수업 2~3시간이 더 있고 또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학습. 나의 의무사항은 정규수업시간까지라고 여겨졌어. 정규수업이 끝나면 담임이 종례를 하러 교실에 들어오는데, 난 정규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왔어. 가끔 종례를 하러 오는 담임과 복도 한복판에서 마주쳐 서로 눈싸움을 했지만 그냥 버텼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학년 주임이 날 불러서 담임 속 썩이지 말라는 경고를 했고, 그런 신경전이 고3말까지 이어졌어.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고, 나는 내 결심대로 계속 행동했어. 왜 불러서 패지 않고 가만 놔둘까 의아했지만 의문은 막바지에 밝혀졌어. 대입이 끝나고 입학원서를 써야 할 때도 담임은 날 없는 존재로 취급했지. 다른 아이들이 다 원서를 써서 나가고 교무실이 텅 비도록 담임은 날 쳐다보지 않았어. 내 원서를 써줄 생각이 없었던 거야. 보다 못한 다른 선생님이 나서서 거들어 주셨기에 간신히 원서를 작성할 수 있었지.


나의 신앙을 들먹이며 나를 모욕했던 사람 덕분에 난 자유가 뭔지 알게 됐어. 정규 수업만 마치고 가방을 메고 나온 학교 밖에는 찬란한 태양과 맑은 공기가 있었어. 그걸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느끼고 들여 마시며 학교건물을 뒤돌아볼 때 나는 가슴 벅찬 뭔가를 느꼈어. 그리고 집에 돌아와 씻고 빨래와 청소도 하고 저녁노을을 보며 숨을 고르다가 다시 공부를 하는 게 정말 좋았어. 난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아니라 정말 자율학습을 하는 거였으니까.


난 그때 받았던 모욕에 대해 대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몸으로 옮겼어. 만년 모범생이었던 내가 저지른 최초의 반항이자 대형 사고였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만큼 내 자신이 맘에 들었던 때가 없어. 내가 모욕감을 접고 원래 담임이 정했던 테두리로 돌아가 얌전히 굴었다면 난 다시 사랑받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나를 나로 만들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난 그때 그렇게 대들고 버텼던 내가 정말 자랑스러워.


학창 시절의 그런 경험이 어린 날의 풋내나는 행동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킨 것은 그런 나를 지지해주는 비슷한 목소리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야.


“폭력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떤 특정한 행위에 대한 권력의 승인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다. 노예가 노예주인의 허락을 받아서만 할 수 있는 일, 가령 일요일에 교회에 가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하거나 한가로운 시간에 옷을 수선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인 톨스토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야. 유명인의 말뿐만 아니라 내 눈앞에서 실행에 나선 사람도 있었어.


“저희 바람은 아주 상식적인 것입니다. 방과 후의 시간을, 방학 동안의 시간을 당연히 학생들 자신의 적성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학생 개개인에게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10여년 후에 나처럼 강제 자율학습에 대해 따지고 나온 고등학생이 한 말이야. 그 학생은 강제 야자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겠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지. 난 그때 정말 반가웠어. 자기 자신이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조건에 맞서 싸우는 동료를 만난 것이어서 말이야.


요즘 책에서 모욕과 품위에 대한 얘길 읽었어. 사람은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여길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 된다고 했어. 그래야 자신의 소중함과 명예를 지킬 수 있는 거니까. 여기서 명예란 무슨 등급을 매겨서 달라지는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가지는 존중받을 자격을 말해.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순간에 자기 삶을 돌아보고 그 이후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런 변화의 가능성만으로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했어. 품위 있는 사회란 구성원들의 변화의 힘을 눈여겨 볼 줄 아는 사회야. 그런 눈을 갖고 있기에 그 구성원들이 인간에 대한 모욕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사회야. 따라서 품위 있는 사회란 사람을 모욕하는 제도를 허용할 수가 없어. 가령 어리다는 이유로 때려도 된다는 것이 합법화돼있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어린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고, 경쟁적으로 등급을 매겨서 사람대접을 달리하는 사회나 일하는 사람을 헐값으로 대우하는 사회는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야.


학교에서 그렇게 모욕에 맞선 이후 엄마 딸은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이 모욕을 겪고 모욕을 참아낼 것을 강요받는 일을 많이 보게 됐어. 그럴 때 멀뚱멀뚱 쳐다보지 않고 내가 모욕당한 것처럼 울컥하다보니 엄마 딸이 많이 변하게 된 것 같아. 모욕하고 창피 주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사람이 제 자신의 값어치를 ‘싸고 형편없는’ 것으로 느끼게 유도하는 일만큼 나쁜 일은 없는 것 같아.


미국의 어떤 작가는 직접 저임금 일자리에 취직해서 경험한 바를 책으로 썼어. 가난한 사람들이 집세를 더 많이 지출할 수밖에 없는 생활조건이나 오랜 시간 힘들게 일하면서도 얼마나 박한 대우를 받는 지 등에 대해 쓴 거야. 그 사람의 고발 중에서 내게 가장 슬펐던 부분은 “자신이 별로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믿게 하면 자기가 받고 있는 임금이 실제로 자신의 가치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는 거였어. 수많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창피하고 불쾌한 구직과정, 끊임없는 감시, 관리자의 엄한 질책 등 모욕을 계속 주다 보면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낮게 여기게 되고 그것이 저임금을 유지하는 일부요인이라는 거였어.


남 얘기 같지가 않더라고. 가령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제때 밥 먹고 제때 잠자겠다는 요구를 내세웠다가 회사가 동원한 용역들에게 매 맞고 경찰에 잡혀간 노동자들이 있어. “아침에는 아침밥, 점심에는 점심밥, 밤에는 잠을 자자!”가 그들의 요구였어. 밥 때와 잠자는 때를 난폭하게 바꾸는 근무시간 때문에 생활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야. 40~50대 나이의 노동자들에게 정신교육이라며 오리걸음 걷기 등의 기합을 준 회사도 있었어. 베트남에서 온 건설 노동자들 열 명이 구속되기도 했어. 야간 근무조로 12시간을 일하고 아침 7시에 밥을 먹는데 30미터 높이의 작업장에서 밥 먹으려고 내려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아냐. 그런데 5분이라도 일찍 내려오면 임금에서 1시간 임금을 제하는 등 야박하게 굴기가 다반사였대.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예나 기계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어 출근을 거부했는데 그걸 업무방해죄로 잡아간 거야. 또 여기저기 대학에서 청소일을 하는 분들이 노동조건을 놓고 다투는데 최저임금을 달라거나 밥을 식당에서 먹게 해주고 휴게실을 만들어달라는 등의 최소의 최소에 해당하는 요구사항들이 많아. ‘그까짓 거도 못해 주냐?’고 생각할 일들이 노동자에게 금지되는 것은 그렇게 계속 모욕을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싸구려로 여기게 만들고 그걸 이용해 계속 헐값 대우를 하려는 음모라는 생각이 들어.


수 년 또는 수십 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대량으로 해고돼서 장기간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도 있고, 헐값의 대우와 소모품 폐기 처분하듯 하는 해고에 맞서 6년 이상 싸운 사람들도 있었어. 그럴 때 구경꾼인 사람들이 쉽게 던지는 말은 ‘원래 먹고 사는 게 그렇게 냉혹한 거다. 회사가 어려워서 자른다는데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 혹은 ‘최저생계비도 못되는 그런 일자리가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버티냐? 그냥 딴 데 가면 그만이지’라는 식이야. 물론 당장의 생계 문제도 걸려있고 그건 중요한 문제야.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사람들이 버티고 싸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에 모욕을 입고 물러설 수는 없다는 거야. 나는 쓰다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고 나는 싸구려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싸우는 거야. 그런 싸움으로 인해서 ‘차마 말조차 못하고’ 문제로부터 ‘떠나가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인간대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모두에게 던지고 있는 거야.


웃기는 얘기지만 난 달걀 후라이를 할 때 달걀을 깨는 순간을 무서워해. 그 순간에 기름이 튀어 오르는 게 무서워서 달걀을 놓쳐버리곤 하거든. 그래서 달걀을 잘못 깨서 후라이팬 밖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늘 걱정돼. 맛있는 요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달걀 후라이 하는 건데 적어도 잘못 깨지는 않겠다는 소심함에 사로잡혀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제도적인 모욕을 없앤다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아주 소심한 일이야. 당장 눈앞의 고통에 빨간약을 바르고 싸매는 것이 급해서 해야 할 일인 것이지, 장래의 거창한 목표가 아니란 말이야.


유별난 개인이 남을 모욕하고 학대할 수도 있지만, 아예 법과 제도로 모욕하게끔 만들어 놓는 일이 있어. 가령 한 남성이 여성을 무시하고 깔볼 수도 있지만 아예 법으로 만들어 여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일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또 성적이 뒤처진 학생을 우습게 보는 것이 개별적이라면,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등록금을 남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학교 규율로 만들어놓는 것은 제도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거야.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반말을 하는 어른도 있지만, 학교에서 학생은 맞아도 되고 머리카락을 잘려도 된다는 관행을 놔두는 것은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거야. 그래서 요즘 학생인권조례 만든다고 엄마아빠에게 서명해달라고 했던 건 그 반대로 ‘사람을 모독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만들자는 거였어.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많은 선생님이나 언론들이 교실붕괴를 얘기해. 물론 말썽장이도 많고 수십 명이 있는 교실에서 질서를 잡고 교육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렇지만 그 많은 어려움이 학생이라 불리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모욕할 이유는 되지 못해. 학생인권조례는 제도적으로 창피와 모욕을 주는 것만은 피하자는 아주 소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적극적이라면 교실안의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학비 등 모든 비용을 없애자, 입시교육이 아니라 취향별 교육을 받게 하자 등 요구할 수 있는 게 많아. 그런데 지금 요구하는 건 최소한 대놓고 모욕하지는 말자는 거야.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자율성에는 바보같이 행동할 권리, 현명하지 못하게 행동할 권리도 있어. 자율성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한이 있어도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를 책임질 권리가 포함돼. ‘잘못되면 어떡해?’가 아니라 ‘잘못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란 걸 인정하는 게 최소한의 출발점인 것이지.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인정하자는 것, 노조의 단체행동을 인정하자는 것은 충분히 살만한 임금, 일을 안 해도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보장의 권리, 뭐 그런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모욕하지 않는 최소한의 규정인 거고, 성폭력을 좌시하지 말자는 건 적극적 성 평등은 못돼도 최소한 모욕하지는 말자는 소극적인 거야.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일을 허용해 두면 그걸 당하는 사람들이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호소하기가 더 힘들어져. 당하는 쪽에선 오히려 당할만하다는 혐의를 쓰게 되고 모욕을 주는 쪽에선 그게 선이라고 의기양양할 테니 말이야. 모욕감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에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은 최소한의 조치야. 사람사이에 서로 공감을 하고 사랑을 하는 일을 권할 수는 있지만 강요할 수는 없어. 하지만 적어도 제도적인 노골적인 모욕을 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는 있어.


아주 옛날에 미국사회에서 이주민이고 허드렛일을 하고 남과 다른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죄 없이 억울하게 사형당한 사람이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미움에 찬 저주가 아니라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어. 나는 모욕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꿈이 이런 거라고 생각해. 모욕주고 모욕받는 일을 벗어나서 이런 공감과 사랑으로 적극적으로 옮겨가고 싶다는 꿈 말이야.



“아들아 … 행복한 유희 속에서만 네 전부를 다 소진하지는 말거라. … 박해받고 희생당하는 이들을 도와라.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더 좋은 친구들일 테니까. … 인생이라는 이 투쟁 속에서 너는 더욱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것이다.”

작성일자 : 2011. 5. 13

작성자 : 배여진

이글은 격월간 <사람>에도 실렸습니다.


퉁명스러움과 사회적 정의(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엄마나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가진 불만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그중에 제일은 말버릇이야. 내 말투는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퉁명스러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지. 엄마는 뭘 물어봐도 뚱한 나의 대꾸에 “막내는 전화하면 이런 일 저런 일 상냥하게 얘기하는데, 넌 도대체 왜 그러냐?”면서 “딸이 너 같이 생겨 먹었으면 무슨 재미로 딸 키우겠냐”고 한숨짓곤 하지. 그럴 때 나는 “엄마 닮아서 그렇지”하곤 또 입에 빗장을 치지. 사실 엄마의 퉁명스런 말투도 장난이 아니어서 “여자가 도무지 애교라곤 없어”가 아빠가 평생 입에 달고 사는 불만사항인 걸.


나는 인권활동하면서 어쩌다 정치인들을 만날 때가 있어. 무슨 법을 만들지 말라거나 만들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서야. 한 번은 어느 정당 정책위원장을 만났는데, 면담 끝나고 참석자들끼리 인사하는데 “제 정치인생 30년에 당신처럼 무서운 분은 처음 만납니다. 여자 분이신데 좀 부드럽게 하시죠”가 그 사람이 내게 건넨 말이었어. 얼마 후 그 사람이 성추행 사건으로 국회의원을 관두게 됐는데, 난 그 기사를 보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읊조렸지.


얼마 전에는 내 말투 때문에 버스에서 ‘패륜녀’가 됐어. 아빠는 늘 내게 상냥하게 전화하는데 난 늘 “왜? 그래서? 끊어!”라는 세 마디 밖에 안하잖아. 어렸을 때부터 난 공주고 아빠는 거의 하인 같은 분위기로 말을 주고받았기에 아빠와 통화할 때 내 말투는 남들이 납득 못할 천하 방자함이지. 게다가 아빠가 돈 문제로 집안을 시끄럽게 만든 직후 걸려온 전화인지라 난 아빠 전화를 이런 식으로 받았어.


“왜 전화했어? 내가 아빠 전화 안 받겠다고 했을 텐데.” 그러자 아빠는 “딸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 왜 집에 안 오냐? 아빠는 딸 보고 싶은데.” 나는 쏘아 붙였지. “아빠 꼴 보기 싫어 안 가”, 아빠는 계속 사정했지. “아빠가 이제 속 안 썩힐 테니까 집에 와라.” “몰라. 끊어!” 이렇게 전화를 끊고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뒤통수가 문득 따가운 거야. 둘러보니 버스 안의 사람들 모두, 특히 나보다 훨씬 젊은 애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무슨 아빠 전화를 저따위로 받냐?”고 수군거리고들 있는 거야. 아차, 하고 버스에서 빨리 뛰어내려 버렸지.


이 일을 후배들한테 얘기 했더니 “배운 녀자에서 패륜녀가 됐네”라고 한바탕 웃어 넘겼어. ‘배운 녀자’는 내가 얼마 전 신문에 쓴 칼럼 제목이야. 평소 내 말버릇을 아는 후배들은 더한 일 생기기 전에 말투 바꾸라고 조언했어. 자기들도 나랑 통화할 때마다 화난 것 같아서 겁난다고 말이야. ‘왜? 알았어. 끊어’ 이상의 말을 들어본 적 없는 그들이니 나도 뭐라 반박할 도리가 없었어.


퉁명스런 말투 뿐 아니라 나는 묻는 말에 대꾸하는 걸 정말 귀찮아해. 그래서 눈만 깜박거리거나 고개만 까닥거린 것으로 내가 대답했다고 혼자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중고교 시절엔 그 때문에 선생님들한테 머리를 많이 쥐어 박혔어. 게다가 인사 하는 걸 정말 싫어해.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가 아니면 뒷줄에 대충 서 있다가 뒤로 쓱 빠져버리고, 맞닥뜨려 인사해야 할 때는 쭈뼛쭈뼛이야. 이런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다들 이런 말을 해. ‘우리들이야 겪어봐서 언니 속이 안 그런 줄 알지만, 처음 본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알아? 좀 고쳐봐’라고.


나도 사실 걱정이야. 나와 친한 사람들, 혹은 나보다 잘난 사람들한테는 내 태도가 그냥 ‘저 인간 되게 뚱하네’ 정도로 받아들여져도 상관이 없어. 하지만 나보다 못한(것이 아니라 자칫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처지의 사람들한테 무시하고 모욕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겁나긴 해. 실제로 그런 일을 많이 겪으면서 반성도 많이 하고 말이야. 해마다 ‘친절해지자’를 새해 목표로 삼지만 ‘상냥함’은 접근불가 체질인지라 자주 속상해할 뿐 잘 고쳐지지는 않아.


애교 덩어리 아빠와 뚱한 엄마, 더 뚱한 딸, 쌀쌀맞은 딸, ‘욱’하는 아들과 상냥한 딸의 조합이 우리 집인 것처럼 이 세상에는 온갖 성격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어. 저마다의 뚱함과 쾌활함을 토해내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런 성질에 대해 겪으면서 이해하고 때론 부딪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제 성질의 장단점을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어.


그런데 나처럼 사람마다 제 성질이란 게 있는데 그걸 죽이고 일을 해야 할 땐 사정이 많이 달라져.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보수를 받으며 하는 일은 제 성질을 죽일 걸 요구하잖아. 그냥 묵묵히 참고 일만 하면 되는 수준이 아니라 늘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는 것 자체를 중요한 업무로 취급하는 게 요즘 세상이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늘 상냥하잖아. 전화로 뭘 문의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화기 속에서 미소가 튀어나오는 것 같이 응대하는 사람들, 내가 냉정한 거절을 표해도 ‘감사합니다’로 늘 답하는 사람들의 속은 어떨까?


엄마 자식 중 하나가 간호사잖아. 걔가 병원에서 무례하고 포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제 성질대로 쌀쌀맞게 대할 수가 있겠어? 걔는 내가 보내는 문자에 ‘응’이라는 한 단어 말고는 한 마디도 보태본 적이 없는 얘야. 그런데 일을 할 때는 늘 미소를 짓고 늘 갖은 말로 설명을 하고 들어야 하잖아. 대형마트, 백화점, 비행기, 식당, 은행, 전화 등에서 우리는 늘 그런 일하는 사람들과 마주쳐. 그들은 늘 웃어야 해. 아무리 개차반 같은 인간을 겪을지라도 말이야. 설령 부당한 일을 겪을지라도 ‘웃으면서’ 항의해야 해. 아니 항의가 아니라 ‘제가 뭘 몰라서 고객님께 불편을 끼쳤나 봅니다. 뭘 더 도와드릴까요?’라고 다 자신이 덮어써야 해.


내가 가던 단골술집 여주인한테 들은 얘긴데 근처 은행 직원들이 자주 온대. 술 마시면서 주로 하는 얘기가 자신들이 겪은 소위 ‘고객’들 얘기래. 하루는 어느 고객이 와서 뭔 심사가 뒤틀렸는지 동전 주머니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욕을 해댔대. 다들 일하다 말고 그걸 주워서 그 사람한테 되돌려줬는데 욕을 멈추지 않더래. 그런데 그 사람이 뒤돌아나가는데 한 직원이 “고객님, 여기 500원 동전 하나 더 흘리셨습니다. 저희 은행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거야. 그런 순간에도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하는 게 업무규칙이라며 그 은행원들은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였대.


그런데 내 주변의 사람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하면 ‘어쩜 그럴 수가 있어.’라고 화를 내지만, 내가 손님인 경우에는 그런 감정이 잘 안 생겨.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다”는 게 요즘 사람들 사이 유행어야. 이 말을 약간 바꾸면 ‘불의는 참아도 불친절은 참을 수 없다’는 거야. 조금이라도 불쾌한 느낌을 받으면, ‘야, 딴 데 가자. 내가 내 돈 내고 사먹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돼?’라고 자리를 박차는 경우가 많아. 이미 물도 따라 마셨고 화장실도 한 번 다녀왔어도 말이야. 약간 불친절한 것 같아도 그냥 있자는 의견은 인기가 없고, ‘불친절은 참을 수 없다’는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


늘 친절한 곳은 규격화된 미소와 인사를 제공할 수 있는 규모 있는 곳이고, 규격화되지 않은 응대를 하는 곳은 동네의 고만고만한 곳일 때가 많아. 그런 규격화된 친절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들은 친절에 점수를 매겨서 관리하니까 일하는 내내 노동자의 몸 뿐 아니라 감정도 쥐어짜고 있는 거야.


규격화되는 것은 친절과 공손함만은 아니야. 반대로 고압적이고 위협적인 태도를 늘 유지해야 하는 일도 있어. 내 전화 응대에 불만을 쏟는 사람들에게 애써 변명을 할 때면 “빚쟁이 전화에 하도 시달리며 자라서 전화가 공포스러워 그래.”라고 답할 때가 있어. 그리고 그건 사실이야. “너 몇 살이냐, 니 부모 집에 있냐? 돈 안 갚으면 큰일 날 줄 알라고 전해라”는 전화는 정말 무서웠어. 또 출입국 관리소의 직원들은 늘 턱을 바싹 잡아당기고 있지. 식당에서 알바하다가 불심검문 나온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과 맞닥뜨려 봤는데 대한민국 주민증이 있는 나였지만 정말 무섭더라구. 주민증 없는 이주노동자가 그런 일을 겪으면 정말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 또 우리를 집에서 내쫓으려 왔던 집달리 아저씨는 얼마나 무서웠는데. 우릴 길거리로 다 내몰고 난 뒤에야 자기도 엄마 아빠와 같은 교인이라며 어깨를 떨어뜨리고 돌아갔지. 직업상 그 아저씨는 무서움을 유지했지만 업무를 다 한 후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이었어.


이렇게 감정을 쥐어짜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많은 고통이 있을 거야. 언론 보도를 보면 위장병, 우울증 등 각종 스트레스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대. 소위 화병에 걸리는 거지.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겪는 고통도 큰 문제지만, 감정을 쥐어 짜이다 보니 편한 상대, 만만한 상대에 대해 함부로 감정을 발산하는 일에 대한 감각이 전 사회적으로 마비되는 것도 큰일이야.


가령 똑같이 일터에서 쥐어 짜이더라도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함을 만들어주는 것은 여성이고 엄마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지. 밖에서 시달리고 들어왔으니 집에서는 무조건 편안함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야. 돈을 주고 사는 물건 속에 사람의 친절도 포함돼 있다고 여기기에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동료라는 감각 스위치는 꺼져버려. 돈을 쓰는 곳에서는 늘 당연하게 친절함을 요구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늘 사근사근하게 굴 것을 요구하게 돼. 나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관계는 ‘피곤’한 게 돼버리고 만만하게 묻어갈 수 있는 덜 피곤한 관계만 쫓게 돼. 덜 피곤한 관계는 나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거나 만만한 상대와 맺는 관계이고, 피곤한 관계는 나의 편안함을 위협하고 나에게 각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그런 상대와 맺는 관계일 거야.


내가 지녀왔던 생각이나 습관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불편함을 넘어 불쾌감을 일으킬 때가 많고, 그럴 때 나의 기준이 되는 생각이나 습관이 어떤지를 따져보기 보다는 그 사람들이 위반한 선을 문제 삼게 돼. 그 위반선을 누가 정했는지는 잘 따져보지 않고 말이야. 전 사회적으로 살기가 힘들고 감정 다스리기에 시달릴수록 사람 사이 관계 맺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도 지쳐가고 있어.
인권의 기본은 타인과 관계 맺기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큰 고민이야. 사람 관계를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은 늘어가는 반면, 그 관계를 올곧게 만들어갈 수 있는 장은 찾아보기 힘드니까 말이야. 인권에서 말하는 사람 사이 관계 맺기의 기본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평등하게 바라보는 거야. 나는 터뜨리고 요구할 수 있지만 상대는 참고 견딜 뿐 아니라 사근사근해야 한다는 관계는 도무지 평등하다고 할 수가 없어.


식당알바를 하다보면 조선족이나 중국에서 온 분들과 같이 일하게 될 때가 있어. 그럴 때 나는 한국인 직원들과 그 분들 사이를 유심히 살펴보게 돼. 한국인 아줌마들은 먹을 것을 줄 때는 참 인심이 후덕해. 그분들에게 제일 먼저 챙겨주거나 더 많이 주거나 해. 그런데 문제는 지시 관계가 어그러질 때야. 한국인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약간 다른 의견을 표할라치면 먹을 것 줄 때의 후함이 당장 “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란 냉대로 바뀌어. 내가 너그럽게 봐줄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에서 인심이 나오고, 그런 인심은 미덕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다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위아래가 어디 있소.” 또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라고 하면 포용할 수 없는 방자함이 돼버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아줌마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 탓으로 치자면 각자 성격만 뜯어고치면 되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아. 똑같이 힘들게 일하는 형편에서 그런 행세를 한국인 아줌마들만 할 수 있는 것은 불평등한 경제관계, 출입국에 따른 신분지위의 불안함, 한국이 이주자를 부릴만한 지위가 됐다는 자만심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작동하고 있어. 그런데 아줌마들 사이의 갈등을 개인의 태도로만 여겨버리고 고칠 것을 설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앞서 정치인에게 했던 것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져. 같이 먹는 것은 허용되지만 의견을 제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큰 거야. 의견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우리 한국인이고 너희는 인심 베풂을 받을 뿐 말할 자격은 없다고 하는 건 평등한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니까.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올곧게 생각한다는 건 우리를 지배하는 불평등과 갈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따져 묻는 것이야. 내가 베푸는 인심이 아니라 고통 받는 타인에게 필요한 옳은 일이 무엇일까, 우리가 서로 밀어내지 말고 같이 기대어 비빌 수 있는 언덕은 어떤 것일까를 궁리하는 거야. 이런 궁리를 하려면 대충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찢고 터뜨리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어.


개인이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면 화병이 나는 것처럼 불의에 대해 분통 터뜨림이 없는 사회는 문제를 곪게 해. 예를 들어 엄마가 영화에서 많이 본 것처럼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오랫동안 노예로 부림을 당했어. 흑인들은 백인과 평등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고개를 치켜들어야 했어. “나는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이제 그 누구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라고 한 흑인 청소부가 있었대. 이 흑인은 자신의 삶을 ‘피부색’만으로 판단하는 사회질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이 흑인 청소부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봉합돼 있던 미국 사회의 문제가 터뜨려졌어. 착한 흑인, 고분고분한 흑인에게는 친절한 백인 주인이 대드는 흑인은 당장 나쁜 흑인으로 여기고 친절을 폭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어.


이런 경우는 백인과 흑인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도 많아. ‘여자니까’, ‘아랫사람이니까’, ‘외국인이니까’, ‘장애인이니까’하는 식으로 경계선을 긋고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로 인해 제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질서인 양 대접받아. 이런 질서를 깨려면 앞서 말한 흑인 청소부 같은 터뜨림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봐주고 보듬는 태도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해. 감정의 쥐어짜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서로에게 좀 더 친절해지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경계선은 손대지 말고 그냥 놔둔 채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야. 왜 유독 어떤 사람들이 친절과 고분고분함을 강요당하는지, 유독 어떤 직종의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요구가 집중되는지를 따져 물어야 돼.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안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아주 많아. 그런데 사회적 약자를 관상용 식물처럼 저만치 떨어뜨려놓고, 내가 움직여 다가갈 때만 닿을 수 있는 위치에 못박아두고 생각할 때가 많은 것 같아. 사람들이 실제 겪는 고통은 내가 다가가고 싶을 때만 다가가고 피곤하면 다가가지 않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야. 사람들의 고통은 일상의 맞닥뜨림 속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문제야. 그러니까 가상의 고통 받는 약자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현실 속에서 감각의 안테나를 치켜세우는 일, 돈 때문에 강요받고 요구하는 친절이 아닌 우리 스스로 결정하고 우리 식대로 만드는 친절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


어떻게 하면 모욕을 당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 속에 더 깊이 끌려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일은 마음과 몸의 힘든 노동을 요구해. 돌아보고 곱씹고 반성하고 또 공부하고 만나고 어울리는 등 갖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야. 그런 힘든 노동 없이 사람사이 관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 바라는 것이겠지. 이게 내 퉁명스런 말투 때문에 고민하게 된 사회적 정의야. 아울러 엄마한테나 주변사람한테나 좀 더 ‘친절한 은숙씨’가 되도록 노력할게. 다시는 버스에서 ‘패륜녀’로 찍히는 일은 없도록 말이야.

작성일자 : 2011. 3. 2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 엊그제도 통장에서 빠져나간 보험료를 보며 난 한숨을 쉬었어. 왜냐고? 엄마는 평생 보험을 부어왔어. 자식들 이름마다 교육보험이든 암보험이든 들어놨다가 큰돈이 필요할 때면 그걸로 대출을 받고, 쪼들릴 때면 원금을 떼이면서 해약하는 일을 반복했지. 잠깐은 숱한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것처럼 보험 모집인을 하기도 했어. 엄마는 내 이름으로 된 암보험도 하나 들었어. 그걸 몇 년 동안 엄마가 붓다가 내가 졸업할 무렵 나한테 넘겨줬지. 이제 네가 부으라고 말이야. 명색이 인권활동가인 나는 ‘공공복지’가 아닌 ‘사보험’에 의탁한다는 것이 탐탁치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넘겨받았어. 10년 만기였던 그 보험의 만기만을 기다렸지. 만기가 되던 해, 나는 해방감을 느꼈어.


그런데 웬걸, 만기가 되자마자 엄마는 보험전환계약을 하고 내게 서명하라 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로 엮어진 그 보험은 이름 자체도 복잡했지만 약관이란 걸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되는 구석이 없었어. “보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내게 엄마는 “시집도 안 가고 혼자 살려면 보험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성을 냈지. 결국 엄마 고집대로 난 서명을 했고, 보험료는 무려 4배나 올랐고, 만기는 20년으로 늘어났어. 무엇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내 생각대로 보험 계약 하나 맘대로 처리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났어.


그리고 비슷한 무렵, 큰돈이라곤 쓸 줄 모르던 엄마가 백만 원에 가까운 요를 사들였어. 무슨 요가 그리 비싸냐고 했더니 “내가 중풍이라도 걸리면 자식들 고생할 테니 큰 맘 먹고 샀다”고 했지. 숯이나 뭐 그런 것들로 만들어져서 중풍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말을 믿고 덜컥 사버린 거야. 노인들을 상대로 바람을 잡아 그런 물품을 판다는 얘기를 뉴스로만 봤어. 그런데 바로 울 엄마가 그런 물건을 산 것이지. 물론 그 장사치들은 중풍, 치매 등으로 자식들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온갖 공포를 불러일으켰겠지.



불안에 대처하는 사회적 방법


이렇게 불안은 우리 생활 도처에 있어. 큰 병 걸릴까, 다칠까, 직장을 잃을까, 홀로 될까, 자식에게 짐이 될까…….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혼자 힘으로, 그게 안 되면 가족의 힘으로 방법을 찾지.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불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반면 개인이나 가족에게만 맡겨두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어. 엄마가 날 걱정해서 들게 한 보험을 내가 싫다고 한 이유는, 내가 두 번째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이 두 번째 방법을 흔히 ‘사회적 권리’ 또는 ‘복지’라고 불러.


‘사회’라는 뜻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을 맺었다는 뜻이야. 결연했다는 것이지.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을 권리라고 해. 그런 사회적 권리가 표현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복지야.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는 우리들 삶이 온갖 불안에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 감싸고 입혀주자는 거야.


그런데 불안을 덮어주고 감싸준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야.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쪽을 째서 보이기 싫은 걸 내보이게 할 수도 있어. 초등학교 때 학기말이면 의무적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야 했어. 형편에 상관없이 모두가 정해진 액수를 내야했지. 그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는 몰랐지만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쓰인다 하니 그런가보다 했어. 근데 6학년 때는 달랐어. 그렇게 걷은 돈을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제일 가난한 두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어. 남학생, 여학생 한 명씩에게 준다면서 아이들에게 추천을 하라 했지. 아이들은 작은 쪽지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서 냈고, 나는 누구의 이름을 적었는지 기억이 안나. ‘가난한 친구’를 한 명 찍는다는 게 너무 힘든 일이어서 끙끙거렸던 기억밖에는 없어. 그 결과 늘 코를 흘리던 남자아이 한 명과 내가 그 돈을 받게 됐어. 선생님은 큰 소리로 우리 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들의 정성’이라면서 공책 몇 권과 연필 몇 자루, 그리고 봉투 하나씩을 우리에게 주셨어. 그 순간 교실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나만 그 가운데 총천연색이 된 느낌이 들었어. 그날부터 같이 등하교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질 못했어. 친구들도 쭈뼛쭈뼛 내게 말 걸기를 어색해했고, 나도 같이 어울리느니 혼자인 게 맘 편했지. 6학년 말이었던 게 그나마 큰 다행이었어. 곧 졸업이었으니까.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은 아니야. 관계로부터 버려지는 공포,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하는 공포로부터도 벗어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 복지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누구나 사람사회에 섞여서 사람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라 보고 복지는 그걸 존중하기 때문에 하는 거야.


누구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누구는 밥상 아래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다면 똑같은 양의 밥을 먹더라도 사람으로서 먹는 게 아닌 거야. 나란히 밥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을 때 두런두런 말도 주고받고 서로의 표정도 살피고 할 수 있어.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만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얼마나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느냐가 복지를 하는 중요한 이유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사람이 지하도에서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동료시민으로서 생각하기는 어려워. 다가올 선거에 대해 침을 튀기며 비평을 하는 사람이 선거용지 받을 주소지조차 없는 사람과 얘기하기는 어려워.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서로에게 보장해주지 않고서야, ‘같은’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에 그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회적 권리’로서의 복지는 불쌍해서 돕는 것과는 달라. 우리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사회에 대고 부양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권리야. 내 처지가 불행하고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회의 일원이니까 당연히 나를 이 사회 속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보살펴줘야 한다는 거야.


드레스코드는 누가 정하는 걸까?


사람들은 저마다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달라. 그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고 어떻게 결정할까?


엄마, 이런 저런 모임에 갈 때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옷을 갖춰 입지? 머리 모양부터 옷, 구두까지 신경 쓰잖아. 그걸 젊은 사람들은 ‘드레스코드’라는 외래어로 표현해(옷 입는 법, 옷 입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어).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고 대화에 끼지 못하게 돼. 심한 경우엔 문 앞에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일도 있어.


이 드레스코드와 관련된 영화가 기억나. 외국영화에선 파티에 갈 때 남자가 여자를 모시러오는 장면이 많이 나와. 여자는 예쁘게 차려입고 데리러 올 남자를 기다리지. 내가 본 두 편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다 가난했어. 둘 다 파티 같은데 가본 적도 없었어. 그래서 한 여자는 자기가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어. 하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이 자기가 데려갈 파티에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처해해. 그는 여자를 옷가게에 데려가서 그 파티에 올 사람들이 입을 법한 세련된 검정 드레스를 골라 입혀. 그 옷을 입고서야 여자는 파티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


다른 영화 속의 여자는 어땠는지 알아? 큰돈을 들여 세련된 드레스를 장만해 놓았는데 딸이 난생 처음 파티에 간다는 걸 안 아버지가 선물로 아주 우스운 분홍 드레스를 사놓은 거야. 아버지 눈에는 예뻐 보이는 옷이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던 딸은 고심 끝에 자기가 사놓은 옷을 두고 분홍 드레스를 입어. 여자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을 보고 난처해하지. 파티에 가서도 자기 외투로 여자의 옷을 덮어주고 그녀 옷이 다른 사람 눈에 뜨일까봐 안절부절 해. 결국 남자가 자기를 창피해하는 걸 안 여자는 파티장 밖으로 뛰쳐나와. “당신 눈에는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이건 아버지의 정성이고, 놀림 받을 줄 알면서도 선택한 건 나”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드레스코드란 건 원래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파티에 어울릴 법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만든 규칙이야. 이 규칙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다고 여기는 것을 파티장에 오려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자기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버지의 정성스런 마음을 담은 선물인 분홍색 옷을 거절하는 거야. 남자가 즉석에서 사주는 옷을 입고라도 드레스코드를 맞추는 여자와 자신이 택한 분홍색 옷을 고집한 여자, 엄마는 어느 쪽이 맘에 들어?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릴 권리로 볼 건가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거야. 사회에서 연을 맺은 우리들이 결정한다는 말이지. 똑같이 ‘복지’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도 나라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달라. 복지를 설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 개인이 감당할 몫과 사회가 감당할 몫을 어떻게 정하는가도 달라. 드레스코드가 다른 것처럼 말이야.


가령 가난한 사람들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복지를 하는 쪽이 있어. “너무 지저분해서 전염병의 위험이 있다”, “너무 가난해서 범죄의 위험이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야. 위험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사람다운 삶의 필요를 최소한도로 낮추고 가난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들에게만 복지혜택을 주려고 해. 복지를 받는 사람들의 자존감 따위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창피를 주는 것이 오히려 복지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스스로의 자립의지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경우엔 드레스코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주 일부로 제한돼 있어.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삶의 필요를 선택하여 그것만 복지의 대상으로 결정해버려. 복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도 일부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야. 그래서 복지를 찬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복지제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야. “우릴 뭐로 보는 거냐?”고 반발할 때가 많아. “우리를 당신들끼리 정한 드레스코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마라, 우리 삶의 필요는 일부 전문가들의 잣대가 아니라 우리가 결정한다. 공공복지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이야.


대놓고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 게 공평한 세상 이치라고 주장해.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 삶이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뼈 빠지게 노력한 사람들의 몫을 돌리는 건 부당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복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관리의 성적을 매기지 못할 만큼 비참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만 사람 된 정으로 베풀면 그만이라는 거야.


또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지를 할 거라면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복지라는 미명하에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란 건 굼뜨기 마련이니까 빠릿빠릿한 시장서비스에 복지를 맡기자”, “‘복지수급자’라고 불리는 것보다 ‘고객님’, ‘소비자님’이라 불리는 게 더 좋지 않냐?”면서 공공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왜 복지를 생각하게 됐느냐를 까먹고 있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격을 매겨 돈으로 사고파는 시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까 복지를 하는 거잖아. 우리 삶의 어떤 필요를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 아니라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공기’같은 것으로 만들자는 게 복지인 거야. 일등만 살아남고 강자들이 다 먹어치우는 질서에 대해 방호벽을 세우는 게 복지야. 그런데 이 사람들 말대로라면 또 돈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복지가 되는 거야. ‘선택의 자유’가 이런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야. 선택의 자유? 좋은 말이지.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공공성 위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 하던 유치한 일 중에 하나가 책상에 줄긋기였어. 친구끼리 토라지거나 짓궂은 남자애와 짝이 됐을 때 흔히 하던 일인데 책상 중간에 선을 긋고 넘어오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였지. 이쪽은 ‘내꺼’, 저쪽은 ‘네꺼’라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선을 그어도 그 책상을 유지하는 건 공동의 책상다리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건 나눠가질 수 없었어. 한쪽 다리가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책상 구실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권리로 정하고 그걸 개인의 힘이 아니라 공공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건, 개인의 삶을 망치자는 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뜻이야.


앞에서 말한 것 말고 복지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이 있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미 파티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특별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지 않는 거야. ‘우리 사회’라는 ‘파티장’ 안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자리가 마련돼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가난한 걸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로 누린다고 서로 인정하는 거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볼 것인지도 일부 전문가가 아니라 다 같이 의논해서 결정해. 그런 결정을 위해서 하는 일이 정치인 거야. 사람들은 투표로도 의견을 표시할 수 있고, 지역사회, 직장, 학교 등 자신들이 처한 다양한 자리에서 의견을 모을 수 있어. 사회에서 공동으로 책임질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삶의 필요라고 여겨져 온 건 아이 낳아 기르기, 교육하기, 건강돌보기, 장애인과 노인 돌보기, 기본적인 주거 등이야. 이밖에도 항목은 많을 텐데 그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서 공동의 곳간을 사용하는 일을 결정하는 게 정치가 하는 중요한 일이야.



복지란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복지는 내가 물질로 누리는 밥이나 학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어디에 우선적으로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 자체에서 시작 돼. 공동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를 정해야겠지. 한국보다 복지를 잘 하는 나라들에선 대개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여하게 돼있어. 왜냐면 많이 번 사람들은 그만큼 사회적인 자원을 더 많이 쓰고 사회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니까 그만큼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지. 한국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돈을 내 집을 얻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내게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걸 ‘억울하다, 아깝다’고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서로 기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 정신을 사회적 연대라고 해. 이런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인 얼굴이 복지가 되는 거야.


돈이 많은 사회라고 해서 복지를 잘하는 게 아니고 돈이 없는 사회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야. 세계 제일의 부자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나라의 복지 수준은 형편없다는 증거도 있어.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조정하는 일이 없으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산처럼 쌓인 돈도 소용없다는 것이지. “복지는 좋지만 돈은 어떻게 마련할래?”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돈과 복지를 따로 떼어놓고 선후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어. ‘복지와 돈’은 선후가 아니라 같이 존재하는 문제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부가 소수에게 불공평하게 쏠리고, 대다수에게 불리하게 분배되는 문제와 복지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아. 복지는 불평등의 뒷감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부의 생산과 분배를 정당하게 하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그에 덧붙여 복지는 우리가 생산에 신경이 팔려서 놓쳐버린 사람들에 대한 더 세심한 돌봄을 자극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복지제도가 사회적으로 잘 마련돼도 남는 문제들은 물론 있을 거야. 예를 들어 노인복지가 잘 돼서 엄마가 더 나이 들어 설령 아프게 될 때(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무료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고 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공복지로 제공되는 서비스에만 엄마를 맡겨놓고 생전 찾아보지도 않는다면 엄마 맘이 그냥 편키만 할까? ‘딸년이라고 찾아주지도 않네’라며 쓸쓸해하겠지. 마찬가지로 주변에 곤란한 사람이 있는데 “국가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세금 냈는데 저런 사람들 돌보지 않고”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당장 손 내밀 수 있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복지제도를 잘 갖추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 거기서 나오는 연대의 정신이 같이 가지 않으면 로봇에게 돌봄을 받는 것과 같이 차디찬 돌봄이 될 수 있어. 복지를 빚어내고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사람에 대한 존중에 있다는 건 아무리 되풀이 말해도 모자라는 말이야.

작성일자 : 2011. 1. 20

작성자 : 류은숙

* 이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5)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차별(류은숙)

엄마, 내가 도라지 무침만 보면 울컥하는 것 알아? 어릴 때 나한테는 김치만 달랑 든 도시락을 싸주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둘째에게만 새콤달콤하게 도라지와 오이를 버무려 싸주었쟎아. 집에서도 그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게 했어. “넌, 아무거나 잘 먹지만 네 동생은 아니잖니. 이건 동생만 줘라.”라고 하면서 말이야. “아무거나 잘 먹는 게 죄지” 구시렁거리며 난 밥만 씹어댔어. 어느 책에서 봤는데 원숭이들도 먹을 것으로 차별하면 음식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대. 부모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 어느 부모나 ‘열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있나?’란 대사를 내뱉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도라지 무침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있어. 맘껏 맛있는 것 못해주는 게 속상한데 거기에 밥도 잘 안 먹는 둘째가 더 맘에 걸려서 엄마가 그랬다는 걸 알면서 내가 괜히 투정부려본 거야.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문제는 내 반찬투정과는 좀 달라.

여느 엄마들처럼 엄마는 자식들 성적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어. 엄마가 고생고생해서 학교에 보냈으니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모두가 일등을 하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쟎아. 꼴찌에서 두 번째도 아니고 정말 꼴찌를 했던 막내, 그리고 재수, 삼수도 아니고 오수를 해야 했던 남동생이 엄마한테는 늘 한숨거리였지. 나와 둘째의 성적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엄마는 공부를 못할수도 있더란 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속상해서였겠지만 “내가 저걸 아들이라고 낳고 미역국을 먹었지”란 말을 남동생에게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해. 공부 때문에 주눅이 들어 인문계 고교에 안가겠다는 막내에게 “내 자식인게 창피하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어느 날 청소하다가 막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 게 됐는데, 정말 가슴 아픈 말들이 적혀있었어. 엄마한테는 그때 차마 말 못했지만, 그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살기 넘치는 저주와 원망의 말을 공책 가득 적어놓고 있었어.

엄마한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야.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식구인데’라고 감싸며 그런 일 없는 척 아닌척하지만 사실 서로 비교하고 상처주는 일이 없었던 집은 드물거야. 형제자매끼리 친척들끼리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어서 명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한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엄마만 우리를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한 것도 아냐. 나도 엄마 아빠를 다른 집 부모와 비교하곤 했어. 심할 때는 ‘내 부모는 따로 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날 이 집에 맡긴 거다. 어느 날 진짜 부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날 데리러 올 거다’란 상상놀이를 하기도 했어.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해 이 세상에는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일이 천지야. 문제는 누가 무엇을 가지고 비교할 힘을 갖고 있느냐는 거야. 가령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심하다고 느끼는 게 학벌차별이래. 학벌은 학교에 들어갈 때 한번 결정 나는 일인데 그것으로 평생의 사람대접이 좌우되니까 너무 심하잖아. 부당하다 해도 그게 평생의 사람성적표가 되니까, 엄마도 늘 성적타령을 했겠지. 그럼 그런 학벌을 가지고 비교하길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겠어? 좋은 대학 나와서 그걸로 꽤나 행세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지. 우리 막내 같은 사람이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잖아?

그래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비교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준으로 해서 남을 판단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지배하는 쪽과 지배받아야 할 쪽을 결정해. 그러니 비교 기준 자체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자기들의 색안경인거야. 허구한 날 중에서 택일을 하는 것처럼 하고많은 사람의 특성 중에서 힘센 쪽이 찍어서 이용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 그렇게 골라낸 특성에 대해서는 온갖 흉을 보고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갖다 붙여. 오랜 시간 그런 흉을 듣다보면 대개 사람들은 ‘정말인가보다’하고 믿게 돼. 그렇게 되면 추문의 주인공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리게 돼.

나 어렸을 때 엄마가 살림에 보태려고 우리도 세로 살던 집 방 두 개 중에 하나를 세놓았던 일 기억나? 어떤 부부가 계약금 5만원을 들고 와서 다음날 이사하기로 했어. 그런데 다음날 와서 무슨 사정이 생겨 이사를 못하게 됐다고 계약금만 떼이고 갔지. 그때 이웃들은 “◯◯도 출신이라 찜찜했는데 잘된 일”이라고 했어. 엄마도 거들면서 “남자 인상은 그래도 괜찮은데 그 부인 인상이 맘에 걸렸다”고 “◯◯도 여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어.

난 ◯◯도 출신인 게 뭐가 문제인지 궁금했어. 커서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도 출신이어서 그 반대편의 도 사람들을 경제로나 정치로나 못살게 굴었던 거였어. 그래서 ◯◯도 출신들에게는 ‘뒷통수를 잘 친다’, ‘음흉하다’는 등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어. 대학에서도 지배층 들과 출신이 같은 도 아이들은 그 지역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쓰는데, 억압받는 지방 아이들은 또박또박 서울말을 썼어. 자기 출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지금이야 옛일이 돼버렸지만, 나는 “◯◯도 출신이라 찜찜했다”는 사람들 말이 잊히지 않아. 정치로나 경제로나 힘센 쪽은 ‘◯◯도 출신’이란 기준을 빼들었고, ◯◯도 출신에게 근거 없는 추문을 갖다붙이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믿게 됐고, 그래서 ◯◯도 출신이 직장을 구하고 셋방을 구하고 공직에 진출하고 결혼을 할 때마다 걸러져서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어.

이게 ‘지역차별’이라면 다른 차별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일제시대 일본인과 조선인, 지금의 한국인과 동남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 앞의 것은 좋은 쪽이고 뒤의 것은 나쁜 쪽이라고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거야.

 

사실 ‘다르다’는 것으로는 할 말이 없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같은 게 없듯이 사람은 모두 다르거든. 그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야. 입 아프게 두 번 세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매순간 달라지고 있잖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 사람은 전부 다른 게 당연하니까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도 우스운 말이야.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혹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차이가 당연하다고 해서 사람마다 갖는 특징이 ‘원래 정해져있다’는 뜻은 아니야. 흑인은 ‘원래 게을러’라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원래 게으른 특징을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오늘날 잘 사는 나라들은 흑인들을 끌어다가 노예노동을 시켜서 잘 살게 됐는데, 왜 하필이면 ‘게으름뱅이’들을 일꾼으로 부렸을까?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뚱뚱한 걸 엄청 싫어하잖아. 그래서 늘 잔소리가 “난 널 예쁘게 낳아줬는데 네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리 됐다”고 하잖아. 만약에 누가 엄마보고 엄마 딸은 “원래 그렇다”고 하면 어쩌겠어?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야.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 차이를 가지고 사람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야. 어떤 차이를 가지면 유난한 대우를 하고 어떤 차이로는 모욕과 무시를 하는 걸 문제 삼아야지, 차이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차이를 무시하는 건 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거야. 나만의 특성, 나를 드러내 주는 차이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있다는 건, 타인과의 차이 덕분인건데, 타인의 차이를 지워버리면 나도 같이 지워지는 거야. 타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홀대하면, 내가 가진 차이가 제대로 대접받길 바랄 수 있을까?

 

차이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어.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특성 탓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의 결과야. 곧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대접하고 누구를 홀대할지를 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야. 트집을 잡고 얕잡아 보고 괴롭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잘못인 것이지,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탓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문제야.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어. 먼저 ‘참아준다’는 부류가 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차이를 참아주겠다고 하면서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어떨까? ‘넌 한국 사람이 아니지만, 한국사람 취급해줄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사람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차이를 지워버리라는 강요쟎아. 네가 입는 그 옷을 입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널 받아줄게. 그럼 그건 받아주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거지.

두 번째는 ‘불쌍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어. 차이를 동정하는 거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봐라’, ‘노숙인을 봐라’, ‘넌 그보다 낫잖니’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어. 자신보다 힘든 환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내 행복을 저울질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행복 자체가 비참한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사람이 가진 장애나 어려움을 그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이라 보고 사회 환경을 뜯어고치려 노력하는 거야. 장애인을 보고 혀를 차고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인이 사회에서 생활할 때 장애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개인적 운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인 거니까,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장애인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만들면 되는 거지.

세 번째로 ‘혐오하고 못살게 구는’ 부류가 있어. 올해 한국 사회가 들썩인 일이 있었어. 남성간의 사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됐어.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본 어떤 사람들이 무지 화를 내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까지 실었어. ‘이 드라마보고 게이(남성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야)된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으면 그 드라마를 방송한 방송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게이인 사람들이나 그 친구, 가족, 또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것이었지. 엄마가 당뇨병을 관리하고 살듯이 에이즈라는 질병도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병일 뿐인데, 그걸 무슨 죄 값인 것처럼 취급하면 아픈 사람의 고통이 배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동성애자가 에이즈의 근원이란 건 일찌감치 엉터리로 밝혀진 사실이야.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불쾌감과 혐오감을 진리라고 여긴 광고였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부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싸움으로 여기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한국에선 요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있거든.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이 법 자체에 물 타기를 하는 거야. 설령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별반 힘을 못쓰는 법이 되도록 하려는 거지. 그런데 동성애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은근히 관심이 사라진 부분이 ‘학력 차별’을 금지하는 거였어.

차별금지법을 제일 반대하는 것은 기업들이야. 사람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고 해고하는 데는 많은 차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것은 간섭이라며 기업들이 아주 싫어해. 정부도 마찬가지야. 정부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명분을 갖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은 부자인 시민과 서민인 시민을 구별해서 아주 달리 취급할 때가 많아.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을 분류하고 선별대우를 하면서 안 그런 척 하려 하거든. 그런데 정부나 기업이나 대놓고 차별을 말하면 명분이 깍일 뿐더러 많은 비판과 저항을 받을 수 있어. 그런 판국에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립이 부각되면 저절로 차별금지법의 힘이 줄어드니까 정부와 기업은 뒤돌아서 웃을 수 있는 거야. 겉으로는 기독교인과 동성애자의 싸움, 군필자인 남성과 여성의 싸움, 명문대와 기타대의 싸움처럼 보이는 일들 뒤에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힘센 세력이 있는 거야.

 

대표적으로 매를 맞고 있는 건 동성애자들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을 숨죽이며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있어. 만약에 자신을 드러내면 동성애자들이 받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어. 공개적인 모욕, 멸시, 공격, 폭력이 예상되기 때문에 주눅이 들고 국가에게 당당히 보호를 요구할 수가 없게 돼. 눈에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이 있는 사람들, 그런 탓에 하나의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는 게 더 힘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이 대표적으로 당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동성애자들만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야.

 

가령 여성들은 차별받는다는 이유로 ‘여성’임을 드러내고 뭉칠 수라도 있어. 그런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병을 드러내고 뭉치기 어렵고, 학력차별의 경우처럼 오랜 정치경제적 고질병인 경우엔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뭉치기가 어려워. 그래서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결이란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우리 사회가 은근히 차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돼.

 

차별받는 사람들은 ‘화’를 낼 권리가 있어. 비슷하게 싸잡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다른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어. 그런데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과 차이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야. 모욕과 폭력을 당해 화를 내는 건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차이를 이유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야. 가령 장애인이라고 감금하는 일, 동성애자라고 직업을 뺏는 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자기 취향이고 자기 자유라고 말하는데, 그런 취향과 자유는 차이가 아니라 범죄인 거야. 살인을 취향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야.

 

차별이 가져오는 제일 무서운 결과는 분열과 애꿎은 사람들끼리의 싸움박질이야. 사회적 불운을 겪는 사람들끼리 창피를 주고 서로를 미워하면 사회적 불운을 고치는데 힘을 합칠 수가 없게 돼. 가령 학력이 낮아서 일하는 만큼 대우를 못 받는 남성이 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의 절반임금밖에 못 받는 여성이 있다고 해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할 때, 남성이 ‘난 여자가 나와 똑같은 임금 받는 꼴은 못 본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여자보다는 많이 받아야겠다’고 여성을 차별한다면, 이 남성이 얻게 되는 건 뭘까? 그래서 자기 자존심이 올라갈까? 자기 월급이 올라갈까? 결국 좋아할 건 사장밖에 없어. 일하는 남성이랑 여성이랑 힘을 합쳐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일을 사장은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성차별을 은근히 좋아할 거야. 차별을 통해 타인을 낮춤으로써 내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동반추락일 뿐이야.

 

차별받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을 싫어해. 가령 장애인, 동성애자, 비정규직, 혼혈인, 동남아인, 이런 식의 이름들인데,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이름들이 필요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이걸 ‘깔때기’처럼 사용하는 게 싫은거야.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점을 살려서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해. 가령 엄마를 ‘노인’, ‘저학력여성’ 이란 깔때기로 싸잡아 부르면 화가 나겠지? 이런 식의 싸잡는 이름에는 엄마가 자식 넷과 손주들을 키워냈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하고, 정직하고 알뜰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차별을 극복하려면, 깔때기같은 한두 가지 성격으로 싸잡아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중요해.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란 양희은의 노래가사가 있어. 이 노래가사를 들으면 푸근한 맘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어.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사건 속의 사람을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사람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돼.

난 어렸을 때 내가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어. 내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은 외교이고, 내가 문밖에 나가 구멍가게에서 뭘 사는 것은 무역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회가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 그것도 좋은 뜻으로가 아니라 구별해서 대우를 달리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싸잡는 이름을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로 다루는 게 필요해. 그래야 ‘너는 장애인이고 나는 비장애인인데’, ‘너는 남성이고 나는 여성인데’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회적 불운을 제거하고 더 평등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뭉칠 수 있는거야. 그렇지 않고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들끼리만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잘 될 수가 없을 거야. 이름 붙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이름을 대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가 없잖아. 싸잡아서 다수인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서만 싸우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다수가 되기 전에는 권리를 누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가진다는 걸 위해 같이 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을 벗어던져야 하는 거야.

 

차별하는 쪽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말이야.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누군가에게 창피를 주고 모욕을 주는데 부러 힘을 써. 그래서 온갖 불쾌하고 낮춰보는 말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해. 게이인 한 남학생이 직접 겪은 일인데, 같은 반 친구들이 졸업사진을 찍으면서 그 학생 어깨위로 올라서 밟았다는 거야. ‘너는 호모(남성 동성애자를 혐오해서 부르는 말이야)니까 짓밟아줘야 한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상대방이 모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상처받을 자존심이 있고 모욕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란 걸 인정하는 거야.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망치겠다고 덤벼들었다는 얘긴데, 그럼 오히려 그렇게 모욕하고 괴롭히는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상대방을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우습지 않아? 자신들이 모욕하려 하면서 사실은 그런 상대방의 존엄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서 자신들이 괴롭힌 상대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건 뭘까? 남을 괴롭혀서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은 정말 못난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걸 통해 ‘나는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건 누가 봐도 한심한 짓이야.

 

결국 차별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사람들한테 싸움 붙여놓고 잇속을 챙기는 ‘남’들, 그런 ‘남’들에게 속고 지배받고 빼앗기는 사람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지지고 볶는 일이 차별이야. 엄마가 “남 좋은 일만 시키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뭔가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혀를 차지. 그렇게 엄마가 한심하게 여기는 짓, 그중에 제일이 차별이라고.

작성일자 : 2010. 11. 1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엄마, 김치대란 때문에 걱정이 많지? “그렇다고 안먹을 수 있냐?”하면서 김장 시름에 빠져있으니 말이야. 엄마가 나 주려고 깍두기를 담갔다니까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엄마한테 내미는 용돈에 김치값을 얹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이 들기는 하지.

 

요즘은 밥 먹을 때 주요화제도 김치야. 단무지나 소세지 같은 건 부잣집 아이들이나 싸올 수 있는 도시락 반찬이었던 시절, 맨날 김치만 들어있던 양은도시락에서 국물이 새어나와 책이며 공책에 김치물이 배는 게 질색이었던 이야기, 도시락 반찬이란 게 나눠먹어야 맛인데, 엄마는 그 커다란 총각김치를 칼질도 안하고 싸줘서, 달랑 총각무 하나들고 도시락을 다 비워야 하는 게 싫었다는 이야기, 김장할 때 옆에서 쌈 배추 받아먹던 입맛 도는 이야기, 겨울 내내 먹던 김치찌개, 고구마와 동치미국물, 김치부침개, 봄에 너무 시어진 김치를 헹궈서 꼭 짠 후 기름에 볶아먹기 등 김치로 만든 음식이야기에도 끝이 없지. 그런데 세상에 말이야. 최고급 커피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락에 김치 싸오는 사람이 부자라는 얘기가 유행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내게 떠오르는 제일 큰 김치 사건은 이런 일이야. 외할머니 댁에 가서 들통 가득 김장김치를 얻어오던 밤이었어. 초등생인 나에게 엄마와 맞든 들통은 너무 무거웠어. 버스 막차를 타느라 빨라진 엄마의 걸음을 따라 뛰는 것도 힘들었어. 게다가 더 무서운 건 통행금지 시간이 다됐다는 거였지. 12시가 가까워지면 골목 여기저기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통행금지에 걸린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었어. 김치통을 들고 가는 모녀가 치안과 안보에 무슨 문제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와 난 통행금지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 무거운 김치통을 쥐어들고 뛰고 또 뛰었지.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흠뻑 젖었던 기억이 나. 호각소리를 따돌리고 간신히 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엄마는 반평생 넘게 겪었겠지만 한국에선 해방 이후 40여년 가까운 세월,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됐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였다는데,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란 TV 광고와 더불어 9시면 쌔근쌔근 자야 하는 줄 알던 나이 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어. 내가 통행금지의 공포를 느낀 건 광주민주화항쟁이 있던 때였어.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땐 밤 10시인가로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어. 석양을 보면 뭔가 가슴이 젖어드는 감흥이 있어야 하는데, 그땐 해가 질 무렵부터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동동걸음치며 불안에 떨었어. 식구 중에 귀가 안한 사람이 있으면 뒤가 마린 양 앉아서 기다리질 못했지.

 

그런데 김치통을 들고 뛰던 그 밤과 오늘의 김치파동이 나한테는 똑같이 ‘자유’의 문제로 여겨져. 김치를 갖고 자유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구? 맘대로 원하는 시간에 못 돌아다녔으니 통행금지가 자유롭지 못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비싸서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냐고 묻고 싶을거야.

 

자유라고 하면 남 눈치 볼 것 없이 내 맘대로 하는 것, 켕기는 것이 있을지라도 ‘대한민국 은 자유주의 국가인데 무슨 간섭이냐‘고 큰소리치면 장땡인 것, 자유부인 같은 영화제목처럼 무슨 도덕적 금기를 어기는 것….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자유의 사연도 많아.

 

솔직히 엄마한테 ‘자유’란 말은 그다지 달가운 말이 아닐 것 같아. 엄마가 우리한테 무슨 소리를 할라치면,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좀 내버려두라’고 ‘자유를 달라’고 했으니 엄마한테는 자유가 좀 징그러운 소리일 것 같아. ‘통행금지, 그게 있어서 애들이 밤늦게 싸돌아다닐 걱정 없지, 범죄 걱정 없지, 나라에서 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 엄마는 통행금지가 없어졌을 때 아마 그 당시 젊은이들처럼 환호하진 않았을거야. 또 엄마에게 그놈의 자유란 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텅 빈 말이었을 거야. 평생 생계를 위해 싼 값의 일과 그 돈으로 자식돌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가져보지 못한 엄마에게 ‘자유’란 늘 ‘장차 올 것’이었어. 빚 다 갚고 나면, 전세방이라도 얻고 나면, 자식 공부 다 시키고 나면 올 것, 궂은 과업을 다 마친 후에나 오게 될 해방이 자유였을거야. 그래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참고 견디는 것인지라, 엄마는 자유란 말을 평생 입에 담아본 적도 없을 거야. 엄마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말을 자주 썼지. 틀려먹은 세상일과 행동거지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지 좋은 것만 하고 사나’ 라고 엄마는 타박하쟎아. 그럴 때, 엄마가 생각한 건 ‘사람의 도리’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엄마가 생각하는 ‘징그러운’ 자유, 그리고 ‘자유’라는 말 대신 쓴 ‘고생 끝의 해방’과 ‘사람 된 도리’처럼 자유라는 말에는 정말 많은 표정과 뜻이 있어.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인지에 대한 얘기에서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

 

먼저 ‘자유’라고 하면, 흔히 내가 뭘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하고 하지 못하게 막는 간섭이나 강요, 위협이 없는 것을 말해. 그런데 통행금지처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절대 돌아다니지 마라, 안 그러면 처벌 된다’라는 강압이 없더라도 자유롭지 못한 일은 무지 많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있쟎아. 그런 사람들에게 ‘넌 네 좋은 것을 선택해 할 수 있어’라는 건 말뿐으로 되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걸 하려면 그걸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해. 그 뭔가의 대표적인 것이 지금 세상에선 ‘돈’인 경우가 많지. 내가 그림이 좋았고 또 날 눈여겨본 선생님이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하셔서 내가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 하지만 미대에 가려면 입시미술 전문 학원을 다녀야 하고 따라서 비싼 학원비랑 재료비가 든다는 걸 엄마는 전혀 몰랐어. 그저 재주가 있다하니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선뜻 그러라 한 거였어. 그걸 아는 나는 간단하게 미대를 포기했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것에 다가갈 수단이 없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 ‘하지 말라’는 강압이 없었어도 말이야. 김치를 먹든 양배추를 먹든 그건 선택이겠지만, 김치를 살만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건 선택이 아닌 것이지. 그래서 김치 먹기가 힘들어진 것은 자유가 그만큼 없다는 것 혹은 줄어들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야.

 

김치가 없는 상차림을 생각할 수 없는 나라에서 그게 밥상 위에 못 오를 만큼 비싸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김치파동이 나기 전이나 후에나 그에 대한 분석과 진단들을 내놓았어. ‘4대강 사업 같은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다’, ‘농업천시 때문이다’, ‘환경위기 때문이다’, ‘시장의 큰 손들의 횡포를 방치해서이다’ 등등 말이야. 그런 의견들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들이 진지하게 고려되는 분위기라면 뭔가 대책이 나왔을 거고 앞으로의 대책도 믿어볼만한 것 일거야. 그런데 정부 권력자나 시장의 큰손들이 싫어하는 의견이라고 해서 묵살하고,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해꼬지를 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어? 바른 말․책임질 말을 할 사람이 주눅 들어 줄어들게 되고, 쓴 말을 새겨들어서 대책을 세울 가능성도 줄어들 거야.

 

엄마, 노벨상 알지? 그 유명한 노벨상을 탔던 한 경제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 언론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사람이 굶는 일 같은 건 생길수가 없다고. 왜냐하면 언론이 자유로우면 무슨 문제가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리 문제를 알고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굶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고 말이야. 또 그 학자가 한 말은 지금 세상에 굶주림이 발생하는 것은 식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것이야. 사실 먹을 것은 풍족한데, 사람들의 수중에 그걸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굶주리게 된다는 거야.

 

이 학자의 말을 우리 형편에 비춰 보면 이런 말이 돼. 김치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그걸 사 먹을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야.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낮은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세금을 걷는 일 등에서 부자에게 오히려 유리한 정책을 펴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이 심해져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야. 소득불평등이 심하면 민심이 뒤숭숭하기 마련이쟎아. 정부에 대해 불평하거나 쓴소리를 하는 게 듣기 싫어서 당국은 입단속에 나서게 되지.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자르거나 가짜 정보를 과대포장해서 널리 알리는데 엄한 애를 쓰게 돼. 그러면 사람들의 말할 자유가 더 많이 억압되고, 그런 억압의 결과로 시민들은 필수적인 정보와 판단의 근거를 얻지 못하게 돼. 시민의 감시와 쓴소리에서 벗어난 정부는 불평등한 판단과 결정을 계속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김치 파동과 같은 재앙이 벌어진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지 말라’만이 아니라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길이 막막해진 것도 자유의 문제인 거야. ‘말하고 듣고 따져볼 수 있는 자유’와 굶주림이 관계돼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은 자유로 연결돼 있어. 특히 엄마가 늘 강조하는 ‘사람된 도리’와 자유는 아주 끈끈한 관계야.

 

자유를 느낀다는 건 사람사이에서 서로의 처지를 느끼고 이해하는 일과 같아. 서로 처지를 이해하면 서로에 대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돼쟎아. 또 같이 힘을 합쳐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쟎아. 그런 관심과 책임감 속에서 같이 누리는 자유가 인권에서 말하는 자유라고 할 수 있어. 엄마가 ‘징그러워’하는 ‘자유’는 제 잇속대로 제 편한 대로만 하려하고 궂은일은 피하려는 거쟎아. 그러니까 엄마가 말하는 ‘사람도리’라고 하는 것과 자유는 별로 다른 것이 아니야.

 

시골로 귀농한 후배들이 있다고 했쟎아. 걔들이 바쁜 틈틈이 채소를 상자 가득 보내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엄마한테도 맛뵈기로 가져간적이 여러번있어. 그때마다 엄마는 반찬거리가 생겼다고 반색을 하쟎아. 그 후배들과의 관계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농산물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게 됐어. 한여름의 김매기, 비닐하우스 안의 뜨거움, 비오면 모종이 상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새벽잠 설치며 한밤중까지 랜턴까지 끼고 일하는 그 고됨을 무시할 수가 없어.

 

김치 파동은 김치를 사먹는 사람들의 자유문제만이 아니야. 그걸 생산하는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김치파동이 있기 전에도 농민들은 늘 불안하고 팍팍한 삶에 대해 호소했어. 하지만 농민을 직접 보지 않고 수퍼마켓에 진열된 물건을 살 뿐인 소비자인 우리는 수퍼마켓의 가격표가 거슬리지 않는 한 농민의 얼굴을 떠올릴 일이 없었지. 배추 한포기가 만원이 넘는다는 호들갑속에서 일찌감치 밭떼기로 넘겼다는 농부가 받았다는 형편없는 가격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아까워’라는 말을 남발하쟎아. 무슨 횡재를 놓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 농부가 김치파동이 날 줄 알고 아껴두었다가 배추를 비싸게 팔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애시당초 김치파동 같은 게 날 리가 없지.

 

동네시장 귀퉁이에 앉아 채소를 파는 사람들도 배추값이 올랐다고 수지맞을 일은 전혀 없어. 시골의 농부와 동네 시장과 평범한 사람들의 밥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건 서로 얽히고 설킨 문제니까 말이야. 생산자를 목조르고 동네의 작은 가게를 죽이고 소비자를 울게 하는 손은 어차피 같은 손이거든.

 

소위 자유를 좋아한다고 우기는 어떤 사람들은 이 손을 그냥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불러. 세상의 자유 중에 최고 좋은 자유는 시장의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 말에 따르면, 시장을 가만 내버려두면, 사람들이 다 알아서 열심히 살고 제일 좋은 것을 쫓아다닐 테니까 세상이 절로 좋아질 거래. 그래서 정부나 노동조합, 인권운동 같은데서 불평등이문제다, 소득재분배를 해야한다느니 어쩌구 하면서 시장 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고 기업활동에 방해를 하면 잘 돌아갈 일에 문제가 생기니까 가만 놔두는 게 최고라고들 말해. 가만 놔두는 게 그 사람들에게는 자유라는 말의 뜻이야. 말은 가만 놔두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가만 놔두는 건가? 불의한 일이 있을 때 아무말 안하는건 가만 놔두는게 아니고 불의한 쪽의 편을 드는 일이쟎아. 강자와 약자가 맞붙을 때 가만 놔두는 건 약자한테 깨지라는 말과 같은거쟎아.

 

엄마 말처럼 사람간에 도리가 있듯이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장에도 도리가 있는것 아니겠어? 길거리에 교통신호가 있듯이 시장에서도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이 있고, 그것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건 바로 사람이야. 엄마가 믿는 하나님 말고 이 세상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누군가 득을 봤다면 그건 누군가 손해를 봤다는 것이고, 누군가 승리했다면 누군가 패배했다는 것이지. 대기업이나 대형마트들은 ‘좋고 싸니까 우리한테서 사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누구에게 싸다는 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싼 가격을 위해 많이 뺏겼다는 말이야. 물론 더 노력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앞서 나갈 수도 있지.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한목소리로 칭찬해 주쟎아. 우리가 문제삼는 건 사람을 헐값으로 부려먹는다거나 농부같은 생산자에게 제 값을 안준다거나 하는 일이야. 또 시장을 통째로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 눈치도 안볼 조건이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거나 세금으로 닦은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시설을 누구보다도 많이 이용해놓고 사회에 대한 기여는 생각도 안하는 기업의 행태를 문제 삼는 거지.

 

시장이란 늘 사람들의 행동으로 만들어온 것이야.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사람들이 조작하는 것인데, 그럼 정의롭게 조작해야 하는 것이지. 생산자인 농부나 도시의 작은 상인이나 소비자에게 정의롭게 말이야. 생산자인 농부가 수지타산이 안맞아 제초제를 뿌려 애써 키운 작물을 죽이거나 트랙터로 갈아엎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다 망해서 큰 가게에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살아가고, 소비자인 사람이 열 지갑이 없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요즘 엄마 같은 방식의 소비습관이 뜨고 있는 것 알아? 엄마처럼, 동네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 동네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습관은 대형업체의 등장으로 구습이 됐다가 요즘 ‘윤리적 소비’라는 말로 되살아나고 있어. 다소 불편하더라도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한다거나 되도록 지역에서 이웃들이 생산한 물건을 쓰려하고, 싼 가격보다는 공정한 가격을 찾아 치르려고 하고, 좀 더 환경을 생각한 물건들을 찾아 쓰는 노력들을 말해. 엄마는 동네사람, 아는 사람의 집을 늘 찾아다녔쟎아. 코 앞에 더 싸고 더 좋은 가게가 있더라도 말이야. 난 머리를 깍아도 항상 엄마가 아는 사람집에 데려가는 게 싫었어. 엄마 아는 동네 사람이라고 너는 항상 거기가서 머리를 깍아야 한다는게 고리타분했어. 난 엄마가 권하는 미장원이 아니라 친구들이 가는 근사한 메이커 헤어샾에 가서 어울리고 싶어도 말이야. 그런데 엄마한테는 그게 사람의 도리였던 거야. 엄마의 그런 소비습관만으로 모든 것이 당장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가만 놔두는 게 아니라 뭔가 바꾸기 위한 시작일 수는 있을 거야. 인권의 역사에는 법과 제도를 바꾸고 때론 세상을 뒤엎어버리는 엄청나 보이는 일들이 많아. 아무리 엄청난 일이라도 그건 하나같이 사람들이 한 일이야. 서로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책임지는 일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말이야. 절이고 씻고 다듬고 버무려 오랜 기다림 속에 시원하고 감칠맛 나게 익어가는 김치처럼 우리네 삶도 익어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야.

 

서양 사람들은 인권을 말할 때 ‘빵과 자유’라는 말을 자주 써. 그 사람들은 빵을 주로 먹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빵’을 먹어야 사람이 살아가니 어느 누구도 빵먹는데서 제외되면 안되니까 여기서 ‘빵’이란 말을 사람 사이의 평등이란 말로 바꿀 수도 있어. 그러니까 ‘빵과 자유’라는 말은 ‘빵(평등)’이 있어야 사람은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사람이 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돼. 우리식으로 바꿔 말하면 ‘김치와 자유’가 되겠네.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지. 자유가 고통받으면 평등도 고통받고, 그 반대도 똑같다는 말이야. 그럼 그 반대로 자유로운 만큼 평등하고 평등한 만큼 자유롭다는 말도 될 거야. 혼자 살 궁리 말고 더불어 살 궁리를 하는 게 자유를 얻는 방법이란 말도 돼.

 

엄마가 고생 끝에 올 낙으로 아껴둔 자유란 말, 이젠 아끼지 말고 썼으면 해. 엄마의 인생속엔 언제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 때문에 엄마는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주고받으며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올 겨울에 배춧값이 얼만큼 오르든 내리든 어쨌든 적은 양이라도 엄마는 김장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아무리 비싸더라도 이집 저집에 김치를 선물로 안기겠지. 비슷한 재료로 담가도 집집마다 다른 맛이 나는 김치, 그런 개성이 자유의 맛인 것이고, 서로에게 선물로 안기는 김치는 우리에게 먹는 것 이상의 것이야. 대가없이 주는 선물을 빼앗긴 사회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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