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인권단어장]은 [인권문헌읽기]를 마치고 새로 시작하는 기획입니다. 인권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의 의미를 대화를 통해 생각해보는 기획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게 시작하지만, 점차 나아지는 기획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글쓴이 류은숙-

- 에휴!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어.
- 쯧쯧! 한숨이 하늘을 찌르겠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인간 존엄성’이 어디 가겠어?
- 인간 존엄성? 그게 뭔데? 난 그 말을 들으면 오히려 무력하고 막연해서 화가 나.
- 인간 존엄성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지.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존엄성에 대한 상상력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걸 연결해줘. 이를테면 모든 인권의 마중물이라 할까? 네가 지금 인간의 가치가 대접받지 못하는 걸 한탄하는 것도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이지 않을까?
- 뭐, 그렇긴 하지만…. 뭐 내세울 만한 지위나 자랑거리가 있어야 대접받지, 나같이 하찮은 ‘노바디(Nobody)’에게 무슨 존엄성이 있겠어?
- 그건 아주 과거로 후퇴하는 생각이야.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 사람들은 존엄성에 대해 네가 말한 것처럼 생각했어. 높은 서열의 지위(신분)에 속하거나 뛰어난 덕을 지녀야만 존엄하다고 여겼어. 존엄성의 어원인 ‘dignitas’에는 그런 위계적 요소가 담겨있어. 존엄성은 원래 ‘공경을 요하는 가치’인데 우러름을 요구하는 가치란 게 평등하기보다는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거야. 높은 집안에 잘 태어나거나 재산이 많거나 명예로운 자질을 갖거나 인데, 명예로운 자질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조건으로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어차피 존엄성의 조건은 동어반복이야. ‘천한’ 다수와 구별되는 ‘귀하디귀한’ 소수를 위한 용어가 존엄성이었어. 요즘 말로 하면, 보통 사람이 아닌 위대한 사람의 특성인 거지.
- 그런 존엄성이 어떻게 인권의 마중물이라는 거야?
- 존엄성의 성격을 싹 바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저항으로 존엄성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어. 즉, 특수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으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게 아니라 평등한 것으로 탈바꿈했어.
- 도대체 무슨 말인지….
- 현대의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잘’ 태어나는 걸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충분해. 특별한 소수의 존엄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보편적인 거야. 존엄성을 지위‧재산‧덕과 명예 등 외적인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야. 또 모든 사람이 일체의 특질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갖는 존엄성이니 평등한 거야. 어떤 사람의 존엄성도 다른 누구보다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거지.
- 어떻게 그런 큰 변화가 생겼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 근대인권혁명을 통해 존엄성의 위계적 요소를 떨어뜨리고 부숴왔어. 결정적으로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확인한 것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왜 하필 세계인권선언이 계기가 된 거지?
- 세계인권선언의 배경을 생각해봐.
- 두 차례의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핵폭탄…. 존엄성과 상반되는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지.
- 맞아. 결코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될 참상을 겪은 사람들에겐 근본적인 가치의 전환과 재확인이 절박했어. ‘다르게 살자’는 구호만으론 될 일이 없어. 구체적인 실천의 기준과 약속이 필요했지. 그게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그 이전 시대에도 인권선언은 많았잖아? 인간 존엄성이 세계인권선언에서 특별할 게 뭔데?
- 뭘 근거로 인간이 인권을 갖느냐, 왜 인간이 존엄하냐는 질문에 대한 접근방식도 답도 다르기 때문이야. 이전 시대의 인권선언은 절대자(신) 또는 신을 대신한 ‘자연’에 기대거나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했어.
- 세계인권선언의 존엄성은 뭐가 다른데?
- 신이나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가 아니라 존엄성을 ‘인간끼리의 약속’으로 강조한 점이 달라. ‘인간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됐으니 존엄하다’거나 ‘만물의 영장’이니까, ‘이성을 가졌으니까’ 등등의 설명을 모두 제쳐두었어. 특정 종교나 사상을 뿌리로 하는 일체의 것들을 무시하자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어.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과 신념, 역사와 문화를 가진 다양한 사람과 민족과 국가들이 있어. 이들 중에 누구의 것을 선택하거나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차이 속에서도 ‘중첩되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고 봤어. 아무리 달라도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자는 데서는 겹치는 합의가 있다고 본거야.
- ‘중첩되는 합의점’이라 …. 그럼, 합의의 목적은 뭐야?
- 실천을 강조한 거지. 인간 존엄성이 이런저런 근거로 정당화된다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실천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걸 중요시한 거야.
-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는 뭐야?
- 선언의 제정자들은 그 개념에 대해 콕 집어 정의하지 않았어.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많다고 봤기 때문이야. 아주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 사상과 신념들 속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다고 봤어. 그리고 인간 존엄성이란 게 어떤 특질이나 본질을 근거로 한다는 시각을 거부했어. 섣부르게 본질을 규정하는 게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배척하는 구실이 돼온 역사가 있잖아.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동등한 내재적 가치일 뿐 어떤 특별한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내재적이란 건 기본 장착된 거니까 분리할 수도 없고 줬다 뺐었다 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말로 하면, 불가양성과 불가침성을 갖는다는 거야.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거지. 이런 존엄성을 경제적‧정치적 이익이나 그 어떤 것과도 거래할 수 없는 비타협적인 가치로 삼자는 게 세계인권선언의 기본적 약속이야.
- 흉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파렴치한 사람의 존엄성도 그렇다는 거야?
- 물론이지. 존엄성은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거니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치러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이지, 존엄성을 박탈당할 수는 없는 거야. 흔히 행실이나 업적을 따져서 ‘인간 자격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에 걸맞은 평가와 처벌 또는 보상이지, 인간 존엄성을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타인의 존엄성을 재단하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흔들리는 건 바로 나의 존엄성의 뿌리야. 인간 존엄성은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거니까.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

-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 존엄성이란 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거 아니야?
- 나는 오히려 다른 예를 들고 싶은데. 인간 존엄성을 ‘너는 온 우주에 하나뿐인 존재’, ‘너는 뭐든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식으로 말로 치켜세울 뿐이거나 ‘사회가 너를 어찌 대하든 네 자신이 무시하면 괜찮다. 내면의 평화와 자존감을 키워라’는 식으로 주문하는 것이 오히려 존엄성을 낭만화하는 것 같아. 정작 존엄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같이 뭘 실천하자고 하면 내빼잖아? 그런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 아닐까? 존엄성은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란 걸 기억했으면 해.
- 지금 하는 말은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관계의 문제를 가리키는 거야?
- 맞아. 인간 존엄성이 인권의 기초이긴 하지만 둘이 같은 건 아니야. 인권은 인간 존엄성을 현실로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어. 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이 목적이라면, 인권은 그것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세트라고나 할까.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게, ‘적어도’ 이걸 지켜줘야 한다는 테두리를 만들도록 해.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과 합의가 있어야 실천 여부를 따질 수도 있지.
- 그럼, 구체적인 권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존엄성은 쓸모없는 거 아냐?
- 존엄성은 ‘쓸모’에 종속되지 않아. 설령 우리가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다수의 타인이나 국가가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존엄성을 갖고 있고, 이 존엄성은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거야. 쓸모가 있고 없고를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인간 존엄성이니까. 흔히 인간 존엄성을 인권의 초석이라고 하는데, 기본 중의 기본 원칙이라는 말이야. 세상에는 쉽게 합의할 수 없고 서로 다투는 권리와 원칙들이 많아. 이것들이 다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심판 역할을 하는 게 존엄성이야. 서로 간에 조정이 필요한 여타의 권리나 원칙들과 달리, 존엄성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기 때문에 모든 권리와 원칙들의 토대이고 초석이라 하는 거야.
- 결국 존엄성의 쓸모가 있다는 말 같은데.
- 하하. 쓸모란 수단을 강조하는 것 같으니 존엄성의 ‘힘’이라고 말하는 게 어떨까? 때론 무력하고 모호해 보여도, 존엄성은 인간다운 삶의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버티는 힘이 돼. 현실적으로 권리의 보장이 잘돼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존엄성을 호출하진 않을 거야. 존엄성은 눌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과 모욕을 드러낼 수 있어. 존엄성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은 부당한 처우를 문제 삼고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 존엄성은 지금은 안 보이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야. 또 존엄성은 권리의 왜곡을 막을 수 있어. 흔히 재화나 서비스를 받으면 권리가 충족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재화나 서비스가 전달됐다고 해서 존엄성이 존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가 이용될 수도 있어. 권리의 가면을 쓴, 존엄성을 위협하는 접근을 가려내는 것이 존엄성의 고유한 힘이야.
- 존엄성의 힘? 존엄성을 말하면 코웃음 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 왜 우리가 인권을 받아들이고 인권을 실천하려 하는지, 환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 탁하게 고인 공기를 환기시키듯이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감정,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환기시키는 공기의 주입이 필요해.
- 그러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존엄성을 느낄 수가 없는 것 같아. 타인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존엄성에 찬물을 끼얹는 걸 거야. 아주 가끔이라도 존엄성이란 말에 스파크가 일었으면 좋겠어.
-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자동적인 게 아니야. 스파크를 일으키려면 뭔가 계속 자극하고 부딪쳐야지. 존중도 익히고 가꾸고 훈련하는 게 아닐까?
- 존엄성도 어렵지만 존중이란 말도 어려워. ‘존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존중받지 못하는 건 수치스럽고 우울하고 화나고, 감이 좀 오는데, 존중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 존엄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 평가한다고 말하진 않잖아. 왜 그런지, 존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 나눠보자.

 

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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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11. 3. 11

작성자 : 유해정(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중증 장애인으로 6시간만 살아보라

3년 전 여름이었다. 장애인 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땡볕 아래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건만 결국 바람을 맞았다. 다음 날, 그와 연락이 닿았다. 병원에 입원했단다. 집에서 휠체어를 타다가 넘어져서 네 시간이나 휠체어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괜찮으냐고 묻자, 일전에는 넘어져서 밤새 그러고 있었던 적도 있었으니 이번엔 그나마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하체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상체도 거의 쓰지 못하는 그가 휠체어에 깔려 사투를 벌였을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떠냐고 말하고 싶었다. 이런 속마음을 아는지 그가 먼저 입을 뗐다. “혼자 살려면 감수해야죠. 집엔 안 알리려고요.”

독립과 자유를 향한 열망에 장애라는 구분은 무의미하다. “나랑 같이 죽어야 할 텐데…”라는 부모의 넋두리를 듣고 사는 중증 장애인일수록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간절하다. 그런 사람에게 안전을 이유로 가족과 함께 살라고 할 순 없다. 그렇다고 시설을 추천할 수도 없다. 시설의 비리와 인권침해는 이제 뉴스조차 되지 못한다. 만에 하나 좋은 시설이 있다 한들, 평생을 시설의 일과표대로, 주어진 식단대로 따르며, 사적인 생활을 통제받으며 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방법은 중증 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 서비스를 강화하는 거다.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는 중증 장애인의 일상생활 및 사회생활을 지원하는 것인데 정부 예산으로 운영된다.

그런데 정부의 의지와 예산이 부족해서 이 서비스는 매번 비판을 받는다. 혼자 생활하는 1급 중증 장애인이 정부 지원을 받는 활동보조 서비스는 한 달에 180시간, 하루 평균 6시간이다(지방자치단체가 추가 지원을 하기도 한다). 이 시간 내에 씻고, 삼시 세끼 밥 먹고, 화장실 드나들고,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세상에서 장애인들은 일상을 보내고 외출을 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하지만 하루에 6시간 이상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자기부담금 4만원 이외에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

장애인 33만명 중 30만명, 활동보조 서비스 못 받아

노동시장에 거의 진입하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에게는 매달 4만원도 큰돈이다. 그러다보니 열성적인 가족들이 있지 않은 한 사회생활은 불가능하다. 대다수 중증 장애인이 학교 가기를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벗 삼아 지내는 건 그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극장에 한번 가기 위해 며칠 동안 한 끼씩 굶어가며 시간을 비축한다. 밖에서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면 화장실을, 식사를, 이동을 부탁하기 바쁘다. 미안함이, 부끄러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책상에 앉아 활자로만 이들의 삶을 엿보는 국회와 정부는 서비스 이용 문턱을 더욱더 높였다. 지난해 정부가 발의해 한나라당이 날치기한 장애인활동지원법은 장애인이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내는 돈을 4만원에서 8만원으로 100% 인상했다. 그리고 같이 사는 가구원의 소득에 따라 매달 최대 21만원까지 자기부담료를 내게끔 했다.

‘공짜 복지병’을 얘기하기 전에 중증 장애인으로 한번만 살아보심이 어떨까? 24시간인 하루를 6시간만 살아보시라. 활동보조 서비스가 필요한 장애인 33만명 중에서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나머지 30만으로 살아보시라. 매달 부담금을 21만원씩 내야 하는 중증 장애인의 가족으로 살아보시라. 중증 장애인에게 필요한 만큼 활동보조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정부가 선심을 베푸는 게 아니다. 그들의 것이어야 할 삶을, 그 삶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시사인 2011. 3. 17 / 유해정>

작성일자 : 2011. 2. 19

작성자 : 유해정(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 <시사인 177호/ 2011.2.15>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어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있다.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 철거 현장에서 준우란 아이를 만나던 날도 그랬다. 아파트 건설 현장 펜스에 기대 세워진 판잣집. ‘여기 사람이 살고 있다’라는 현수막이 없었다면 혹한에 장사를 접은 포장마차인 줄 알았을 그곳에 철거민들이 산다. 한낮이건만 빛 한줌 들어오지 않고 바람만 피했을 뿐 말할 때마다 입김이 서리는 천막 안에서 준우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도 아이는 입을 열지 않는다. 농담을 건네도 웃지 않는다.

다른 이를 통해 알았다. 아이의 이름이 준우라는 것도, 올해 열한 살이 됐다는 것도, 그리고 아빠 김창수씨가 용산 참사로 구속된 이후 그 충격에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도. 김창수씨는 2009년 1월 용산 망루에 올랐다가 4년형을 선고받았다. 준우 엄마는 화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한순간에 집을 빼앗긴 것도 기가 막힌데 남편을 교도소에 보내고, 노모를 모시며 어린 두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우리만 살기도 벅찬 세상에 왜 남편은 용산 철거민들을 돕겠다고 망루에 올랐는지, 내쫓으면 사라지면 될걸 왜 우리도 사람이라고 외쳤는지. 때로는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간 남편이, 용산 철거민들이 원망스럽다. 슬픔과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떠올랐다. 회사 측의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 파업을 벌이던 2009년 여름,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그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빠의 긴 부재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경찰만 보면 엄마에게 숨으라고 했다. 구사대가 내뱉는 욕을 배웠고, 막대기와 돌멩이 던지는 것을 배워 소꿉장난을 했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다며 가슴을 쳤다.

이겨야만 했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노동자 90여 명이 구속됐고 파업 참여 노동자들은 민사소송에 휘말리면서 빚더미에 앉았다. 해고된 이들은 생활고에 아이의 우유를, 학원을 끊었다. 누군가에겐 ‘지난 사건’이 이들에게는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었고, 오늘도 계속되는 삶이다. 혹독한 삶의 무게에 지난 2년간 쌍용차 노동자 다섯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 남의 일이라며 뒷짐만 져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얘기한다. 혹독한 세상, 안될 일에 미련 두지 말고 빨리 손 털라고.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아이들만 상처받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들을 돌아봤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이들을 보살피고 보호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고, 사법부는 ‘법대로 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건설회사는 계산기만 두들기고, 많은 어른들은 남의 일이라며 뒷짐을 진다.

발전과 경제성장만이 화두인 세상에서 내몰리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들의 고통과 그 가족의 아픔은 오롯이 그들 몫이다. 사회적 고통이 되지 못하고, 화두가 되지 못한다. 얼마나 서글픈 시대인가.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도 서러운데,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도, 분노도, 죄책감도 다 그들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지는 세상은.

언젠가 아이들이 물을 거다. ‘정리해고’ ‘강제철거’ ‘승자독식’이 무슨 뜻이냐고. 그때 우리는 이 말들의 의미를 설명해줄 수 있을까? 발전·경제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집과 부모를, 동심을 빼앗긴 아이들이 있다는 걸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외면해야 했다고, 우리 가족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해야 할까? 오늘도 준우는 아빠를 기다리고, 수많은 준우의 부모들은 망루에, 타워크레인에 오른다.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 <시사인 177호/ 2011.2.15>

작성일자 : 2018. 2. 10

작성일 :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공동정범: 국가폭력을 직시하며 고통을 통한 연대의 정당성을 묻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정범은 지금까지의 ‘사회’파 다큐멘터리가 가지고 있던 문법을 깨뜨렸다. 보통 이런 ‘사회’파 영화들이 가진 기본적인 서사가 있다. 선량하게 살던 사람들의 삶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파괴되고 피해자들은 그 고통에 절규한다. 화면 가득한 절규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피해자의 ‘편’, 혹은 피해자의 ‘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아니라 이들이 피해자라는 단수여야 한다는 점이다. 설혹 그 피해자들 안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봉합 가능한, 즉 큰 틀에서 국가나 자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라는 단수로 봉합가능한 차이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차이 같지 않은 차이로 무시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결코 복수일수가 없다. 단수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 문법을 완전히 깨트렸다. 그 가정 자체를 부정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이 피해자‘들’ 사이의 차이는 ‘봉합’ 가능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고통은 국가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삶에서 이들이 겪고 느끼고 분출하는 분노와 고통은 국가보다는 오히려 그 국가의 폭력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과의 반목 때문에 생긴다. 이전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동지’라는 관계/언어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관계’가 박살났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큰 폭력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다른 사회파 영화와 달리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가가 행사한 폭력은 관계를 박살난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의 관계만 박살낸 것이 아니다. 당사자들은 그 이후 ‘우리처럼’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다. 인‘간’을 박살내어 그가 더 이상 사람일 수 없게 하는 것, 그것이 존재 자체에 가하는 국가 폭력의 핵심이다.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말한다. 이 사이를 두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어떤 얼굴로 만나는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을 맨 얼굴로 만나지 않는다.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면’을 쓰고 만난다. 그리고 이 ‘가면’에는 언제나 사회로부터 오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는 ‘동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면을 쓰고 만났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시민’ 혹은 ‘민중’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난다.

사람이 가면을 쓰지 않고 그저 ‘나’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그 만나는 사람도 그저 ‘그’로서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대단히 한정적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신이나 동물, 식물 그리고 아주 희박하게 사랑하는 사람정도다. 교회에서 통성기도, 무속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 이전의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 언어는 침묵이거나 혹은 의성어나 절규와 같은 ‘소리’다.

첫 번째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이들 사이에 더 이상 가면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상을 넘어서는 국가의 폭력은, 그 국가의 폭력 앞에서 이들을 묶어 놓았던 가면인 ‘동지’를 박살냈다. 동지가 서로 같은 뜻을 나누고, 서로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것이라면, 이전에 쓴 글에서 말했듯 국가의 폭력은 이들의 ‘동지’라는 가면이 그저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가면이 아니라 얼굴로서의 그런 동지는 애시 당초 있지도 않았다.

그 가면이 깨어진 순간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누군가는 바로 거기가 출발점이 아니겠냐고 말하겠지만 그런 ‘민낯’에서 출발하여 새로 서로에게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가면’을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탐색하여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가면이 박살난 이후 관계에 대한 가능성이다. 이들은 어떤 가면을 쓴 얼굴을 서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서로 그 가면을 쓴 얼굴을 대면하면서 그 가면 뒤의 민낯을 떠올리며 역겨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바로 이 가능성을 찾기 위해 참사의 당사자들도, 끝 무렵에 등장하는 인권활동가들도 애를 쓴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도 한 번도 제대로 대면해보지 못했던 추한 자신의 얼굴, 그 민낯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사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박살낸 국가권력이 향하는 종착지가 있다. 바로 더 이상 이들이 가면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 혹은 가면을 쓰고 있으면서 언제나 자산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것. 그래서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구역질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존재에 가하는 최종적인 폭력이다. 그 결과 이들은 가면을 쓰지 못하거나 가면을 써도 스스로에게 역겨운 존재가 되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아우슈비츠에 던졌던,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이 던졌던 동일한 질문을 만난다. 이것이 사람인가? 가면이 벗겨진 존재, 더 이상 쓸 가면이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는 존재, 그래서 발가벗겨진 이 존재들은 과연 사람인가? 사람이 모든 이름을 박탈당하고 발가벗겨 졌을 때, 그래서 그저 사람에 불과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 아니라 비인간으로 전도되어 버렸던 아우슈비츠처럼 가면이 박살나고 더 이상 가면을 쓸 수 없게 된 이‘ 사람들은 사람인가?

가면이 깨어진 자는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폭력을 가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참혹한 폭력은 서로에게 ‘진심’을 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잔인하이 있다.사람에게 진심은 믿어주거나 서로에게 있다고 가정하기에 물어보지 않을 때 존재한다. 진심에 대해 그것이 진심이냐고 묻는 순간부터 아주 희박한 경우를 제외하고 진심은 존재할 수 없다. 진심은 답할수록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진심으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사과했을 때 문을 박차고 나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진심을 묻지 않고 믿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맨 얼굴이 아니라 그가 쓴 가면이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면을 쓴 우리 모두는 ‘위선자’이다. 스스로도 자기의 맨얼굴을 다른 가면으로 가린다는 점에서도 위선자이고 다른 사람의 진심을 진정으로 확인하지 않고 믿는 척 한다는 점에서도 위선자다. 그러나 이 ‘위선’은 단어가 풍기는 느낌과는 달리 나쁜 위선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가면을 쓰고 위선자가 됨으로써 자기를 보호할 수 있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게 된다. 사회는 이런 위선자들이 펼치는 일종의 가면무도회이다.

그러나 가면이 깨어진 자는 더 이상 위선자가 될 수 없다. 그는 가면이 깨어졌기에 더 이상 사람을 못 만나거나, 사람 아닌 존재만 만나거나, 혹은 서로에게 네 얼굴은 가면이라고 폭로하거나. 마지막으로 자신이 쓴 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면서, 요구되는 그 가면에 충실해버리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앞의 두 경우가 도피라고 한다면 뒤의 두 경우를 우리는 ‘위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 영화에 나오는 한 ‘문제적’ 인물처럼 위선을 부리는 것조차 그것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 된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유일’하게 충실한 사람이다. 피해자로서, 당사자로서 그는 자로 잰 것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참사의 다른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객들조차 바로 눈치 챌 수 있다.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충실하되 영혼이 없는 것처럼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까지 충실하게 드러낸다. 위선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조차 그가 자신에게 가하는 위악이다.

이것이 국가가 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삶의 터전을 부수고, 관계를 박살냈다. 이 이후로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더 이상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스스로 내가 과연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영원한 고통으로 밀어넣었다. 또한 그 고통이 영원하기에 좀처럼 그 고통에서 벗어나 가면을 쓰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서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존재가 말살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같은 질문을 관객에게도 던진다. 이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만나야할 것인가?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전에 이런 사회파 영화를 보며 그들을 만나던 가면으로는 이 영화에서 더 이상 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민이라는 ‘익숙한’ 가면을 쓰고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 역시 역시 피해자라는 단수의 ‘익숙한’ 가면을 써야한다. 그런데 그들이 겪는 ‘피해’의 핵심이 바로 이 ‘가면’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이 영화다. 따라서 관객들 역시 영화를 볼 때 다른 가면을 써야한다. 무슨 가면? 그러니 관객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언제 결정적으로 취약해지는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저항한다고 하는 ‘국가’에 의해 그 가면이 깨어져버렸을 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저항을 분쇄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이 더 이상 ‘동지’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저항하던 국가에 의해 ‘동지’가 파괴된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동지’가 될 것인가? 그것은 가능한가? 이 영화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여기이며, 사람들이 멈추고 싶은 것이 바로 여기다.

여기서 사람들은 싸늘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건 너네 문제다. 그러니 당신들이 알아서 해결하라. 우리 앞에서는 싸우지도 말 것이고, 내보이지도 말아 달라. 당신들이 해결하고 난 다음에, 혹은 당신들이 해결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연대하겠다. 당신들이 불화한다면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역할에 충실해 달라. 우리의 역할을 위해 당신들의 가면을 써 달라. 그러니 관객들은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데 이런 요구가 연대일 수 있는가? 가면이 박살나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고통의 원인 중의 하나인 그 ‘익숙한’ 가면을 다시 쓰기를 원하는 것이 운동이고 연대인가? 피해자의 가장 큰 비극은 피해자로서만 살아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참사를 알리기 위해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언제나 피해자이기만 해야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말하는 것처럼 피해자는 피해자로서만 주체화된다.

연대의 잔인함은 한 걸음 더 나간다. 연대를 한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가하는 잔인한 폭력은 그들이 피해자로만 박제된 삶을 살아야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아니라 연대한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이 피해자로서 피해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그 피해에 연대하는 우리를 환대하는 것이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환대하기 위해 그들은 피해자로만 살아야 한다. 한 친구가 말한 것처럼 참사의 당사자들이 늘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이 올 때마다 ‘피해자’가 되어 ‘환대’한다. 우리가 그들을 ‘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환대’해야 한다. 이것이 연대인가?

그럼 이 영화는 연대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깨어진 가면 이후, 그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인가? 전혀 아니다. 이 영화를 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의 사회운동의 고민에 대한 완전한 모독이다. 만일 우리가 이 영화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며 ‘민낯의 중요성’ 운운한다면 우리는 완전히 반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운동’이 지나간 자리를 허무와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위악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국가 폭력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일일 것이다.

가면이 깨어진 이들의 민낯을 포르노처럼 드러내는 것은 영화의 의도도 아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이 감독들의 운동이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무엇보다 이 영화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참사가 한 존재에 가하는 고통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존재가 말살당한 채 죽어있는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참사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자칫 참사의 당사자들에게 매몰되어 놓치지 쉬운 이 질문을 이 영화는 끝가지 붙들고 있다. 드러내야하는 민낯은 이들이 아니라 바로 국가라는 것을 말이다. 그들의 얼굴을 보며 내가 이것까지 알아야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바로 그 ‘이것’의 뒤에 있는 국가의 민낯을 폭로한다.

또한 관객에게도 질문한다. 참사의 당사자들을 ‘피해자’로서만 만나고 그들이 ‘피해자’로서 우리를 환대하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문제’만 해결하려고 하는 너희는 정당하냐고 말이다. 이런 ‘우리’들의 연대는 겉으로는 우리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환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들이 연대하려는 우리를 환대하기를 바라는 그 익숙하고 편안한 연대인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편안하고 감동적으로 고통과 연대하는 것, 그것이 연대인가? 그 연대는 정당한가?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지 않고 당사자의 정당성을 묻는 연대는 정당한가? 연대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허물고 질문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작성일자 : 2018. 2. 2

작성자 :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공동정범: 세 개의 공동과 각각의 언어인 공감, 고백 그리고 증언(엄기호 연구활동가)

 

이 영화에는 ‘공동’이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그 세번의 공동을 만들어내는 각각에 대응하는 언어가 있다. 이 글은 공동과 그 각각의 언어가 무엇인지를 보고 영화/글을 쓰고 읽는 우리는 각각의 처지에서 어떤 언어로 무엇의 장치가 되어 어떤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용산 철거민들과 여기에 연대하러 온 다른 지역 철거민들 사이의 ‘공동’이 있다. 두 번째는 참사가 일어난 후 정부에서 이들을 하나로 묶어 처벌하기 위해 붙인 죄목이자 이 영화의 제목인 ‘공동정범’의 그 ‘공동’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김석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경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영화의 주인공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그림자처럼 보이는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을 보자. 이들은 ‘같은’ 철거민으로서, ‘전철연’이라는 같은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이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동지란 같은 운명을 공유한 사람이며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공동의 운명을 나눈 사람들이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고 각자의 재주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공동’의 행동을 취한다.

 

망루는 그 ‘공동’의 상징이다. 이 망루 자체가 공동의 ‘짓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전기를 아는 사람이, 용산 당사자가 아니지만 같은 철거민이고 같은 투쟁을 하는 동지로서 전기를 따오고, 또 누구는 다른 그 망루에 자기의 힘을 보탰다. 싸움은 용산에서 일어난 용산의 일이었지만, 그 용산의 일에 마음과 힘을 보태는 것은 철거민 모두의 ‘공동’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공동’은 정말 공동이었을까? 아니었다는 것이 중간 중간 철거민들의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말한다. 일이 그렇게까지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게다가 그렇게 농성을 하는 계획도 몰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들에게도 투명하게 ‘공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참사 이후에 알게 된다.

 

여기서 이 ‘공동’의 허상이 드러난다. 운명을 공유하는 것으로서의 공동에는 핵심과 주변이 있을 수 없다. 공동의 생명은 위/아래도, 핵심/주변도 아닌 둥글게 마주 앉는 평등이다. 둥글게 마주 앉아 모든 것을 ‘같이’ 결정했을 때 그 공동은 책임을 같이 지는 ‘공동’이 된다. 그 책임은 일을 같이 논의하고 결정했다는 의미에서 ‘공동’ 책임이 되는 것이며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비로소 ‘공동’이 된다.

 

그럼 이번에는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좋게 말하면 입장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해관계다. 철거민이라는 공동의 입장이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내고 그것이 용산과 다른 지역이라는 공간을 가로지르며 ‘공동’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이 ‘공동’은 간단하게 자동적으로 만들어진다. 이해관계가 같거나 혹은 입장이 같으면 이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서로를 부르는 말인 ‘동지’가 되고 이 동지들은 차이를 넘어 ‘연대’하게 된다.

 

입장과 연대 그리고 공감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 중의 하나가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입장이 같다는 것은 비를 같이 맞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를 같이 맞는 것은 말하지 않지만 같은 곳에 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이며 이게 연대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쉬운 말로 연대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며 연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상기시키는 말로 곧잘 인용되곤 한다.

 

이렇게 같은 입장이 되어 비로소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고 ‘연대’할 수 있게 하는 언어는 무엇일까? ‘공감’이다. 이미 철거민들은 같은 망루에 서지 않더라도 같은 처지이다. 같이 비를 맞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곳에서 같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서로의 처지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처지에서 비를 같이 맞고 피하기 위해 망루를 짓고 함께 또 비를 맞는다. 그렇기에 같은 처지라는 입장의 동일함에서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이기려고 것으로서의 ‘공감’이 ‘공동’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 ‘공감’을 확 쳐낸다.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같은 처지에서 같은 비를 맞은 사람들이 모여 더 큰 비를 같이 맞으며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동’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용산 참사 현장에 있던 이들을 통해 보여준다. 같은 아픔을 겪고 비를 같이 맞았다고 공감은커녕 반목과 불신만 생긴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기는커녕 그것을 더 공유할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한다.

 

그 결과 처지의 같음에서 연대하던 ‘공동’의 사람들은 낱개로 파편이 되어 밀려난다. 자신들의 공동이 허상이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자신들이 얼마나 고독으로 밀려났는지를 말이다.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고,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없다. 차라리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편하다. 신에게 귀의하는 것이 편하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영혼에 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하게 한다. 말도 못하지만 자기가 손을 주는 만큼 정직하게 잘 자라는 식물과 달팽이만이 위로가 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공감에 대한 반대편의 진실에 도달한다. 아픔에 대한 동참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내는 공감은 같은 처지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할 때, 함께 아픔을 겪는 이들 사이에 공감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아픔을 같이 겪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공감’은 가능하다. 같은 일을 겪으며 아파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절대 나눌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다.

 

고통의 나눔, 공감은 신과 달팽이, 그리고 식물하고 가능한 것이지 인간 사이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외로움 따위의 말이 아니다. 반대로 고통을 통한 공감, 고통을 통한 연대라는 것이 그 수사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그 불가능을 직시하지 못할 때 얼마나 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누구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에 함께함을 통해 연대하고자 한다면 신처럼 되거나, 달팽이처럼 되거나 혹은 식물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고 있는 이 영화의 ‘성취’가 여기에 있다. 고통과 연대, 공감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 그러 공감은 당신이 신/달팽이/식물이 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사람과 세상을 더 추하게 만들 뿐이다. 같은 운명의 사람들이, 같은 어려움과 아픔을 겪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니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픔을 통한 연대는 공감이 아니라 불신과 반복의 지옥도를 만들어낸다.

 

두 번째의 공동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이다. 용산 참사의 총책임을 맡아야하는 정부는 참사의 피해자인 이들에게 ‘공동정범’이라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 왜 하필 이들에게 부과한 죄목이 ‘공동정범’이었을까? 정부가 이들에게 ‘공동’의 혐의를 씌운 것은 영화에서 말하듯이 앞으로의 투쟁을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투쟁에 나선 사람 모두에게 책임의 위계를 묻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두 번째의 공동은 행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공동이 아니라 행위자를 위협하기 위해서 정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강제된 범죄자로서의 ‘공동’이다.

 

또한 바로 이 ‘공동’으로부터 이미 연루되어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은 분열시키고 반목하게 하는 힘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첫 번째의 공동이 깨지면서 동시에 두 번째의 공동이 부과되면 연루되어진 사람들은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왜 저 자와 똑같이 처벌받아야 하는가? 저 사람의 책임은 어디에 갔는가? 그가 먼저 자신의 책임을 고백한다면 그 이후에 나는 그와 함께 하겠다.

 

이 영화가 묻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첫 번째의 공동이 깨어지고 두 번째의 공동이 강제될 때 공동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한마디로 공동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 영화에는 그런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영웅’도 등장하지 않으며 다른 이를 공동으로 엮어내는 ‘거룩한 희생자’도 없다. 다만 서로 반복하고 불신하며, 공동이라고 믿던 것이 공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들만 나온다.

 

이 영화는 말한다. 공동이라는 것은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말이다. 그리 쉬웠던 공동이, 참사 이후에는 오히려 한 번 만나는 것조차 힘든 것이 된다. 한 쪽에서는 만나는 것을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분노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렇게 만나는 것이 무슨 ‘공동’이냐고 묻는다. 한 쪽은 만나서 소주도 한 잔하고 서로 마음을 터놓아야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다른 쪽은 그런 공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날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나는 그런 공동만이 진짜 공동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정권이 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고백’이다. 재판의 와중에 범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고백이다. 고백을 통해 먼저 자기의 죄를 털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범죄인들이 자기의 죄, 즉 개별의 낱낱의 죄를 토해놓지 않는다. 그럴 때 그 낱낱을 묶어 한꺼번에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정범’이라는 죄목이다. 앞의 공동이 허상이었다면 이 공동은 권력의 올가미다.

 

그러나 영화에서 우리는 이 ‘고백’이 정권뿐만 아니라 참사의 당사자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산에 연대하러 갔던 철거민들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말로 고백을 요구한다. 그들은 누가 망루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는지, 누가 맨 먼저 뛰어내렸는지 등이다. 이를 통해 누군가가 이것이 내 책임이라고 말하고 시인한다면 그 고백에 기초해서 다시 공동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그 모든 일에 그저 휩쓸린 사람이기 때문에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이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이 고백되었을 때 비로소 ‘함께’ 할 수 있고 ‘공동’은 복원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절대 그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용산 참사 현장에서 벌어진 ‘사실’에 대한 이야기일수는 있지만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피해자로서 모든 혐의를 부인한 것도 바로 그 이유라고 말한다. 자기가 책임이 있다고, 아니 더 큰 책임, 혹은 원초적인 책임이 있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을 하는 순간 진짜 책임을 져야하는 권력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앞의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 사실에 집착하는 한 진실은 빠져나가버린다며 완강히 거부한다. 그에게 고백은 진실로 나가는 문이 아니라 진실을 덮는 것일 뿐이다.

 

진실과 사실, 혹은 한 쪽의 진실과 다른 쪽의 진실이 대립하고 그 간격이 커질 때 오리무중이 되는 것은 진실 그 자체다. 사실의 퍼즐들을 맞춘다고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진실이 사실 모두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사실과 진실이 대립하고 만남의 장이 사라지면서 사실을 조작하여 진실을 허구로 만들어낸 쪽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정권이다. 사실도 필요 없고 진실도 필요 없는 쪽이 이긴다. 그래서 이들은 오로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정범으로서의 ‘공동’만 남는다.

 

진실을 통해 공동을 만들어내는 언어로서의 고백.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고백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감독과 관객이다. 아마 한국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이 취하는 방법이 이것일 것이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이 ‘고백’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카메라는 인터뷰를 할 때 항상 얼굴을 찍는다.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카메라는,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관객은 그 얼굴을 통해 가늠하려고 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아마 많은 관객들은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들의 눈동자와 표정을 살피며 그 고백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고백의 도구다. 우리 모두는 그들을 ‘취조’하는 형사, 즉 국가기관이다. 국가기관이 허접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국가를 대행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고백은 국가가, 동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심 있는 우리 모두가 요구하며 모두를 국가로 만든다.

 

이 영화에 대한 가장 큰 상찬은 바로 이 고백을 강요하는 취조의 도구로서의 카메라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는 집요하게 인터뷰이를 몰아붙인다. 그래서 그들의 진실을 살핀다. 그러나 (정성일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그 진실을 고백하는 순간 – 즉 눈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일부로 카메라를 돌리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고백의 장치가 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고백은 ‘죄인’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흔히 토로라고도 말하는 고백은 인터뷰이를 ‘피해자’로 완성한다. 인터뷰이들이 최종적으로 카메라 앞에서 보이는 것은 자신이 겪은 아픔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눈물’로 상징된다.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홀로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는 피해자로 완성된다. 숭고한 피해자로 말이다.

 

대부분의 인터뷰-참여관찰을 통한 서사가 달려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고백을 하는 숭고한 피해자로서 재현/완성하는 것으로 서사는 숭고하게 끝난다. 피해자가 숭고해져야 서사도 숭고해진다. 서사가 숭고해져야 서사를 읽거나 보는 이도 숭고해진다. 이 숭고에 동참하는 것으로 ‘공감’이 발동하고 ‘공동’이 만들어진다.

 

고백을 통해 용서할 수 없는 타락한 죄인과 누군가와 결코 나눌 수 없는 고통을 토로하는 숭고한 피해자가 만난다. 타락한 죄인과 숭고한 피해자는 한 쌍을 이룬다. 그 쌍을 만들어내는 언어가 바로 ‘고백’이다. 이 고백을 통해 이윤을 챙기는 것은 그들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국가이며 그들의 얼굴을 통해 진실을 재판하는 관객이다. 고백은 국가와 관객을 하나로 묶는다.

 

그렇다면 공동은 정말 불가능한 것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관객은 이 영화의 끝에서 다시 새로운 공동의 그림자를 본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들이 다시 둥글게 모여 앉는다. 첫 번째 모임은 고성과 반복으로 더 큰 상처만 남긴다. 그리고 두 번째 모임에서 이들은 비로소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첫 번째에서는 서로에게 진실을 추궁하던 이들이 두 번째 모임에서는 사실을 가지고 조각을 맞추기 시작한다. 이때 이들은 머리를 맞댄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기억, 즉 각자의 사실이 전체에 대한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그 날의 전체, 즉 진실에 대해 목마른 사람들이 그들이기에 서로의 조각에 기대 각자의 조각을 내놓고 빠진 부분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공동‘정범’을 부인하기 위해 말하지 않던 것과, ‘공동’정범임을 부인하기 위해 상대에게 추궁하던 것을 내려놓는다. 위와 아래, 안과 바깥이 아닌 둥근 공동의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김석기에 맞서기 위한 공동의 행동을 편다.

 

여기서 우리는 허상으로서의 공감과 국가 장치로서의 고백을 넘어 서로를 만나게 하고 ‘공동’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다. 나는 이것을 ‘증언’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흔히 증언을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기의 증인이 되는 것, 그러나 나는 이미 자기가 자기를 증언할 때 이것을 국가처럼 보고 그 진실을 판단하려는 카메라와 관객이 개입하는 순간 증언이 증언이 아니라 국가 장치인 고백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앞에서 말했다.

 

증언은 내가 나에 대해, 내가 겪은 것을 타자 앞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증언은 내가 아니라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말미에 인권활동가 박래군과 함께 비로소 만난 참사의 당사자들이 하는 것은 서로의 기억을 맞추는 것을 통해 서로를 ‘폭로’하는 것도 서로에게 ‘고백’을 강요하는 것도, 자기를 ‘토로’하는 것도 아니라 서로에 대해 ‘증언’하며 서로의 기억을 북돋아주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의 증언이 당사자들에 대한 폭로나 당사자의 고백과 다른 지점이 여기에 있다.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게 하는 것, 그것을 나는 증언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증언은 위태롭다. 고통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도 타인에 대한 증언이 타인에 대한 폭로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또한 아무리 용기를 북돋는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마주 대하는 두려움은 증언을 거부하게 한다. 증언의 이름으로 거짓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진실을 향한 용기를 북돋는 증언은 매우 힘들고, 아주 희박하다. 증언은 폭로로, 고백으로 타락하기 딱 좋다. 당사자들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진실을 기록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물어야하는 것이 바로 기록하는 자, 영화라면 감독일 것이고 책이라고 하면 저자, 둘을 묶어낼 수 있는 전통적 언어로는 지식인/활동가일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돌고 돌아 민중 혹은 피해자 혹은 서발턴을 기록하는 자로서의 지식인/활동가의 언어, 지식인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와 사이드, 그리고 스피박 등이 궁극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영화/글쓰기의 윤리, 아니 그 글쓰기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백을 강요하는 국가 장치의 일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공감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그가 될 것인가. 저 국가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고백과 공감의 정치를 거부하고 증언의 ‘장치’로서의 ‘정치’를 하고 있는가? 감독들은 관객에서 무엇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영화를 본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이 영화에 대해 또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과연 증언의 ‘공동’은 만들어지고 있고, 만들어질 것인가?

 

첫 번째의 허상으로서의 공동, 두 번째의 올가미로서의 공동에 이은 이 세 번째 희미하게 등장하는 이 공동은 증언의 공동일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할 것이다.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김석기라는 ‘악’에 맞서기 위한 잠정적인 휴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을 서로 나누자고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소주의 힘을 빌려 빙빙 말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싸움이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공동’이 아닌 ‘고립’이 더 심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우리가 공동에 대해 그리 쉽게 첫 번째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 영화 이후에 우리는 다시는 첫 번째의 공동을 공동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쉽게 저들의 농간에 말려 두 번째의 공동을 받아들일 수도 없게 되었다. 첫 번째의 공동이 ‘동지’와 ‘연대’라는 이름의 공동이었다면 두 번째의 공동은 ‘우리 안의 박근혜’류 따위의 공동이다. 첫 번째의 공동은 언제나 위와 아래, 핵심과 주변으로 나눠진 공동이었으며 두 번째의 공동은 고상하고 성찰하는 척 하는 공동이었지만 그 공동은 언제나 저들에 의해 ‘정범’으로 묶이는 공동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의 공동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림자처럼, 마지막에 지나가듯이 희미하게 보여주지만 그 공동은 뚜렷하다. 그 누구도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 소유하지 않은 진실은 누구에 의해 독점되며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진 사실/진실의 파편들로 머리를 맞대고 퍼즐을 맞추며 나가야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가운데를 비우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진실을 향해 조각을 맞춰가는 것,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그것을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주인공도 아니고 중심인물도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인물/운동이 있다. 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정성일이 말한 것처럼 길이도 맞지 않고 서사도 일관되지 않은 여러 에피소드들의 조각들로 산만하게 흩어질 것이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겠지만 영화의 말미에 반짝 등장하여 고백과 공감을 넘어 서로에 대해, 진실에 대해 용기를 내게 하는 인권활동(가 박래군)이다. 그가 이 과정에 대한 증언자로 되고, 희미하게나마 사람들을 증언자로 묶어내고 있었다. 여기가 인권활동의 자리가 아닐까.

 

나는 인권활동의 위태로움을 늘 경험하는 인권활동가 동료들이 우리의 언어가 무엇이고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하는지를 되묻기 위해 꼭 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작성일자 : 2016. 10. 22

작성자 :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피해자에게서 박탈된 삶(엄기호)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신지 한 달이 되었다. 진실이 밝혀지고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이 사과하고 처벌받기는커녕 일은 점점 더 꼬여간다. 담당 주치의와 서울대병원이 보여주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와중에 괴담은 일부 네티즌들뿐만 아니라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퍼트리고 있다. 그들은 병실을 지키던 딸이 시댁 식구를 방문한 것을 휴양이라며 폐륜으로 몰아가고 있다. 연명치료에 대해서도 마치 유족들이 적극적으로방치한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이를 두고 인간성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냐는 개탄이 이어지고 있다.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신 후 두 차례 장례식장을 방문해서 유족을 만났다. 그들을 보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상가집에서 의례적으로 입어야만 하는 까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언제까지 그 상복을 입어야만 하는지 모른다. 아니 지금 유족들에게 허락된옷은 저 까만 옷밖에 없다. 그 분들이 저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기라도 하면 아마 득달같이 달라붙어 온갖 흉측한 말을 내뱉을 것이다. 그 옷만 입고 있을 때 유족들을 정당성은 겨우 보장된다.(이후에 다시 백도라지님을 만났을 때 다행히상복을 벗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유족들의 건강이 걱정이다. 마음고생이 너무 심해서 밥을 제대로 챙겨먹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더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반경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몇 미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하루 종일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해야한다. 혹 그들이 서울대병원을 떠나 그 앞의 창경궁에 산책이라도 가면 그 사진을 찍어 바로 또 아버지의 시신을 두고 고궁이 눈에 들어 오냐는 둥의 참담한 고발이 이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유족들에게 움직임이란 앉았다 일어섰다, 가끔 절을 하는 조문객을 상대로 맞절을 하는 것만 허락된다. 마음은 마음대로 다치고, 밥은 밥대로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움직임은 최소로 제한된다. 이런 상태에서 사람이 건강할 수가 없다. 사람은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자고, 제대로 움직이고 활동해야 겨우타고난 대로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겨우를 할 수 없는 게 지금 백남기 선생의 유족들이다.

 

이것은 발리를 갔다 왔다 어쩌고 하면서 폐륜 운운하는 저들이 유족들에게서 박탈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이 나라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억울함과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빼앗겨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정희진 선생이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해 말을 했던 것처럼 피해자는 오로지 을 박탈당한 피해자로서만 말을 할 수 있다.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사회가 정한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피해자로서 말을 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존재가 된다. 그는 죽은 존재로서만 재현되고, 행동할 수 있을 뿐이다.

 

유족들에게서 박탈당한 것은 이다. 당신이 오늘 아침 일어나서 먹고 마시고 놀고 걷고 눕고 떠들고 한 바로 그 말이다. 삶이란 변화하는 것이고 부딪치는 것이며 그래서 생동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기약 없이 까만 옷 하나만 입어야 하고, 반경 몇 미터 내외를 떠날 수도 없고, 만나는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 자체가 반복이며, 지어야하는 표정이 또 슬픔하나인 삶. 이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이 나라에서 피해자는 오로지 죽은 존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정희진 선생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피해자에게 가장 큰 가해는 피해자를 만든 바로 그 폭력뿐만이 아니다. 그를 살아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는, 오로지 피해자로만 머무르게 하는 그 가해야말로 폭력이다. 지금 보수 세력이 폐륜운운하며 유족들에게 가하고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해자인 유족들을 죽은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잔인한 죽임의 폭력인 것이다. 그들은 이 폭력을 백남기 선생을 돌아가시게 함으로써, 그리고 유족들을 그들이 만든 피해자의 이미지에 가둠으로써 반복하고 있다.

 

유족들이 웃을 수 있다는 것, 고궁을 거닐 수 있다는 것,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을 만나 떠들 수 있다는 것, 이 삶을 유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조문이라는 유족들과의 만남은 기뻐야 한다.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또 그 사람들 덕분에 유족들이 까만 유니폼을 잠시 벗고 고궁을 거닐고, 친구들을 만나고, 일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유족들을 남편/아버지에게서 잠시라도벗어나 자기의 삶을 돌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을 위해 우리는 싸우는 게 아닌가?

작성일자 : 2016. 10. 20

올린이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53개 인권단체 공동성명>

인정하고 사죄하라.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국가폭력 재발방지 보증하라.

 

국가폭력 피해자, 고 백남기 님이 떠나신지 한 달이 되어간다. 하지만 고인과 가족은 공감어린 위로는커녕 형식적인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진상규명은커녕 사건왜곡을 꾀하는 부검시도만 여전하고 지독하다. 책임지기는커녕 피해자에 대한 모욕과 비방으로 더 큰 죄악만 키우고 있다.

고인의 사건만이 아니다. 셀프수사와 권력자 비호로 법과 권력을 은폐왜곡축재의 도구로만 휘두르고 있다. 정의와 책임을 요구하는 시민을 불순내지 으로 낙인찍고 억압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를 외면하고 후려치는 국가폭력이 잔혹성을 더하고 있다.

이런 때이기에 더욱 절실하다. 국가폭력에 대한 공식사죄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이 없으면 같은 일의 반복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처에서 무너지고 흔들리고 있는 존엄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 인권단체들은 다음과 같이 요구하고 선언한다.

 

1.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을 의문사로 만들지 마라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고, 죽음의 원인을 명확히 하고, 같은 일의 되풀이를 막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현 정권은 이 의무를 정확히 거꾸로 뒤집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만들었고, 명백한 죽음의 원인을 왜곡하고 있고, 더 심한 일이 생기리란 불안을 획책하고 있다.

국가의 대표적인 거꾸로 행위가 부검시도이다. 부검은 의문사 또는 변사의 경우, 고인에 대한 존중을 표하기 위한 행위여야 한다. 하지만 고 백남기 님의 죽음은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의문사나 변사가 아니다. 시민의 머리를 겨냥해 물대포를 직사한 명백하고 무리한 공권력의 행사가 있었다. 피해자는 317일간이나 사경을 헤매면서 매일같이 의무기록을 남겼다. 검시도 마쳤다. 이런 명백한 사건이었기에 가족들은 가해자들을 고발했다. 하지만 당국은 최소한의 수사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범인이 사건현장에 다시 나타나듯이 경찰이 돌아왔다. 시신을 빼앗아 부검하겠다고 장례식장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연일 부검하라는 시위를 고인과 가족들에게 벌이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공정성과 독립성이 유지되는 조사가 아니라는 걸 본인들의 행위로 증명하고도 남는다. 범인이 스스로 하겠다는 부검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부검시도를 걷어치워라. 부검 시도는 국가폭력에 의한 죽음, 명백한 원인이 있는 죽음을 의문사로 만들려는 시도이다. 부검 시도는 고인과 가족에게 연거푸 가하는 고통이다. 부검 시도는 고인을 애도하는 시민들에 대한 모욕이다. 그만큼 잔혹했으면 됐다. 이미 충분하다. 이제는 멈춰라.

 

2. 피해를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라.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는 우선적으로 인정을 받을 권리가 있다. 공권력에 의해 부당한 해를 입었다는 것,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는 진실규명, 가해자 처벌을 포함한 정의실현, 배상, 재발방지와 제도개혁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가교가 인정과 공식사죄이다.

정권이 행하고 있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모욕, 피해사실에 대한 부인과 왜곡은 피해에 대한 인정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피해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는 권력 행위의 대가로서 져야할 책임이다. 명백한 과오와 범법행위에 대한 사죄는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리질하고 내뺄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식적인 사죄는 국가폭력과 인권침해에 대한 귀결로서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져야 할 책임이다. 그런 책임을 인정할 줄 모르면 그런 직분과 직무를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된다.

 

3. 진상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경에 대한 신뢰를 문드러지게 하고, 공정성과 독립성이 유지되는 조사에 대한 불신을 키운 건 시민들이 아니라 공권력 그 자체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특검을 요구하는 건 그나마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민들의 자구책이다. 책임을 묻는 정치, 신뢰의 불씨를 살려내지 않으면 우리가 대참사를 향해 항해하고 있다는 불안을 도무지 다룰 수가 없다.

 

4. 국가폭력 재발방지 보증하라.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혁은 피해자 뿐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의 권리이다. 우리 모두의 운명과 관련된 일이다. 이 일에 제삼자는 없다. 피해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기본적 인권이 존중되고 보장되는 사회구조에 대한 권리가 있다.

 

5. 우리의 애도는 계속된다.

우리는 정치적사회적 참사,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런 애도를 통해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음을 느끼고 책임을 공유하려 한다. 고인에 대한 애도를 통해 우리 삶을 짓누르는 폭력적인 권력에 대항할 힘을 찾고 싶다. 그것이 고인을 기리는 참 의미요, 고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라 믿는다.

애도를 통해 우리가 잃은 것, 우리가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질서의 모순을 찾아 해결하려 한다. 애도를 걷어치우고 빨리 잊으라는 강요가 우리 삶에 대한 모욕과 무시와 통한다는 걸 안다. 애도하는 우리에게 산 자들이 처한 정치나 죽은 이들이 처한 정치가 다르지 않다. 무시와 부인이 아닌 인정을, 모욕과 고립이 아니라 존중과 연대를 구하는 정치야말로 우리가 애도 속에서 찾는 것이다.

 

20161020

 

거창평화인권예술제위원회, 경산(경북)이주노동자센터, 광주인권지기 활짝,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국제민주연대,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노동인권 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다산인권센터,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망할 세상을 횡단하는 LGBTAIQ 완전변태,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반올림, 법인권사회연구소, 불교인권위원회,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 () 신나는센터, 사회진보연대,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서울인권영화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임 '여행자',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새사회연대, 수유너머N,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원불교인권위원회, 울산인권운동연대,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교육 온다, 인권연구소 ’,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중심 사람, 인천인권영화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공동행동, 장애해방열사단,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제주평화인권센터,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진보네트워크센터,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홈리스행동 등 이상 53개 단체

작성일자 : 2016. 10. 11

작성자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죄하라

(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국가의 과잉진압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

백남기 농민 사건은 공권력이 과잉 진압해 한 시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한 말이다.

 

물대포를 사용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한국의 경찰에 대한 총체적이고 독립적인 조사를 요구한다.” “가해자는 처벌되어야 하고 백남기 농민의 가족은 적절한 배상을 받아야 한다.” “한국 정부가 이 비통한 참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이나 키아이(Maina Kiai) 유엔 집회결사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고 백남기 님의 죽음에 대해 표명한 입장이다. 여러 유엔 특별보고관들도 이런 입장표명에 연명했다.

 

안팎으로 자명하다. 고 백남기 님의 죽음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 이것은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 행위라는 것, 따라서 국가는 공식적인 사죄로부터 시작하여 일련의 책임지는 사죄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사죄해야 하는가?

 

잘못에 대하여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근본 규범이다. 우리는 부당한 일에 대하여 일단 사죄를 기대한다.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사죄를 거부하거나 고자세로 버티려할 때 피해자의 참담함은 배가된다.

 

무산된 사죄는 개인 사이에서도 큰 상처이지만, 시민과 국가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국가가 사죄를 거부하는 건 책임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잘 하겠다는 다짐은 다짐이 아닌 더 큰 비극을 부르는 전주곡일 뿐이다.

 

국가의 범죄는 시민의 권리에 대한 침해이고 시민이 준 공권력을 제약 없이 휘두른 것이다. 공권력에 대한 제약은 시민의 인권을 지키고 증진하는 한에서만 그 힘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사죄를 거부하는 건 개인적 차원의 양심의 문제와 다르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제약을 무시하겠다는 것이고 직분과 행위에 따른 책임을 외면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범죄와 그에 대한 책임의 공개적인 인정을 뭉개고 넘어가는 걸 용납하면, 정치공동체가 딛고 선 발판이 흔들리고 무너지게 된다. 권력행위의 대가로서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공권력과의 동거는 불안공포불신에 휘둘리고 힘에 대한 굴복과 숭상에 쏠리게 될 것이다. 사망진단서 발급 하나에서도 나타나는 권력의 손때가 이점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인권의식은 김빠지고 각자의 안위에 목매는 사회가 어떤 모습이겠는가? 공동의 문제를 부각시켜 새 길을 모색하려는 행동들이 위축될 것이다. 국가범죄에 관한 행적을 권력과 법으로 은폐하는 게 관습이 될 것이다. 권력자의 생각과 선호에 자신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타인이 겪는 고난을 못 본 척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잔혹함이 지배할 것이다. 무책임한 국가는 정치공동체에 대한 의식 없는 각자도생의 사회를 반길 것이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에서 자신의 잠재된 고통을 볼 줄 모르는 사회는 똑같은 일이 더 심각하게 재발되는 걸 내버려둘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철저하게 시민의 말을 죽이고 억압했다. 말을 죽이는 정부가 결국 사람까지 죽였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 강남역, 구의역, 지진과 태풍, 군납품비리……. 이어진 죽음들 속에서 국가는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있었다. 책임져야 할 데는 나서지 않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에 도사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민의 말, 공동의 문제를 나눌 말을 부활시켜야 한다. 국가의 무책임, 무능력, 적반하장을 지적하는 말을 죽일 때 납득 못할 죽음의 고리는 이어질 것이다. 악순환의 고리를 깨고 새 고리를 꿰기 시작하는 첫 작업, 말을 살리고 대화가 가능해지는 첫 시작이 국가의 공식적인 사죄이다. 사죄는 말로써 책임의 1번지를 확인하고 책임의 고리를 확산하고 공유하는 정치의 첫 걸음이다.

 

공식적인 사죄는 시민의 일부를 악마화하는 정치에서 벗어나 책임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공권력은 시민을 갈라 치는데 몰두해왔다. 시민들의 집회시위를 과잉 통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어떤 시위는 권력이 직접 부추기고 심지어 돈으로까지 지원하면서, 어떤 시위는 위험시하고 참가자를 으로 대했다. 누구에 대한 기소는 신속하고 가혹하게 처리하고 누구에 대한 고발은 수사조차 안하거나 기소할 생각 없이 굼떴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 복수의 가치와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 살아가는 서로의 존재를 관용으로 대하면서 이 아니라 서로 논쟁하고 경합하는 상대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이 정권의 권위와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시민을 또는 비인간으로 갈라서 분류하고 처우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지를 한국의 근현대사는 똑똑히 보여준다. 비판적 세력 또는 이질적 집단을 적으로 상정한 공권력은 언제든지 심각한 인권침해를 일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죄는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행위이다. 국가의 공식적 사죄는 시민을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표시이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공권력과 공권력에 대한 인권의 제약이라는 원칙 위에 다시 정립하겠다는 행위여야 한다. 공권력이 시민을 /비인간또는 내 편으로 갈라온 점을 반성하고, 보편적 인권과 국가 책임의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 공식적인 사죄이다. 사죄는 이런 기본적 관계를 국가가 존중하겠다는 시인이다. 그런 책임의 시인 속에서 공유할 공적세계를 확장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작동이다. 고인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며 연대와 책임의식으로 작동하는 정치를 말이다.

 

어떤 사죄여야 하는가?

 

사죄가 필요할 때, 입술로만 하는 사죄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회와 사죄를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국가에 요구하는 사죄는 그런 내면에서의 사죄가 아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정치 행위에 따른 정치적 책임이고 불법한 공권력의 행사에 따른 법적 책임이다. 이런 책임은 내키지 않는다고, 진정으로 참회할 맘이 없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성격의 책임이 아니다.

 

입술로만의 사죄라도, 일찌감치 피해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표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물대포에 머리를 직사 당했을 때도, 긴 시간 사경을 헤맬 때도, 돌아가신 후에도, 입술만의 사죄조차 없었다. 지나치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처럼 사죄가 지체될수록 사죄의 진정성은 흐려질 뿐이고 져야할 책임만 늘어갈 뿐이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매우 당당한 어조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하게 한 후에 말할 수 있다. 결과만 두고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죄는커녕 비난도 감수 못하겠다는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데, 비난을 수용하는 것도 사죄의 일부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더욱더 자기변호로 빠지는 사죄, 얼렁뚱땅 모면하려는 사죄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적절하고 유효한 사죄를 요구한다.

 

첫째, 국가의 사죄를 보증하는 명백한 국내외적 규범이 있다. 그런 규범에 따른 충실한 사죄를 요구한다. 국가가 가진 힘을 잘못 또는 과잉으로 휘둘러서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했을 때는 당연히 사죄해야 한다. 이것은 백남기대책위원회 또는 유승민 의원의 요구이기 이전에 보편적인 인권규범의 침해이다. 유엔의 인권피해자권리장전을 포함한 국제인권규범은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한 공식적인 사죄를 국가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단순한 유감이나 후회의 표시가 아닌 사죄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수용하겠다는 약속이다.

둘째, 사죄는 사죄의 주체상황이유절차를 명확히 해야 한다.

셋째, 사죄는 유효한 후속행위의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즉 배상과 재발방지 조치를 포함해야 한다.

 

사죄 받을 권리사죄하라는 명령

 

공식적인 사죄는 피해에 대한 인정’ ‘진실을 알 권리’ ‘정의실현에 대한 권리’ ‘피해 배상에 대한 권리’ ‘재발방지와 제도 개혁에 대한 권리의 연쇄작용으로 이뤄진다. 이 연쇄과정 전반에서 국가는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

 

피해자는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당연히 인권을 가진다. 정부가 가하거나 부추기는 모욕과 강압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사람으로서 갖는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유엔의 인권피해자권리장전에는 피해자의 만족(satisfaction)’이란 항목이 있다. 만족에 포함되는 게 책임의 인정공식적 사죄이다. 만족이란 피해자가 흡족할만한 사죄를 의미한다. 가해자의 자기변명이나 상황의 모면 또는 충실한 책임 이행을 회피할 목적으로 하는 사죄를 사죄로 보지 않는 것이다.

 

사죄 받을 권리사죄하라는 명령문과 같다. ‘권리라는 건 그 상대방에게 그렇게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죄 받을 권리가 권리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진상규명배상재발방지 보장 등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걸 포함한다. 나아가 사죄 받을 권리는 직접적인 피해자의 권리에 그치지 않는다. 재발방지조치는 피해자뿐 아니라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원들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억과 애도는 거듭된 사죄로 표시된다

 

공식적인 사죄는 일회성이 아니라 거듭돼야 한다. 우리는 달력에서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만 보는 게 아니다. 어떤 사건과 의미가 되돌아옴을 거듭 느낀다. 사죄는 한번으로 해치우는 게 아니라 새기고 거듭돼야 한다. 또한 국가의 공식적 사죄 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죽음에 대한 기억과 애도를 공유하는 것도 거듭된 사죄의 중요축이다. 사죄가 지속된다는 것은 우리가 책임의식을 공유한다는 것이고 그런 책임의식이야말로 재발방지의 기본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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