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와 인권의 정치 1]  인종차별주의의 작동방식과 서구우월주의

엄기호(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일주일 전 멕시코시티에서 코스타리카로 오는 비행기를 탔다. 옆자리에 백인 청년이 앉았다. 우리를 보더니 흠찟 놀라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말했더니 쭈뼛거렸다. 일반적으로 남미 사람들은 한국을 잘 모른다. 주저주저하더니 코로나...”라고 말한다. 일행 중 한 명이 괜찮아요. 걱정말아요.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예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뭔지 모르지만 안심하는 듯 했다. 물론 여행하는 내내 힐끗힐끗 우리쪽을 보았지만 말이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예요.” 이 말이 지금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말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에 대한 혐오, 중국인에 대한 혐오를 인정하고, 용인한다. 중국인을 혐오하는 것은 정당하니 마음대로 처분해도 된다는 말이다. 이 사태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으니 그들은 비난받고 격리되고 배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중국인을 발가벗겨 넘기는 말이다. 이 말 속의 중국인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타인의 처분에 맡겨진 존재가 된다. 이를 발가벗은 생명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는 나는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는 부당한 공격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알아듣는다는 게 무슨 말일까. 나를 중국인과 분별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말이다. 그들이 애초에 나를 중국인과 구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말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을 구분하는 사람이라면 안도의 한숨을 내 쉬게 된다.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나는 그 권리가 박탈되어 마음대로 처분해도 되는 존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제법 된다. 그러면 다시 구차하게 설명한다. “두 유 노 삼성?” “두 유 노 엘지?” 그리고 두 유 노 비티에스?”

구차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대부분 구별한다. 그런데 그 분별은 정말 분별일까? 비행기에서 우리 일행에게 코로나?”를 물어본 다음부터 우리 일행은 비행기 타는 내내 기침과 재치기를 조심해야했다. 조금이라도 콜럭거리는 소리가 나면 다시 불안한 듯이 쳐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기침/재치기와 함께 우리가 이전에 한 모든 두 유 노우...”는 허사가 된다. 그래, 니네가 중국이 아닌 한국이라고는 했지. 하지만 너네 같잖아.

기침과 함께 분별은 의미 없는 것으로 무화된다. 답답하지만 이럴 때도 역시 구별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를 탓하는 게 아니다. 분노와 짜증은 굳이 구별하게 해달라고 말하게 만든 중국과 중국인을 향한다. “이 미개하고 무식한 것들은 왜 그런 짓을 해서 병을 만들고 퍼트려서...”가 된다. 서구인이 아시아인을 구분하지 못할수록,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수록 분노는 중국인을 향해 다시 표출된다. 그리고 더 크게 대답한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한국뿐만 아니다. 일본인도 그렇게 말한다. ‘심지어홍콩인도, 대만인도 그렇게 말한다. “중국인은 맞습니다만 저는 홍콩 사람입니다.” 억울함이 반이고 두려움이 반이다. 내가 저 미개하고 무례한 중국인으로 분류되는 게 억울하고, 그 중국인으로 분류되어 겪게 될 차별과 배제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혐오의 목소리가 커지고 행동이 공격적이면 공격적일수록 외친다.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이 말이 저들에게 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다. 저들이 이 말에 응답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부질없다. 말이란 분별하기 위해 쓴다. 분별할 필요가 없다면 굳이 말은 만들어지 않는다. “중국인이 아니에요.”를 외치는 우리에게는 분별이 필요하지만, 이 말을 듣는 저들에겐 분별의 이유가 없다. 분별의 가치가 없다. 애초에 저들에게 중국인과 한국인은 구분 가능한, 구분할 필요가 없는 한 덩어리의 사람들일 뿐이다.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는 더욱 더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구분해서 바라보는 것이 어떤 유효함도 없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권에서 사용하는 치노라는 말은 그때에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아시아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지금도 구분할 필요가 없다. 구분하지 않아 그들에게 억울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간절히 분별해주기를 바라는 우리 비-중국 아시아인들과, 그걸 구분할 필요가 없는 서구인들 사이의 간극, 그 간극에서 이익을 챙기는 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이들은 중국을 주저앉히기 위해서 대중들 사이에 격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이 반중국/반아시아 정서에 기름을 붓고자 한다. 이들의 중국 비판은 결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종식이 목적이 아니다. 중국을 주저앉히고 현 미국-유럽 우월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그 동안 세계의 위협이 되어온 중국에 대한 이중적 평가를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첫 번째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동안의 중국의 경제적 군사적 성장에서 이들이 느낀 위험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상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세계의 안전, 그리고 서구의 우월적 지배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로서의 중국이다. 역시 중국은 위험하다. 지금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전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 위협적인 중국이 사실은 부실공사에 불과하며 아무리 잘난 척을 해봤자 미개한 후진국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그러니 중국은 더 위험해진다. 이 부실하고 미개한 나라가 쓸데없이 경제력과 군사력만 강하니 진짜 위험하다. 그러니 주저앉혀야 한다.

애초에 저들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위생적인 중국도, ‘문화적인 중국도 아니다. 중국을 자신들의 아래로 주저앉히는 것이다. 중국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랬다. (아까 링크한 칼럼에도 나오지만) 청일전쟁 이후의 삼국간섭도 그랬고, 70년대 일본의 경제적 급성장 이후 프라자합의 때도 그랬다. 이들은 서구가 아닌 것들이 서구와 대등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들에게 비서구는 언제나 재앙의 근원지일 뿐이다. 영원히 미개한.

그러니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 이 말은 비-중국 아시아인을 안전하게 하는 말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애초에 애써 중국인과 중국인이 아닌 아시아인을 구분하는 에너지를 써서 자신을 안전하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에너지 낭비다. 한 덩어리로 묶어서 혐오하고 격리하여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 앞에서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고 말해봤자 그 말이 우리를 안전하게 할 리가 없다.

거기서 우리가 당할 것은 비웃음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인종주의자라는 평가를 우리가 대신 받을 뿐이다. 중국인은 미개하고, 중국인을 미개하다는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로서 미개할 뿐이다. 미개한 자, 미개한 자를 미개하게 차별하는 미개한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세계의 질서를 지킬 사람은 이 모든 미개함을 미개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들 뿐이다. 중국인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할 필요조차 없는 그들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당신들만 문명인입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매우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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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소 창이 그간 해온 세미나 내용을 정리하여 인권교육 교재를 발간했습니다. 인권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나누는 학습에 귀하게 쓰이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권연구소 '창'에서는 인권에 관한 정보의 확산과 공유를 위해 인권아카이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인권아카이브’에서는 아카이브 활동의 일환으로 디지털 아카이브(http://hrarchive.or.kr)를 구축하여 누구나 인권의 기록들을 자유롭게 검색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웹페이지에는 1990년대 이후 인권단체, 네트워크, 연대체에서 생산한 기록들이 등록되어 있으며 매월 새로운 기록을 수집하여 업로드하고 있으니 많은 활용 바랍니다.

 

작성일자 : 2018. 1. 5

작성자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2017년 인권연구소 활동보고

 

1. 인권아카이브 구축 사업(3년차)

2015년 시작한 인권아카이브 구축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에 각 단체나 네트워크에는 정리하지 못한 자료들이 쌓여갑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사라집니다. 각 단체가 창립 10주년, 20주년 행사를 맞을 때 정리하기에는 벅찰 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정보의 확산과 공유를 제때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체계적으로 인권자료를 축적/정리하는 시스템의 마련이 절실했습니다.

 

이에 2015인권아카이브를 구축하기로 했습니다. 첫 사업은 각 단체에서 자료 정리와 입력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발이었습니다. 수 십 차례의 논의와 검증을 거쳐 자료입력정리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인권의 가치를 존중하는 활동을 하는 모든 활동단위(개인/단체)에 무료로 보급됩니다.

 

2년차(2016)에는 아카이브 서버로 모은 자료 중에 공개 가능한 자료들에 접속할 수 있는 아카이브 홈페이지를 개발했습니다. 3년차(2017)에는 본격적으로 자료를 스캔하고 입력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인권아카이브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에서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자료는 꾸준히 입력중이고, 검색 기능 에러 등을 계속 수정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인권운동의 옛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아카이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실 주소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37-7 현대빌딩 201호 인권연구소 ’(우편번호 03735)입니다. 파일 자료는 soom9999@gmail.com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2. 한국인권운동사 정리 작업

한국의 인권운동 역사를 정리하는 세미나와 기획 사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2016년과 2017년에 걸쳐 문민정부(김영삼 정권)때부터 박근혜 정부 시기까지의 인권운동 주요일지를 정리했습니다. 이전 시기는 민주화운동으로 정리가 많이 되어있기에 의 세미나는 인권운동이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인권활동가 수다회란 이름으로 당대 주요 현안 활동을 했던 활동가들의 집담회를 열었습니다. 현재는 인권운동의 주요 연대조직(비엔나세계인권대회 공대위부터 인권단체연석회의까지)의 활동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5년 정도의 기본자료 수집과 인터뷰,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고, 매 소주제 세미나가 끝날 때마다 소책자로 정리할 계획입니다.

 

 

3. 출판

은 한 명의 상임활동가와 십여 명의 비상임 활동가들의 조직입니다. 비상임 활동가들은 저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7의 연구활동가들이 단독으로 내거나 참여한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류은숙 상임활동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이제 마주하는 인권의 문장들>, <아무튼 문고 제1-아무튼 피트니스>,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 유해정 비상임활동가 <재난을 묻다-반복된 참사 꺼내온 기억 대한민국 재난연대기>, 김영옥 비상임활동가 <노년은 아름다워-새로운 미의 탄생>, 엄기호 비상임활동가 <공부 공부>

 

4. 세미나

촛불집회 이후 한국사회에서 집회시위의 권리는? 민주주의의 심화는 어떻게?

이런 물음을 갖고 공권력 감시 대응팀소속 인권활동가들과 공익변호사모임 희망법과 공동으로 길 위에서란 주제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이 세미나는 2018년에도 이어갑니다.

공개 세미나에 대한 물음이 많으실 텐데, 당분간 공개 세미나는 없습니다. 인권운동사 세미나와 길 위에서세미나 두 개는 고정 참여자들이 있고, 현재 조건에선 일주일에 두 개 이상 정기 세미나를 운영하기는 벅찹니다. 다만, 정기 세미나 사이사이 소주제를 정리하는 특강 등의 형식으로 공개세미나 자리를 마련할까 합니다. 공개세미나는 홈페이지를 통해 알리겠습니다.

2018년 한 해 모든 분들 건강하시고 서로에게 좋은 기운을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학교는 죽었다 -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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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지난 11월 10일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 하루였다. 첫 조카가 수능을 치른 날이었고 김진숙 씨가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이었다. 내가 인권운동이란 걸 시작하던 무렵 갓난애였던 조카가 다 큰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은 얼마만큼 좋아졌나, 그 세월 동안 난 뭘 하고 살았나,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추위와 더위를 보내고 또 추위를 맞은 300여일 동안 또 난 무엇을 했나, 나는 하루 종일 시험 치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치를 때 문제지를 받아드는 순간은 긴장감의 절정이었다. 책상에 채 다 펼치지도 못할 만큼 큰 시험지를 받아들고 볼펜을 깨물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가 이날 받아든 시험문제는 숱하게 치러왔던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지에서 김진숙 씨는 ‘연대란 무엇인가’는 굵직한 물음을 던졌다. 오랫동안 연대가 뭐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줄 몰라 우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에 속하는 대학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다반사이거나 ‘연대기를 말하는 건가요?’라는 물음을 되돌려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오답자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김진숙의 309일은 연대란 어떤 사람들 사이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공동학습의 기간이었다. 연대가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아하 그거’라고 가슴 한편을 스치는 무엇을 느꼈다. 계속 연대를 공부하고 실천할 동기를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으리란 것이 난생 처음 시험을 치르면서 든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또 다른 시험지는 ‘대학입시거부선언’이었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던 같은 시간에 18명의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과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루저”나 “낙오자”라 손가락질 할 사회에 대해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그저 대학을 안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라 했고,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했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손을 내미는 몸짓”이라 표현했다.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리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가 선언의 마침표였다.

학벌사회를 거부한다고 기껏해야 경력을 쓸 때 출신학교를 쓰지 않는 정도밖에 못하던 나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걱정도 됐다. 이 험한 학벌 세상을 계속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학교를 너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 원치 않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입시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은 뭐가 같고 다른 거지? 이런저런 이유로 ‘탈학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청소년과 입시를 거부할 배짱을 가진 청소년은 뭐가 다르지? 아무리 정규교육에 문제가 많아도 배울 게 있는 것인데 배움의 시기에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지인들과 이런 문제들로 장시간 토론도 벌어졌다.

김진숙 씨의 책 <소금꽃나무>에는 ‘학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김진숙 씨에게는 학번이 없다. 가출하면서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던 대학생이 돼보자는 꿈을 갓 입사한 한진중공업에서 밝히며 ‘공부 땜에 잔업을 못하겠다’고 했다가 비웃음 섞인 벼락을 맞은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 건 김진숙 씨의 트위터 아이디 ‘JINSUK_85’를 봤을 때 85호 크레인이 아니라 85학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습관 때문이었다. 85학번이 아닌 85호 크레인에서 버텨낸 그녀의 힘은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많고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믿음이었다. “학번 없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지고부터였을 게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생기고부터” 그녀는 대학에 못간 잔인했던 청춘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글의 끝에 “세상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투쟁. 그 투쟁에서 당신들은 나의 소중한 동지들이다”라고 그녀는 사랑을 고백한다. 이 고백에서의 ‘당신’은 학번이 없는 사람 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호명이다.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연대, 희망버스나 날라리 외부세력 등에 대한 얘기가 넘쳤던 한 해였다. 그 얘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연대란 ‘우리들’이란 틀을 해체하는 것,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는 거였다. ‘왜 외부세력이 와서 간섭하냐’는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에 대하여 ‘저희는 날라리 외부세력인데요’란 이름으로 화답하는 경쾌함이 이미 ‘우리’의 틀 안과 밖의 구분을 해체했다는 것이었다. 연대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리’ 문제로 뭉친 ‘우리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는 거란 지적이었다.

조카의 수능, 김진숙 씨의 크레인과 연대, 대학입시거부선언이 얽히고설킨 날, 던져진 시험문제에 참고하고 싶어서 나는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절판되었고 누렇게 뜨다 못해 제본까지 너덜너덜해진 책이다. <학교는 죽었다>라는 과격한 제목의 책 내용은 김진숙 씨나 입시거부선언자들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아마 던지는 질문이 같아서일 것이다. 저자인 에버레트 라이머는 미국의 교육학자인데, 저명한 철학자인 이반 일리히와 15년간 나눈 토론과 대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토론에 기초해 이반 일리히도 책을 썼는데 그건 <학교 없는 사회>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교육을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던진 질문을 공유한다면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학번이 있든 없든, 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동료일 수 있다는 것을 묵은 책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학교든 대학이든 정규교육이든 그 무엇이든 어디에 걸쳐 있든 간에 우리 삶 자체가 교육이고 배움인 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라는 걸 말이다.

학교는 죽었다 (에버레트 라이머, 김석원 옮김, 한마당, 1979)학교를 왜 거부하는가

… 전 세계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학교로부터 배우게 된다. 학교에 입학조차 못해본 아이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를 일찍이 중퇴해버린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인생의 좋은 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를 좀 더 다니다가 중퇴한 아이들은 이 체제가 타도될 수는 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 모두가 다 학교란 한 세상 편히 살기 위한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식들만은 그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시켜 잘 살게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들의 자식들은 자기들보다 학교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소망은 결국 현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좌절감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 너무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 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실제로 교육받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실제로 취업관계에서 그리고 실수입면에서도 형편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교육비용이 학생 수나 국민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 소비수준에 한계가 없고, 학위가 사람의 지위를 결정해 주는 이 세상에서는 학교교육의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 진학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닥친다. …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매우 철저한 과정을 거쳐서 길들이는 -즉,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학교에 다니려면 학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즉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규범에 순종하여 따르게 만든다. …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되려면 부모의 재산과 권력 외에도,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순종을 가르치면서 또 규정위반을 가르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규정위반이 일종의 순종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선생 개개인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학교 조직은 학생들이 얻는 점수만을 문제로 삼는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규정은 순종해야 하고, 별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어겨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규정에 잘 순종하는 학생들은 그 사회에서 생산 및 소비 생활을 요구받는 대로 수행하게 된다. 학교 규정을 어기며 성공하는 것을 배운 학생들은 이 사회를 요리조리 이용해먹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 학교는, 기술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사람이 이 지배관계를 통하여 이득을 얻게 보장해주며, 더구나 그들이 이 지배관계를 거부할 줄 모르도록 무능력화시켜 버린다. 결국 학교 운영 과정에서, 상부의 운영자에서부터 하부의 추종자까지 모두가 끝없는 경쟁 -처음에는 규정에 따르다가 결국에는 규정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는 경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 규정이 옳고 그르고 혹은 그 경쟁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제쳐두고 말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테크놀로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테크놀로지의 노예 혹은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예로 전락하기는 쉽지만 자유인 혹은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테크놀로지는 환경의 오염에 의하여, 현대전쟁을 통하여, 혹은 인구폭발 등에 의하여 인류를 죽여버릴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소비경쟁을 통하여, 경찰국가에 의하여 혹은 결국에는 무너지고야 말 생산양식을 통하여 인류를 노예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기회(life chance; 사회계층적 이동, 즉 하층에서 상층으로의 상향이동의 수단으로서의 학교교육을 의미한다)에 있어서 학교 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가

… 학교의 선별기능에 의해 승자가 탄생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자도 또한 생겨나며 학교의 선별은 인생의 선별로 연장되어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어 내게 된다. … 학문 자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기보다는 경쟁에 이기는 것 자체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일부분은 항상 그 대열에서 탈락하기 마련이다. … 더 큰 해악은 학생들을 선별해서 카스트 제도와도 같은 특권적 위계질서의 틀 속에 끼워 넣는다는 점에 있다. … 오늘날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은 그 사회구조와 부합되는 실력뿐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징은 기술문명의 생산물의 경쟁적 소비에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다시 제도에 의하여 통제된다. 한편 제도는 현재의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현재의 특권층이 새로운 ‘실력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물을 통제한다.

학교란 무엇인가

… 여기서 학교를 <일정한 연령의 집단이, 단계적인 교육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가 감독하는 교실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라고 정의하자. … 선생들도 학교가 생기면서 그 전과는 반대의 위치에 서도록 바뀌었다. 선생의 진정한 역할은, 질문을 받고서 보다 깊은 질문을 다시 던져올 수 있도록 대답해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즉 선생이 질문해야 하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정설을 제시해야 한다. … 학교가 직업을 알선하고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을 갖게 해주는 독점적인 제도로서 성장한 것은 표준화된 단계적 교육과정에 의해서 가능했다. … 학교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 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한다 -마치 현대기술문명 세계 모든 것을 취급하듯이. 물론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작과정에서 대상물의 다른 측면을 짓밟고, 바라지 않았던 부산물이 생기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을 조작대상으로 삼을 때 그 희생은 특히 크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있어서 조작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할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교육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은 벌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그 방법이 성공할 것이라는 고집에 있다. 교육과정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조작 처리되어 배출되는 인간은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 -인간을 다른 나머지 물질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교육의 혁명적 역할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 없이는 학교 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의 변화로 교육에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소용없는 짓이다. … 교육적인 변화는 그 변화과정에서 다른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교육은 사회의 근본적인 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는, 비록 소수만을 교육시킨다 하더라도,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서 붕괴되고야 말 것이다. 여기서는 학교 교육 이상의 다른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학교에서 교육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사회를 창조하거나 혹은 다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도움이 없다면 영웅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정의로운 세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삶을 지금부터 살기 시작하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모든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나마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이나 정당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사회는 일단 획득되고 그 다음에 향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하며, 따라서 획득되어지고 있는 동안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사회

A: 나, 노안 때문에 요즘 안경 두 개 쓴다.
B: 두 개?
A: 응. 가까운 거 볼 때랑, 길거리에서 먼 데 볼 때랑 바꿔 써.
B: 불편하겠다.
A: 응. 젤 불편할 때는 사람들 얼굴 보며 얘기해야 하는 데 자료도 같이 봐야 할 때야. 자료를 보려고 이 안경을 끼면 사람들 얼굴이 흐릿해 보이고. 사람들 얼굴 자세히 보려고 딴 안경을 끼면 자료가 안 보이고.
B: 늘 두 개의 시야 사이를 오가네. 나도 요즘 시야가 흐릿한 데 곧 그렇게 되겠다.
A: 두 시야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조리개가 있었으면 좋겠어.
B: 우리들 시력에만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갈수록 느끼는 건데 한국 사회에도 안경 같은 게 필요한 거 같아.
A: 무슨 안경?
B: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 말이야.
A: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엄청 달라 보이는 데, 사회에 요구되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은 뭐로 만들지?
B: 인권교육 같은 걸로?

지긋지긋한 공부

A: 맨날 공부해야 할 게 허다한데 뭘 또 배워? 공부라면 지긋지긋하다.
B: 네가 지긋해하는 그런 공부 말고.
A: 그럼 무슨 공부?
B: 넌 왜 공부가 지긋지긋한데?
A: 음… 내가 지긋지긋해 하는 공부란… 하면 할수록 남과 비교해서 내가 초라해지는 공부, 갈수록 암기하고 익혀야 할 것만 늘어나는 공부야.
B: 또 하면 할수록 전문가들을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공부지. 그래서 주눅 들고. 공부하다 보면 빚도 엄청 쌓여. 돈이 좀 많이 들어야 말이지.
A: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기력해져. 인권교육은 그런 공부와 뭐가 다를까?
B: 네가 싫어하는 공부를 뒤집는다고 생각해봐.
A: 뒤집는다? 그럼 경쟁과 비교 말고, 암기 말고, 전문가나 가르치는 쪽의 우위 말고, 전문가의 일방적 전달 말고, 무기력 말고…. 뭐 이렇게 되네.
B: 반대말을 모아 보면 협력과 공유, 비판적 사고, 위계를 지우고 서로 배우기, 힘이 생기는 배움이 되네.
A: 그런 공부가 세상에 어딨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냐. 우리가 생각해 온 공부는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 위계에서 더 높은 학교로의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거였는데.
B: 이상적이지. 근데 인권교육의 이상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배움이 할 수 있는 참다움이 아닐까? 암기와 기술만을 요구하는 교육에 이미 우린 너무 물렸잖아. 이제 그만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인권교육은 권리다

B: 무엇보다도 인권교육은 그저 하면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권리이기도 해.
A: 우리의 권리라고?
B: 그래. 권리!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권리를 지킬 수 있겠어? 또 권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겠어?
A: 우리 주변을 보면, 인권이나 평등 관련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걸.
B: 그렇게 권리를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 아닐까?
A: 권리 침해라는 생각까지는 못해봤는데… 내 경우엔 내가 받는 모욕과 무시를 ‘내가 못나서’라고 내 탓으로 여기게끔 길들여져 온 것 같아. 또 노동착취를 열정 또는 헌신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B: 우리 주변엔 차별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문제제기하는 쪽을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내모는 사람이 많아. 나도 거기에 쉽게 동조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
A: 특히, 타인에 대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무시를 자기의 자유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
B: 이상한 제목과 명칭을 씌워 피해자를 모욕스럽게 부각시키고 가해자의 존재는 지워주는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인권감수성 결핍이란 생각도 자주 하게 돼.
A: 돌이켜보니 구석구석 인권교육이 필요한 데가 많구나.
B: 지금껏 못 배웠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해 알 수 있어야지. 그 앎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해.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만든 인권교육길잡이 책<인권교육,날다>

 

인권교육을 옹호하는 근거들

A: 인권교육은 한편으론 의무이기도 한 것 아닐까? 인정받을 권리는 곧 타인을 인정할 의무이고 자유를 주창할 권리는 곧 타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할 의무이니까.
B: 그래.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전문)해야 한다고 돼 있어.
A: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강화”(제 26조)여야 한다고도 써있네.
B: 또 있어. 유엔에서는 ‘인권교육훈련선언’을 2011년에 채택했어. 그에 앞서 1994년에는 유엔인권교육을 위한 10개년 행동계획을 채택하기도 했어. 이런 행동계획의 요지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삶을 위한 학습이란 거야.
A: 그럼, 한국에서도 그에 따른 노력이 있어야 할 것 아냐?
B: 물론이지.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교육에 노력해왔어. 무엇보다도 국가는 인권교육에 대한 의무가 있어. 유엔의 ‘인권교육훈련선언’에서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 정책과 절차를 적용해 인권교육훈련을 실행하고,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 7조)고 명시했어.
A: 그러니까 인권교육훈련에 기반이 되는 법 제정 등을 해야 한다는 거네.
B: 그렇지. 가령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교육훈련을 증진하고 공공기관과 민간 활동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해. 2014년에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어.
A: 그래서 인권교육법안이 생겼어?
B: 아니. 법안 철회로 끝났어.
A: 왜?
B: 일부 단체들이 ‘인권교육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 ‘동성애 옹호 등으로 국민의 안전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식의 반대활동을 벌여서 결국 법안이 철회됐어.
A: 반대의 이유 자체가 인권과 거리가 머네. 정말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것 같은데.
B: 그러게. 인권교육의 원칙은 평등, 존엄, 화합, 반차별인데 말이야.
A: 인권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인권이라 했는데, 자기 권리를 걷어찬 것과 마찬가지야.
B: 인권을 내세우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자격조건을 다는 것, 그런 조건부 인권의 주장은 이미 ‘특권’이라 할 수 있어.

비판적 사고의 힘

A: 나는 말을 잘 듣고 지시에 복종하는 게 좋은 태도라고 배워왔는데… 비판적 사고를 가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B: 나도 비판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삐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
A: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곤 했지.
B: 비판적 사고든 창조성이든 ‘자유’를 필요로 하는데 우린 그런 자유를 방해받는 일이 더 많았지. 우리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엘리트의 언어나 표준화된 언어로만 말할 걸 요구받곤 했어.
A: 내겐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한 데, 그게 도대체 뭘까?
B: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란, 모호함을 떼어내는 훈련이 아닐까?
A: 모호함을 떼어낸다?
B: 가령 ‘성폭력’이라 명백히 지목할 일을 ‘어쩌다보니’, ‘몹쓸 손’, ‘스트레스로 인한 일탈’ 등으로 모호하게 말하는 일이 많잖아.
A: 그런 일을 ‘성폭력’이라 말할 수 있으면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거네.
B: 또 ‘노력이 부족해서’, ‘눈높이가 높아서’ 등으로 설명하는 언어들은 대규모의 실업과 열악한 노동현실을 가리는 모호한 언어야.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가령 지배엘리트의 시각으로 해석된 현실이야.
A: ‘변화란 불가능하다’,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거다’ 이런 것도 누군가,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의 시각일 뿐인데, 그걸 나의 시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 이런 것도 비판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
B: 내 삶의 구체적 문제를 드러내고 뭔가 요구하고 싶은 데, 그걸 국가안전이니 애국이니 하는 추상적인 논의와 맞불을 붙일 때가 많아. 그래서 내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몰거나 침묵시키지. 그런 것에 도전하는 것도 비판적 태도 아닐까?
A: 우리가 당연시 했던 해석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또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판적 사고란 거네.
B: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기존에 당연시되던 권력의 작동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는 변화를 찾아내야 해.
A: 그런 변화를 찾아내는 힘을 스스로 긍정하고 서로에게 격려할 수 있는 것에 비판적 사고의 힘이 있을 거야.

인권교육의 방법

A: 그런 힘을 기를 수 있는 인권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B: 일단 내용 자체가 내 삶의 내용, 내 삶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인 권리의 내용, 내 삶의 터에 존재하는 인권규범, 주요한 인권침해에 대한 지식, 인권에 대한 책임을 진 기관과 제도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
A: 또 배움의 방식이 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할 것 같아. ‘꿇어’, ‘외워’ 식으로는 안 될 거 아냐. 검열이 아닌 성찰을 요구하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를 통한 것이면 좋을 것 같아.
B: 공부할수록 날 무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해. 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구체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으면 해. 가령 ‘카더라’ 통신과 근거 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능력,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쟁점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 상호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
A: 나는 그런 교육을 통해 멋진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B: 다시 태어난다고?
A: 응. 우린 그냥 우연히 태어나 저절로 시민권이란 걸 가졌잖아. 그런 걸 누군가 “저절로 된 시민”이라고 말했어. 그런 시민이 다른 운을 갖고 태어난 동료 인간에게 거들먹거리고 배타적으로 군다면 시민성의 의미가 빛이 바래. ‘저절로 된 시민성’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민주주의적 시민성’으로 거듭나는 것, 멋지지 않아?
B: 그래. 좋은데! 아주 멋져!
A: 어느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장애를 만드는 건 환경이고 느끼게 하는 건 사람입니다.”
B: 인권교육이 세상을 전부 바꿀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떤 환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나 또는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를 성찰하는 힘을 기를 순 있을 거야.
A: 요즘 광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배우고 있어. 누군가를 배제하는 폭력이 뭔지도 느끼고 있어. 이런 배움이 비판적 성찰로 이어져 우리 삶을 꾸리는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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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국민 주권

A: 난리다. 난리.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B: 검은 돈으로 주고받는 이권의 정치, 권력의 사유화……. 넌 요즘 심정이 어때?
A: 어릴 적 꼬리잡기 놀이할 때 같아.
B: 꼬리잡기?
A: 머리에 선 대장은 팔짱끼고 버티는데 꼬리에 붙은 애들은 서로 잡고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뛰고 몸부림치던 놀이 있잖아.
B: 넌 머리였어, 꼬리였어?
A: 말해서 뭣하냐. 늘 꼬리였지.

정당성의 근거로만 이용

A: 내가 유권자이고 주권자인 것 맞냐? 나를 대리하거나 대표한다는 자들에게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배신당하기만 하는데.
B: 애초에 저들은 ‘국민’과 ‘주권’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해.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
A: 어떻게 다른데?
B: 일단 저들은 국민주권을 통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만 생각하지.
A: 우리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로 뽑아주기만 하면 ‘나는 국민을 통해 선출된 정당한 권력’이라고 써먹기만 하는 거?
B: 그런 써먹기에서 ‘국민’은 그저 같은 국적을 갖는 사람들의 덩어리에 불과해.
A: 정치의 무대에 등장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의사결정과 집행능력을 갖지 않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한 거지.
B: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은 명목상 주권자이지만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잖아. 그래서 개발된 논리가 헌법상의 권력에 위임한다는 거지.
A: 주권자의 의사라는 명목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뜻’이란 모호한 이름으로 대표자로 나선 권력자의 자유가 표명되기 십상이지.
B: 물론 헌법이 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행사된다고 하지만.
A: 우리를 매개로 했으니 정당하다? 그럼 국민주권이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인증서로 끝나는 거야?
B: 정당성의 근거만 제공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또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선거에 착실히 투표하러 가는 거…….
A: 에효. 대통령이 빈껍데기 허수아비였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우리 주권자들이 허수아비인거네.

권리로서의 국민 주권

B: 국민주권 개념 자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거야.
A: 정치적이란 건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대항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는 말일 거고
B: 역사적이란 건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구성됐다는 거지.

A: 지금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국민주권론 말고 분명 딴 게 있지 않을까? 정치적, 역사적으로 말이야.
B: 있지. 주권을 우리들 권리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구성하려는 주권론도 분명히 있어.
A: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B: 그러니까 주권을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이 진짜 누구에게 있는가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거야.
A: 우리가 주권자라는 건 우리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 권력을 어떻게 쓰지?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B: 우리가 주권자란 걸 관철시키려면 적극적 정치 참여의 권리, 권리 투쟁의 과정으로 주권행사를 생각해야 해.
A: 참정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대표를 선출할 때만 등장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의사를 확인하고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여야지 우리가 주권자라는 게 말이 되지.
B: 권리로서의 주권론과 권력을 옹호하는 주권론의 경합이 오랫동안 있어왔어. 우린 지금 그 경합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야.

국민 주권 vs 인민 주권

A: 무슨 역사적 사례 같은 걸로 얘기해 보자.
B: 근대적 의미의 헌법과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에서 그런 경합의 사례를 볼 수 있어.
A: 맞아. 의회 안의 정치세력과 의회 밖의 정치세력의 경합이 치열했지.
B: 구체제의 특권세력과 특권을 몰아내는 데는 힘을 뭉쳤지만, 중상층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 장악력을 빈농, 소농, 노동자, 소상인 등 민중에게 뺏길 것을 두려워했지.
A: 당연히 두려웠겠지. 민중들은 아주 배가 고팠고 자신들의 단결과 직접행동을 통해 배를 곯게 만드는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했으니까.
B: 그래서 민중들은 정치적 참여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어.

A: 그걸 표현한 것이 ‘국민 주권’과는 다른 주권론이었겠네.
B: 맞아. 둘을 구분 짓기 위해 ‘인민 주권’이란 말을 쓰기도 해. 한국에선 북한이 ‘인민’이란 말을 쓴다고 이 단어를 꺼리지만. ‘국민 주권’의 ‘국민’과 구분 짓기 위해 ‘인민’(people)이라 해보자.
A: 주권론에서 국민과 인민의 차이가 뭘까?
B: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국적보유자의 덩어리가 ‘국민’이라 했잖아. 반면에 ‘인민’은 직접 주권을 행사하고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유권자, 즉 주권행사에 참가한 시민의 집합이야. 이런 인민은 덩어리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은 존재야.
A: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았다면, 유권자의 의사는 유권자 전체의 1/n씩 모여 표현되는 거네.

B: 그런 표현이니까 대의 제도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일 뿐이야. 이런 유권자는 추상적 국민과 달리 의사결정 능력과 집행 능력을 갖는 존재야. 이런 인민은 주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행사하는 존재야.
A: 대의 제도 말고 달리 주권을 행사할 방법이 있을까?
B: ‘인민 주권’의 주창자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구상을 했어. 가령 의회가 법률안을 작성하면 개별 유권자들은 각 지구별로 주권자 집회를 열어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 그 결과가 의회에 전달되면 이를 집계하여 법률의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거야. 법률안을 작성하는 의원은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고, 유권자는 선출된 대리인(의원)에 대하여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책임 추궁은 소환과 형벌로 이뤄지지. 또 의원에 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도 구상했어.
A: 상층 계급이 그런 구상에 동조할 리가 없잖아.
B: 그렇지. 그들은 구시대의 특권층을 내모는 데는 민중들과 힘을 합쳤지만, 이런 급진적인 민중들의 주권론을 받아들일 순 없었어. 자기들 이익을 반영하는 주권론으로 물타기를 해야 했어.
A: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민 주권’이란 거네.

B: 맞아.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규정했지만 그 국민은 ‘대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덧댄 거지. 그러니까 선거 제도가 당연 필요한데, 의회를 장악한 세력은 돈 없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는 제한 선거를 내세웠어.
A: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법률 등의 제정에 직접 참가할 수도 없고, 선거에 나설 수도 없는 거네.
B: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책임추궁, 소환과 형벌 등은 꿈도 못 꿀 명목상의 주권자가 된 거지. 지배세력은 국민 주권론만 헌법에 새겨 넣는 데 그친 게 아냐.
A: 또 뭘 했는데? 제한선거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데.
B: 아주 촘촘한 사슬을 갖췄지.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인권에 대한 제한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법, 또 반선동법을 만들어서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
A: ‘국민 주권’론으로 정당성만 챙기고 사실상 국민의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는 거였구나.
B: 정치적 의사표현의 집회의 자유 보장, 압제에 대한 봉기권을 말한 인민 주권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거지.

주권자는 쉬지 않는다

A: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네.
B: 주권자에 대한 탄압도 다르지 않지만 저항도 다르지 않지.
A: 우리의 가까운 역사만 봐도 ‘국민 주권’에 갇힌 명목상 주권자가 아니라 실질상 주권자가 되려는 저항은 쉰 적이 없는 것 같아.
B: 오늘날 ‘국민 주권’은 그런 저항 속에서 변화된 거라고 봐야 해. 간판은 ‘국민 주권’이지만 ‘인민 주권’의 이상이 많이 침투한 국민 주권을 오늘날 우리는 구상하고 구성하려고 하고 있어.
A: 그치. 제한 선거 제도는 보통선거 제도로 바뀌었고, 건드릴 수 없던 대표에 대해서도 유권자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으로 역사는 진전해왔어.
B: 위헌 법률 심사나 정당의 민주화, 많은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국민투표, 국민발의, 소환제도 같은 것도 있잖아.
A: 도처에서 주권자들은 쉬지 않았구나.
B: 우리도 쉴 수가 없잖아.
A: 신정정치니 어쩌니 하면서 추문에 대한 꼬리잡기 놀이로 빠지지 않아야겠어. 똑바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국정 통제권을 발휘하는 거야.
B: ‘정치고 경제고 힘 있는 자들은 원래 다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체념하고 관심을 접을 때 그들은 계속 이익을 얻을 거야. 권력도 공공 재산도 맘껏 사유화하면서 말이야.
A: 나에게 딱히 지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공적 과제들을 다루는 장에서 절대 나가지는 말아야겠어. 레이더를 계속 켜두겠어.
B: 그리고 서로를 더 많이 초대했으면 해.
A: 무슨 초대?
B: 우리 삶은 갖은 고통으로 점철돼 있고 우린 그 고통으로 서로 연결돼 있어. ‘왜 지금 시국에 그 얘기를 하느냐?’ ‘‘하야’얘기에 물타지 마라.’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배척하지 말고 다양한 문제를 들고 공론의 장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서로 환영했으면 해.
A: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이 참, 겨울 바람에 스치운다.
B: 헌법 제1조 2항이잖아? 우린, 개별 유권자들은 따로 또 같이, 집합적으로 이 헌법대로 할 권리가 있어.

 

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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