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71 호 [기사입력] 2016년 01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평등

A: 에구. 추워라. 안 그래도 추운데 가슴 시린 부고까지 왜 이리 많냐.
B: 그러게. 노래로 글로 삶으로 동행해주던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시니 이 추위가 더 힘드네.
A: 그분들에겐 한껏 애도라도 표할 수 있는데, 난 학대받은 아동의 죽음에는 그것도 못하겠더라. 면목이 없어서 말야.
B: 나도 그래.
A: ‘어떻게 아이한테 그럴 수가…’, 흔히 이런 말들을 하는데, 난 솔직히 그 말이 젤 면목 없어. 아이를 평등한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아놓고 문제가 터진 후에야 ‘특별’ 취급하는 것 말야.
B: 나도 그런 말부터 나오던데. ‘어떻게 아이한테 그럴 수가 있어?’
A: 그런 말 하는 심정이야 알지. 하지만 ‘어떻게 아이한테’ 이 말은 늘 아이를 예외 취급하는 거 아닐까? 근데 그게 예외로 잘 해주는 게 아니라, 어른 맘대로 훈육할 때는 ‘특별’이 명분이다가, 정작 중요한 아동의 권리문제에 대해선 쭈뼛거리고 예외 취급하고 배제하는 장치는 아닐까?
B: 일단, 가련한 얘기에 울컥하고 그걸 표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A: 맞아. 인지상정이지. 아동이건 또 누구건, 누가 말도 안 되는 일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되면, 같이 아프고 내 몸 한구석이 저린 것 같고. 근데 그 다음이 늘 없기 때문에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것 아닐까?
B: 그 다음이 뭔데?

‘위한다’가 아니라 동등하게

A: 누굴 ‘위한다’는 식으로 표현하지 말고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하고 동등한 관계를 맺는 것. 그런 관계 위에서 당연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
B: ‘위한다’가 뭐가 어때서? 위해주는 게 뭐가 나빠?
A: ‘위한다’는 걸 만약에 천대, 무시, 차별, 동정과 시혜… 이런 식으로 바꿔 말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B: 뭐,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 그건 쫌 듣기가 별로네.
A: 아동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한다면, 아동이 처한 문제를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는 운명이나 팔자의 문제로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중요한 공적 사안으로 다루고 뭔가 다른 식으로 제도를 운영하겠지. 당연한 권리의 문제로 다루는 것과 뭔가 위기이고 예외적 상황이니까 조처하는 건, 정말 다른 거 같아. 근데 늘 예외로 취급하니까 문제가 터지면 ‘천하에 죽일 XX’ 식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괴물’로 만들거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외치다 잊는 것 같아.
B: 아이가 어른과 같지는 않잖아? 굳이 ‘동등하다’라고 하지 않아도 네가 말하는 권리를 지켜주기는 가능한 것 같은데….
A: 내가 말하는 동등함은 권리의 평등함이야, 권리에 대한 자격을 가질 만한 어떤 본질, 본성, 능력이 원래 우리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게 있는 셈치고 서로를 그렇게 대하자는 약속이 인권이니까.
B: 우린 정말 불평등하잖아. 날 때부터 가진 자원과 자질도 다르고 지금 사회구조 속에서 격차도 크고, 그런 것에 관계없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듣기는 좋은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궁할 때 그런 원리에 호소하면, 다들 코웃음이나 칠 텐데.
A: 너, 평소 인권에 대해 코웃음 치진 않잖아? 중요하다고 생각하잖아. 그러면 인권의 대전제에 대해 비웃는 사람들에 맞장구치듯 같이 코웃음 치면 안 되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사람으로서 평등하다’, ‘누구나 박탈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대접받아야 한다’가 인권의 원칙이잖아. 이게 말이고 말에 그칠 뿐이라고 고집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그 말대로 평등하고 그 말대로 평등한 존재로 살아야겠다고 치받아야지.
B: 하긴, 평등의 토대가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권리도 인권이 아니라 특권일 뿐이지.

‘급’의 틀 깨기

A: 저성과자 낙인찍기, 쉽고 편리한 해고, 함부로 뒤집는 보육예산 집행, 이런 게 불평등한 구조로 고통 받는 노동자나 양육자에게만 고통이고 권리침해일까? 아동의 빈곤, 거기서 야기될 가능성이 큰 학대, 이런 걸 생각하면 아동에 대한 불평등의 문제이기도 하지. 아동의 입장이 빠지고 확실한 권리 보유자인 어른 중심으로만 인권을 이해하면 그 인권은 한국 사회 공동체를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B: 아동만이 아니야. 흔히 사회구조 속에서 취약하다고 분류‘당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동등한 사람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규정받아. 취약한 아동이나 또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취약해진 사람들이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건 기존의 위계 속의 누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뜻일까?
A: 맞지 않는 틀 속에 들어갈 수야 없지. ‘급’을 나누는 틀 자체가 문제인데 그걸 그냥 두고 급수를 올리면, 그냥 끼어든 거밖에 안 돼.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00와 같아졌다’는 인간승리 인생역전 드라마를 계속 만드는 거지. 주인공만 바꿔가면서 말야. 그 주인공은 엄청 빡세게 살아야하고.

모두가 과자를 받는 게임

A: 난 어렸을 때 학교 교실에서 책상 밀어놓고 하는 의자놀이가 참 싫었어.
B: 나도. 처음엔 하는 척 하다가 ‘이걸 열심히 해서 뭐해?’ 이런 생각에 팔짱 끼고 물러나 있곤 했어. 마지막으로 남은 의자 하나에 앉은 애도 그리 신나 보이진 않았고. 중간에 의자 뺏으러 다투는 것도 그저 몸싸움 즐겨하는 애들만 좋아했지, 그 애들도 의자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아.
A: 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그 과자게임이 좋더라.
B: 과자게임?
A: 응. 원래 책에 나오는 게임이름은 그게 아닌데 난 그냥 과자게임이라 불러. 게임의 모든 참가자에게 엘리스가 자기 주머니에 있던 과자를 상으로 나눠줬던 것 같아. 오래 돼서 자세한 얘긴 희미한데 내 기억이 그렇다구.
B: 대충 어떤 얘긴데?
A: 강물에 흠뻑 젖은 새가 다른 짐승들에게 몸을 말리기 위한 경주를 제안해. 일단 경주선이 일직선이 아니라 동그라미야. 동그라미니까 누구든 어디서 출발하든 상관없어. 언제든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리다 원할 때 멈추면 돼. 다들 뒤죽박죽으로 달렸는데 경주가 끝나자 모두의 젖은 몸이 말라 있었어. 그렇게 경주가 끝나자 ‘모두가 이겼다’고 선언하고 모두가 상을 받게 되는 얘기야.
B: 에이, 그건 유토피아 얘기지. 다 과자를 받으면 누가 노력하려 들고 힘든 일을 하겠어?
A: 과자를 인권으로 바꿔 생각해 보면 어때? 인권은 성과나 업적의 대가가 아니잖아. 사람이면 사람으로서 받을 당연한 대접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 당연한 것이 ‘원래’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함께 정하는 거지. 그 당연한 걸 정하는데 누구나 참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는 게 평등의 원리고. 무엇보다도 젖은 몸을 말리는 건 모두에게 좋은 거잖아. 모두에게 좋은 그런 공통의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게 평등의 의미 아닐까?
B: 하지만 한국 사회는 불평등해야 발전이 있다고 하잖아. 평등과 불평등이 같이 논해지는 게 어째 이상하다. 우리가 너무 불평등에 익숙해서 그런가.
A: 불평등에 불만을 제기하면 여기저기서 ‘노력, 노오력’ 타령하는데, 한국 사회는 노력 타령으로 불평등을 아예 문제 삼지조차 않으려는 것 같아.
B: 하긴, 일 자체에 이상한 위계를 두고 있어. 다만 하는 일이 다를 뿐인데, 일의 위계를 사람의 지위와 연결시키는 게 문제 아냐? 나에게는 쓰레기 치워주시는 분의 일이 펀드매니저의 일보다 소중해. 소중하다는 건 위계하곤 다른 건데. 그런데 한국 사회에선 이 두 가지 일에 위계를 매기고 그 위계에 따라 사람의 지위를 높고 낮음으로 나누잖아?
A: 아무리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사회경제적 위계를 바꿀 수 없는 일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고 있어. 그런 위계를 불평등이나 차별로 여기지 않고 실력이고 능력이라고만 평가하는 게 문제 아닐까? 그런 평가 기준을 문제 삼아볼 순 없을까? 난 과자게임을 떠올릴 때면 그런 생각이 들어.

평등은 사회성을 풍부히 한다

B: 그건 그렇고, 너 연말에 왜 또 전화기 끄고 잠수 탔어?
A: 한 해를 어떻게 사나 불안하고, 내 자신이 창피스럽고, 그런 생각하다 보니 우울하고, 누구 만나면 괜히 갈구고 싸울 것 같아서.
B: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그렇지.
A: 주변 사람의 평가, 사회가 나한테 매기는 평가를 어떻게 신경 안 쓰고 살아?
B; 평가하면서 또 불안해지고 창피해지려고?
A: 왜 다른 사람들은 잘 해내는 것 같고 잘 사는 것 같은데, 나만 못하는 것 같지?
B; 너, 과자게임 좋아한다며? 근데 왜 자꾸 반대로 비교에만 힘을 써?
A: 그러게. 내가 불평등에 젖은 사람인가 봐. 성격까지 변하는 것 같아.
B: 불평등하면 사람도 달라져?
A: 불평등한 경쟁체제에서 이득을 보려면 나만 생각해야 하잖아. 사람하고 친하게 지낼 시간을 아까워하고 아껴야 하니까 사회적인 걸 멀리해야지. 근데 스트레스는 풀어야 하고 그걸 풀려니 또 돈을 더 벌어야 하고. 나보다 잘난 사람 보면 주눅 들고 눈치보고. 나보다 만만한 사람 보면 빽 소리 지르고 함부로 하게 되고. 이 사회가 하도 불평등하다고들 하니까 이 사회에 대한 애착도 떨어지고…. 일단 사람을 보면 의심부터 하게 돼. 당신도 기회와 여건만 되면 날 이용하려 들겠지. 뭐, 이런 의심.
B: 야, 정말 그러다가 너 정말 성격 변하겠다.
A: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나 다양성에 편견을 조장하고 쌍심지를 켜게 만든다고 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뭔가 덧입히고 덧칠해서 보는 거지.
B: 편견이나 혐오가 기승을 부린다는 말이구나. 그럼 평등하면 뭐가 좋을까?
A: 일단 나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나다운 것이 남과 비교해서 부끄럽거나 비정상인 게 아니라 존중받는다면 스트레스가 확 줄 것 같아.
B: 그럼 평등할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위험 없이 친하게 지낼 수 있고, 서로를 뭉개기보다 추켜세우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겠네.
A: 옛말에 “평등이 동료애를 낳는다”고 했어.
B: 평등이 우리의 사회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말이구나. 하긴 격차가 너무 나면 친구가 친구가 아니게 되고 모임 같은데 나가기도 꺼려지지.
A: 사회공동체의 삶에 책임을 느끼게 되는 것도 애착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참여는 서로 평등한 사람들끼리 도모하는 거라고 느껴야 가능한 거야.
B: 한쪽에는 조아리고 다른 쪽의 누군가에겐 발길질을 하는 관계에서 ‘공동’의 삶을 궁리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굴종하거나 무시하면서 어떻게 상호적일 수 있고 공동의 것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어?
A: 평등하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헤아리는 게 쉬워져. 불평등은 경제적 격차만이 아니라 서로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말라붙는 거야. 상대의 고통을 느낄 수도 상상할 수도 없게 되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득실거린다고 생각해봐. 정말 무섭지 않아?
B: 너, 그렇다고 또 전화기 끄고 방에 콕 처박히려고? 제발, 그러지마. 우리 사이에서라도 ‘공동’의 것이 뭔지 같이 생각하자구.

공동의 장, 공동의 무대를 만드는 평등

B: “서는 데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야” 송곳의 이 대사 생각나지? 정말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는 대사 아냐?
A: 맞아. 정말 명대사지. 근데, 이런 의문도 들더라. 다른 데를 디디고 산다 하지만 사회라는 게 가능하려면 다르기 이전에 공동으로 디딘 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B: 공동으로 디딘 데?
A: 응.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위계 속에서 위에서 아래로 발길질을 해댄다고 하지. 갑이냐 을이냐 서있는 위치에 따라 풍경은 분명 다를 거야. 하지만 갑과 을을 나누는 위계라는 문제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공통의 문제이잖아. 각각의 배역들의 처지가 다르지만 공동으로 선 무대, 공동의 장 같은 게 있는 거지.
B: 송곳처럼 튀어나와 저항하는 노동자도, 위에는 조아리고 아래로는 발길질하는 중간관리자도 사실, 그 공통의 문제 속에서 고통을 겪는 거잖아. 왜 그 젤 악질로 굴던 사람, 결국 잘렸어. 분명, 악역인데 그 사람에게 오히려 감정이입이 많이 됐다더라.
A: 난, 그런 감정이입이 단지 먹고사니즘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공감만은 아니라고 봐. 사람의 인성까지 바꾸도록 몰아가는 힘, 이런 불평등한 위계구조 속에 ‘같이 있다’는 느낌 아닐까?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도 있다,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째야 하는 거지. 그런 막막함의 공통성을 느낀 거.
B: 그 막막함은 공통이지만, 저마다 선 데에 따라 다른 막막함을 느끼지. 우리가 공동으로 디딘 데, 서로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게 무너지면 각자의 서는 데가 생길 수 없는 그런 토대를 찾는 일에 누구나 예외 없이 참여할 수 있어야지. 젤 중요한 평등은 우리가 그렇게 정치적으로 동등하다는 거. 내 삶뿐 아니라 공동의 삶을 결정할 힘이 있다는 거야.
A: 나의 삶, 나의 처지가 적어도 ‘무효표’나 영향력 없는 ‘사표’처럼 취급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불평등한 사회에서 내가 감내하는 문제가 그냥 내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공동의 문제로 다뤄졌으면 좋겠어. 영웅이나 정치가가 쨘 하고 그렇게 해줄 게 아니니 내 주변하고라도 공동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지. 그게 사람 사회에서 동료가 되는 평등의 힘일 거야.

 

인권오름 제 471 호 [기사입력] 2016년 01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67 호 [기사입력] 2015년 12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왜 이리 늦었어?
B: 응. 나오려는데 문 잠금장치가 말을 안 들어서. 매뉴얼 찾고 어쩌고 쩔쩔매다가 간신히 잠그고 왔어.
A: 불안하겠다. 작년에도 그런 적 있잖아?
B: 그랬지. 아주 추운 날엔 기계가 오작동 하더라구. 또 그러고 나면 괜찮아져서 새로 교체하기도 그렇고. 비싸잖아.
A: 문만 잘 잠근다고 안전한 건 아니지. 사실 난 내 통장이 젤 불안하다. 올해도 마이너스인데 내년엔 어찌 버틸지 모르겠어.
B: 죄다 불확실해서 불안하다 하는데, 더 힘들어질 건 확실한 것 같아.
A: 야! 우리 연말에 만났는데, 좀 기운 나는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니?
B: 억지로 기운 내잔 말은 하기 싫어.
A: 하긴 너나 나나 지금도 충분히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낼 기운이 있을까?

어떤 안전?

B: 큰 거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고만고만하게 살더라도 맘편히 살고 싶은 건데.
A: 안전에 대한 욕구는 인간에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B: 문제는 다들 고만고만하게 자기 신체와 지갑의 안전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거야.
A: 그게 뭐 잘못인가?
B: 안전에는 개인적인 안전과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안전이 있대. 개인적인 신체와 물질의 안전을 더 포괄적인 ‘안전’(security)으로부터 따로 집어낸 ‘안전’(safety)이 있는 거지. 우리가 흔히 몰두하는 건 개인적인 안전이야.
A: 사실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한 거 아냐? 어차피 연관되는 거고.
B: 그런데 개인적 안전에 집착할수록 소위 각자도생하는 것을 답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아. 가령 비싼 금고, 비싼 자물쇠, 빗장 채운 주거시설, 따로 만든 교육과 의료시설…… 이런 식으로 ‘따로’에 집착할수록 사회적‧집단적인 안전은 뒷전이 되고 개인적 안전은 돈 주고 능력껏 구매해야 하는 것이 돼버려.
A: 네 말대로, 각자가 집착하고 주력하는 자기만의 안전이랑 함께 공동으로 책임질 안전이 따로 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B: 가령, 내가 아무리 명랑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어도 모르는 사람 혹은 아는 사람에게 무례한 말을 듣거나 무례한 행동을 겪게 되면 그날 기분 끝장이지. 내 정신건강이 무너져.
A: 화장실도 못 가고 수면부족으로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는 건 어때?
B: 위험한 작업인데도 안전장치 설치나 중지요청을 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여야 하는 공사장 옆을 지나는 건?
A: 지나친 근무로 인한 피로로 흐느적거리는 의료진에게 내 몸을 맡기는 건?
B: 자연재해건 인재건 참사가 발생해도 국가조차 책임지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는 건?

각자도생의 안전?

A: 야! 여름도 아닌데 공포영화 찍는 것 같다. 일터도 무섭고, 그곳을 오가는 지하철, 엘리베이터, 계단도 무섭고, 오가며 부딪치는 모르는 사람들, 알고 만나는 사람들 죄다 무섭네.
B: 다 돈 아끼자고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하게 몰아붙이는 게 다반사인데, 각자는 또 돈을 들여 이런저런 안전을 구매하지.
A: 개별적으론 기껏 안전을 추구했다고 하는 노력이 집단적으로 추구할 안전의 발목을 잡을 수 있겠구나.
B: 그게 부메랑이 돼서 되돌아오면 개인적 안전은 더 위험해지고 사회적 도움은커녕 혼자 다 책임져야 하는 거지.
A: 그러니까 안전에 대한 추구가 주파수를 잘못 맞추면 실제론 위험을 향해가는 것일 수 있다는 거구나. 다들 고만고만하게 자기만의 안전에 집착하고 주력할수록 같이 책임질 안전은 관심에서 멀어진다는 거네.

안전에 의한 안전의 억압

A: 하지만 집단적 안전의 추구가 무조건 좋은 걸까? 국가안보와 사회적 안전의 추구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인권을 압박하는 일이 많잖아.
B: 맞아. 국가안보란 말이 모든 안전을 집어삼켜서 개인적 안전이 질식하는 일이 많지. 엄청난 인권침해의 역사가 차고 넘치도록 사례를 보여주잖아. 또 사회적 안전의 명목으로 주류가 아니거나 소수자인 사람들을 배제하고 쫓아내려는 일이 엄청 많지.
A: 그렇게 따지면 안전이란 말 자체가 엄청 불안하네.
B: 그래서 안전이란 말은 혼자 돌아다니면 안돼. 자유나 인권 등과 같이 엮어서 그 맥락 안에서 쓰여야 돼.
A: 그러니까 자유를 억압한 대가로 거래되는 안전, 권리로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능력껏 시장에서 구매하는 안전 같은 건 오히려 위험한 안전이네.
B: 요즘 벌어지는 일들을 봐봐. 집단적으로 안전을 추구했다고 해서 ‘안전’의 논리로 엄청 핍박받잖아.
A: 아, 집회시위 하는 거? 거기 담긴 요구사항들은 같이 살 방도를 찾아보자는 것인데, 사실 들어보지도 않고 ‘피곤하다’ ‘불편하다’ 심지어 ‘불손하다’고 때려잡으려고만 들지.
B: 그런 게 안전을 빙자한 안전의 억압 아닐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집회시위 했다고 신체의 구속을 당연시하는 거.
A: 또 있지. 정부 정책이나 고위급 인사들을 비판했다고 툭하면 명예훼손이니 손해배상이니 소송으로 얽어매는 거.
B: 또 자기 정체성을 드러냈다간 혐오발언과 폭력으로 들볶일 위험에 빠지는 거.
A: 일터에서 함부로 쉽게 해고하는 거. 안 나가면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는 거.
B: 사회안전망 없이 경기후퇴와 불안을 감내하라는 거.
A: 예를 들자면 끝도 없겠네. 근데 이거 죄다 인권의 목록들과 비슷하다.

인간의 안전으로

B: 응. 안전의 개념이 그런 식으로 전개돼왔거든. 국가안보에서 인간의 안전으로. 인간의 안전은 국가안보의 배타적 강조가 왜곡하거나 빠뜨린 안전 요소를 보완하는 개념이야. 국경과 무력을 통한 안전이 아니라 정치적 안전, 경제적 안전, 건강과 생태적 안전 등을 포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거지.
A: 자기 정부를 비판한다고 해서 애국심 운운하는 게 진짜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는 걸까? 획일성으로 내부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공동체를 강화할까?
B: 내가 어떤 책에서 본 건데, 국가안보를 빌미로 강압적인 정책을 펴는 정부들이 취하는 공통적인 행태가 있대. 가령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반대자들을 관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결사에 대한 죄를 부과함으로써 정치적 행동을 무력화시키는 것, 정부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비밀주의를 강화하는 것, 언론과 시민 심지어 국회조차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걸 방해받는 것, 단지 반정부적이란 이유로 시민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는 것……
A: 그만 그만! 나 자꾸 더 무서워져. 이거 요즘 우리가 매일 보고 듣는 일이잖아.
B: 우리 삶의 취약성이 커질수록 거기에 걸맞은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말 엉뚱한 데서 삽질하는 것 같지.

민주주의가 안전이다

A: 안전과 관련된 요소들은 워낙 다양하고 죄다 중요해 보여. 그래서 포괄적으로 다뤄야 하는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보기엔 시민들이 보복과 처벌의 공포 없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젤 중요할 것 같은데? 그래야 각종 영역에서 안전의 주파수를 어떻게 맞출지를 결정할 수 있잖아.
B: 맞아. 그래서 난 정치인들의 망언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아. 시민의 정치적 관심과 참여를 가로막는 정치가 젤 큰 불안요소야. ‘정치가 밥 먹여주냐’고 하는데 진짜 그렇거든. 우리의 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배분되는지를 결정하는 게 정치잖아.
A: 그래서 밥을 포함한 진짜 안전을 책임지지 못 하는 정치가들일수록 책임을 회피하려고 엉뚱한 쪽으로 불안의 책임을 돌려.
B: ‘쟤네 때문에 불안하다’, ‘쟤네를 때려잡을 테니, 시민 각자는 ’먹고사니즘‘에 몰두해라’…… 이런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우리가 안전해지진 않잖아?

불신과 기만, 속아 넘어가기

A: 지구온난화, 핵의 위험, 사람 죽이는 바이러스…… 사실 죄다 무섭긴 하지만 난 솔직히 이런 것들엔 감이 안 와. 당장 눈앞의 불안이 워낙 커서 그런지 그런 것까지 살필 여유가 없네.
B: 내 지갑이나 통장에 들고 나는 것을 계산할 가능성은 있는데 이 사회의 안전한 지속가능성에 대해선 솔직히 ‘난 모르겠다’가 되는 것 같아.
A: 우린 위기와 불안에 푹 젖어있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냥 이러고 사는 것 같아.
B: 그치. 충격적 사건은 또 다른 충격적 사건으로 덮이고 정치적 불만은 또 다른 불만으로 덮이고……
A: 우리가 정말 안전을 원하기는 하는 걸까? 하는 행동들은 죄다 불안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B: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해보자고 하면 ‘비현실적이다’, ‘경제를 모른다’는 타박만 잔뜩이지. 다른 방식을 구상하고 애쓰는 사람들만 박해받고.
A: 안전을 위한 진짜 조치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그 가능성에 대한 불신이라더라.
B: 너와 내가 뭔가 행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 믿는 거?
A: 또 기만이 있지. 속고 속아 넘어가는 거.
B: 나는 속아 넘어가는 쪽이 더 우울하고 나쁜 것 같은데.
A: 아닌 처방인 줄 알면서 삼키는 약은 약이 아니라 독이겠지?
B: 우리의 불안에 무슨 확실한 처방전이 있겠어? 약이 필요없다는 게 아니라 식사 조절하고 운동해야 하듯이 사려 깊은 행동을 취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A: 난 적어도 속아 넘어가는 쪽이 되고 싶진 않아.
B: ‘내가 처한 생존의 위기를 나 혼자 감당할 게 아니라 사회가 같이 나눌 수 있지 않느냐’, ‘정치는 그런 걸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건, 진짜 속은 것일까? 속아 넘어간 척하는 것일까?
A: 가능성에 대한 불신과 기만에 속아주기, 환상의 복식조네.
B: 그럼 우린 어떤 복식조를 짜야 할까? 정말 안전하고 싶다면 말이야.

 

인권오름 제 467 호 [기사입력] 2015년 12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10] 인권 피해자의 권리  (0) 2019.06.10
[인권단어장 9] 평등  (0) 2019.06.10
[인권단어장 7] 인권에 따른 책임  (0) 2019.06.10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63 호 [기사입력] 2015년 11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인권에 따른 책임

 

불운과 불의

A: 난 왜 지지리 운이 없을까? 타고난 재능도 외모도 별로, 받아온 교육도 살아온 지역도 별로, 이제 나이까지 별로가 돼가고 있네.
B: 별로인 게 한 두 가지여야지. 우린 왜 복지국가 같은 데서 태어나지 못하고 이런 데서 났을까? 알량한 일자리나마 잃으면 난 당장 길거리로 나앉아야 돼.
A: 내가 내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운 때문에 이렇게 힘들게 산다고 누가 이해해주는 것도 아니고.
B: 삶의 기대치가 없어. 내일도 오늘 같은 게 아니라 오늘보다 더 나빠질 것이란 생각에 무섭고 우울해.
A: 우리 벌 받고 있는 거지? 실패에 대한 처벌 말이야. 처벌을 할 때 면제 요건으로다 우리의 불운이라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B: 난 그건 싫어. 안 그래도 힘든데 운 나쁘단 동정까지 받는 건 싫어. 진짜로 생각해준다면, 불운의 비용을 나눠서 짊어져야지. 우리더러 운이 나쁘다고 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는 덮어버리는 것 같아.
A: 맞아. 우리 개인의 자질과 조건 탓을 하면서 힘 있는 자들은 ‘어쩔 수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거야. 나의 불운을 동정할 게 아니라 나를 불운하게끔 만든 제도나 규범의 잘잘못을 따지고 바로잡으려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뭐? 개혁이랍시고 쉬운 해고를 일상화하겠다고?
B: 야,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운이 나쁘단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냐? 불리하고 유리하고가 결정되는 것은 사회구조적 맥락 속에서인데, 왜 우린 우리의 운을 탓하고 있지?
A: 내가 운 타령을 시작했지? 가만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 대해서만 불운이란 말을 함부로 쓴 게 아닌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벌어진 일, 사회적으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함부로 운을 남발한 것 같아.
B: 그러게. 세월호 참사가 불운이니? 불의에 의한 거니? 시위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게 운이 나빠서니? 공권력의 불의한 행사 때문이니?
A: 불의한 거지. 마찬가지로 따져 묻고 싶어. 내가 여자로 태어나서 차별받는 게 불운이니 부정의니? 내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불이익을 겪는 게 불운이니 부정의니?
B: 불의하고 부정의한 거지. 이놈의 사회는 내가 뭔가 하기도 전에 사회 속의 내 자리를 강제배치 해버렸어. 강제배치 해놓고선 그 자리에서 겪게 되는 억압과 박탈을 나더러만 고스란히 참아내고 받아내란 거지.
A: 내가 내 삶에 대해 책임을 안지겠다는 말이 아니야. 강제배치 된 자리에 대해 뭔가 이의를 제기하고 시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B: 조금만 틈새가 있으면 타인을 구별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 차별과 억압을 당연시하고 부추기는 언론, 불평등과 억압을 시정하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 국가, 혁신 없이 사람 쥐어짜기로만 이윤을 취하려는 기업, 뭐 이런 것들이 적극적으로 어울려서 빚어낸 불의가 지금 내 위치에서 겪는 고통이라구. 내가 운이 나쁘고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구.
A: 그냥 운이 나쁘다는 말, 이제부터 취소야. 이건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라구.

무력감의 퇴치약, 책임의 인정

A: 하지만 그 불의함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또 나의 문제네.
B: 인터넷에서 그 동영상 봤니? 우유를 먹으려다 주둥이가 우유통 입구에 박혀 꼼짝달싹 못 하게 된 야생곰 말이야.
A: 응. 봤어. 다행히 구조돼서 야생으로 되돌아갔다고 하던데. 근데 왜?
B: 문득, 내가 우유통에 박혀 있단 생각이 들었어. 내 시간의 대부분을 남의 장소에서 일하며 굴욕적으로 보내는 나 말이야. 먹고 살기 위해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되뇌이며 불의한 일을 봐도 내 주둥이를 꽉 다물고 있어.
A: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우리뿐이니? 그저 ‘사는 게 죄다’ 여기며 사는 거지.
B: 그래. 대개가 그렇지. 내가 특별히 나쁜 사람인 게 아니라고, 불의한 일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자책하면서 그래도 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위안하려고 해.
A: 우린 불운에서 무력감으로 옮겨왔구나.
B: 그래. 무력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무력감. 근데 가만히 있으면 죄를 짓는 건 아니지만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럴 때 뭐라 말 못할 수치심으로 힘들어.
A: 책임? 나를 부양할 의무, 가족을 돌볼 의무, 이런 의무만으로도 벅차 죽겠는데 또 무슨 책임을 더 질 수 있을까?
B: 그런 의무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냐. 싫어도 내팽개칠 수도 없고. 하지만 성격과 종류를 달리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나의 생존과 경력에 관계된 것만이 아닌 책임 말이야. 뭔가 아닌 거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할 책임, 아닌 걸 바로잡기 위해서 뭔가 도모할 책임 같은 거 말야.
A: 우린 그 ‘아닌 것’으로 이뤄진 체제의 희생양이잖아. 피해자인 우리가 그 ‘아닌 것’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한다구? 갑자기 억울해진다. 책임질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B: ‘아닌’ 것에 의해 권력과 특권, 이익을 누리는 자들이 져야 할 책임과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의 종류와 정도는 다를 거야. 사회적으로 처한 위치가 다르니까.
A: 하긴, 책임을 따져 묻는 사람들이 없다면 누가 책임을 인정하겠어? 명백하게 저지른 법적인 죄도 유유하게 빠져나가는 게 권력이고 특권인데.
B: 그래. 눈앞에서 방아쇠를 당긴 놈만 처벌하고, 쏘라고 명령하거나 허용한 권력자는 당장의 인과관계에서 늘 멀리 떨어져 있는 법이지. 누군가는 그런 은폐의 구조를 드러내고 불의를 시정하도록 요구하는 역할을 해야지.
A: 하지만 그런 일 할 사람이나 조직은 따로 있겠지. 나 같은 개인이 뭘 할 수 있겠어?
B: 나도 그런 생각을 자주 해. 그래서 괴로워.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까 내 자신이 우유통에 박혀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니까.
A: 네 기분은 알겠는데, 그 책임이란 게 나에게는 불가능한 요구로 보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어.
B: 우리는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란 얘기를 했잖아. 불운이 아니라 불의의 문제라고 판단한 것에서부터 뭔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운은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불의의 문제라는 건, 뭔가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인정한 거 아니겠어?
A: 근데, 내가 그런 책임을 인정한다 치자. 우리 말고도 이걸 불의의 문제라고 판단할 사람들이 많을까?
B: 글쎄. 다들 살아남기에도 벅차하는 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공적인 불의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겠지. 그걸 연결하고 모으는 게 큰 문제지만 말이야.
A: 내가 ‘누구 없어요?’라고 소리치면 ‘나,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답이 왔으면 좋겠다.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

B: 너는 내가 보낸 카톡이나 문자에도 바로 답하지도 않잖아.
A: 내가 언제? 어쩌다 그런 걸 갖고. 너는? 대답 못할 상황이란 게 있는 거지.
B: 핑계 아니고?
A: 아니라니까.
B: 반응이나 응답이 없는 건 정말 힘들어. 만약 이게 너와 나 사이, 사적인 소통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라면 어떨까?
A: 내가 구조적 불의나 막대한 인권침해의 피해자라면 속이 터지겠지.
B: 책임진다는 건 응답한다는 거래.
A: 응답한다?
B: 책임이란 말의 영어 표현은 responsibility야. 이 말은 응답한다는 response에서 나온 거래.
A: 난, 불의한 제도나 행동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껴. 뭐, 어쩌다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할 때도 있고.
B: 나도 그래. 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진 못해도 불의하게 여겨지는 그런 부류에 끼지 않으려 애쓰고 뒤에서 욕하고 흉도 보고.
A: 고통에 대한 공감, 내심의 자책, 그런 불의를 저지하지 못하고 방관하거나 때론 지지한 것에 대한 반성, 뭐 이런 거는 나도 많이 하는 데.
B: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더라도 작은 선의라도 보이고 싶은데, 그게 어쩔 땐 불안해. 불의의 피해자들이나 저항하려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려 드니까. 나는 그저 내 작은 선의에 만족하고 있는데….
A: 그럼, 우린 응답한 걸까?
B: 글쎄. 우리가 보낸 신호가 아니라 신호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과연 응답이 왔다고 여길까?
A: 공감과 위로를 원하겠지만 그보다 더 피해에 대한 공적인 인정을 원하지 않을까? 피해를 일으킨 불의에 대한 인정과 시정의 약속을 원하지 않을까?
B: 그건,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응답이잖아. 여럿이 함께 애써야 할 수 있는 응답이지.
A: 하지만 그 여럿 속에서 나를 제외할 수는 없는 거잖아.
B: 그렇지. 그래서 그냥 응답할 의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라는 말을 하나봐.
A: 정치적으로 응답할 의무? 왜 정치적이야? 인간적인 응답, 뭐, 그런 걸론 안되는 거야?
B: 각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지만 혼자선 못한다는 거야.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거지. 변화를 위해 서로의 관계를 만들고, 더 정당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위해 공적으로 조율하는 일에 참여한다는 거야. 그래서 정치적인 거지.
A: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참여의 장이 너무 없잖아.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지만, 집회나 시위하는 것만으로도 노조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에선 난리가 난 줄로 알아. 그런 사회에서 참여의 장이 도대체 어디 있어?
B: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도 많지. 성소수자나 이주노동자 등이 차별 당하는 걸 지켜보거나 되려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거, 심지어 진짜 다가가 부수고 때리기도 하지. 당국이나 주류 언론이 퍼뜨리는 말을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고, 저항도 없고 조용히 지내는 상황이 정상적인 거라고 여기는 거, 그런 게 정치적 참여의 장을 조이고 점차 사라지도록 돕는 걸 거야.
A: 그렇게 불의나 인권침해를 정당화하는 가치관, 태도, 관행 등을 상대로 싸우는 게 정치적 응답일 텐데. 그거 하다가 억압 받을 게 무서워.
B: 그걸 무릅쓰고라도 해야 한다는 거지. 그게 없고서야 어떻게 변화란 걸 기대할 수 있겠어. 투쟁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게 정치적 응답의 의무인거지.

인권과 책임

B: 적어도 기본적 인권에 관련된 제도들은 지켜나가야지. 공권력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지, 반대로 공권력이 우리를 관찰하고 감시하고 비난하도록 냅둬서야, 불의가 판치라고 면허장을 발급해주는 거지.
A: 그런데 도대체 인권에선 왜 그런 사람들의 책임은 말하지 않는 거야? 인권침해를 정상적인 것처럼 여기고 함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B: 그건 오해야. 책임이 함축돼 있기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거나 분명히 책임을 지적하고 있는데도 잘 듣지 않으려는 데서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아.
A: 하지만 인권선언 등을 보면 죄다 권리의 이야기지 의무나 책임은 없는 거 같은데.
B: 권리라는 건 반드시 그 권리에 따른 의무가 있기 마련이거든. 권리와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 ‘권리에 상응하는 의무’란 ‘권리 없이 억압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와는 다른 거야.
A: 그럼, 책임에 대해 말을 아껴온 것이 의무를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니까 경계하려고 그런 거 아냐? 지배적인 규범을 정해놓고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에 의무라는 이름을 씌우니까 말이야.
B: 그러게. 우린 의무란 말에 질릴 정도로 많은 의무를 짊어져왔어. 그런데 정작 젤 중요하고 기본적인 의무와 책임은 무시하고 살라는 지시를 따라온 것 같아.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을 갖는다고 하지.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에게 져야 할 어떤 숭고한 의무가 있는 게 아닐까?
A: 세계인권선언 마지막 부분을 찾아봤어. 네 말대로 의무와 책임이 여기 끄트머리에 숨겨있네. 여기 보면 ‘인권이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 및 국제체제’에서 살아갈 권리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있어.
B: 적어도 구성원을 굶기거나 무책임에 죽어가도록 방치하는 게 공동체는 아니겠지?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란 구성원들이 서로 호혜적으로 책임지는 행동을 통해 구성하는 공동의 세계야. 각자는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예외 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고 사회적 위치와 구조적 맥락에 따라 그 책임의 종류와 성격이 다를 뿐이야. 국가나 대기업 등 권력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져야 할 책임과 같을 수는 없지.
A: 특권에 맞서 인권이 빛을 보려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완하고 향상시킬 의무를 져야 하는 데, 막막하긴 하다.
B: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요구 앞에서 나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의무가 불명확하다는 건 책임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 거야. 어떤 방법과 행동으로 책임질지가 열려있다는 뜻이야. 우린 서로에게 무슨 행동을 한 것에 대해, 또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충분하지 않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변화를 위한 행동을 요청할 책임이 있어.
A: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의한 일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면 도덕적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정치적으로 책임을 다하는 인간이 될 순 없을 거야. 뭔가 ‘이건 아니다’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아닌 것에 대한 도전’을 행동으로 보여야 되는데, 참…. 이건 내 불운보다 다루기가 힘든 과제구나.
B: 일단 우린, 회피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시작은 한 거겠지? 빠꾸하기 없기다!

 

인권오름 제 463 호 [기사입력] 2015년 11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9] 평등  (0) 2019.06.10
[인권단어장 8] 안전  (0) 2019.06.10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59 호 [기사입력] 2015년 10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자유

류은숙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A: 넌, 자유롭니?
B: 너, 뜬금없이 철학하니?
A: ‘자유’를 입에 담으면 철학하는 거야?
B: 그치, 먹고 사느라 바쁘고 이리저리 치이느라 죽겠는데. 자유? 그거 어디서 팔기라도 하냐?
A: 얘는…. 왜? 팔면 사기라도 하게?
B: 팔아도 그거 살 여유가 없다. 그냥 줘도 자유를 쓸 틈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A: 우리가 왜 이리 팍팍해졌지?
B: 흙수저니까 그렇지.
A: 또 수저타령?
B: 사실, 아주 아주 많이가 아니라도 이만큼 버둥거리면 요만큼은 사람답게 살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그게 안되니까 하는 말이지.
A: 아휴…. 갑자기 우리 어렸을 때 하던 ‘셈치고’ 놀이가 생각난다.
B: 셈치고? 소공녀 읽고 같이 하던 놀이?
A: 그래. 너랑 나랑 소공녀 되게 즐겨 읽었잖아. 주인공 세라가 하루아침에 특권층에서 다락방 소녀가 돼서도 ‘셈치고’ 놀이를 계속 하잖아. 이런 셈치고, 저런 셈치고…. 낡은 다락에서 추위 속에 자야하고 자기 몸보다 작은 옷을 입고 배가 고파도 ‘셈치고’ 놀이를 계속하며 버티잖아. 따뜻한 이불이 있는 셈치고 풍성한 식탁이 있는 셈치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여전히 공주고 세상의 모든 여자는 가난해도 예쁘거나 똑똑하거나 젊지 않아도 모두 공주라고 여기잖아.
B: 어렸을 때는 그 얘기가 재밌었지. 근데 그 얘긴 왜 꺼내? 나에게 긍정 마인드라도 설파하려고?
A: 너, 오늘 아주 뾰족하네. 요즘 힘들었나 보구나. 내가 긍정 마인드 싫어하는 것 너도 알잖아? 나는 그냥 다른 종류의 ‘셈치고’ 얘기를 하고 싶었어.
B: 다른 종류의 셈치고?
A: 응.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말.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 나오는 문장이래.
B: 도대체 그건 무슨 종류의 ‘셈치고’야? 제1조면 엄청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건데 그게 왜 ‘셈치고’야?
A: 사실, 우리 인간이 모두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건 사실이 아니잖아? 네가 금수저, 흙수저 따지듯이 우리 모두는 엄청나게 격차나는 형편에서 다른 재능과 외모 등을 갖고 태어났어. 그러니까 세계인권선언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규범과 그것의 중요성을 나타낸 거지.
B: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셈치고 대해야 한다는 말이라구?
A: 그렇지. 나는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처신하고 또 다른 ‘자유인’들에게도 그렇게 대해야만 한다는 의미지.

공통의 자유

B: 와, 그 ‘셈치고’는 이런 현실에서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
A: 하지만, 이 ‘셈치고’는 그냥 ‘주문을 외워봐’가 아니야. 자유의 제한과 박탈을 운명으로 여기지 말란 거야. 자유의 힘으로 자유의 박탈을 야기하는 부정의를 시정할 수 있다는 의미야.
B: 에이, 자유는 한쪽에 쏠려있거나 누군가에게 치우쳐있어. 치우친 자유가 대세이고 그 자체가 부정의한데 자유로 불의를 시정한다고?
A: 그 치우친 자유를 바로잡고 기본적 자유를 특정해 온 것이 인권의 역사라 할 수 있어. 절대주의 국가권력, 봉건귀족이나 지주들, 자본가의 권력, 제국주의 식민권력, 또 주류이고 대다수를 자처하는 사회세력, 그런 권력들에 도전하면서 치우치고 쏠린 걸 시정하려는 저항의 역사였지. 당대 사회에서 부자유를 경험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저항이 기본적 자유를 정의하고 만들어왔지.
B: 그런 저항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건데?
A: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여기는 행동이었다는 거지. 인간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것에 저항하여 공통의 자유를 확인하자는 게 인권에서의 자유의 의미야. 그런 공통의 자유 속에 당연히 너와 나의 자유도 있지.
B: 네가 말하는 자유는 평소 내가 아는 자유와 달리 너무 거창하다. 내가 아는 자유는 ‘홀로서기, 혼자되기, 피차 간섭안하기’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난 부정의나 불의 따위완 상관없어’, ‘관심없어’, 이러는 태도를 갖는 것도 각자의 자유잖아?
A: 그래. 나도 그런 말 자주 해. ‘무슨 상관이야?’란 말. 하지만 그런 게 자유에 대한 오해이자 자유를 아예 부정하는 태도는 아닐까? 누구나 누려야 할 자유에 대한 정의와 합의가 없다면, 남과 다르게 살 자유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B: 그럼 누구나 누려야 하는 공통의 자유란 게 있다는 거야? 도약을 위한 일종의 발판 같은 거 말야.
A: 인권은 그런 공통의 자유를 구성하고 있어.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되는 자유의 목록을 정하고 그걸 ‘기본적 자유’라고 불러.

기본적 자유

B: 기본적 자유? 하지만 기본을 뭘로 보느냐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잖아?
A: 그렇지. 어떤 입장에서는 기본을 최소화해서 아주 잔학하거나 의도적인 행위만을 자유의 침해라고 봐. 가령 고문 같은 거 말야. 반면 어떤 입장에서는 인간다운 생존을 누릴 것도 기본적 자유로 인정해. 이런 시각에서는 굶주림이나 높은 주거비 같은 것도 공통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의 문제가 돼.
B: 나는 후자가 맘에 드는 데. 적정한 주거비, 임대료 같은 게 자유의 문제가 아니면 뭐가 자유의 문제라는 거야? 나는 월세 내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말야. 하지만 내게서 돈을 받아가는 입장의 사람들은 맘대로 올려 받을 자유를 자기의 자유라고 할텐데?
A: 그러니까 기본적 자유란 게 중요한 거야. ‘맘대로 올려 받을 자유’가 타인의 기본적 자유를 제약하는 걸 무조건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어. 타인과 사회가 정당한 것으로 승인하거나 수용하는 과정을 밟아야 해. 사회적으로 불리하거나 모자란 쪽으로 자원을 이전하려는 데도 그런 승인의 과정이 필요하구. 기본적 자유란 그걸 가능케 하는 거야.
B: 기본적 자유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봐.
A: 응. 막 떠올리는 대로 말해볼게.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통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신체의 자유, 자국의 통치에 참여할 권리, 또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생존을 누릴 권리 같은 거.
B: 내가 들어본 말 중에서 고른다면, 한마디로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는 거구나. 하지만 그런 자유가 인권이나 헌법으로 보장돼 있다고 해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 그 자체는 아니잖아? 자유의 이상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다르잖아?

자유에는 자원이 필요하다

A: 맞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원이 없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거나 누릴 수 없다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지. 시간, 체력, 돈, 필수적인 서비스,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 등 여러모로 개인적 자원 뿐 아니라 사회적 자원이 필요해.
B: 그 자원이라는 게 꼭 물질적 자원인 것만은 아니지? 가령 내 스스로가 체념해버리면 자유는 내 안에서 이미 고사해버린 거잖아. 또 내가 중요시하는 자유의 문제가 공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져 다뤄지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공염불인 거지.
A: 그렇겠지. 자유를 누리는 데는 내‧외적 자원, 개인뿐 아니라 타인과 사회적 자원이 모두 필요해.
B: 내가 생각해 본 예인데 이런 경우 아닐까? 내게 여행할 시간과 자원이 있더라도 공공의 교통체계나 이동수단이 부족하면 내가 누릴 자유는 제한 받을 거야.
A: 맞아. 그럴거야. 나는 내가 못하는 걸 남이 하는 것도 자유라고 생각해. 가령 나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지만 작곡도 연주도 할 줄 몰라. 하지만 나는 음악가들의 성취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아. 내가 못할 걸 다른 사람이 실현할 조건이 공통의 자유이기도 한 것 같아. 어떤 음악가가 표현을 이유로 탄압을 받거나 부정의한 수익 배분 때문에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면 나의 음악에 대한 자유도 제한받는 걸거야.

공통의 자유, 고유한 자유

B: 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장땡이고 자유라고 여겨왔는데, 네가 말하는 자유는 사람들 간의 관계나 상호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말이네. 내가 생각해 온 ‘홀로서기, 혼자되기, 피차 간섭안하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네. 그럼 나만의 자유 같은 건 없는 건가? 왜 너와 자유를 얘기할수록 자꾸 뭔가와 엮이는 기분이 들지.
A: 엮이는 기분, 그게 자유가 아닐까? 가령, 누구나 인간답게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게 공통의 자유로 안정돼야 각자의 입맛과 식성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 가능하지 않을까? 누구나 부당한 간섭과 제약 없이 친밀한 관계를 누릴 공통의 자유가 있어. 그럼 어떤 사람을 애정의 상대로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의 자유로 존중돼야 하지 않을까? 공통의 자유를 기반으로 나‘만’의 고유한 자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B: 공통의 척도로서의 기본적 자유가 안정적으로 보장돼야 ‘다르게’ 살기도 활발할 수 있다는 거구나. 하지만 나와 상극인 자유가 더 많은 것 같은데, 같이 좋아지기 보다는 나를 압도하는 힘을 가진 세력들과 대립되는 자유 말이야. 그럴 때 나는 자유가 오히려 인권의 위협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데. ‘이건 내 자유야’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어. 자기의 소유의 자유, 자기의 선호와 혐오의 자유가 타인의 기본적 자유에 대한 제약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주장들이 피곤해. 자기에게 좋은 게 타인에게도 좋은 삶일 거라고 우기는 것도 피곤해.
A: 다른 쪽을 압도하는 권력관계에서 우세한 쪽이 주장하는 자유, 타인의 자유를 함부로 하거나 경멸하려는 사람들이 왜 그것을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지, 그 근거가 적절한지 아닌지를 따져볼 수 있는 잣대가 인권에서의 자유야. 인권이란 게 원래 인간공동체에 속한 종족 존재를 바탕으로 거론된 거잖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존엄하고 자유롭다는 게 바로 그 종족 존재를 전제로 한거야. 그러니까 인권에서의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어. 어떤 구속이나 억압이 왜 부당하고 불의한가를 그 관계 속에서 따져보자는 게 인권에서의 자유야.
B: 늘 그렇게 따지려면 정말 부지런해야겠다.
A: ‘아끼다 똥된다’는 말이 있잖아. 소유하고 간직하기만 하는 게 자유라면 자유가 매력적일까? 자유란 ‘가진다, 안가진다’가 아니라 ‘누리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 누린다는 건 이미 자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거, 자유인으로 사유하고 움직인다는 것 아닐까? 자유란 늘 움직이고 출렁거리기에 아름다운 게 아닐까?
B: 어떻게 움직여? 맨날 집회라도 나가야 한다는 거야?

상관할 자유, 영향을 주고받을 자유

A: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나는 늘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는 것 자체가 움직이는 거야. 타인과의 의견 교환으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타인의 영향으로 다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사회의 부정의함으로 내가 야기치 않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어. 그럴 때마다 나의 판단에 대한 평가와 타인의 반응을 통해 수정하고 방향을 전환할 수도 있어. 자유는 그렇게 움직이는 걸거야.
B: 그런 움직임에서 타인은 나의 자유를 방해하기도 하지만, 나의 자유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겠구나.
A: 난 나한테 뭐가 정말 좋은 건지 늘 헷갈리고 흔들려. 남들도 나처럼 늘 흔들리고 있을 거야. 그런 흔들림을 서로 인정하고 영향을 주고받다보면 진짜 좋은 걸 찾을 수 있지 않을까?
B: 그냥 영향을 주고받는 정도가 아니라 날 압도하고 압박하려 들면?
A: 영향을 주고받는 것과 지배하려 드는 건 엄연히 달라.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을 폄하하고 경멸하는 말과 행위가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비판하고 거기에 대항함으로써 바로 잡을 수 있어야 돼. 그게 내 자유의 책임이야. 하지만 그런 지배가 아니라 나에게 ‘다른 것’의 활기와 자극을 준다면 그런 영향은 늘 환영해야지.
B: 초과의 자유를 행사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 기본적 자유가 박탈당하는 사태의 연속이야. 그런데 맨날 ‘진정한 나를 찾아라, 자기평가‧자기개발‧자기실현을 해라’…. 이런 거 너무 피곤해. 내 선택이니까 나더러만 책임져야 한다는데, 좀 같이 선택하고 같이 책임지면 안될까? 왜 다른 선택지는 없는지, 내 힘만으론 만들 수 없는 다른 선택지를 좀 같이 고민하면 안될까? 그게 없는 자유는 잔인한 자유 같아.
A: 자유란 말이 어이없을 때가 많지. 허허벌판에 혼자 선 느낌이 자유라니? 불평할 수 없고, 불평하면 노력이 부족했고 무책임하단 소릴 듣는 게 자유라니? 난 내 삶에 연루된 게 좀 많아졌으면 좋겠어. 공적인 육아, 공적인 교육, 공적인 의료, 공적인 주거, 공적인 연금, 그런 연루가 늘어나야 내 삶에 숨통이 트일 것 같은 데 홀로서기만이 자유라고 하는 건 자유를 위장한 협박 같아.
B: 공공의 가치에 상관할 자유, 영향을 주고받을 자유를 너는 자유라고 여기는 거구나. 나는 못 그러지만 괜히 부럽다. 나도 너처럼 자유를 생각하고 누리고 싶다면 나도 연루되는 걸까?
A: 셈치고 놀이를 했을 때부터 우린 늘 서로 상관하고 살았잖아. 앞으로도 그럴거고.
B: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했으니 태어난 때부터 지금까지 죽 서로 상관한 거지. 서로 관련할 자유, 상관할 자유라 …. 우리 오늘 철학한 것 같은데!

 

인권오름 제 459 호 [기사입력] 2015년 10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8] 안전  (0) 2019.06.10
[인권단어장 7] 인권에 따른 책임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55 호 [기사입력] 2015년 09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모욕(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A: 왜 얼굴이 그렇게 시뻘게?
B: 열 받아서
A: 뭐가?
B: 어떤 자리에 갔는데 날 사람 취급 안하잖아. 면전에 두고도 날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구.
A: 그래서 빨간 물이 얼굴이 들었구나. 사람을 사람 취급 안한다? 대체 어떤 식으로 당한거야?
B: 말하자면 길어. 그들에게만 조명이 켜있고 나만 암흑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어.
A: 마음 가라앉으면 차근차근 얘기해 줘. 근데 우리, 이제 그런 거에 무뎌질 때도 되지 않았니?
B: 그게 어떻게 무뎌질 수가 있어?
A: 그래야 살아남지. 너처럼 뻘겋게 달아오르다가 혈압만 오른다. 뭐 달라질 기대도 없고 맘만 상하니까 그냥 신경 꺼.
B: 너까지 더 열 받게 할래? 신경 끄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면 왜 열이 오르겠어?
A: 미안 미안, 하도 사람에 대한 모욕이 판치다보니 무감해지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이야.

사람 취급 안하기

B: 사람에 대한 모욕이 판친다? 너도 뭔 일 있었니?
A: 사람관계에서 당하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어.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지. 자존감을 떼놓고 다닐 수도 없고…, 왜 이리 서로 자존감을 해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됐는지 모르겠어.
B: 사람들이 정당한 비판과 모욕을 분간 못하는 것 같아. 모욕이란 자존감에 가하는 공격과 훼손이야. 정당한 비판과는 다른 거라구. 정당한 비판이라면 나의 태도나 일을 반성적으로 고치거나 하면 돼. 하지만 자존감 훼손은 날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거라구.
A: 사람취급 하지 않는다는 게 심정적으론 느껴지는 데 뭐라 콕 짚기가 어렵다.
B: 심정적으로 단지 기분 나쁜 거하고는 달라. 모욕이란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중요한 자유와 힘을 뺏는 것을 말해.

사물 취급

A: 가령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나 도구처럼 취급하는 것?
B: 그거라면 신물 나도록 경험해봤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어온 ‘인적 자원’이란 말, 요즘 듣는 ‘쓸모없다’는 의미의 ‘잉여’라는 말 ….
A: 쓸모없다 하면서도 우린 정말 훌륭한 기계취급을 받지. 서울의 야경이 실상 ‘야근의 불빛’이라는 과중한 노동은 어떻고? 학창시절 12시간 이상의 학습 노동을 견뎌냈더니 휴식 없는 노동이 기다리더라. 기계도 그 정도 썼으면 닳아서 고장이 나도 숱하게 났을거야.
B: 그렇게 부려먹으면서도 우릴 ‘한번 쓰고 버리는 종이컵’ 취급하잖아.
A: 그렇지. 우리 말고도 쓸 ‘종이컵’은 많으니까. 우린 정말 종이컵보다도 못한 물건이지.
B: 며칠 전엔 손쉬운 해고를 합의고 개혁이란 이름으로 통과시켰더라. 잘리는 건 ‘저성과자’에 ‘근무불량자’래. 불량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눈감고 죽은 듯 엎드려 지내란 거네.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

A: 이렇게 사람취급 못 받는 예가 많은데 또 있을까?
B: 타인을 피부색, 외모, 몸무게, 치수 같은 것으로 보는 거.
A: 맞아 맞아. 난 여성을 비하적으로 말하는 ‘출산기계’, ‘고깃덩어리’, 이런 말들 정말 싫어. 인터넷 사이트만 열면 튀어나오는 뉴스 봐봐. 여성배우는 왜 ‘굴욕 없는 몸매’, ‘출산 후에도 완벽한 몸매’, ‘빛나는 생얼’ 등으로만 묘사하는 거야? 연기에 대한 얘기는 왜 남성배우에 치우쳐서 하는 거야? 사람을 몸으로만 보는 건 그 사람의 의지나 자유 같은 영혼을 빼놓고 보는 거잖아.
B: 또 그거 있지? 요즘 말 많은 몰카. 정말 모욕 아니니? 내 속옷, 배설…, 그런 걸 누군가 함부로 찍어 노출시킨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모욕이야. 여성인 내가 내 사적인 영역을 지킬 수 없다는 건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내는데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거고, 그걸 침해하는 쪽이 여성을 전혀 사람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야. 그런 걸 ‘평범하던’ 사람의 ‘순간적 일탈’로 표시하는 언론은 모욕을 선동하는 거고.
A: 아까 네가 ‘고의적으로 어떤 사람에게서 중요한 자유와 힘을 뺏는 것’이 모욕이라 말했지? 몰카라는 게 나에게서 내 사생활을 통제할 힘을 뺏어가지, 또 그것의 침해에 항의하고 지킬 자유를 무시하고 있는 거네. 정말 심한 모욕이다.
B: 왜 ‘여성’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거야? 가령 조폭에 소속된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있지만, 사람이 ‘자기’라는 걸 형성하는 데 합당한 정체성을 열등한 것으로 찍어서 거부하고 괴롭히는 것 또한 모욕이야.
A: 맞아. 나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성, 피부색, 종교’ 등이 포함되는 데 그걸 가지고 ‘눈에 띄지 말라’고 명령하거나 심각한 결함이 있는 인간으로 대하는 건 모욕이야.
B: 물건이나 기계 취급, 인간 이하 또는 열등한 인간 취급, 한마디로 비인간 취급 속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기 정말 힘들다.

제도적 모욕

A: 게다가 자존감에 상처준 걸 피해자 탓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어떻고. ‘네가 못나서’ 또는 ‘네가 오해해서’라고 하면서 모욕당했다고 간주될 만한 조건이나 상황마저 왜곡해버리잖아.
B: 별난 개인들만이 문제가 아니야. 왜곡이란 점에선, 개인적인 모욕만이 아니라 제도적 모욕이 더 심각한 것 같아.
A: 제도화된 모욕?
B: 어떤 개인이 못되게 날뛰는 것 말고 이 사회의 제도 자체가 조직적으로 모욕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 말야.
A: ‘정규직 노동자’ 또는 ‘쉽게 해고되지 못할 인재’가 되는 건 ‘네 노력에 달렸다’는 식으로 책임 전가하는 게 떠오르네.
B: 노동권 있지? 난 요즘 이 말이 너무 아프다.
A: 말만 들어도 아픈 단어가 있지. 나는 안전장치 없이 스크린도어 수리하다 죽은 노동자 생각이 나네. ‘용광로’였다가 ‘창고’였다가 ‘스크린도어’였다가, 앞의 말만 바뀌지 ‘안전장치 없이 방치된 노동자의 죽음’이란 조건과 상황은 변함이 없어. 이런 게 제도적 모욕이 아니면 뭐가 제도적 모욕이겠어?
B: ‘권’이란 말에는 ‘옳다’는 뜻과 그 옳고 정당한 것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란 뜻이 들어있대. 그러니까 ‘노동권’이란 말은 ‘노동에 관하여 옳은 것’, ‘노동에 대해 옳은 것을 마땅히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노동자에게 있다’는 말이지.
A: 그런데 사람들은 ‘네가 스펙을 덜 쌓아서 그래’, ‘좀 더 노력하지 그랬어. 좀 더 유능하지 그랬어’란 식으로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해. 그래서 취직 못한 사람, 해고된 사람, 사고당한 사람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지. 거기다 대고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앞 세대 임금을 잘라서 주고, 기부금을 조성해서 돕겠다는 건 제도적 모욕의 극단이야.
B: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필수적인 물질적 자원이 있잖아. 제대로 차려입고 나갈 수 있어야 하지, 제대로 씻고 잘 수 있어야지, 제대로 먹을 수 있어야지, 이걸 죄다 형편없는 노동환경에 방치해두고 사회보장제도에도 인색하면 어쩌란 건지 모르겠어.
A: 난 솔직히 무서워. 나는 집은커녕 방도 없어.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삶의 장기적인 계획 같은 걸 세울 수가 없어. 뭘 배우고 싶어도 돈과 시간이 없어. 휴식도 아플 때의 치료도 공공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아니라 다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돼. 이런 조건에서 누굴 돌보기는커녕 내가 날 언제까지 돌볼 수 있을지가 두려워.
B: 그만, 그만! 나 또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아.

모욕의 결과들

B: 너, 아까 나보고 ‘신경 꺼’라고 말했지? 많은 사람들이 모욕을 대할 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모욕의 가해자)이 정당하지 않은 데 왜 네가 위축돼? 네가 떳떳하면 됐지.’ 또 ‘그런 자들을 뭘 중요하게 생각해. 그냥 XX다, X같은 것들, 그래 버리면 되지.’
A: 미안하다고 했잖아. 사실 나도 ‘나만 아니면 괜찮다’, 이게 정말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또 ‘X같은 것들’ 이래 버리고 말면, 나도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거고 같은 방식을 쓰는 거잖아.
B: 맞아. 솔직히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안하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걸 거야. 사람이니까 모욕감을 느끼는 걸 아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라구.
A: 모욕으로 사람을 괴롭혀서 도대체 뭘 얻으려는 걸까?
B: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는 걸 보고 즐기려는 게 아닐까? ‘넌(너흰) 내 수중에 달려있어.’ 뭐 이런 거. 타인의 운명이 내 손에 달려있다는 우월감, 조종력을 느끼고 싶은 거지. ‘넌 스스로 네 삶을 결정할 수 없고 키는 내가 쥐고 있어.’ 이런 메시지를 모욕을 통해서 전달하는 거야. 그래서 삶의 통제력을 피해자에게서 뺏어가고 무력감과 의존성을 강요하고 싶은 거야.
A: 모욕 받아도 가만히 있다보면 자기 걸 뺏겨도 덤덤해지겠네?
B: 실제로 역사적 사례를 보면, 내쫓고 싶은 사람이나 집단을 우선 대놓고 모욕하는 데서 공격이 시작돼. 모욕을 당하는 데도 가만히 있으면, 또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그저 남 일 취급하며 구경하다보면 모욕이 자연스런 일상이 돼. 그때부터는 법이나 제도로 그 사람들의 권리를 없애거나 줄이는 게 얼마든지 가능해.
A: 우리 노동자들 처지 같다. 대놓고 노동자를 되고 싶지 않은 ‘하층’계급 취급하고 감정노동이니 서비스 정신이니 해서 하인 취급하는 걸 내버려두고, 나는 ‘소비자’로서 누리고 대접만 받고 싶다, 뭐 이러다보니 노동권이 쥐락펴락 맘대로 되고 있잖아.
B: 더럽고 아니꼽지만, 그런 우월감이나 권력을 즐길만한 위세를 가진 사람들이 있지. 그런데 그런 처지가 아니면서도 남을 모욕하는 사람들은 뭐지? 그럴 처지가 못되는 사람들이 왜 더 악랄하게 남을 괴롭히는 걸까?
A: 그건 번지수 잘못 찾은 폭력이 아닐까? 자기에게 진짜 모욕을 준 쪽이나 제도적 모욕에는 입도 벙긋 못하겠으니까 약한 쪽을 골라 분풀이하는 거지. 모욕에 손상된 자존감을 더 약한 타자를 해치는 것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것, 그게 모욕을 재생산하고 모욕에 대한 진짜 저항을 가로막는 걸 거야. 사실 개인적 모욕이랑 제도적 모욕은 따로 노는 게 아니라 같이 다닌다고 할 수 있어.
B: 사람의 말과 행동은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잖아. 움직이면서 영향을 만들어 내. 모욕을 모욕으로 돌려막기 하다보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처럼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 ‘못났다, 못났다, 못나서 저렇게 됐다’는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그게 문제의 원인이 돼버리고 우린 실제로 ‘못난 사람’이 돼버렸어. 그래서 모욕에 대해 같이 저항할 동료는 없고 사방에서 날 못났다고 째려보는 불특정다수에 둘러싸여버렸어. 그래서 특별히 날 모욕하는 사람이 없어도 난 늘 ‘아무것도 아닌’, 그저 ‘노바디’란 굴욕감을 느껴야 돼.

무감해지지 않을래

B: 난 모욕의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고 싶지 않아.
A: 난 모욕에 덤덤해지려는 것부터 다잡아야겠어. 나, 민감해질 거야. 말리지마. 너, 아까 뭣 때문에 열 받았다고 차근차근 얘기해준다고 했잖아. 이제 얘기해봐.
B: 이미 충분히 얘기했어. 앞서 한 얘기가 전부 내 얘기 같아. 그냥 이런 말을 하고 싶어. 난 사람이니까 모욕감을 느낀다구. 나에겐 존엄성이 있고 그에 따른 자존감이 있다구. 이건 명예심이나 자부심과는 다른 거야.
근데, 내 자존감은 나 혼자의 세계에서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게 아냐. 그 사람들의 눈으로 날 보게 돼. 그냥 기분 나쁜 문제가 아니라 그런 눈을 통해 그 사람들은 나에게 영향을 줘. ‘나는 여기서 입을 열면 안된다. 난 발언권이 없구나. 내가 저 사람들이 날 바라보는 눈을 바꿀 수 없구나.’ 이런 무력감이 든다구. 그래서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괜찮다! 괜찮다! 괜찮아!’ 나를 아무리 내가 달래도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아. 다른 사람들이 내게 보이는 태도에 계속 신경 쓰인다구. 나는 내 방에서 혼자 나는 나를 존중한다고 되뇌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내가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고 싶다구.

 

인권오름 제 455 호 [기사입력] 2015년 09월 1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7] 인권에 따른 책임  (0) 2019.06.10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단어장 2] 존중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51 호 [기사입력] 2015년 08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연대

A: 뭐해? 또 드라마 보고 있어? 맨날 똑같은 얘기인데 지겹지도 않니? 로맨틱이 아니라 완전 사기잖아 사기!
B: 환상이란 게 있는 거잖아. 사는 게 지질한데 드라마라도 환상이어야지.
A: 넌 아직도 백마 탄 왕자, 신데렐라 얘기가 그렇게 좋니?
B: 그건 아냐.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환상은 주인공 옆 친구들이야. 늘 하소연 들어주고 내 일처럼 같이 화내고 슬퍼하고 어려울 때마다 곁을 지키는 친구, 사실 그게 젤 비현실적 캐릭터지.
A: 넌 드라마에서 무슨 연대를 찾고 있니?
B: 갑자기 무슨 연대? 드라마 얘기하다 말고?
A: 돌봄, 관심, 감정적 결속, 인간적 유대, 넘치는 정…. 네가 찾는 환상이 이런 거잖아? 이런 걸 주제로 하는 담론이 연대니까 해본 말이야.
B: 경쟁, 공격성, 경멸, 모욕, 무시…. 뭐 이런 것들보다야 훨 듣기 좋네. 근데 왜 우린 그 좋은 걸 느낄 수 없는 걸까?

연대의 요청

A: 연대는 우리가 느끼는 사회상에 대한 대응이래. 우리가 맨날 불평하는 게 ‘사는 게 불안하다’, ‘다들 저밖에 모른다’, ‘사회가 왜 이 모양이냐’는 거잖아. 이런 사회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잘 안보이니까 연대에 대한 느낌이 오지 않는 것 같아.
B: 근데 뒤집어보면, 아쉬우니까 연대를 더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대라는 개념이 원래 사회에 문제가 있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사회의 실패 때문에 등장한 거라잖아. 나는 지금 믿음 가는 안정적이고 친밀한 관계, 사회안전망이라 기댈 수 있는 지원 같은 게 정말 아쉽거든.
A: 아쉽고말고. 옛사람들이 끈끈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관계, 소속, 소속감, 이런 것들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어. 가정, 직장, 노조, 국가? 이런 소속이 누구한테나 열려있지도 않거니와 간신히 속해 있다 하더라도 예전 같은 소속감을 느끼긴 어려워. 때론 그런 소속이 날 지원해준다긴 보다 오히려 부담주고 괴롭히는 것 같기도 해.
B: 우린 사회안전망이란 걸 제대로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그게 앞선 복지국가에서조차 쇠퇴하고 있다고 하지. 끈끈한 관계를 만들 만한 관계망에 들어가긴 너무 힘들어. 취직하긴 어렵지 잘리긴 쉽지, 노조는커녕 오늘 만난 사람이 내일도 같이 일할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어. 임시 일자리 가면 이름도 안 물어. 내가 내일 또 볼 사람이란 생각이 있어야 이름을 묻지.
A: ‘인간은 원래 상호의존하며 상부상조하며 사는 거야’란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던 시대에는 연대를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파편화된 개인들로 해체된 사회에서 어떻게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것이 연대 개념의 본격적 시작이었어. 보편적 인류애로 인간 사이 위계와 구분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연대, 연대를 제도화해서 사회적 시민권을 만들고 지탱한 연대, 공유하는 가치 속에서 차이를 인정하는 연대…. 다양한 연대가 출현해왔지.
B: 그런 연대들의 맥락이란 게 있을 거 아냐. 그런 개념정의를 익히고 따르는 것으로 우리 문제가 해결될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처한 사회적 조건에서 어떻게 연대할까를 궁리해야 하는데….
A: 그 시절이 좋았다면서 옛날식으로 재결합하자거나 ‘묻지마 결합’ 같은 건 있을 수 없지. 연대는 자칫하면 적당한 조화와 통합에 호소하는 김빠진 얘기가 되기 쉬워. 불의에 맞선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게 문제인식을 제쳐둔 통합의 설교야.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여는 연대가 아니라 괜한 향수어린 공동체 이상주의로 빠져들 수도 있어.
B: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으로서의 연대?
A: 나와 주변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숙성된 관심과 감정이 낯선 이들과 공유할 가치와 제도에 대한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 연대의 정치적 가능성 아닐까? 우린 모여서 놀고 즐기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바로잡아야 할 사안에 대해 뭉칠 필요도 있고, 불리한 처지의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어. 연대의 얼굴은 다양한 것 같아.

연대를 억압하는 배제적 연대

A: 우린 먼저 연대에 대한 불신부터 벗어야 할 것 같아.
B: ‘믿을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말이 신뢰의 결여를 젤 드러내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부인할 수가 없어서 서글퍼.
A: 사실 그 말은 ‘넌 의지할 데라곤 없는 존재’라는 걸 재확인해 주는 말 같아.
B: 근데 믿을 건 개인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 연대 따윈 시대착오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오히려 자기들끼리 딴딴하게 뭉쳐 있더라구.
A: 그렇지. 어느 시인은 “이미 배불리 먹은 자들이나 먹는 것을 혐오한다”고 했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결속이 센 사람들일수록 약자들이 뭉치는 걸 혐오하고 핍박하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무임승차를 조장하고 성실한 개인의 몫을 빼앗아간다고 난리 난리를 쳐.
B: 소위 빽과 연줄을 동원해서 할 것 못할 것 다할 수 있는 힘,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사회적 자본이란 걸 독식하면서, 너희는 연대를 꿈꾸지 말라니. 기댈만한 인적 관계도 사회적 제도도 없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족벌, 패거리, 파벌, 은밀한 담합 등 그들끼리의 배제적 연대에 맞서 우리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고 문제를 공동으로 개선할 수 있고 불리한 타인에 대한 공감을 포함하는 그런 연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거든. 그런 연대를 친밀한 관계에서뿐 아니라 공적인 제도로서 만들고 싶은 거거든. 그런 힘을 모아보자고 부르짖으면 개인의 권리가 침투당한다고 호들갑 떠는 건 오히려 단단히 뭉쳐 있는 사람들의 위장이 아닐까?

인권과 연대

A: 그런 면에서 보면 연대도 일종의 권리고 연대의 결여 또는 부족은 인권침해인 것 같아.
B: 인권선언 같은 거 읽어보면, 권리가 엄청 많잖아. 국제적으로 인정된 권리가 60여 개는 된다더라. 그런데 왜 내 삶속에선 권리를 구경하기 힘들지?
A: 권리가 어떤 틀에서 구현되는지에 달린 문제 같아. 형식상으론 각 사람이 똑같이 그 권리들을 개인적으로 가졌잖아?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하는 틀에서는 각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권리의 칼을 뽑아들 거야. 그럼 서로 베고 찌르기만 하다 쓰러질 것 같아.
B: 개인의 권리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권리로 끝나기만 하는 틀에서는 그렇겠지. 문자론 똑같은 ‘개인’이지만 결코 권력이 똑같지 않은 ‘개인’들의 세계에서 그런 식의 권리 다툼의 승패는 뻔해. 불의한 강자에 의한 약자에 대한 억압을 제거하는 힘이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힘이 연대 아닐까? 그런 연대의 힘을 업지 않고 나 같은 개인 각자가 권리를 자급자족하는 게 가능하겠어?
나는 연대가 권리란 동전을 유통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해. 권리라는 동전을 개별적으로 아무리 쌓아놓아도 그걸로 타인과 교섭하고 합의하고 뭔가를 구축하는 과정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잖아.
A: 권리가 끝없는 대결이 아니라 상호보장 되기 위한 조건이자 환경이 연대라고 할 수 있겠네.
B: 근데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연대’란 말은 안 나오던데.
A: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문에서 암시돼 있고, 제28조에 있는 권리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 및 국제체제’란 말에 담겨 있어. 그리고 본문에 있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등이 연대를 사회적 시민권으로 다룬 권리들이야. 또 연대는 ‘권리’와 ‘의무’를 함께 담은 말로도 생각할 수 있어.
B: 권리와 의무가 동전의 양면 같단 말이야?
A: 응. 법에서 다루는 채권·채무 관계를 집단적 차원에서 책임관계로 고려하게 만든 것이 연대야. 법적 개념을 넘어 정치적 개념이 되면서 연대는 새로운 유형의 제도 구성원리가 되었어.
B: 난 이왕이면 채권이 좋은데, 채무는 끔찍해.
A: 사회로부터 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느냐 개인이 사회에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느냐, 권리냐 의무냐의 차이인데, 사실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지.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공공서비스나 사회적 인프라의 혜택을 많이 봤다고 할 수 있어. 그럴 경우 사회로부터 많은 몫을 받은 것이고 그만큼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 아닐까? 또 사회적 권리의 경우를 생각해봐. 사회보장과 관련된 세금을 납부해서 연대에 기여할 의무가 있고, 내가 노동능력의 상실로 소위 기여가 없다 할지라도 사회의 성원으로서 사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어떤 경우건 기본적인 인간다운 삶을 개인의 업적을 따지거나 가족관계 등 기댈만한 인적관계에 내맡기지 않고 사회가 집합적으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만드는 거야.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필요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거지.
B: 내가 채권자로도 채무자로도 등장할 수 있는 관계네. 나에겐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고.
A: 가령 돈에 쪼들릴 때마다 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백 원씩만 줬으면 좋겠다.’ 집합적으로 곤궁을 해결하는 연대의 제도는 대대적인 상부상조를 가능하게 해. 게다가 내가 직접 백 원을 구걸 또는 호소하는 수치를 느끼지 않고, 익명의 상대들로부터 받은 세금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좋아. 반대로 개인들이 자기가 받는 혜택은 많아지고 튼튼해질 것을 요구하지만, 지는 부담은 줄이기를 요구하는 이중성이 있어. 차가운 관료제가 대면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끈끈함을 주기는 좀 어렵지.
B: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에는 늘 긴장감이 있는 거지. 개인의 자유와 집합적 책임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 간의 적절한 조합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친밀한 연대와 제도로서의 연대 둘 간의 적절한 긴장과 조합이 필요할 것 같아.

연대의 지구적 틀짜기

A: 최근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 사람들은 연대의 틀을 지구적인 것으로 상승시켜야 한다고들 해.
B: 가까운 공간에서도 내 자리가 불안하고 관계 맺기가 어려운데 국제적 차원의 연대라…. 그건 너무 거창한 거 아냐? 맨날 비행기 타고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나 국제기구 종사자가 아닌 바에야….
A: 틀을 단지 키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틀의 성격을 바꾼다는 거야. 한 국가 차원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려면 틀을 바꿔야지, 헌 틀에서 작업을 하면 당면한 문제에 적용이 안 될 거야. 가령 아까 말한 사회적 시민권 같은 건 한 국가틀 내에서만 가능하잖아. 국경을 넘어서면 권리의 문제가 아닌 빈곤구제로 바뀌어버려. 이걸 조정하는 틀을 만들자는 거야.
B: 나는 여기 묶여 있고, 중요한 결정의 힘은 국경을 맘대로 넘나드는데 내가 무슨 틀을 바꿀 수 있는 거지?
A: 넘나드는 것들, 사람이건 상품이건 기본 원칙을 지킬 수 있도록 틀을 맞추자는 거야.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책임회피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틀을 만들자는 거지. 가령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구 어디에서나 경제활동으로 이익을 얻는 자라면 누구든 그 활동의 결과로 환경과 인간에게 미친 손해에 대해 연대책임을 지는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야. 그들이 예로 드는 유럽의 기준 중에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 상품을 하자있는 상품으로 정의하고, 이 하자로 인하여 사람이나 재산에 가해진 손해에 대해서는 피해자와 계약관계가 있건 없건 생산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어.
B: 그런 식으로 초국적 기업 등에 책임을 묻는 일 중요하지. 근데 듣고 보니 내가 지구적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져야 할 책임을 따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아.
A: 프랑스 혁명의 대표 구호가 자유, 평등, 우애인 건 잘 알려져 있지?
B: 그렇지. 그 ‘우애’가 오늘날 ‘연대’로 전개돼온 거고.
A: ‘우애’를 강조하면서 “프랑스에서 유일한 타인은 나쁜 시민 뿐”이란 선언이 있었대.
B: ‘나쁜 시민’이라고? 어떤 이가 나쁜 시민인데?
A: 공적인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시민을 가리켜 나쁜 시민이라 했대.
B: 나는 나쁜 친구도 나쁜 시민도 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삶은 너무 피곤해. 아, 연대의 고민은 끝날 일이 없겠네.

 

인권오름 제 451 호 [기사입력] 2015년 08월 1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단어장 2] 존중  (0) 2019.06.10
[인권 단어장 1] 인간 존엄성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엘리베이터에서 맨 끝에 탈 때마다 조마조마하지 않니?
B: 너도 나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야?
A: 내가 널 놀릴 형편이냐? 피차 마찬가진데. 그냥 내가 조마조마하단 소리야. 저번에도 ‘삐’ 소리가 나서 얼마나 무안했는지.
B: 그건 사람이 많이 타서였겠지. 네가 우연히 마지막에 탄 거고. 날씬한 사람만 엘리베이터 타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린 이렇게 몸무게에 민감한 걸까? 이게 무슨 천형이냐?
A: 그러게 말이야. ‘삐’ 소리에 얼른 내리는 데 뒤통수에 비웃는 화살이 꽂히는 것 같았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괜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고 나면 힘이 쫙 빠져.
B: 몸무게를 달 저울은 있어도 내 삶의 무게를 잴 저울은 없어. 왜 외모를 가지고 내 삶을 잴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A: 외모뿐만이야? 그냥 다른 걸 다르게 냅두지 않아. 굳이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게 한둘이어야지.
B: 그러게. 구실도 다양하셔라! 학벌, 성, 외모, 장애, 출신, 결혼 유무, 피부색, 나이, 재산 ….
A: 차별은 그런 구실들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잴 수 있다고 뻐기는 저울이나 줄자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저울이나 줄자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차별의 구축 과정

B: 거다 러너라는 유명한 역사학자 말로는 그게 과정이 있더라구.
첫 단계, 일단 무수한 다름 중에서 일단 자기네가 원하는 걸 골라잡아. 골라 잡히면 표적이 되는 거야.
A: 하긴, 모든 차이가 차별이 되는 건 아니지. 겉으로는 다양성을 떠들지만, 차이들이 나란히 다양한 게 아니라 차이들 속에 분명히 위계와 서열이 있거든.
B: 맞아. 특정 표적을 골라잡는 이유는 권력이 많거나 센 쪽이 그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거든. 그런 동기를 은폐하기 위해서 두 번째 단계가 필요해. 골라잡은 표적에게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부정적인 색칠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색깔이 표적의 원래 색깔인 양 뒤집어씌워. 이유를 만들어놓고 거기다 표적을 꿰어 맞추는 거야.
A: 편견, 고정관념 같은 걸 만드는 거구나.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부당하다고 안 받아들이면 되잖아?
B: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게, 그 색깔을 이유로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이 이뤄지거든. 사회적 기회나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 자기 삶과 사회에 미치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묵살하는 거야. 그렇게 실제적으로 상당 기간 박탈이 계속되면 어찌 될까? 물론 부정의하다고 느끼고 저항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겠지. 슬프게도 차별의 표적이 된 사람은 좌절과 열등감으로 자기에게 씌워진 색깔대로 살게 될 수 있어. 주입된 열등감이 지배세력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대개 사람들은 주입된 부정성에 동의하고 그걸 통념으로 갖게 돼.
A: 경쟁 때문일까? 부족한 기회나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누군가를 떨꿔낼 수 있으니까 그런 과정에 협조하는 게 아닐까?
B: 그러게. 차별로 이득을 보는 쪽에서 그런 경쟁과 분열을 노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차이에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하게 만들어낸 차이를 구실로 박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거야.

‘나머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

A: 우리 학교 다닐 때 ‘나머지 반’ 얘기를 하는 것 같다.
B: 나머지 반?
A: 왜 성적도 별로, 특기도 별로, 집안도 별로인 얘들끼리 묶어서 ‘나머지 반’이라 하고, 아주 소수정예만 뽑아서 ‘특별 반’이라 했잖아.
B: 맞아. 그 때 ‘나머지’라서 겪었던 설움이 장난 아니었지.
A: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나머지로 취급했을까?
B: 특별반이 학교생활에서 정상이고 표준이었으니까 그렇지.
A: 우리가 그 정상의 기준에 대들었다면 우리 삶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고 좀 세게 나갔으면 말이야.
B: 그러게. 하지만 우린 오히려 특별 반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지. 나머지 반을 떠나 특별 반으로 옮기는 애를 아주 부러워하고, 나머지 반과 그 속의 아이들을 창피해 했어.
A: 나는 남고 너는 잠깐 특별 반에 간 적 있잖아? 그때 그랬던 거지?
B: 창피하지만, 옛날 얘기니까 고백하자면 그랬어. 나머지 반 애들 갖고 킥킥거리고 얕잡아보는데 더 열심히 꼈지. 처음부터 특별 반이었던 게 아니라 나머지 반 출신이란 거 지적할까봐.
A: 아, 세월이 가도 남는 건 상처구나. 그때 나를 멀리하고 무시한 게 특별 반 애들이랑 잘 어울리기 위한 거였구나.
B: 옛날 얘기라니까! 부당한 구별에 올라타서 잘난 척 했던 게 쑥스러워. 그때 기억이 나한테도 상처로 남아있어. 결국, 지금 우리는 ‘나머지’란 말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공유하고 있잖아.
A: 그래. 그때의 구별이 우리 삶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으니까. 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를 보면, 살아서만 아니라 죽어서도 차별하잖아. ‘나머지’가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는커녕 왜 우리 삶에 더 들러붙는 걸까?
B: 눈에 보이는 공식적·제도적 차별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게 토양이라서 그럴 거야. 그런 토양에선 형식적으론 차별이 금지돼도 실제론 모욕과 무시와 차별이 비온 날 풀처럼 거침없이 자랄 거야.
A: ‘요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대놓고 사람 무시하지. 자기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다는 걸 다른 사람도 당연하게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친구야, 제도화된 차별이 문제란 건 잘 알고 그것 땜에 화도 많이 나지만, 우리 그걸 방패로 숨지 말자.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은근한 신호들을 무시하지 말자구.
B: 문득 최근 들은 말이 생각난다. <차별론>을 쓴 사토 유이란 학자가 이런 말을 했대. “차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다”고.
A: 왜 세 명일까? 차별받는 표적이 된 한 사람, 그 표적을 대상으로 서로 짬짜미해서 한통속이 되는 두 사람을 말하는 거야?
B: 하하, 너 말이 적나라하다. 다른 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라네.
A: 네가 특별 반에서 했던 것처럼?
B: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
A: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큼 차별은 위험하다는 거야.

차별의 해악

B: 차별의 해악이야 잘 알려져 있지. 희생양 만들기, 제거하기, 식민 지배, 아파르트헤이트, 제노사이드 등 역사적 증거들이 넘치잖아.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나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치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비난하잖아.
A: 차별 정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체제가 자국민의 인권뿐 아니라 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침해했다는 증거가 넘칠뿐더러, 멀고 남 얘기 같으니까 동조하는 걸 거야. 하지만 가까운 내 얘기에서는 얼마든지 태도를 뒤집잖아. 이로울 때는 글로벌스탠다드를 부르짖다가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할 때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지.
B: 굳이 역사적 증거들로 차별의 해악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간 이하나 비-인간으로 대하는 모욕과 배제가 주는 고통이 인권침해란 걸 부인할 수는 없어. 까놓고 말해 무시나 모욕을 받으면 당장 잠도 안 오고 우울해. 어쩔 땐 심장이 조이고 속을 칼로 긁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난 평소 둔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데, 무시당하고 주눅 드는 상황에선 그게 말짱 거짓말이더라.
A: 한편에선 인권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말하던데, 한편에선 차별에서 파생되는 인권침해가 날로 드세지는 것 같아. 이건 뭔 조화지?
B: 대놓고 차별하는 쪽의 문제야 지적하자면 끝도 없지. 그런데 나는 가끔 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에서도 불편함을 느껴.
A: 무슨 소리야? 우리끼리 목청껏 차별을 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고정된 선 지우기

B: 음, 정확하게 말하긴 어려운데, 가끔은 불평등해지기 위해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놓고 시합을 벌이면서, 그 시합의 규칙에 국한해서만 차별반대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해서 더 많이 갖게 되면 평등이 성취되고 차별은 사라지는 걸까?
A: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방식이잖아.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별하는 방식이 경쟁의 공정함과 능력에 따른 대우인 거고. 너 무슨 유토피아를 꿈꾸냐?
B: 재능과 장점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걸 아예 부인하자는 게 아냐. 난 그저 그런 분배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거지. 정당한 것과 유일하게 정당한 건 다르잖아. 나는 정당한 분배에 앞서 사람으로서 같이 누리는 기본값이 커졌으면 좋겠어. 특성과 조건을 따지기 전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는 기본적인 대접이 동등했으면 좋겠고, 그 동등함의 범위가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반차별과 평등의 관심이 기회의 균등이나 공정한 분배에 너무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A: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찜찜한 게 있었어. 내가 차별을 반대하지만, 내가 피해자라는 점을 너무 의식하고 강조하는 건 아닌지, 피해자임을 강조하다 보니 피해에 늪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난 늘 약자니까 특별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사정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사정하는 게 아니라 난 당당하고 싶거든. 사정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원하는 건데, 왜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낙인 찍혀야 하지? 왜 자주 되풀이해서 피해를 말해야 하지?
B: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말이 내 입에 안 맞을 때가 많아. 무슨 무슨 차별의 피해자라고 누군가 날 묘사할 때면 성질이 날 때가 있어. 왜 자기 말로 나를 묘사할까 싶어서.
A: 그런데 내가 나와 다른 범주의 차별 피해자를 묘사할 때는 늘 내 말로, 내 방식으로 설명틀을 만들어내지?
B: 아까 왜 특정 차이가 차별로 만들어지는지 얘기했잖아. 차별을 엮어내는 고리 자체를 바꾸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없을까?
A: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선 긋기 자체를 바꾸는 것? 우리, 몇 해 전에 회 먹으러 갔던 해변 기억나?
B: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대단했지. 저 멀리 있던 바다가 순식간에 코앞에 해안선을 그려서 깜짝 놀랐잖아.
A: 그치.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졌지. 간밤에 보았던 해안선과 아침에 보았던 해안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어.
B: 그뿐이야? 파도는 늘 넘실거리면서 우리가 그리거나 새긴 것들을 지웠잖아. 우린 또 다시 그리고 또 지워지고.
A: 차별을 만들어내는 범주와 경계에 고정되지 말고 우리도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B: 날은 덥고 바다는 생각나고, 비·회·술·벗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나머지 반’끼리 번개 해볼까?
A: ‘나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정정하면, 생각해볼게.

 

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2] 존중  (0) 2019.06.10
[인권 단어장 1] 인간 존엄성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43 호 [기사입력] 2015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나홀로 존중?

A: 너,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다. 왜 사람들과 통 어울리질 않아? 전엔 안 그랬잖아?
B: 창피하고 힘들어서
A: 뭐가 창피해?
B: 내가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했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날 그냥 끼어주는 척 했던 걸 날 진짜 받아들인 걸로 착각한 것 같고, 뭐 여러 가지로….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했던 것 같아.
A: 그래서 혼자 뭐 하는데?
B: 응, 자존감을 좀 키워 보려구
A: 자존감? 그걸 혼자서 어떻게 키우려고?
B: 뭐, 열심히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나부터 돌봐야지. 돈 쓰는 습관도 바꾸고. 목표를 세워 하나씩 성취 해내야지. 내 주제를 모르고 오지랖을 떨었던 것 같으니까, 날 책임질 줄도 모르면서 남 걱정 하는 것 그만둘래.

A: 에효, 네가 내 거울 같았는데 난 어쩌라구.
B: 거울?
A: 그래.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듯이, 난 네 눈과 생각에 비친 나를 통해 나를 봐왔거든. 네가 날 칭찬해주면 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 뿌듯해하고, 네가 지적하는 내 언행을 곰곰이 씹어보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시당했다고 여길 때마다 네가 날 응원해줬잖아.
B: 그게 뭐 대단한 거라구.
A: 나한텐 대단하거야. 네가 보여주는 그런 반응들 때문에 난 적어도 의미 있는 존재다, 나는 존중받고 있다, 그런 느낌을 가졌거든.
B: 나 말고도 너한테 반응을 보여줄 사람들은 많잖아?
A: 맞아. 너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게 어떤 반응을 해주기 때문에 내가 무시 또는 존중을 체험할 수 있는 거지. 너 또한 그랬잖아. 그래서 네가 혼자 자존감 키우겠다는 그게 걱정돼.
B: 왜?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날 좀 자랑스럽게 만들어보겠다는 데.
A: 존중은 날 존중해줄 타인 또는 타인들을 필요로 해. 그런데 너는 존중보다는 평가를 의식하는 것 같아. 골방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것처럼, 실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존중감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인데, 사실 네가 키우고자 하는 것은 위신, 실력, 뭐 그런 거 아닐가? 또 네가 받고자 하는 것은 네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위신과 실력 같은 것에 대한 평가와 인정이 아닐까? 그런 업적이나 실력 같은 건, 남을 의식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남에게 무관심할수록 잘 키울 수 있을지 몰라. 반면에 존중은 사람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거잖아. 너 홀로 수련하겠다는 건, 상호존중을 표현할 줄 아는 존엄성과는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
B: 그럼, 나한테 어쩌라구. 여러 관계에서 계속 주눅 들기만 하는데.

존중의 상호성

A: 딱히 해줄게 없어서 나도 속상해. 나도 날 평가할 때마다, 타인에 대한 알량한 관심보단, 보란 듯이 성공해서 베푸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끔 해.
B: 나 때문에 너까지 주눅 드는 것 같아 미안하네. 우린 존중에 왜 이리 인색한 걸까? 존중이란 게 맘껏 표현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한 존중이 깍이는 것도 아닌데
A: 맞아. 내가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니고, 내가 비-한국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닌데, 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면서 자기 존중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걸까?
B: 비교와 평가와 배분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아닐까?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이겨야지’란 생각에 집착하게 돼. 이겨야만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인정받을 수 있고 몫이 커진다고 생각하게 돼. 남과 비교해서 우수한 평가를 받아야만 대접받을 만한 것이라 여겨져.

A: 존중의 핵심은 상호성인데, 상호적이지 않고 뺏고 빼앗는 경쟁을 통해 쟁취하는 ‘몫’으로 생각해서일거야. 몫에 대한 평가에 익숙해지다 보니 지위나 위신을 챙기는 것과 존중을 혼동하게 된 것 같아. 목표달성과 상호존중은 다른 거야. 상호존중은 너와 내가 지금껏 해왔던 방식으로 서로 표현하고 반응하는데서 만들어지는 거야.
B: 네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도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인정받고 싶고 우러름 받고 싶은 것과 존중이 왜 다를까?
A: 인간은 여러 모로 불평등하지. 대표적으로 능력이 불평등하다고들 말해. 몫의 배분을 위한 평가에선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게 공정하다고들 해. 그게 왜 얼마나 공정한지 따져 봐야할 게 많아. 설령 능력을 공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할지라도, 평가를 위해 늘 계산을 하고 비교를 하는 게 왜 일부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 전반에 적용돼야 할까? 왜 다양한 능력 중에서도 특정 능력에 대해서만 몰아주기가 지나칠까? 그런 비교와 평가와 배분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관계와 제도를 장악하고 있어. 우리가 그런 기준을 죄다 무시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불평등조차도 사람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바탕으로 구성됐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존엄성은 존중을 통해 드러난다

A: 저 뉴스 저거 뭐야? 또 손님이 종업원의 무릎을 강제로 꿇렸다고 하네.
B: 짜증나. 무릎 꿇리는 게 무슨 유행인가 봐. 그렇게 하면 자기 위신이 높아지는 줄 아는 걸까?
A: 아무리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원칙상 평등한 거니까 그런 식으로 타인의 인격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일은 금지돼야 하는 거 아냐?
B: 그러게. 그럴 때마다 나오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난 정말 싫어. 일하러 갈 때마다 자존감을 항아리에 두고 나간다는 무슨 드라마 대사도 있었어.
A: 살려고 하는 일인데, 살려는 게 존엄성을 포기해야 하는 거라니. 살기 위해 죽으라는 말처럼 들려.
B: 아이구, 답답해. 존엄성을 끄집어내 보여줄 수도 없고. 우화속의 토끼 간처럼 꺼내 쓸 수 있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A: 사실 우린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거야.
B: 무슨 말이야?
A: 우리가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고 할 때, 그 존엄성을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라고 했잖아.
B: 그랬지. 사회적 지위나 위계로 인한 명예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지만, 존엄성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평등하다 했지.
A: 그런 평등한 존엄성은 인간의 어떤 속성을 본질로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존엄성의 증거 같은 건 없는 거야. 우린 서로를 존엄한 ‘셈 치는’ 거야.

B: ‘척’을 하고 ‘셈 치는’ 거라면, 우리가 존엄성에 대해 서로 뭔가 짜고 있다는 거야?
A: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인정은 서로를 존엄한 사람으로 대하기 위한 실천의 약속이라고 했잖아. 네가 ‘착한’ 속성을 가졌기에 존엄하다고 한 게 아니라, 네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 합의한 거야. 이제 너와 내가 할 일은 서로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그걸 인정하고 표현하는 거야.
B: 표현하지 않는 감각은 감각이 아니라던 광고 문구 같네. 존엄성을 어떻게 드러내지?
A: ‘존중’을 통해 드러내는 거야. 존중이란 한마디로 누군가를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으로 대하는 거야. 우리 서로가 사람대접을 하고 받음으로써 사람다워지는 거지. 이건 사회적 상호관계의 모든 순간에 늘 요구되는 거야. 끊임없이 표현돼야 하는 거지.
B: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 솔직히, 누가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부터가 문제네.
A: 그렇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사람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게 아픈 현실이지. 사회마다 자기네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식에서 존중을 표현하지 않고 정반대의 표현을 고집할 때가 많아. 가령 특정 사람(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은 성원으로서 인정과 불인정의 경계 위에서 숨죽이며 눈치를 봐야 돼.
B: 능력 격차를 따져서만이 아니라 단지 주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
A: 존중은 타인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있고,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그런 영역이 있다는 걸 인정받는 거야. 비교해선 안되고 비교를 통해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그런 게 있다는 걸 서로 인정해줘야 해.

존중의 표지판

B: 솔직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니까 존중해라! 그렇게만 명령한다고 누가 듣나? 표지판 없이 안전운전하란 말과 같아. 사람이 존엄을 유지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존엄을 지킬 수단이 보장돼야 하는데, 그런 수단에는 신경 안 쓰고 각자 알아서 ‘나는 존엄하다’고 주문을 외우라고 시키는 것 같아.
A: 그렇지. 차선도 긋고 신호체계가 있어야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 뭔지를 확인시켜주는 표지가 필요해.
B: 어려운 것 말고, 우리가 늘 걷는 거리,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걸로 생각해보자. 음, 가령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신호, 표지판 같은 걸로 말이야.
A: 사람들 사이에선 서로의 얼굴을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여기 있는 걸 인정하고, 그 사람이 있는 듯이 행동해야지. 가령 인사를 한다든가, ‘고맙습니다’ 또는 ‘실례합니다’ 등의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B: 음, 그렇다면 ‘투명인간’ 취급은 정반대의 표지겠네. 특정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여기 없는 듯 행동하고, 있어도 ‘감정’ 등 인간성의 중요한 요소를 빼놓고 ‘기능’만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 말야.
A:사람들 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제도적·구조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일도 많아. 그런 제도 속에서 사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같이 여기에 있는’ 사람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지.

B: ‘투명인간’ 취급 말고도 사람이 아닌 듯 대하는 건, 존중하지 않는 거겠지? 가령 사람을 물건 또는 기계처럼 다룬다든가, 의존이나 미성숙을 이유로 온전한 사람대접을 안 한다든가, 사람 이하로 취급 하는 거.
A: 물건 버리듯이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날리는 거?
B: 복지 수급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
A: 또 있어.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보살핌을 받기만 해야지 자기 삶의 조종 장치를 쥘 생각을 갖지 말 것, 주는 쪽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 것, 뭐 이런 요구들
B: 우리가 언급한 경우에서마다 그게 만약 나였다면,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나 군식구 취급을 받는 느낌일거야. 그럴 때, 존중의 표현을 받지 못했다고 따질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말로는 존엄성을 설교하면서 무시나 경멸을 없는 듯 연기하는 사람들한테 들이 밀 레드카드 같은 게 있어야지.
A: 그런 표지가 인권이잖아. 인권은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설명해주는 합의된 기준이야.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람다움을 유지하려면 사회가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지를 지시한 거지.
B: 존중은 개인적·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표현돼야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거겠지. 나와 너 같은 관계에서의 상호존중 만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의 상호존중을 북돋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
A: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자신을 출현시키는 것, 참여하는 것 또한 존엄성의 표현, 즉 존중이야. 너 인제, 골방에서 홀로 존엄성을 쌓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인권오름 제 443 호 [기사입력] 2015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 단어장 1] 인간 존엄성  (0) 2019.06.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