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구소 '창'과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가 함께 주최한 국제워크샵 자료집입니다. 

 

2024년 6월 15일 오후 2-5시 광화문 향린교회

진행: 조경희(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제1부 
기조발언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노년인권과 돌봄의 단초-돌보는 남성성을 향하여  
발표 신만수 (일본 사회복지법인 목련회/ 유한회사 하트풀 회장) "보람과 꿈을 고령자에게": 하트풀의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철학과 실천


제2부 
라운드 테이블 
이혜진(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최홍조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노년돌봄 학술 발제자료 전체.pdf
1.62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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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적 돌봄을 향하여  (0) 2023.12.19

반인권적 언행의 장본인이 인권교육을 책임지게 둘 수 없다

반인권적 언행 일삼는 이충상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한 인권교육 전문위원 의견서 -

우리는 국가인권위원회(아래 국가인권위)의 주요 수임 사항 중 하나인 인권교육 분야의 전문위원들로서 아동·청소년·여성·노년·복지·언론·교육 등 각계에서 인권 인식의 향상과 실천을 도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권에 대한 앎과 실천은 누구나 자기를 지키고 타인을 존중하기 위하여 필수적입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인권을 알고 이를 상호의존적이고 상호호혜적으로 행사할 수 있을 때 인권은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국제인권규범은 인권교육을 하나의 권리로 규정하고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교육과 학업을 통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권교육은 모든 인권의 실현을 위한 기본적 권리입니다. 한국의 국가인권위가 인권교육을 주요 수임사항으로 삼고 있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국가인권위는 사회구조적 제도와 정부의 행태를 인권의 렌즈로 감시하며 침해의 시정과 더 나은 실현을 도모하는 역할을 하는 독립적인 국가 기관입니다. 국내의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설치될지라도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규범을 자국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국내법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을 활동의 틀로 갖습니다. 또한 인권에는 실정법이 아우르기 힘든 영역이 존재합니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법규정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는 인권상황이 존재하기에 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최근 인권침해의 당사자가 된 이충상 위원은 앞서 말한 국가인권위 및 인권교육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인물인가요?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특히 인권교육을 책임지는 상임위원으로서 이충상 위원은 그 지위와 역할을 배반하는 혐오 표현과 행태를 일삼아왔습니다. 지난 521일자 경향신문의 보도에 언급된 표현(‘...항문이 파열되어 대변을 자주 흘리기 때문에 기저귀를 차고 살면서도 스스로 좋아서 그렇게 사는 경우에 과연 그 게이는 인권침해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며...’)은 과연 인권위원이 공론장에서 쓸 수 있는 언어인지 충격적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에이즈예방법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위헌 의견에 반대하면서 이충상 위원이 낸 의견서는 충격적인 표현들(‘에이즈 환자는...사망하지는 않는 경우에도 본인이 커다란 고통을 겪으면서 골골 살고 국민에게 큰 짐임’)로 점철됩니다. 또다른 국가인권위 결정문에서 소위 소수의견으로 표출된 인식을 보면, 헌법과 인권 원리에 대한 접근 태도 자체가 인권위원의 위치에 적합한 것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일례로 국가인권위원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한 의견표명 결정문에 나타난 이충상의 소수 의견을 보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정치나 사회문제 해결을 사법화하려는 경향이 짙게 드러납니다. 국가인권위 전원회의 산하 아동권리위원회의 책임자이면서 윤석열차그림을 그린 고등학생을 각종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은 사례, 국가인권위 직원들에 대한 모욕적 언사로 인해 국가인권위 공무원 노조에서 조사관 비하, 무시 등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직원들이 괴롭힘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등(518일자 퇴임하는 서미화 인권위원의 경향신문 인터뷰 참조) 이충상 위원은 혐오와 차별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온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충상 위원은 다양성에 대해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반인권적인 언행을 자제해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반인권적 표현을 소수의견이며 다수결의 폭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분명 중요한 인권적 가치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은 성소수자,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한 것이지, 기득권이나 특권의 옹호를 기본적 인권과 병렬적으로 나란히 놓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혐오의견이나 표현도 병렬적으로 놓인다면, 기본적 인권에 대해 인식도 판단도 하지 못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에 흐를 뿐입니다. 다원성과 다원주의를 논할 수 있는 전제는 인권의 원칙, 즉 모든 구성원의 고유한 존엄성과 평등한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정당성 판단을 거쳐야 합니다. 극단적 상대주의의 주장으로 자신의 혐오 표현을 옹호하려 드는 것은 이충상 위원의 인권의식 결여와 무적격성을 증명할 뿐입니다.

이에 이충상 위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열악한 처지의 사회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검토·성찰·주장·논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종교·젠더·성적지향·인종·계급 등이 다르더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한 권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자신이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으로서 내리는 판단과 결정이 타인의 삶, 특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과 권리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능력이 있습니까? 지배적인 권력과 정치인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이충상 위원이 국가인권위의 각종 결정과정에서 보여준 의견과 행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수자에 대한 인지 및 인식 능력 결여, 혐오 표현에 대한 무감수성과 소수자에 대한 증오의 선동, 국가인권위 직원들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만한) 폭력적 언사, 동료 위원들에 대한 무례와 협박 등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당신은 인권위원은 물론 인권교육을 책임질 자격이 없습니다. 더구나 전원회의 산하 아동권리위원회를 맡고 있다니요? 곧 다가올 유엔의 국가별 인권 상황 정기 검토(UPR) 회의에 참가한다고요? 당신 입에서 나올 말들이 인권의 장에 난입한 흉기가 될 것으로 염려됩니다. 혐오 표현을 일삼는 자들이 그 대상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인권의 주인인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생태 위기, 돌봄 위기, 골이 깊어가는 불평등의 격차, 곳곳에서 번져가는 혐오와 배제, 폭력의 파고는 인권교육의 실천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위기 시에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더욱 심해집니다. 비인간화와 인권침해는 언제나 말과 함께 시작됩니다. 모욕하고 비하하는 말, 선입견과 근거가 미약한 공격적 표현 등입니다. 그런 시작을 막지 못할 때 대규모의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합니다.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비인간적으로 묘사되는 것을 막는 것은 지금 당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인권교육은 사회구조적 불평등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역량, 협소한 자기 이해를 넘어 둘레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역량,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태도로 상상할 수 있는 역량 등을 추구합니다.

이런 인권교육을 혐오와 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인권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인권위원이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혐오 표현과 행태에 당장 사과하고 사퇴하십시오. 우리 인권교육 전문위원들은 당신이 주재하는 어떤 회의도 참가 거부할 것이며, 당신이 행사하려는 어떤 권한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반인권적 행태에 항의하고 저항하는 움직임은 우리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인권사회의 일원으로서 계속 동참하며 주시할 것입니다.

2023523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 전문위원

구정화(경인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은희(인권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류은숙(인권연구소 대표)

박영철(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윤여진(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

이병구(양심과 인권-나무 사무처장)

이상재(대전충남 인권연대 사무국장)

허창영(전라북도교육청 교육인권센터 인권보호팀장

인권연구소 '창' 대표집필 후 연명함.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비상시국회의/기자회견 발언문(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코로나19의 복판에서 막대한 희생과 고통을 겪으신 분들, 또 지금도 겪고 있는 분들, 산불과 가습기살균제 등 각종 재난과 참사를 겪었으나 제도의 잘못으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분들, 노동재해 및 각종 불평등과 차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모든 분들의 몸이 여기에 있지는 않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무게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취약한 인간입니다.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취약한 서로를 지켜내기 위해 인권이란 걸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든지, 서로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서, 사회 속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자는 약속이 인권입니다. 이 약속을 잘 지키는 사회는 상호인정과 상호의존을 바탕에 깔고 움직입니다. 반면 그렇지 않은 사회는 서로에게서 탐탁치 않은 요소만 콕 집어서 면박주고 무시하고 내쫓으려 합니다. 서로 인정도 존중도 하지 않는 사회에서 불안과 괴로움은 커질 뿐이고, 인권은 이름뿐일 것입니다. 잔인함과 폭력이 법과 질서의 탈을 쓰고 설쳐댑니다. 그런 사회의 구성원일수록 더더욱 취약해지고 위험해질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것일까요?

차별금지법은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를 표현하는 말에 운을 떼는 것입니다. 토대가 있어야 저마다 창의적으로 더 나은 사회 만들기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차별금지법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권으로써 서로를 의지하고 지원하고자 합니다. 상호인정과 상호의존과 연대의 가치를 토대로 인권은 새로운 변화와 위기에 걸맞게 법과 제도를 만들고 위기를 헤쳐나갈 것을 추구합니다.

차별금지법을 조롱하고 저주를 퍼붓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용기를 한 번 내 보십시오. 어떤 용기냐 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볼 용기입니다. 자기 삶의 방식과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는 용기를 발휘해 보십시오. 서로 기대고 돌볼 수 있는 관계의 경험, 시민적 덕성을 체험하는 경험을 만들어 보십시오. 차별금지법과 함께 하려는 시민들의 합주에 당신이라는 악기로 참여해주시기를 초대합니다.

누군가 작디작은 조약돌을 모아 애써 쌓은 탑을 무너뜨리거나 시린 손으로 애써 만든 눈사람을 걷어차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를 인정해주지도 존중해주지도 않는 권력자들을 향해서는, 자기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나쁜 제도를 향해서는, 눈 한번 흘기지도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면서, 우연히 자기 옆을 지나가는 만만해 보이는 약자를 골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일이 즐겁고 행복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의 존엄과 동등한 가치를 존중하는 관계의 기쁨에 초대합니다.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에 묻습니다.

저와 같은 인권활동가들은 각자도생의 반대말을 정치라 여깁니다. 정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기 위한 삶의 양식과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자 토대가 되는 기본법조차 만들지 못하는 정치는 시민들에게 정치의 죽음을 고하고 있습니다. 시민사이에 위계를 나누고 인권의 가치와 명분마저 걷어치우는 이익추구와 당파적 경합은 정치의 죽음으로 가는 길일 뿐입니다. 정치의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제각기 노잣돈을 아무리 챙긴다 한들, 그 노잣돈 어디에 쓰겠습니까? 정치의 소생을 위한 길로 노정을 바꾸십시오. 그 이정표가 되는 인권의 가치는 아무리 나눠 써도 채워지고 넘쳐나는 정치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세계인권의 날을 맞이하는 애도의 마음(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지금부터 74년 전인 오늘, 19481210, 인류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오늘 이 선언을 애도의 선언으로 부르려 합니다.

애도란 무엇입니까?

애도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습니까? 존엄을 무시하는 돈과 권력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고 비교불가능한 존엄성의 상실입니까?

애도는 떠나보낸 이와 남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존재들을 상실함으로써 남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빨리 쉽사리 접고 잊으며 그냥 하던대로 살아가려 합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상실을 낳은 불의한 관계를 바로잡으려 합니까?

애도는 또 같은 상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찾아내고 실현하려는 지속적인 행동입니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다짐이 아니라 계속되는 실천 속에서 가능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쟁과 압제와 결핍으로 인해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인류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며, ‘다시는 결코 다시는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은 이들이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인지를 확인하려는 약속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의 맨 앞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 전체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정의·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낳았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선언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가 폭정과 억압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비판할 자유를 행사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지시하는 바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치를 구현함에 있습니다.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애도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시민이 공포와 궁핍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절망과 궁핍에 시달리게 방치한다면, 폭력과 혐오의 선동정치를 일삼는 세력에게 비판 의식없이 휘말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에 선언은 자유의 방파제로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건강·주거 등에 대한 권리를 차별없이 누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에 쓰인 권리들은 액자에 넣어두는 용도가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현실을 활보하길 바랍니다. 인권은 구체적인 법과 제도, 사회문화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 등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인권을 현실화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나이, 성별, 국적, 출신, 장애, 성적지향 등 인간을 구별하는 각종 표지들은 인간 간 위계와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더 세심하고 각별하게 살피기 위한 것으로 다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인권의 날이라는, 달력의 어느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지금 이곳의 삶에서 재확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여기서 손과 가슴을 모읍니다.

우리에게 이 날은 어떤 의미입니까? 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홀로 일하다 죽어간 날입니다. 지금도 매일 어디선가 또다른 노동자들이 퇴근하지 못하고 각종 재해에 쓰러져 갑니다. 교통, 교육, 의료, 주거 등 사회적 인프라와 사회적 돌봄의 부재로 장애인을 비롯하여 노년, 아동, 여성, 이주민 등이 사회 속 시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상은 누가 죽고 나서야 표면에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1029, 여기서 가까운 이태원에서 숱한 생명이 쓰러져 갔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구청장이 있고, 경찰과 소방대, 병원이 코 앞에 있으며 15천억원을 들였다는 최첨단 통신시스템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전쟁도 기아도 아닌, 평시에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로에서 벌어진 참사는 재난 대응을 총괄하고 지휘할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한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참사 희생자들을 존엄하게 애도하기 위하여 세계인권선언에 쓰여진 모든 권리를 정의롭게 행사할 것입니다.

선언 제28조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인권이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집니다. 선언에 규정된 권리를 타인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의 행위를 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선언의 제30조는 못박고 있습니다. 소중한 인권을 혐오와 2차 가해에 쓰고, 공직자의 책임 회피에 동원하고, 시민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감시하고, 유가족과 사회적 취약자에 대한 지원을 칼질하는데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애도를 통해 존엄한 삶과 애도를 가능케하는 사회라야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참사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 염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속되는 애도 행위가 사회적·정치적 염치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 학술워크샵◀️

∙주제: 한·일 노년 돌봄의 현장--소수성들의 만남을 중심으로
∙일시: 2024년 6월 15일(토) 14시~17시
∙장소: 광화문 향린교회
∙진행: 조경희(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제1부
14:05~14:25 기조발언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노년 인권과 돌봄의 단초-돌보는 남성성을 향하여」
14:30~15:00 발표
신만수 (일본 사회복지법인 목련회/ 유한회사 하트풀 회장) 「“보람과 꿈을 고령자에게”: 하트풀의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철학과 실천」
 
∙제2부
15:30~16:50 토론
이혜진(경남연구원 연구위원, 우에노 치즈코 『돌봄의 사회학』 공역자)
최홍조(고려대학교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참여신청:  https://bit.ly/한일노년돌봄현장
 
*사전신청하지 않아도 당일참석이 가능하나, 예상 참석자 확인을 위해 사전 신청을 부탁드립니다.
∙주최: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인권연구소 창
∙후원: 한국연구재단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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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애도와 기억의 장 세번째 추모문화제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2024.2.20.)

추도사 (류은숙, 인권연구소 ’)

제가 어렸을 때 상상 속에서 아주 무서워한 장소는 사막입니다. 물 없는 사막에 고립됐는데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상상, 목이 타 죽을 것 같은데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난 상상, 그러나 그게 신기루였고 허겁지겁 마신 물이 모래 더미여서 숨이 막히는 상상, 그런 상상은 어린 저를 꿈에서 깜짝깜짝 놀래켰습니다. 이제 나이 든 저는 현실에서 사막을 봅니다.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의료나 돌봄이 끊어진 사막, 감염자를 비롯한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에게 조리돌림을 유도하는 황폐한 언론 사막, 성차별과 인종주의 등 오래된 바이러스가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사막, 필수노동에 절대 의존하면서 필수노동을 무시하고 모 욕하는 사막, 희생양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의 극단 속에서 종사자의 과로와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막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막화를 방치하고 있는 무책임한 정치, 사회구성원들 특히 약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비열한 정치에 숨이 막힙니다. 무책임과 분열 조장에 유능한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사막화를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모였습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슬픔에 잠겨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슬픔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감염병이 오기 오래전부터 고립된 시설에 이미 고립돼 있었고 감염병으로 인해서야 비로소 폐쇄병동을 벗어나게 됐던 첫 번째 희생자 분, 그런 분들을 안전장치 없이 돌보다가 감염돼 돌아가신 돌봄노동자, 고립된 돌봄 관계에 질식해 돌봄의존자 살해 후 자살을 택한 돌봄자들, 감염병이 아니라 성차별적 해고와 절망 등으로 자살한 여성노동자들, 거리두기라는 행동백신을 맞을 수 없어 일터에서 스러져간 숱한 노동자들, 피부색과 혈통을 이유로 배제된 이주민들, 아시아인이라고 혐오범죄에 노출된 세계 곳곳의 사람들···, 우리의 기억에 새겨진 분들의 사연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적 사연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그 상황과 환경을 바꾸고자 애도를 계속합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권력자들은 애도를 금합니다. 애도를 그만두게 하라고 혐오 세력을 부추깁니다. ‘이제 지겹다’, ‘할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과거에 머물러 있느냐’,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서 새로운 이슈로 문제를 덮고, 또 그 문제를 덮을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 바쁩니다. 그들이 애도를 지우기에 분주할수록 그들의 책임 또한 희미해지고, 애도해야 할 재난과 참사는 다시 또 다시 반복되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망각, ‘설마 그런 일이 또 있을라구하는 현실 부정, ‘그 사람들이 운이 나쁜 걸 어떡하겠냐는 운명론적인 동정, ‘자기 탓인데 왜 사회나 정부 탓을 하느냐는 비방, ‘뭘 해도 바뀌지 않는데 어쩌겠느냐는 체념···, 애도를 훼방하는 것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애도를 계속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는 색출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첫째, 색출이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책임을 찾아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동선과 행위를 추적하고 모욕주고 혐오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색출을 말합니다. 필수적인 의료와 돌봄의 체계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이 끊겼고, 왜 우리는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아직껏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애도는 우리에게 시시각각 서로 다른 규모와 서로 다른 차원으로 벌어지는 문제들의 연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특정 집단의 사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분노의 분풀이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회적 연결고리를 망치는 불평등과 차별의 체계를 찾아내는 색출이 우리의 애도여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겪는 위기에는 끝이나 종식이란 없습니다.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한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이 비상사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대확산에서 바이러스가 아니라 불평등이 사람을 죽인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방역의 최대 방해물인 걸 확인했습니다. 명백한 경험을 외면하고 비상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각종 위기와 재난이 상시적이기에 더 무뎌지고 체념하는 우리의 세태에 맞서, 더 포함적이고 더 보편적인 인권 존중, 인권 존중에 기반한 기술과 재화의 사용과 배분, 이것을 위한 사회적 제도화가 요구됩니다. 불시에 벌어진 심장마비에서 사람을 소생시킨 건 전혀 모르던 낯선 타인의 심폐소생술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심폐소생술처럼 누구나를 지킬 수 있는 사회적 역량 만들기, 우리의 애도는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한 철학자는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체는 혈연이나 언어 같은 공통의 기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는 받을 것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주어야 할 것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인간적인 존중, 필수적인 치료와 돌봄, 주거·생계와 안전 보장 등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취약한 상태를 강요받은 존재들에게 당연히 최우선으로 제공해야 할 것을 나중에로 미뤘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과 주어야 할 것이 순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위기시에 믿고 의지할만한 공동체가 없습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들은 절대로 각자도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서로의 편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로나19 같은 위기시에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휘어잡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각자도생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힘없기에 우리의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붙잡고 같이 돌봐야 우리 중의 누구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습니다.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우리는 역설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을 돌보는 공동체를 위하여 애도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위기에 맞선 책임을 제도화한 공동체입니다. 책임은 희생이나 덕분에란 말로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적인 시스템과 자원 배치를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모든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필수적인 법과 제도, 사람과 자원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지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애도는 집합적으로 조직돼야 합니다.

제가 무서워하던 사막을 다르게 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 여러분도 익숙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내는 것, 아니 우물을 파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의미입니다. 코로나19 대확산의 희생자들이 웃는 별로 우리를 내려보고 우리가 웃는 별을 볼 수 있도록 애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이스라엘 규탄행동의 의의(2024년 2월 17일 팔레스타인 연대집회 발언문)

류은숙(인권연구소 활동가)

저에게는 4살 난 조카손자가 있습니다. 저는 이모할머니입니다. 제 조카손자는 코로나19 팬데믹에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그 아이를 거의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사진을 통해 볼 뿐입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울수록 가슴 한편이 쓰라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빠질수록, 즉 기후위기, 전쟁과 재난, 노동자·여성·아동·퀴어·장애인·노년·이주민 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대할 때마다 조카손자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을 사진에서 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붕대를 감고 있거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합니다. 그 아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입니다. .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제 조카손자와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비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와 다른 어떤 존재를 떠올릴 때, 자기와 가까운 존재부터 떠올리는 것은 익숙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입니다. 취약하고 애틋한 존재를 향한 마음 씀(care), 그 존재를 향해 몸과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삼아야 되는 것은 고통에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식의 위계와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왜 어떤 고통은 모두와 관계된 공통된 문제로서 공적인 장에서 논의되고, 왜 어떤 고통은 공론장에서 배제되는 걸까요? 왜 누구의 고통은 문제 삼는 것이 당연시되고, 누구의 고통은 불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걸로 얘기될까요?

우리가 여기 모여 팔레스타인 사람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저울질하고 순위를 매기는 행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관심과 책임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체제에 대해 항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요청받은 발언의 주제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얘기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입니다. 질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에 답을 하려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을 설명하려니 어렵습니다. 여기 모이는 분들은 저마다의 답을 이미 갖고 계실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 개인의 답을 간단히 나누려 합니다.

첫째,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입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마다, 춥다고 난방 온도를 높일 때마다,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매순간마다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누군가 쓰러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은 어떤 도덕 기준을 준수하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개인적으로 얼굴과 가슴이 화끈거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수치심을 통해 서로의 연결된 관계성을 느끼게 합니다.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신도 화끈거리는구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과 가슴을 옥죄는 죄책감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구나, 이어져 있구나를 확인하려 여기 모였습니다. 이 연결됨의 감각에서 우리는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만들려 합니다.

둘째,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은 우리가 이 감정을 공론화하고 집합적으로 대응하는 힘을 모을 때 열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수치심과 죄책감을 개인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감정은 절대 해소될 수 없고 변화를 요구할 뿐입니다. 집합적으로 책임지는 행동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학살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우리 정부와 기업과 여론을 붙잡고 늘어지고 추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목격자가 돼야 합니다. 제가 본 어떤 영화에서 학살자의 대사가 이랬습니다. ‘쥐 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마’, 그리고 그 대사의 영어 자막은 노 위트니스’(No Witness!)였습니다. 가해자의 의도와 달리 역사적인 학살 현장에는 언제나 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격자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방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목격자는 목격한 바를 왜곡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격자가 돼야 할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증언하고 집합적으로 항의하는 목격자가 되려 여기 모였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서로를 지키려는 목격자로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팔레스타인 사람이 겪는 불의와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해는 서로 연결된 공통토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권, 민주주의, 공동체, 인류,... 이런 말들이 거짓부렁이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토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조세력은 인류라는 것의 공통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강하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절대악,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또한 학살을 자행하는 행위 속에서 변형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적극적 목격자로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인간성, 존엄성, 인권, 이런 것들은 개별적으로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공통토대에 근거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의 존엄성과 인권이 짓밟힐 때, 우리의 발밑에서 그 공통토대가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당장 불의와 폭력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쓰고 대응하려 하지 않을 때, 고통에 대응하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삶을 우리는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 삶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연결과 이어짐도 계속되고, 고립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2024 국제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집회 2024년 5월 17일 저녁 7시 보신각 연대발언문(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안녕하세요. 국제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에 함께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우리라고 부르려는 건, 동질성의 확인이 아니라 다름 때문에 맺어진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에 대한 선물로 모였습니다. 선물을 열어보듯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선물을 나누는 것이 공동체의 의미이며 우리의 복잡다기한 존재 자체가 공동체에 대한 기여입니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우리를 삭제하거나 위협하는 혐오세력의 언어는 너무 얕아서 우리의 엄청난 다양성과 역동성을 담지 못합니다. 우리는 혐오와 차별의 언동에 담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은 혐오와 차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릇을 깨고 넘쳐흐르는 개성과 풍부함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셉니다. 물론 혐오와 비하와 모욕은 쓰라리고 아픕니다. 우리 힘은 고통과 공포를 견디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혐오세력은 극악한 악당이나 괴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일상이자 시스템으로 존재합니다. 이성애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와 차별주의를 통해 이득을 챙기는 지배세력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반사적 적대와 악마화로 인해 강한 것이 아니라 지배에 맞서 인권이란 공통의 기반을 확인하고 다지는 데 있습니다.

인권이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인권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어떤 효과를 내는가가 중요합니다. 혐오세력도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그 존엄을 통해 그들이 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실상은 그 존엄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골라내고 내쫓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존재와 삶의 복잡성에 대한 논의를 종결시키려는 의도로 존엄성을 운운합니다.

우리에게 존엄성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혐오와 배제 때문에 해를 입더라도 우리 자신의 가치와 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엄성은 실천으로 고양됩니다. 우리는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 참여합니다. 주요한 억압 체계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단편적인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얼키고설킨 정치·경제·문화적 불평등에 반대합니다. 누구든 존엄한 일자리, 의식주, 교육, 보건의료 등에 보편적인 접근을 할 수 있기 위해, 모두의 존재가 괜찮은 것으로 느껴지고 초월적인 의지로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위해, 저마다 경험한 폭력을 더 넓은 맥락에 놓고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생을 펼치고 있습니다. 힘들고 숨찬 삶이지만 벅참 또한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펼쳐가는 세계는 어쩔 수 없음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로 인해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실현하는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존엄성이란 공통의 토대 위에서, 인간성을 위협하는 공통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서로를 보살피는 공통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불복종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세상을 둘로 쪼개놓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여자거나 남자거나 이성애거나 아니거나 식의 이분법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우리는 아주 놀랍도록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는 성적소수자를 위하는 듯 이용하는 교묘한 언어를 거부합니다. ‘힙하다며 무지개를 상품화하고 광고하면서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걸 거부합니다. 스타성 있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존재들로만 우리를 재현하는 걸 거부합니다. 일상에서의 인정과 존중을 외면하고, 법과 제도에 평등을 기입하지 않으면서 취하는 관용의 시늉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정상성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이상, 즉 누구나의 삶이든 존중받으며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보장하는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앞장섭니다.

우리는 불의하고 반인권적인 구조에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로서 이 구조를 변화시킬 필요와 책임을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 또는 가해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바꾸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입니다.

물론 현실의 구덩이는 깊습니다. 이 구덩이에서 혼자의 의지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밧줄을 던집니다. 서로를 단단히 연결하고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잡아당기고 매달리는 힘에 손이 갈려나갈 수도 있지만, 서로를 구덩이에서 빼내고 구축한 유대감은 구덩이를 메우고 새로운 집을 세울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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