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애도와 기억의 장 세번째 추모문화제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2024.2.20.)
추도사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제가 어렸을 때 상상 속에서 아주 무서워한 장소는 사막입니다. 물 없는 사막에 고립됐는데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는다는 상상, 목이 타 죽을 것 같은데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난 상상, 그러나 그게 신기루였고 허겁지겁 마신 물이 모래 더미여서 숨이 막히는 상상, 그런 상상은 어린 저를 꿈에서 깜짝깜짝 놀래켰습니다. 이제 나이 든 저는 현실에서 사막을 봅니다.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의료나 돌봄이 끊어진 사막, 감염자를 비롯한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에게 조리돌림을 유도하는 황폐한 언론 사막, 성차별과 인종주의 등 오래된 바이러스가 사람을 사회적 존재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사막, 필수노동에 절대 의존하면서 필수노동을 무시하고 모 욕하는 사막, 희생양 만들기와 영웅 만들기의 극단 속에서 종사자의 과로와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막을 봅니다. 그리고 이런 사막화를 방치하고 있는 무책임한 정치, 사회구성원들 특히 약자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하는 비열한 정치에 숨이 막힙니다. 무책임과 분열 조장에 유능한 정치를 바꾸지 않고서는 사막화를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모였습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슬픔에 잠겨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슬픔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감염병이 오기 오래전부터 고립된 시설에 이미 고립돼 있었고 감염병으로 인해서야 비로소 폐쇄병동을 벗어나게 됐던 첫 번째 희생자 분, 그런 분들을 안전장치 없이 돌보다가 감염돼 돌아가신 돌봄노동자, 고립된 돌봄 관계에 질식해 돌봄의존자 살해 후 자살을 택한 돌봄자들, 감염병이 아니라 성차별적 해고와 절망 등으로 자살한 여성노동자들, 거리두기라는 행동백신을 맞을 수 없어 일터에서 스러져간 숱한 노동자들, 피부색과 혈통을 이유로 배제된 이주민들, 아시아인이라고 혐오범죄에 노출된 세계 곳곳의 사람들···, 우리의 기억에 새겨진 분들의 사연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개인적 사연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강요된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그 상황과 환경을 바꾸고자 애도를 계속합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권력자들은 애도를 금합니다. 애도를 그만두게 하라고 혐오 세력을 부추깁니다. ‘이제 지겹다’, ‘할 일도 많고 바빠 죽겠는데 과거에 머물러 있느냐’,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서 새로운 이슈로 문제를 덮고, 또 그 문제를 덮을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 바쁩니다. 그들이 애도를 지우기에 분주할수록 그들의 책임 또한 희미해지고, 애도해야 할 재난과 참사는 다시 또 다시 반복되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망각, ‘설마 그런 일이 또 있을라구’ 하는 현실 부정, ‘그 사람들이 운이 나쁜 걸 어떡하겠냐’는 운명론적인 동정, ‘자기 탓인데 왜 사회나 정부 탓을 하느냐’는 비방, ‘뭘 해도 바뀌지 않는데 어쩌겠느냐’는 체념···, 애도를 훼방하는 것들은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애도를 계속하는 걸까요?
첫째, 우리는 색출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둘째, 우리는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하기 위해 애도합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첫째, 색출이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책임을 찾아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인의 동선과 행위를 추적하고 모욕주고 혐오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색출을 말합니다. 필수적인 의료와 돌봄의 체계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이 끊겼고, 왜 우리는 그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아직껏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애도는 우리에게 시시각각 서로 다른 규모와 서로 다른 차원으로 벌어지는 문제들의 연결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나와 비슷한 특정 집단의 사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분노의 분풀이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사회적 연결고리를 망치는 불평등과 차별의 체계를 찾아내는 색출이 우리의 애도여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겪는 위기에는 끝이나 종식이란 없습니다. 이미 와 있는 비상사태를 예비한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이 비상사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대확산에서 바이러스가 아니라 불평등이 사람을 죽인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방역의 최대 방해물인 걸 확인했습니다. 명백한 경험을 외면하고 비상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각종 위기와 재난이 상시적이기에 더 무뎌지고 체념하는 우리의 세태에 맞서, 더 포함적이고 더 보편적인 인권 존중, 인권 존중에 기반한 기술과 재화의 사용과 배분, 이것을 위한 사회적 제도화가 요구됩니다. 불시에 벌어진 심장마비에서 사람을 소생시킨 건 전혀 모르던 낯선 타인의 심폐소생술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심폐소생술처럼 누구나를 지킬 수 있는 사회적 역량 만들기, 우리의 애도는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애도합니다.
한 철학자는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체는 혈연이나 언어 같은 공통의 기원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의무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입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우리는 받을 것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주어야 할 것도 제대로 주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인간적인 존중, 필수적인 치료와 돌봄, 주거·생계와 안전 보장 등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보다 더 취약한 상태를 강요받은 존재들에게 당연히 최우선으로 제공해야 할 것을 ‘나중에’로 미뤘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것과 주어야 할 것이 순환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위기시에 믿고 의지할만한 공동체가 없습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들은 절대로 각자도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든 서로의 편이 되어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코로나19 같은 위기시에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을 휘어잡습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약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각자도생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모순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약하고 힘없기에 우리의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붙잡고 같이 돌봐야 우리 중의 누구도 함부로 내칠 수가 없습니다. 취약성에 서로 기대어 우리는 역설적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취약성을 돌보는 공동체를 위하여 애도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위기에 맞선 책임을 제도화한 공동체입니다. 책임은 희생이나 ‘덕분에’란 말로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공적인 시스템과 자원 배치를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모든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필수적인 법과 제도, 사람과 자원의 배치를 바꾸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지지를 조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애도는 집합적으로 조직돼야 합니다.
제가 무서워하던 사막을 다르게 보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 여러분도 익숙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사막에서 우물을 찾아내는 것, 아니 우물을 파는 것이 우리가 애도하는 의미입니다. 코로나19 대확산의 희생자들이 웃는 별로 우리를 내려보고 우리가 웃는 별을 볼 수 있도록 애도는 계속될 것입니다.